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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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우는 자, 잊는 자, 잊히는 자. 


  제 나이만큼 딱 오래되었을 방문을 열어봅니다사방을 메운 빼곡한 캐비닛들이 눈에 들어오네요각각 무어라 표시가 되어있기는 하지만당최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찾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개중 오래되어 보이는 것을 열어보면 가까스로 책상 위로 머리를 내밀만큼의 작은 아이가 침대 난간을 위태롭게 타고 있네요보는 이를 마음 졸이게 하던 아이는 기어코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집니다그렇게 아이는 인생 첫 깁스를 하게 되네요반대로 아직 광택이 사라지지 않은 캐비닛을 열어봅니다어느덧 다 자란 그 아이가 노트북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무언가 썼다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말이죠.

 

  기억. 기억이란 참 종잡을 수가 없어요별것도 아닌 일이 선명하게 기억나기도 하고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흔적도 없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경우도 있지요분명 내 기억인데 중요하다고 외웠던 것이 왜 시험지만 받으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요만약 우리 머릿속에 기억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면제 머릿속의 담당자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뜬금없이 스스로의 모자람을 고백하듯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 소개드릴 책이 기억에 관련된 책이기 때문입니다제목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책, ‘오리가미 교야(織守 きょうや)’의 기억술사입니다기억술사는 시리즈로 현재 3권까지 국내에 발매가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제가 오늘 이야기할 책은 그 첫 번째 이야기 기억술사 1입니다.

 

  주인공은 대학생 요시모리 료이치’.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료이치는 사와다 교코를 만납니다그리고 은연중에 선배인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지요하지만 어쩐 일인지 교코는 이른 시각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분명 대화가 잘 통했다고 생각하던 료이치는 교코의 서두르는 모습이 의아하죠나중에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교코는 치한을 만났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늦은 시각의 어두운 길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언제나 교코가 이른 시각 황급히 자리를 떠난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고작 그런 이유라며 반문하기엔 교코의 트라우마는 깊습니다그녀는 병원에서 상담치료까지 받으며 트라우마를 고치려 노력합니다료이치는 그런 교코의 사정을 알게 되고 도움을 주려 하지만 역시나 쉽게 해결될 리가 없는 일입니다그러던 어느 날 교코는 료이치에게 묻습니다.

 

  문득 기억이 났다는 듯이 교코가 문에 한 손을 댄 채로 돌아봤다.

  “기억술사라고알아?”

 

  료이치는 당황합니다처음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죠어린 시절 료이치는 기억술사에 대한 괴담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복잡할 것도 없는 기억을 지워준다는 도시괴담입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찾아 헤매는 교코를 보게 되지요료이치에게 호감을 가질수록 교코는 트라우마를 고치는데 힘을 쓰게 됩니다.

 

  공포증을 고치려면 이제는 원인이 된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다여러 치료법을 시도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심각한 얼굴을 보면 그냥 웃어넘기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으슥한 골목 교코가 다닐 리가 없는 시각에 그녀와 마주친 료이치는 자신을 완전히 잊은 교코를 보게 됩니다료이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트라우마도 완전히 잊은 교코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료이치는 본격적으로 기억술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그저 도시괴담에 불과할 풍문이었으나눈앞에서 교코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점점 실재할지도 모르는 것으로 인식하죠처음 료이치의 반응은 슬픔이었습니다자신을 완전히 잊은 교코를 보면 항상 마음이 아파왔죠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때부터 료이치의 감정은 분노로 바뀝니다.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지지만 이쯤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과연 기억을 지우는 일은 옳은 일인가?’입니다조사를 거듭하던 료이치에게 기억을 지우는 일이 가능한가?’는 더 이상 논의거리가 아닙니다이미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죠믿건 말건 기억술사는 실재합니다그러나 기억술사가 존재하고 기억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료이치는 기억을 지우는 행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료이치의 논지를 봅시다.

 

  “기억이란 그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므로 다른 사람한테 넘겨도 안 될뿐더러 빼앗는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됩니다.”

 

  가장 정석적인 논지겠지요물론 료이치의 경우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자기만 잊다니 그건 자기밖에 모르는 거다.

  기억은 자기 혼자의 것일지 모른다하지만 기억 속에 있던 사람은그 기억을 만든 시간을 공유한 사람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있다가 지워져버린 쪽에서 보면그 사람 안에서 죽임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사람 안에서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게 되어그 사람 안에는 아픔 하나 남지 않고…… 잊힌 쪽만이 잊지 못해서 끌어안고 몸부림친다.

 

  어떤가요료이치의 울분에 가까운 항의를 듣고 여러분들은 기억술사의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부정적이신가요이번엔 료이치와 기억술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젊은 변호사 다카하라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잊는 거랑소중한 사람이 죽어버리는 거랑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가치관의 문제겠지만나라면 전자를 선택할걸.”

  기억 속에서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지만다카하라가 그렇게 말하니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기억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

  다카하라는 내리떴던 눈을 위로 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기억은 과거야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하지만 그 사람 안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그 기억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때로는 그 영향력이 현실보다도 더 강하게 작용해그 사람은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어기억의 힘은 그 사람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어.”

 

  사실 이 논의는 기억술사의 주된 논쟁거리입니다기억을 지우는 기억술사가 이미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기억을 지우는 행위의 의미와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지요일견 료이치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부정당한 느낌이지요분명 교코와의 추억은 료이치도 함께 만들었던 것이니까요이렇게 생각하면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주변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다카하라의 말도 이해가 갑니다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기억이 스스로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죠더군다나 기억이라는 게 억지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피할 수도 없는 것이니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또한 교코의 선택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행동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교코는 료이치와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어찌 보면 교코를 그렇게 몰아세운 것 또한 료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작중에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이유를 갖고 그들의 선택은 상대방의 입장까지도 고려한 선택이었지요서로를 위해 혹은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요.

 

  개인적으로 기억술사를 읽으면서 가능할 것이라 상상치도 않았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즐거움이 좋았습니다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줄 영향들과 의미가 그렇게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기억술사가 2, 3에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1은 사실상 추리소설에 가깝게도 보입니다흔적도 없는 기억술사를 좆아 진실에 다다르는 여정을 함께하는 것 같아요잡힐 것 같던 꼬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순간혹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보를 얻게 되어 활로를 찾게 되는 순간들눈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고 어느덧 두툼한 기억술사의 책장을 덮게 되죠흥미로운 소재와 적당한 관계도막힘없이 나아가는 전개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기억술사 1을 읽으면서 조금 아쉬웠던 점을 생각한다면지독히도 기억술사의 시선이 적다는 것에 있습니다애초에 기억술사라는 존재가 희미하고 그래서 괴담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도대체 누가 기억을 지우고 왜 그리고 어떻게 지우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진실을 마주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해소되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더군요신 같기도인간 같기도 한 기억술사완벽한 능력을 가진 것 같으면서도 불완전한 부분도 보여주는 괴인.

 

  『기억술사는 제22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 독자상 수상작입니다독자들의 호평이 만든 수상작이지요동시에 서점 직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인기몰이를 한 작품입니다저 역시 한명의 독자로서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쉽게 손이 가고어렵지 않게 읽히고너무 가볍지 않으면서 충분히 흥미로우니까요. 2,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기억술사의 시선이 좀 더 나올지 궁금하네요.

 

  여러분은 무엇을 기억하고무엇을 기억하고 싶지 않으신가요행복한 기억은 영원히 머릿속에서 선명했으면 좋겠지요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인생의 창피한 순간소위 흑역사이불킥할 이야기가슴 아픈 실연상처의 순간들이 있지요그리고 우리는 이런 기억 역시 안고 살아갑니다간혹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들도 있죠그럴 때면 기억술사의 존재를 바라실까요나쁜 기억을 깔끔하게 모두 잊고 새 출발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요오리가미 교야의 기억술사와 함께 이런 상상에 빠져보는 것은 어떠신지요기억을 지우는 일그리고 그 후가 어떻게 될지 같이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기억을 지우는 사람기억술사였습니다.

 

 

상기 리뷰는 <북이십일주관 서평단 모집을 통해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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