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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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우는 자, 잊는 자, 잊히는 자. 


  제 나이만큼 딱 오래되었을 방문을 열어봅니다사방을 메운 빼곡한 캐비닛들이 눈에 들어오네요각각 무어라 표시가 되어있기는 하지만당최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개중 오래되어 보이는 것을 열어보면 가까스로 책상 위로 머리를 내밀만큼의 작은 아이가 침대 난간을 위태롭게 타고 있네요보는 이를 마음 졸이게 하던 아이는 기어코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집니다그렇게 아이는 인생 첫 깁스를 하게 되네요반대로 아직 광택이 사라지지 않은 캐비닛을 열어봅니다어느덧 다 자란 그 아이가 노트북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무언가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말이죠.

 

  기억. 기억이란 참 종잡을 수가 없어요별것도 아닌 일이 선명하게 기억나기도 하고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흔적도 없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경우도 있지요분명 내 기억인데 중요하다고 외웠던 것이 왜 시험지만 받으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요만약 우리 머릿속에 기억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면제 머릿속의 담당자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뜬금없이 스스로의 모자람을 고백하듯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 소개드릴 책이 기억에 관련된 책이기 때문입니다제목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책, ‘오리가미 교야(織守 きょうや)’의 기억술사입니다기억술사는 시리즈로 현재 3권까지 국내에 발매가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제가 오늘 이야기할 책은 그 첫 번째 이야기 기억술사 1입니다.

 

  주인공은 대학생 요시모리 료이치’.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료이치는 사와다 교코를 만납니다그리고 은연중에 선배인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지요하지만 어쩐 일인지 교코는 이른 시각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분명 대화가 잘 통했다고 생각하던 료이치는 교코의 서두르는 모습이 의아하죠나중에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교코는 치한을 만났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늦은 시각의 어두운 길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언제나 교코가 이른 시각 황급히 자리를 떠난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고작 그런 이유라며 반문하기엔 교코의 트라우마는 깊습니다그녀는 병원에서 상담치료까지 받으며 트라우마를 고치려 노력합니다료이치는 그런 교코의 사정을 알게 되고 도움을 주려 하지만 역시나 쉽게 해결될 리가 없는 일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교코는 료이치에게 묻습니다.

 

  문득 기억이 났다는 듯이 교코가 문에 한 손을 댄 채로 돌아봤다.

  “기억술사라고알아?”

 

  료이치는 당황합니다처음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죠어린 시절 료이치는 기억술사에 대한 괴담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복잡할 것도 없는 기억을 지워준다는 도시괴담입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찾아 헤매는 교코를 보게 되지요료이치에게 호감을 가질수록 교코는 트라우마를 고치는데 힘을 쓰게 됩니다.

 

  공포증을 고치려면 이제는 원인이 된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다여러 치료법을 시도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심각한 얼굴을 보면 그냥 웃어넘기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으슥한 골목 교코가 다닐 리가 없는 시각에 그녀와 마주친 료이치는 자신을 완전히 잊은 교코를 보게 됩니다료이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트라우마도 완전히 잊은 교코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료이치는 본격적으로 기억술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그저 도시괴담에 불과할 풍문이었으나눈앞에서 교코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점점 실재할지도 모르는 것으로 인식하죠처음 료이치의 반응은 슬픔이었습니다자신을 완전히 잊은 교코를 보면 항상 마음이 아파왔죠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때부터 료이치의 감정은 분노로 바뀝니다.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지지만 이쯤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과연 기억을 지우는 일은 옳은 일인가?’입니다조사를 거듭하던 료이치에게 기억을 지우는 일이 가능한가?’는 더 이상 논의거리가 아닙니다이미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죠믿건 말건 기억술사는 실재합니다그러나 기억술사가 존재하고 기억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료이치는 기억을 지우는 행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료이치의 논지를 봅시다.

 

  “기억이란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므로 다른 사람한테 넘겨도 안 될뿐더러 빼앗는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됩니다.”

 

  가장 정석적인 논지겠지요물론 료이치의 경우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자기만 잊다니 그건 자기밖에 모르는 거다.

  기억은 자기 혼자의 것일지 모른다하지만 기억 속에 있던 사람은그 기억을 만든 시간을 공유한 사람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있다가 지워져버린 쪽에서 보면그 사람 안에서 죽임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사람 안에서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게 되어그 사람 안에는 아픔 하나 남지 않고…… 잊힌 쪽만이 잊지 못해서 끌어안고 몸부림친다.

 

  어떤가요료이치의 울분에 가까운 항의를 듣고 여러분들은 기억술사의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부정적이신가요이번엔 료이치와 기억술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젊은 변호사 다카하라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잊는 거랑소중한 사람이 죽어버리는 거랑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가치관의 문제겠지만나라면 전자를 선택할걸.”

  기억 속에서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지만다카하라가 그렇게 말하니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기억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

  다카하라는 내리떴던 눈을 위로 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기억은 과거야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하지만 그 사람 안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그 기억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때로는 그 영향력이 현실보다도 더 강하게 작용해그 사람은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어기억의 힘은 그 사람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어.”

 

  사실 이 논의는 기억술사의 주된 논쟁거리입니다기억을 지우는 기억술사가 이미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기억을 지우는 행위의 의미와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지요일견 료이치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부정당한 느낌이지요분명 교코와의 추억은 료이치도 함께 만들었던 것이니까요이렇게 생각하면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주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다카하라의 말도 이해가 갑니다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기억이 스스로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죠더군다나 기억이라는 게 억지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피할 수도 없는 것이니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또한 교코의 선택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행동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교코는 료이치와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어찌 보면 교코를 그렇게 몰아세운 것 또한 료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작중에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이유를 갖고 그들의 선택은 상대방의 입장까지도 고려한 선택이었지요서로를 위해 혹은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요.

 

  개인적으로 기억술사를 읽으면서 가능할 것이라 상상치도 않았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즐거움이 좋았습니다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줄 영향들과 의미가 그렇게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기억술사가 2, 3에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1은 사실상 추리소설에 가깝게도 보입니다흔적도 없는 기억술사를 좆아 진실에 다다르는 여정을 함께하는 것 같아요잡힐 것 같던 꼬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혹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보를 얻게 되어 활로를 찾게 되는 순간들눈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느덧 두툼한 기억술사의 책장을 덮게 되죠흥미로운 소재와 적당한 관계도막힘없이 나아가는 전개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기억술사 1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점을 생각한다면지독히도 기억술사의 시선이 적다는 것에 있습니다애초에 기억술사라는 존재가 희미하고 그래서 괴담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도대체 누가 기억을 지우고 왜 그리고 어떻게 지우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진실을 마주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해소되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더군요신 같기도인간 같기도 한 기억술사완벽한 능력을 가진 것 같으면서도 불완전한 부분도 보여주는 괴인.

 

  『기억술사는 제22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 독자상 수상작입니다독자들의 호평이 만든 수상작이지요동시에 서점 직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인기몰이를 한 작품입니다저 역시 한명의 독자로서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쉽게 손이 가고어렵지 않게 읽히고너무 가볍지 않으면서 충분히 흥미로우니까요. 2,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기억술사의 시선이 좀 더 나올지 궁금하네요.

 

  여러분은 무엇을 기억하고무엇을 기억하고 싶지 않으신가요행복한 기억은 영원히 머릿속에서 선명했으면 좋겠지요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인생의 창피한 순간소위 흑역사이불킥할 이야기가슴 아픈 실연상처의 순간들이 있지요그리고 우리는 이런 기억 역시 안고 살아갑니다간혹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들도 있죠그럴 때면 기억술사의 존재를 바라실까요나쁜 기억을 깔끔하게 모두 잊고 새 출발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요오리가미 교야의 기억술사와 함께 이런 상상에 빠져보는 것은 어떠신지요기억을 지우는 일그리고 그 후가 어떻게 될지 같이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기억을 지우는 사람기억술사였습니다.

 

 

상기 리뷰는 <북이십일주관 서평단 모집을 통해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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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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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분노해야 하는가?


  혹시 레플리카라는 게임에 대해 들어보셨나요최근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기념하여 국내 1인 게임 개발자 SOMI가 자신의 게임 레플리카를 하루 무료로 배포했었죠처음 들어보았지만 흥미로운 내용과 호평을 보고 관심이 생겨 해보았었습니다게임 시스템은 간단합니다. IOS 운영체제 핸드폰 화면이 전부고플레이어는 어플을 들어가고메시지를 보는 등 정보탐색을 하여 여러 가지 엔딩에 이르는 것이지요주인공 고등학생 톰 리플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핸드폰에서 이 핸드폰 주인의 테러 혐의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영문을 모른 채 구금되어 있는 톰에게 이를 잘 수행하면 자신을 풀어준다는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지요그리고 아주 사소한 정보부터 찾아나가며 정보를 수집합니다인터넷 검색 기록비밀 사진첩 속 사진친구들과의 문자 대화비인가 프로그램 사용 등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어처구니없는 근거로 테러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일례로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은 어플을 썼다는 이유나인터넷에 폭동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죠.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작년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논의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죠바로 대테러방지법’ 제정 문제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입니다당시 이를 막기 위해 야당에서 2016년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진행하여 가결을 막으려고 했으나결국 실패했죠해당 법안이 우려스러웠던 이유는 기본권 침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습니다.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에 과도한 권력을 집중시키고이로 인해 테러방지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습니다더구나 이전까지 국정원이 벌였던 중대한 실수들이 이러한 우려를 증폭시켰습니다찬성하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의심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요자신이 떳떳하면 문제 될 게 없는데 왜 반대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하지요정말 그럴까요오늘 이야기할 책은 코리 닥터로우의 리틀 브라더입니다.

 

 

  『리틀 브라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게임 레플리카를 이야기했던 이유는 레플리카의 많은 설정들이 리틀 브라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리틀 브라더를 읽었다면 레플리카를 조금만 해보아도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지요물론 실제 퀴즈를 푸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리틀 브라더』 제목을 보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고전 명작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으레 빅 브라더’를 떠올리실 것입니다. ‘빅 브라더라는 존재가 텔레스크린을 통해서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1984는 모든 것이 정부의 통제 하에 놓이고 진실은 가려지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입니다. ‘리틀 브라더의 의미는 이와 조금 다르지만 리틀 브라더내의 사회는 얼추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주인공 마커스 얄로우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고등학생입니다사용하는 아이디는 ‘w1n5t0n'으로 조금 생각해보면 윈스턴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죠그리고 윈스턴은 1984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마커스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합니다스마트폰이 있고노트북이 있고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는 사회지요하지만 조금 이상한 모습들이 보이기도 합니다학교 내에 학생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이 산재해 있죠예를 들어걸음걸이로 누구인지 파악하는 보조 인식 카메라가 교내에 설치되어 있다던가정해진 것들만 작동이 되는 스쿨북이라는 노트북을 제공하기도 합니다물론 주인공답게 마커스는 이 모든 것들을 어렵지 않게 피하지만요어떤가요이 정도의 장치는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느껴지시나요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마커스는 친구들과 대체현실게임(ARG, Alternate Reality Game) 하라주쿠 펀 매드니스를 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학교를 빠져나옵니다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 찾아가서 힌트를 찾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형식의 게임이지요그런데 마침 그 근처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베이교를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처음에 지진인 줄 알았던 마커스 일행은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다시 재회하지만 친구 데릴이 칼에 찔려 피를 흘림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낯선 자동차가 마커스 일행 앞에 서고수갑을 채우고 반항하는 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치며 차에 실어 어디론가 사라집니다처음에 마커스는 자신들을 데리고 가는 존재가 테러리스트라고 생각을 하죠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테러리스트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텔레비전에서 보면 거창하게 수염을 기르고 면으로 만든 헐렁한 옷을 발목까지 늘어뜨렸으며 머리에는 비니를 쓴 갈색 피부의 아랍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붙잡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오히려 슈퍼볼 중간 휴식 시간에 나오는 치어리더들과 비슷했다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사람들은 미국인처럼 보였다멋진 턱선에다가 군인과는 약간 다르지만 짧게 정돈된 머릿결의 백인과 흑인 남녀들이 트럭 반대편 끝에 앉아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롭게 농담을 하고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스타벅스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마시던 이들은 국토안보부(DHS)였습니다그리고 마커스 일행을 테러 혐의로 억류한 것이지요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한 이들은 이후 하나하나 심문을 하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이 과정을 보는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질문들을 보게 됩니다머리가 짧은 여자가 마커스에게 묻습니다.

 

애야내 말 듣고 있니나는 네가 이 휴대폰의 암호를 풀고 메모리에 있는 파일들의 암호도 해제해줬으면 좋겠어그리고 네가 해명을 해줬으면 좋겠어왜 그 시간에 거리에 나와 있었지샌프란시스코 공격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놔.”

  “전 휴대폰 암호를 해제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내 휴대폰 메모리에는 온갖 개인 자료들이 들어있었다사진이메일내가 설치한 해킹 프로그램과 모듈들. “그건 사적인 자료예요.”

  “뭘 감추려는 거지?”

  “저에게는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요그리고 변호사와 이야기하고 싶어요.”

  “얘야너한테는 이게 마지막 기회야정당한 사람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

 

  머리 짧은 여자의 말이 맞나요정당한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감추지 않나요그럴 필요가 없나요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무언가를 감추는 것은 사생활의 영역이지 절대 정당함과 관련된 영역이 아닙니다내가 남에게 보이기 싫은 무언가를 감춘다고 해서 범죄 혐의를 뒤집어써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정부가 바보가 아닌 이상 혐의를 조사할 때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신중히 선별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요먼저 말하지만 정부는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아무리 신중하게 노력하여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분명 어디에선가 실수가 발생하기 마련이지요제아무리 노력해서 99% 확률로 테러리스트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해도 1%의 피해자는 분명 발생하기 마련입니다책에서는 이를 허위 양성 반응의 역설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슈퍼 에이즈라는 새로운 질병이 있다고 치자슈퍼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백만 명 중 한 명이다누군가가 99퍼센트의 정확도를 보이는 슈퍼 에이즈 탐지기를 만들었다, 99퍼센트의 확률로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다는 이야기다검사 대상이 감염되어 있으면 참건강하면 거짓을 내놓는다그걸로 1백만 명을 검사한다.

  슈퍼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1백만 명 중 1명이다하지만 그 검사에서는 100명 중 1명이 허위 양성’ 반응을 보일 것이다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검사에서는 슈퍼 에이즈로 나오는 것이다. ‘99퍼센트의 정확성은 1퍼센트의 오류를 의미한다.

  1백만 명의 1퍼센트는 얼마인가?

  1,000,000/10 = 10,000

  슈퍼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1백만 명 중 1명이다무작위로 1백만 명을 검사하다 보면 진짜로 슈퍼 에이즈에 걸린 1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 검사는 1명이 아니라 10,000명을 슈퍼 에이즈 환자로 식별할 것이다.

  99퍼센트의 정확성을 가진 검사는 다시 말해 99.99퍼센트의 부정확성을 보여줄 것이다.

 

  재미있는 이론입니다그러니 결국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정부는 수없는 무고한 사람들 역시 잡아들여 괴롭혀야만 합니다그래도 괜찮은가요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마커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던 인물입니다테러는 먼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없이 저 먼 타국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하지만 단순히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커스는 억류되어야만 했습니다그리고 그게 무고한 누군가의 친구누군가의 가족그리고 내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국가 안보를 위하여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흔히 잘못된 가정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바로 정부는 옳다라는 가정이지요정부가 하는 일은 필시 국민을 위하는 일로 국민 개개인은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요그게 일부 국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라도 말입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옳다라는 가정은 역사를 조금만 뒤돌아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가정입니다국민이 세운 정부가 반드시 옳았다면 그토록 수많은 정부의 몰락과 비극들이 존재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렇다고 정부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많은 부분 정부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요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정부 역시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단인 만큼 때로는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그렇기에 우리 국민은 우리 손으로 뽑은 정부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견제하고 감시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지요시작부터 인간은 서로를 투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습니다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지요사회 시간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마커스는 짧은 글을 읽습니다.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요짧게 읽을게요. ‘이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가 정부를 조직했으므로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한다또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리를 바탕으로 그런 형태의 권력을 조직해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 글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말입니다미국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가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기본권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엇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기본권은 가변적인 것이 아닙니다언제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지요그리고 언제나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까지 오랫동안 소위 애국보수를 자칭하며 정부에 반하는 시위를 보고 종북이니빨갱이니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정부에게 저항하고 자신이 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들이 빨갱이라서가 아니라 국민이기 때문입니다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소리 내어 정부에게 인지시키는 것이지요그렇지 않으면 정부는 어떤 일의 문제와 그 중대함을 파악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정부를 감시하고 정부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우리가 뽑았다고 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제재 없이 하게 해서는 안 되지요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리고 논쟁도 생기겠지만 사회 구성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그 때문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그토록 부르짖었던 것 아닌가요?

 

우리 대부분은 찍을 사람이 없어서 기권을 했습니다하지만 투표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우리는 자유를 선택해야 합니다부디 자유에 투표하세요.

  제 이름은 마커스 얄로우입니다저는 이 국가에게 고문당했습니다하지만 아직도 이 나라에 살고 싶습니다저는 열입곱살입니다저는 자유로운 국가에서 자라고 싶습니다저는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고 싶습니다.


  『리틀 브라더의 내용은 조금 더 남았습니다협박과 함께 풀려난 마커스는 정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마지막엔 통쾌한 복수를 보여줍니다그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손에 땀을 쥐는 긴장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지요책을 읽다 보면 단순히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우리 삶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그러니 마커스의 이야기를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곤란하지요개인과 정부의 관계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짧지 않은 책이지만 분명 손에서 놓기 힘든 책입니다이상 리틀 브라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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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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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괴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공포 소설 혹은 공상과학소설로 구분되기도 합니다여러 시체 부위를 꿰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설정은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혹은 최근의 과학기술 발달을 생각하면 또 과학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프랑켄슈타인은 1818년 출간 이래로 많은 관심을 받아온 작품입니다연극과 영화로 혹은 다른 매체로 리메이크되곤 했죠물론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실은 우리가 생각하던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시지요. ‘프랑켄슈타인은 괴물(The creature)을 만든 주인공 빅토르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을 말합니다작중 괴물(the monster)’, ‘창조물(the creature)’, 혹은 악마(the wretch)’라고 불리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존재는 이름이 없습니다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불릴 뿐 이 존재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이 때문에 우리에게 이 존재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또한 당연히 피부가 초록색이라든가 머리에 나사가 박혀있다든가 하지도 않지요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잘못된 이미지일 뿐입니다이런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여러 오해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무섭게 생각하거나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엄연히 공포 소설이고괴기 소설임을 알게 되지요전혀 가볍지 않은 분위기끔찍한 사건들어두운 색채 등.


  작가 메리 셸리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 볼까요메리 셸리는 일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 작가입니다이런 괴기 소설을 19세기 초에 그것도 여성 작가가 썼다는 점은 당시대를 생각하면 매우 놀랍지요지난 포스팅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나네요그 때문인지 첫 출판 당시에는 메리 셸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지 않았습니다이후 프랑켄슈타인이 유명해지고 몇 년이 흐르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판할 수 있었지요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메리 셸리가 무려 19살 때 프랑켄슈타인을 썼다는 점입니다메리 셸리는 1797년생입니다. 19살에 짧은 단편도 아니고 이런 장편을그리고 공포 소설에다가 주제도 범상치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메리 셸리의 천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작품의 시작도 흥미롭습니다낭만 시인의 거장 중 한 명인 퍼시 비시 셸리는 15살의 메리 셸리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하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에 있었죠그러자 급기야 둘은 사랑의 도피를 떠납니다이후 아내가 병으로 죽자퍼시 비시 셸리는 메리와 결혼합니다그리고 그 해 1816이 부부는 시인 바이런과 그의 주치의 존 폴리도리와 모임을 가졌고그 자리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합니다바로 그 자리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처음 시작하게 됩니다재미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존 폴리도리는 그의 작품에서 흡혈귀를 등장시켰고이는 이후 드라큘라에 영향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프랑켄슈타인에서 나오는 주된 논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즉 프랑켄슈타인과 괴물(the creature, 이하 크리처’)의 관계지요특히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의무를 이야기합니다가까스로 만난 프랑켄슈타인에게 크리처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네 피조물이고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그리고 모든 비극을 겪고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정적인 광기로 이성인 잃은 상태에서 나는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으니내 능력이 닿는 한 행복과 복지를 보장했어야 합니다그게 제 의무였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고 의무를 행해야 할까요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오늘 여기서는 다른 시각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보려 합니다크리처의 입장에서 말이지요.

 

  크리처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그는 드 라세 가족의 집을 불태우고프랑켄슈타인의 동생 어린 윌리엄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이 혐의를 교묘하게 선한 유스틴에게 덮어씌우지요이뿐만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의 오랜 친구 클레르발을 살해하고프랑켄슈타인과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날자리를 비운 사이 엘리자베트까지 목 졸라 살해합니다그리고 결국 이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십니다프랑켄슈타인은 이 모든 비극에 대한 분노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크리처를 쫓지만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크리처를 잡을 수는 없었죠어떤가요크리처가 벌인 일들을 보고 크리처를 끔찍한 악마라고 부르는 이유에 공감하실 수 있나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크리처에게 있는 것일까요단순히 사건들의 결과만 보면 크리처는 극악무도한 악마가 맞습니다하지만 작품을 읽어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크리처가 시작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을요.

 

내 말을 믿어라프랑켄슈타인나는 선했고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실제로 크리처는 나쁜 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착한 일을 하기도 했었지요가난한 드 라세 가족을 보고 그들을 위해 일부러 많은 양의 장작을 몰래 가져다 놓기도 하고물에 빠진 여성을 구해내기도 했습니다하지만 이 모든 선행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은 증오뿐이었습니다왜 일까요어째서 크리처에 대해 이토록 모진 반응만이 돌아온 것일까요크리처와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프랑켄슈타인을 읽다 보면 유난히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프랑켄슈타인의 소꿉친구이자 아내가 되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묘사를 보겠습니다.

 

그녀는 심성이 유순하면서도 선했지만여름날의 곤충처럼 쾌활하고 장난기가 많았다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감성은 강인하고도 깊었으며 성정은 남달리 다정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자유를 만끽하면서도속박과 변덕 앞에서 누구보다 우아하게 순종했다상상력은 풍요로웠으며응용력 또한 훌륭했다그녀의 외모는 정신을 그대로 드러냈다밤색 눈은 새처럼 초롱초롱하면서매혹적이고 부드러웠다몸매는 날렵하고 호리호리했다지독한 피로를 견뎌낼 힘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처럼 보였다.

 

  엘리자베트는 마치 천사 같습니다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착하고 쾌활하죠막내 윌리엄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꼬마라고 묘사합니다크리처가 호감을 보였던 드 라세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오두막 사람들의 완벽한 외모에 찬탄했다그 우아함아름다움그리고 섬세한 얼굴.

 

  이렇게 프랑켄슈타인에는 유달리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이 많습니다그것도 인간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서요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은 모두 선한 존재로 묘사됩니다하지만 크리처는 어떤가요프랑켄슈타인이 크리처를 만들 때그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신경 씁니다하지만 결과는 끔찍했지요.

 

사지는 비율을 맞추어 제작되었고생김생김 역시 아름다운 것으로 선택했다아름다움이라니하느님맙소사!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거듭 말하듯이그는 크리처를 볼 때마다 극심한 공포와 혐오만을 느낍니다이러한 반응은 태생부터 마지막까지 크리처가 겪게 될 반응이었습니다그렇습니다크리처에 대한 혐오는 비단 프랑켄슈타인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크리처는 이후 모든 마주치는 인간들의 얼굴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를 보게 되지요자신이 그동안 사랑하고 아껴왔던 드 라세의 가족으로부터길을 가다 마주친 인간들로부터심지어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서도 자신에 대한 혐오를 그들의 눈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며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 그 노쇠한 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벌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간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한 여자가 기절했다마을 전체가 난리 법석이었다.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를 본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와 경악을 그 누가 표현할 수 있을까아가타는 기절했고사피는 친구를 돌보지도 못하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펠릭스가 달려 들어와 초인적인 힘으로 노인의 무릎에 매달려 있던 나를 떼어냈다분노에 넋을 잃은 그는 나를 덮쳐 땅에 쓰러뜨리고지팡이로 나를 심하게 내리쳤다나는 사자가 영양을 갈기갈기 찢듯이 그의 사지를 찢어발길 수도 있었다그러나 내 심장이 쓰디쓴 슬픔에 젖어 있었기에 참았다다시 날 때리려는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고통과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오두막집을 뛰쳐나와 온통 격정에 휩싸여 남의 눈을 피해 축사로 돌아갔다.

 

  크리처는 인간들의 반응에 언제나 좌절을 겪습니다사실 윌리엄을 죽인 일도 의도를 가지고 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언제나 거절당하는 자신을 보고혹여나 아직 편견이 없는 어린아이라면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윌리엄에게 다가간 것이지요하지만 역시나 돌아온 반응은 혐오였습니다.

 

아이는 내 형상을 보자마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새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나는 억지로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애야왜 그러니너를 해칠 생각은 없단다내 말 좀 들어보렴.’

  아이는 격렬하게 반항했다. ‘날 놔줘.’ 아이가 외쳤다. ‘이 괴물흉측한 쓰레기나를 잡아먹고 갈가리 찢으려는 거지네놈은 인육을 먹는 도깨비야놔주지 않으면 아버지한테 이를 테다!’

 

  이에 결정적으로 크리처는 자신이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죠프랑켄슈타인에서 크리처는 언제나 못생긴’ 존재입니다그래서 절망하는 존재입니다이러한 절망은 인간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결국에는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로 귀결되죠그러니 프랑켄슈타인에서의 비극의 원인은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비극은 크리처가 창조되었다는 사실보다는크리처가 흉측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크리처는 인간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분노했고그 부정적 시선은 크리처의 외모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한번 생각해봅시다만약 크리처의 외모가 흉측하지 않고 최소한 평범했더라면크리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그랬다면 크리처는 인간 사회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그 속에 들어가복수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결국 크리처의 외모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크리처의 외모가 비극의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이는 인간들의 부정적 시각이 없었다면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우리가 이미 보았듯인간들은 크리처에게 차갑고 잔인한 시선을 보내죠인간들은 크리처의 외침은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하죠이러한 태도는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라는 도덕 명제를 무색하게 만듭니다인간의 차별적 태도에 크리처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은 크리처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프랑켄슈타인조차 크리처의 이성적인 발언에 놀라지요.

 

마음의 흔들렸다내가 동의한 후에 다가올 결과를 생각하면 전율이 흘렀다그러나 괴물의 논조에는 정당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의 이야기그리고 지금 표현하고 있는 감정은 그가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증거였다.

 

  이성적인 크리처에게는 자신에게 행하는 인간들의 비이성적인 태도가 큰 상처로 다가왔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인간들의 이런 행동의 근간은 무엇일까요?

 


  인간들의 크리처를 향한 잔인한 태도는 ()’ 혹은 아름다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아름다운 것은 이로운 것이고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그러니 크리처의 아름답지 못한 그래서 추한 외모는 이들에게는 악이고 혐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이제 크리처를 악마’, ‘괴물’ 등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겠습니다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미의 개념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지요그러니 크리처는 자신들로부터 배제해야 하는 존재로 판단합니다그러니 마지막까지 크리처는 외롭고부당한 대우를 받는 존재입니다.


  결과적으로프랑켄슈타인에서의 비극의 원인은 아름다움의 존재입니다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라는 개념이 크리처를 고립시키고 절망에 빠뜨린 것이죠이렇게 본다면, ‘아름다움’ 혹은 라는 것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아름다움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추함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니까요그리고 동시에 둘을 분리시키고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 평가하게 합니다이런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언제나 고통받는 쪽은 추한쪽이겠죠분명 프랑켄슈타인은 크리처를 만들 때 악한 존재를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크리처는 그저 누구보다도 사회에 속하기를 원했고그러지 못해서 극도로 외로운 존재였습니다그러나 그의 간절하고도 소박한 꿈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처참하게 무너졌죠크리처를 만든 것은 프랑켄슈타인이지만크리처를 괴물로 만든 것은 아름다움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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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미셸 배럿 작품해설.주해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 사유의 낚싯줄을 강물 깊이 담그기 위해선

 

  여러분들은 여류 작가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시나요사실 여성이 글을 쓰는 게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서 굳이 작가가 여성임을 인식하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분명 여성 작가의 섬세함이 두드러지는 글들도 있습니다저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물론 머릿속에는 다른 작가들도 떠오릅니다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에밀리 브론테그리고 마리 셸리 등현대 작가나 국내 작가도 으레 떠오르지만 굳이 다 적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무슨 순위를 매기려는 것은 아니니까요다만 그렇습니다제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울프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학교에서 여성 문학을 수강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그리고 그 첫 만남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한 울프의 글은 가뜩이나 원서 읽기를 힘들어하던 제게는 고역과도 같았습니다그도 그럴 것이 한 장면을 몇 장이고 길게 묘사하기 일쑤였으니까요조금이라도 집중하지 못하면 몇 장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어야만 했습니다그렇게 시작한 울프와의 인연은 몇 권을 더 거치고서야 어느덧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죠오늘은 울프의 여러 작품 중 조금은 특별한 에세이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바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입니다.

 

  『자기만의 방은 울프가 1928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의 예술 협회와 거튼 칼리지의 오드타에서 강연한 원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이후 원고를 수정하며 하나의 완성된 에세이를 발표한 것이지요일견 에세이라 하면 하나의 논지를 가지고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 글에도 하나의 주장이 있습니다오랜 고민의 끝에 내린 하나의 결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여러분에게 사소한 부분을 지적하는 의견 한마디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흥미로운 주장입니다그리고 이 흥미로운 주장을 전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내부에 소설의 형식을 띤 것이지요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에 허용되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이용하여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어깨에 짊어진 이 주제에 눌려 고개도 들지도 못한 채어떻게 그 문제를 고민하며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각했는지를 말입니다내가 지금부터 묘사할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옥스브리지는 꾸며낸 대학이고퍼넘도 지어낸 칼리지입니다. ‘역시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편리한 용어에 불과합니다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그러나 그 거짓말에는 진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이런 진실을 찾아내고 그중에 기억할 만한 것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만약 그럴 만한 게 없다면내가 한 말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넣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지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전달하기 위해 울프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그리고 청중이면서 독자인 우리는 울프가 설정한 의 생각의 여정을 따라가게 됩니다한 사람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그 안에 섞인 진실을 찾기 위해 기꺼이 따라가 보려 합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골몰하는 는 사유의 강에 낚싯줄을 던져 골몰하고 있습니다쉬운 주제가 아닌지라 몹시도 신중하고 집중하여 생각하며 걷고 있었지요그러던 그녀의 앞을 한 남자가 가로막습니다그 사이 물고기는 도망갑니다.

 

그 남자는 공포와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이 도움이 되더군요그는 학교 관리원이었습니다나는 여성이었고요여기는 잔디밭이고길은 저쪽이었지요연구 교수와 학자들만이 여기를 지날 수 있고내게 허용된 길은 자갈길이었습니다.

 

  여전히 여성 인권의 향상을 부르짖는 지금이지만채 100년도 안 된 과거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놀랍기만 합니다.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죠단순히 일상에서의 차별뿐만이 아닙니다교육이라는 부분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만연했죠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요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다 도서관에 도착한 는 좀 전에 겪었던 당혹감을 도서관 앞에서 다시 느끼게 됩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은발 신사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듯 내게 물러가라고 손짓을 하며 나타났으니까요갑자기 수호천사가 흰 날개가 아니라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길을 막는 것 같았습니다그 신사는 유감스럽지만 여자는 칼리지 연구 교수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이 있을 때만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불평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하지만 어째서일까요도대체 무엇이 남성과 여성을 그토록 다른 입장에 있게 만들었던 것일까요원래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의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그녀는 작가들의 오찬 모임에 참석하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오찬 모임을 떠올립니다그리고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깨닫습니다.

 

  먼저 앞의 오찬에 대한 묘사를 살펴봅시다이 오찬에서는 다양하고 푸짐하게 나온 새고기가 있고 양배추는 장미꽃 봉오리처럼 잎이 겹쳐 있는 모양으로 촉촉하고 신선합니다. ‘냅킨으로 주위를 둘러 장식한 설탕 과자가 나오고요와인 잔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가 붉은색으로 물들고또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곤 했지요.’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오찬입니다음식도 분위기도 장식도 모두 훌륭하고 풍족하지요.

 

  이번엔 후에 떠오른 오찬 모임을 살펴봅니다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자리였고여성들이 주관하는 자리였습니다그곳에서는 평범한 그레이비 수프가 나오고접시에 패턴 무늬같은 건 없었습니다노랗게 시든 양배추와 디저트로 설탕 과자가 아닌 자두와 커스터드 과자’ 그리고 비스킷과 치즈가 나왔지요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아닌 물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두 오찬의 차이가 느껴지시는지요? ‘는 생각합니다.

 

그 모든 여성들이 해가 지나도 2천 파운드의 기금을 마련하는 일도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또 3만 파운드를 모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우리는 여성의 빈곤이라는 비난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비웃음을 터뜨렸습니다우리 어머니들은 그 시절에 무엇을 했기에 우리에게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죠코끝에 분을 바르느라가게 창문 안을 들여다보느라몬테카를로에서 햇볕을 즐기며 과시하듯 걸어 다니느라?

 


  여성은 빈곤했습니다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었죠그전까지 기혼 여성의 경우 모두 남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습니다이러한 불균형은 재산뿐만 아니었습니다책의 경우 역시 극심한 불균형이 존재했지요서가에 꽂힌 남성이 여성에 대해 쓴 글은 아주 많았지만여성이 남성에 대해 쓴 글은 거의 없었습니다왜 그리고 남성은 여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까요상대 성에 대한 관심이 남자만의 전유물이었을까요그럴 리는 없었겠죠남성이 여성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자신감때문이었다고 는 생각합니다그리고 그 자신감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요. ‘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내내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여성을 비하하거나 여성을 낮출수록 남성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그래서 마치 남성이라는 성이 원래의 크기보다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어졌다고 말입니다여성이라는 유리 잔을 통해여성이 다른 성에게 기댈 수밖에 없던 상황. ‘는 이런 상황이 불균형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니 에게 돈은 단순히 화폐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요그녀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식사를 하며 값을 치를 때 자신의 지갑을 보며 새삼 놀랍니다.

 

지갑에는 10실링짜리 지폐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이것은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지갑에서 10실링짜리 지폐가 자동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숨이 멎을 만큼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모에게 상속받은 유산과 여성의 투표권에 대해 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 돈이 더 중요하다고 고백합니다왜일까요단순히 돈이 있으면 음식을 자기 맘대로 사 먹을 수 있다는 이유는 아니겠죠투표권도 중요하지만 돈이 있다면 무언가 여성으로서 삶이 변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그것은 곧 사물을 그것 자체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예를 들어 저 건물은 내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저 그림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내 생각에 저것은 좋은 책인가 나쁜 책인가진실로 숙모가 남긴 유산은 내 머리 위 하늘을 가리고 있던 것을 벗겨 주었고한 남자의 키 큰 고압적인 형상 대신 밀턴이 끝없이 감탄해야 할 대상이라 했던 드넓은 하늘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돈은 여성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일찍이 남성은 돈이 있었고그래서 자유로웠지요빈곤한 형편이었던 여성은 삶을 물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당장에 주어진 적은 것으로 삶을 꾸려나가기 바빴던 여성이었습니다그리고 돈은 여성의 사고의 제한을 풀어주었죠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비로소 여유를 찾게 되어 삶을 온전히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해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의 사고는 여성의 삶에서 여성의 글쓰기로 넘어갑니다여성의 과거 상황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겠지만여성의 글쓰기는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여성의 글은 인정받기 어려웠지요그 결과 여성의 서가는 언제나 비어있습니다여성이 쓴 글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죠이 부분에서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라는 인물을 상상해봅니다. ‘는 이 상상에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재능을 가졌다고 가정한 누이 주디스라도 결코 셰익스피어 시대에 셰익스피어 희곡을 쓰는 일은 절대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극복해야 할 환경은 너무나 높은 벽으로 존재해왔습니다.

 

  그 이유 중 중요한 한 가지로 꼽는다면강연의 처음에서 이미 말한 결론대로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자신만의 방을 갖는 것은 19세기 초까지도 부모가 몇 안 되는 부자이거나 매우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은 차분하게 앉아 공을 들여 글을 쓸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는 것과 같죠물론 제인 오스틴과 같이 자신만의 방이 없음에도 훌륭한 작품을 쓰고 그 안에 그런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여류 작가도 존재했지요그렇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였고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뿐만 아니라 여성의 글쓰기가 적은 것에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남성의 혐오감도 한몫했습니다이는 당시에 글을 쓰는 여성을 지칭하던 표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글을 쓰는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그런 여성들을 이렇게 말했죠.

 

글을 끼적거리고 싶어 못 견디는 블루스타킹

 

  이러한 조롱에 여성으로서 제대로 된 글을 쓰기도 어려웠고그나마 글을 쓰더라도 서로 주고받던 편지라는 장르에 만족해야 했습니다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넘어서는 그 시작에는 애프라 벤이 있었습니다그녀는 최초의 소설 오루노코를 집필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작가로서, 17세기에 이미 남편과 사별하고 여성으로서 글을 써서 돈을 벌었습니다여성이 글로 돈을 벌다니요시대를 감안하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걸작은 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러한 작품은 수년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일군의 집단이 생각해 낸 결과물입니다.

 

  애프라 벤으로 시작해제인 오스틴샬럿 브론테에밀리 브론테그리고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여성들이들이 모두 여성의 글쓰기를 가능케 한 존재들이라 생각합니다그리고 그 시작으로서 애프라 벤에 대한 의 찬양이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그녀가 없었다면 여성이 글을 직업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연기되었을지 모르니까요.

 

모든 여성은 다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애프라 벤의 묘비에(애프라 벤의 묘비를 그곳에 안치하는 일은 큰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매우 적절한 처사였습니다.) 꽃을 바쳐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조금 건너뛰어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실 여성 작가뿐만 아니라 남성 작가를 포함하는 공통된 질문입니다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일까요이에 가 언급하는 몇 가지 생각을 소개해보려 합니다먼저 는 셰익스피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상처받은 것에 대해 항의하고 설교하며 비난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복수하고 하는 욕심세상을 어떤 고통이나 슬픔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그의 안에서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따라서 그의 시는 자유롭게 유유히 흘러나옵니다만약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표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입니다다시 책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만약 방해 없이빛을 발하며 타오르는 마음이 있다면그건 바로 셰익스피어의 마음이라고요.

 

  ‘는 말합니다주변에 영향들과 그로 인한 감정들에 휘둘리지 말고 작품 그 자체를 완전하게 나타내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죠그리고 그런 마음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마음이라고요여성들이 글을 쓰면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물질적정신적 힘듦에 고삐를 내어주면 작품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초연하게 반응하고 글을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그렇게 글을 쓴다면 글 속에 개성은 사라지고 글의 가치는 사라지겠죠그녀는 가상의 젊은 여류 작가 메리 카마이클의 작품을 읽고 생각하다 그녀의 작품의 놀라운 점을 깨닫습니다.

 

첫 번째 위대한 교훈을 완전히 익혔다고요그녀는 여성으로서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글을 썼습니다.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여성 작가의 문체와 남성 작가의 문체글의 분위기주제분명 두 성의 글은 차이를 보입니다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는 깨닫습니다여성으로서 글을 쓰더라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서는 안 되고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글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필요합니다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글을 써야 하지요.이제 가 눈앞에 보이는 평범한 장면에 매료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애나멜 구두를 신은 한 소녀와 이내 갈색 외투를 입은 한 청년까지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또한 택시까지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그 흐름은 이 세 사람을 모두 내방 창문 아래까지 곧장 데리고 왔습니다택시는 바로 그곳에서 멈추었고 이내 소녀도 청년도 멈춰 섰습니다그들이 택시에 올라타자택시는 마치 이 흐름에 실려 또 다른 곳으로 휩쓸려 나가듯 미끄러져 갔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남녀가 같은 택시를 타고 흐름 그대로 나아가는 장면그러니 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여기서 쓰고 싶은 제일 첫 번째 문장은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성을 의식한다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을 의식하지 말고작품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데 집중하고셰익스피어의 마음으로 쓰는 것이것이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의 대답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끝나갑니다울프가 지어낸 거짓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죠.

 

여기서 메리 비턴은 말을 멈추었습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여러분에게 말해 주었습니다여러분이 소설이나 시를 쓰려면 500년의 시간과 문에 자물쇠를 단 방이 필요하다는 그런 지루한 결론을 말이지요그녀는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낸 사고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자 노력했습니다그녀는 여러분에게 부탁했습니다학교 관리원이 손짓하는 쪽으로 달려가고점심과 저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먹고영국 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며서가에서 책을 빼내고창밖을 바라보는 자신의 여정을 따라와 달라고 말입니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위한 여정이 끝났습니다울프가 들려준 거짓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진실을 찾아내셨나요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울프는 이야기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그 안에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많은 진실들이 숨어 있으니까요.

 

  『자기만의 방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있습니다챕터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이야기 어느 하나 흐름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눈앞의 생각에 급급하여 읽기보다는 넓은 틀에서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야 합니다그리고 그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을 마주하게 되지요이것이 아주 독특하고 독보적인 울프 글의 특징이고흐름을 따라 읽는 것이 진정 울프의 글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에 관한 에세이입니다애초에 강연 대상도 여성들이었죠하지만 이 책이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라 하여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만이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닙니다페미니즘을 생각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지요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지만확실한 것은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니까요그러니 누구든 거부감을 갖지 말고편견을 갖지 말고있는 그대로 울프의 생각의 여정을 따라 같이 걸어보기를 바랍니다분명 귀한 진실을 하나쯤은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마지막 메리 비턴의 이야기를 마치고울프가 청중을 향해 던진 몇 마디를 뽑아 보여드리려 합니다이는 분명 여성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여성들만을 위한 말은 아니겠지요누구든 살기 팍팍한 시기에 생각해봐야 할 말들입니다다시 한 번 그녀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어떨까요이상 자기만의 방이었습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러분 스스로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사색하며책을 구상하며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사유의 낚싯줄을 강물 깊이 담글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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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 남방 우편기 펭귄클래식 37
생 텍쥐페리 지음, 앙드레 지드 서문,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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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빛 속 유랑자


  생텍쥐페리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조금 양보하여 모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대표 저서 『어린 왕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그만큼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유명하죠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인간의 대지가 그다음으로 유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야기할 텍스트는 그 유명한 어린 왕자도 인간의 대지도 아닙니다생텍쥐페리의 두 번째 소설바로 야간 비행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생애에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익히 아시겠지요생텍쥐페리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이었습니다. 1920년 징병으로 공군에 입대했던 생텍쥐페리는 1922년 면허를 따고 이후 많은 비행을 했죠. 1926년부터는 정기 우편 비행에 종사하기도 하였고이후 그의 데뷔작 남방 우편기를 집필하였고 이어 야간 비행까지 집필하였습니다그의 마지막 비행은 1944년이었습니다그해 7월 31일 오전 8시 30분 기지를 출발한 생텍쥐페리는 이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그의 죽음에 대하여도 많은 논란이 오가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다만 생텍쥐페리의 비행 경력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의 비행 경험이 야간 비행에 많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보면 항공 일정을 조정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와 야간 비행을 하고 있는 파비앵으로 나뉩니다그리고 파비앵은 야간 비행 중 폭풍우를 만나게 되죠지금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조금 고개를 갸웃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간 비행이 특별한 일인가?’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지금이야 비행기를 타는 일에 이미 익숙하고 또한 그 시각이 낯이건 저녁이건 큰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만이 당시만 해도 야간 비행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비행이었습니다항로가 완벽하게 개척되지 않았고악천후에 대비할 여력도 없었지요빠르게 우편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하지만 당시엔 그만큼 비행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리비에르도 파비앵도 다른 모든 이들도 잘 알고 있는 일이죠.

 

하지만 평화란 없다어쩌면 승리도 없을지 모른다모든 우편기가 최종적으로 도착하게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의 경험이 이야기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래서 야간 비행을 하는 파비앵의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요야간 비행을 하는 조종사가 느끼는 감정들과폭풍우를 만나는 순간의 생각그리고 생사를 넘는 순간의 이야기까지요야간 비행의 모습은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래도 밤은 어두운 연기처럼 피어올라 벌써 계곡을 메웠다계곡과 평야는 이제 구별이 되지 않았다마을은 벌써 불을 밝혀 별자리처럼 반짝임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그도 손가락을 튕겨 날개 등을 깜박이며 마을에 화답했다등대가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히듯 집들이 저마다 광대한 밤을 향해 자신의 별을 밝히자대지는 반짝이는 호출 신호가 점점이 박힌 듯 펼쳐졌다인간의 삶을 감싸는 모든 것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이번에는 밤으로 들어서는 것이 마치 배가 정박지로 들어서듯 느리고 아름다워 파비앵은 이를 감탄하며 감상했다.

 

  야간에 지상에서 바라본 비행기의 모습은 별을 배경으로 마치 비행기가 별에 쌓여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그리고 재미있게도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파비앵의 시선도 비슷합니다어둠이 짙게 깔린 대지는 이미 구분이 가지 않는 하나의 어두운 덩어리가 되고점점이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마치 하늘에 박힌 별들처럼 반짝이죠비록 정반대에 있지만 하늘의 파비앵과 지상의 우리는 같은 것을 보는 것일까요하늘과 대지에서 반짝이는 별들을요.


  한번 궤도에 오른 비행은 평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비행기가 떠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밤이 비행기를 붙잡아 고정시키는 것처럼 느껴지지요마치 어둠에 착륙한 것처럼 밤하늘 속에 단단하게 안착되어 있다고 파비앵은 느낍니다그 말대로라면 밤이 적당히 비행기를 붙잡아 두었다가 시간이 되면 놓아주는 것이라고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폭풍우를 만난 파비앵과 무선사는 당혹스럽지만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뇌우로 무선은 좀처럼 연결되지 않고그저 무사히 폭풍우를 뚫고 지나갈 수 있기만을 비는 것밖에 할 수 없죠극도의 공포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상황이지만파비앵은 언제나 그런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오히려 담담히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는 포위당했다고 생각했다좋든 나쁘든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그는 때때로 동트는 모습을 볼 때 병의 회복기로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해 뜨는 동쪽을 뚫어져라 바라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와 해 사이에 너무도 깊은 밤이 가로놓여 다시는 그 밤의 심연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할 것 같으니.

 

  지상에 있는 리비에르 역시 크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그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고동시에 계속 무전을 확인할 뿐이지요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소식에 불안한 파비앵의 아내가 찾아와도 리비에르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뿐 다른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회신이 왔다.

  ‘내륙 전반에 걸쳐 폭풍우연료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삼십 분.’


  이 전보를 마지막으로 파비앵의 소식은 더 들을 수 없습니다파비앵 역시 전보가 닿지 않음을 잘 알고 있겠죠.

 

  파비앵은 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구름바다 위를 헤매고 있지만 저 아래에 놓인 것은 영원이다그는 자기만 홀로 거주하는 별자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그는 여전히 두 손으로 세상을 붙든 채 자기 가슴에 대고 균형을 잡는다그는 핸들 속에 무거운 인간의 부()를 가득 채운 채 절망에 빠져 이 별에서 저 별로 보물을 가지고 다닌다곧 돌려주어야 할 그 쓸모없는 보물을.

 

  시간은 흐릅니다더 이상 파비앵이 날고 있을 확률은 없을 만큼 시간이 흐릅니다애초에 연료는 한정되어 있으니 선고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었겠죠파비앵의 비행기는 돌아오지 못했지만야간 비행은 멈추지 않습니다아니멈출 수 없습니다파비앵의 안타까운 비행과 별개로 여전히 배송되어야 할 우편들이 있기 때문이죠리비에르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그는 멈출 수 없고예정된 비행을 명령하죠이야기의 마지막 리비에르의 묘사가 그날의 일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리비에르는 느린 걸음으로자신의 엄격한 시선 아래 몸을 움츠린 사무원들 사이를 지나 자기 사무실로 돌아간다위대한 리비에르승리자 리비에르가 무거운 승리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길지 않은 꿈 같은 현실 이야기아름다운 묘사절제된 감정생생한 경험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은 분명 낯선 작품입니다그가 썼던 어린 왕자만을 읽어본 독자에게라면 더욱요하지만 읽어보면 이야기 곳곳에 생텍쥐페리가 짙게 묻어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그의 비행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지요야간 비행을 읽으면 새삼 인간 생텍쥐페리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조금 관심이 생긴다면그리고 약간의 시간도 생긴다면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점점이 박힌 별빛 속을 유영하는 야간 비행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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