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막 마카롱 에디션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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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 사랑을 검색해 보세요어떤 것을 기대하셨나요그리고 어떤 것이 보이시나요당연히 검색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는 우리가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느낌이겠죠하트 모양따스한 분위기행복한 연인의 모습마주 잡은 손 등사랑은 달콤합니다이를 부정할 수는 없죠그러나 다른 이미지도 있습니다무릎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모습등 돌린 연인마침표 세 개가 따라다니는 사랑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사랑을 장소로 표현하자면 어떤 곳이 적절할까요천국뭔가 로맨틱한 장소에덴동산 같은 낙원이런 이미지가 잘 어울리겠죠하지만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사랑에는 다른 장소도 있습니다황량한 불모의 장소사막은 어떨까요사랑의 사막그곳의 사랑은 과연 달콤할까요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을 살펴봅니다.

 

 

  • 사랑에도 사막이 있다면,

 

  사랑에도 사막이 있다면필시 그 사랑은 만족과 완성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그 사랑은 지치고힘들고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랑이겠죠레몽이 앉아있는 까페에 한 남녀가 들어옵니다순간이지만 레몽은 여자를 알아봅니다몰라볼 수가 없는 그녀마리아 크로스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레몽을 쓰디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보냅니다젖과 꿀이 흐르는 곳을 바랐지만 결국은 사막이었던 그때의 기억으로.

 

이 미지의 여인이 바라봐 주기 전에는레몽은 한낱 지저분한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았는가우리 모두는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람에 의해 빚어지고 만들어진다그들의 사랑이 쉬 사라진다 해도우리는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중학생 정도의 레몽은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죠학교에서야 문제아로 취급받았지만그래도 레몽은 어른이 아닌 아이였습니다그런 레몽은 집에 가는 전차에서 어떤 여인을 봅니다그 여인도 자신을 봅니다레몽은 매일 그녀의 무언의 시선을 느낍니다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레몽이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한낱 지저분한 애송이그게 레몽이었으나 그녀의 눈길이 레몽을 바꾸지요그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지만그 전차에서의 무언의 눈길에 레몽은 남자가 됩니다.

 

  한 남녀의 눈길이 마주치는 일이 문제가 될 리는 없지요다만 문제는 레몽이 어리다는 사실과 레몽에게 눈길을 준 그녀는 부유한 남자의 정부로 평판이 매우 안 좋고최근에 자식을 잃은 여자라는 점이었습니다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그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죠그녀가 파렴치하게 어린 소년까지 유혹하는 여인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사막입니다서로를 원함에도 결코 서로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지요레몽은 그녀를 욕망하지만레몽의 앳된 모습은 마리아를 죄책감에 빠뜨립니다레몽이 다가오기를 바라면서도 마리아는 레몽을 밀어낼 수밖에 없죠.

 

이 애를 단념시키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올 것이 오고 말았다하지만 어떤 자책감의 독성도 마리아가 느끼는 벅찬 행복감을 다 망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레몽에게도 있습니다그가 방탕한 척을 하지만어쨌든 여린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눈앞에 있지만어떤 말을 걸어야 하는지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질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그 미숙함이 삐뚤어진 형태로갑작스레 그녀를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마리아의 저항에 너무나 쉽게 거부당합니다그리고 여린 소년에게 그 수치심은 뜨거운 불길에 덴 것처럼 평생의 흉터로 남습니다.

 

긴장한 팔의 우악스러운 움직임 하나 때문에레몽은 아득히 먼 곳으로 그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 욕망이라는 이름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리고 펼쳐진 그들의 사랑의 사막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절대 닿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레몽은 평생을 마리아에 대한 복수심으로 여자들을 정복할 것이며마리아는 레몽을 보내고 끓어오르는 열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희망 없는 기다림과 침묵 속에서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격정의 매혹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이 비참한 상황에 어떤 다른 출구가 있단 말인가?)

  이 고독한 사랑은 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팽팽하던 긴장 속에서 상대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자기의 정염의 맹렬함뿐이었다자신 속에 불이 휘몰아치고 있음을 느끼는 것오직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깨닫는 것.

 

  이 사랑의 정염은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태울 만한 모든 것을 태우고도 집요하게 타오르죠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사막처럼 모든 것이 건조하고그 어떤 풀도 자라지 못합니다불이 사그라져 생긴 빈 공간에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공허가 자리 잡습니다.

 

 

  • 신기루는 깨어지고다시 사막으로

 

  절대로 다시 보지 말았어야 했다지나간 17년간의 수많은 연애는자기도 몰랐지만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꺼뜨리기 위해 놓은 맞불에 불과했다랑드 지방의 농부들이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편에 놓는 맞불처럼그러나 일단 마리아를 다시 보자지금까지 의식의 이면에 숨겨진 채 꺼진 척하던 불길이 순식간에 강하게 타올랐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건만그 찰나의 마주침으로 그들은 다시 사랑의 사막에 내던져집니다꺼진 줄 알았던 뜨거운 정염은 다시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활활 타오릅니다.

 

  사랑그 강렬한 욕망이 끝없는 갈증은 아무리 목을 축여도 사라지지 않아요물을 아무리 벌컥벌컥 들이마셔도 여전히 사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순간적이고더 큰 갈증이 찾아오죠유일한 출구는 절대로 다다를 수 없으니 결국 사랑의 사막에서는 모두 방향을 잃고 헤맬 뿐입니다.

  모리아크의 사랑의 사막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줍니다그 가혹한 불길이 절대 꺼지지 않음을생 전체를 지배하고 뒤흔든다는 것을요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조심스럽게 관리하여맹렬히 타오르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까요아니면 그 강렬한 욕망에 몸을 맡겨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태우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자, 여러분 내면의 불길은 어떻습니까아직 잠잠한가요아니면 타오르고 있나요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막의 출구를 혹시 찾으신 분도 있나요?

 

출구가 없구나쾌락을 아무리 만족시켜도 그다음에 채워야 할 욕망의 양이 늘어날 뿐 영원한 만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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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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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어느덧 푸르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귓가를 간질이는 계절이 되면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하루하루 그 과정을 준비하던 나무는 조금도 쉼이 없었건만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싱싱한 잎과 갑작스레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조각이네요시간이 얼마나 빠른지어찌나 조용하게 모든 것들이 우리네 삶을 스쳐 지나가는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어떤 것은 눈에 띄어 내게 의미를 남기고 사라지고어떤 것은 얕게 부는 바람처럼 뒤돌면 이미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그래요때로는 내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나를 지나치는 것 같기도 해요나는 선 채로 가만히 있고삶은 내 뒤로 흘러 흘러 흘러가는현재에서 거리를 두고 나의 삶을 조망하듯 바라보면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사랑도기쁨도사건도절망도 모두 선이 되지 못한 점처럼 인생의 도화지에 작은 흔적을 남길 뿐이지요.

 

 

  • 오선지에 아로새겨지는 감정의 변주

 

  그 작은 점들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요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한때는 기쁨이었던 것이 이내 슬픔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곧게 뻗어가는 오선지처럼 삶은 계속해서 지나가고순간의 감정들은 작은 음표가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로때로는 불협화음으로 변주를 이룹니다삶이라는 각자의 교향곡은 그렇게 흐르다 생의 끝에서 완성됩니다그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삶의 한 마디아름답고도 슬프게 흐르던 멜로디그해 39살이었던 폴의 삶에 브람스가 흐릅니다여러분은 어떠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고작 질문 하나에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브람스를 좋아하거나좋아하지 않거나 간단한 질문 아닌가그렇습니다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질문입니다피자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같은 질문과 다를 게 없이 들릴 수도 있지요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때로 그렇습니다짧은 그 한 마디 안에 감정이 요동치기도 합니다남자친구가 있는 39살의 폴, 25살의 젊은 시몽의 질문에 그녀의 감정이 변주를 시작합니다.

 

 

  • 요트의 작은 떨림라디오를 켜는 손등에 비친 정맥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제 인상에 깊이 박힌 것은 폴을 비롯한 주인공들의 선택이나소재의 참신함줄거리의 흥미로움이 아니었습니다소재는 이미 흔한 사랑 이야기이고줄거리는 그리 특별하지도 예상하기 어렵지도 않았으니까요다만 그럼에도 이 짧은 작품이 저로 하여금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책에 한 번 더 손길을 가게 했던 건 시시각각 변하며 미묘하게 이어지는 감정선이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어쩌면 아무 상관 없을 순간순간의 행동과 말들그리고 그 순간에 흐르는 감정의 변화작은 부분에서조차 이 책은 풍부한 감정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한순간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아주 일상적이고 작은 변화로 그 모든 행복이 무너지기도 하지요.

 

당시 이미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그들은 마르크의 요트에 타고 있었다요트의 돛이 불안한 마음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그러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뱃전에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물에 손가락을 담그려 했던 것이다작은 요트가 기울어졌다마르크가 그녀에게 특유의 무사태평한 눈길을 보냈다그러자 즉각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행복감이 물러가고 조롱기가 차올랐다.

 

  폴이 유달리 예민한 걸까요그렇지 않아요우리 역시 폴과 마찬가지죠다만 우리가 시시각각 변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지금 당장 이 순간 각자의 감정을 묘사해본다면 어떨까요기쁨인가요슬픔인가요아니면 다른 어떤 것혹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나요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면그것은 그 감정이 표현하기에 가장 가깝고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순간의 그보다 작은 감정들도 우리는 분명 느끼지만그 크기가 미세하여 혹은 표현할 길이 없어 지나칠 뿐이지요지난 상황을 되돌아보아요기쁨을 느낀 순간정말 오직 순수하게 기쁨만이 느껴졌었나요그와 동시에 혹은 그 전후로 다른 감정이 섞여들어 있지는 않았나요어머니의 밝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기쁨과 짙게 패인 주름에서는 슬픔이오래된 살림 도구에서는 더 잘해드리지 못하는 죄책감이그 모든 감정이 명명할 길 없이 섞여 한 마디를 이루지는 않았던가요걔 중에 가장 컸던 감정이 기쁨이어서엄마 얼굴 봐서 좋다는 말로 나타나지 않았나요?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제의 차에 탄 폴은 방심한 태도로 라디오를 켰다그녀는 계기판의 창백한 빛에 비친 자신의 길고 잘 손질된 손가락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정맥이 드러나 손가락 쪽으로 돌진하며 이리저리 뒤얽혀 있었다. ‘내 삶을 반영하는 것 같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에 드러난 정맥처럼 삶은 이리저리 뒤얽혀 있고우리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로 뒤엉켜 있습니다하나로 명확할 수가 없는 우리 감정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주어진 상황에서 모두 기쁨을 느낀다고 하여도 세세한 구성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그래서 그런가 봅니다삶이인간이이토록 복잡하고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녀는 불안했다그들이 저녁 6시에 만나는 게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을까다른 한편매일 저녁 그가 작은 자동차에 탄 채 문 앞에서 조바심을 내며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프랑수아즈 사강문제적 삶을 살면서도 그녀의 죽자 프랑스 전체가 그토록 애도했던 것은 세밀한 감정 묘사가 독보적이었던 사강 작품의 매력 때문이겠지요여러분은 어떠실까요브람스를 좋아하실까요그 짧은 질문에 어떤 감정의 변주를 이루실까요그렇게 만들어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인생을어떤 곡을 만들어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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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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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였을까요편의점이 간단한 물품을 구비한편의를 위한 장소를 넘어선 때가어느 순간부터 어린 시절 방바닥에 앉은 할머니가 돈 받으시던 슈퍼마켓이 사라지고깔끔하고 젊은 알바들이 카드 받는 편의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요처음에는 말 그대로 간단한 편의를 위해서 들리는 곳이었지만지금은 사실 편의점에 구비된 물품만으로도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입니다수많은 과자와 음료수끼닛거리생필품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죠이제 정말 주변에 편의점이 없으면 이상한 기분도 듭니다당연히 있어야하는 것이 없는 느낌일까요?

 

  편의점과 관련하여 또 하나 친숙한 것은 편의점 알바입니다많은 알바 중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지요특별한 관련 직종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고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은 걸리지만 대체로 배우기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다만 편의점 알바에 관련된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도 언제나 따라다니는 이야기지만요.

 

  • 편의점과 인간성

 

  편의점을 이용하는 우리는 편의점과 그 직원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우리는 그저 원하는 상품을 고르고원하는 상품을 찾지 못할 때 직원에게 묻고직원은 알려주고상품을 결제하고끝이지요잘 정리된 상품잘 보이는 가격빠른 계산그야말로 효율적인 장소입니다불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편의점은 어쩌면 현대적인 것과 가장 잘 합치하는 장소일지도 모릅니다이렇게 말하니 편의점이 결점 없는 완벽한 장소처럼 보이지만현대적인 이미지와 걸맞게 찾기 힘든 것도 있지요.

 

  인간성효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편의점의 존재 이유와 구매 과정에 무슨 인간성이 필요하냐는 질문도 나올 수 있겠지요확실히 우리는 편의점에서 어떤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러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죠하지만 편의점에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도진열하는 것도판매하는 것도모두 인간입니다제아무리 효율성을 추구하는 곳이지만 인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그런데 만약 자신의 모든 게 편의점을 위한 인간이 있다면 어떨까요편의점의 소리를 듣고편의점에 맞게 신체를 맞추는 인간이 있다면과연 우리는 그런 존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을 소개합니다.

 

  주인공 후루쿠라(게이코)는 어쩐지 좀 이상합니다어릴 때부터 그녀는 남들과는 달랐죠남들은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놀던 후루쿠라는 죽은 새를 손에 들고 엄마에게 다가가 말하죠이거 먹자.”동생은 닭튀김을 좋아하고아빠는 새 꼬치구이를 좋아하니 집에 가서 꼬치구이를 해 먹자는 말이었죠그녀는 자신의 말이 어쩐지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이 새는 작고 귀엽지저쪽에 무덤을 만들고모두 함 게 꽃을 바치자꾸나하고 열심히 말했고결국 그 말대로 되었지만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창시절 일화도 있습니다교실에서 두 아이가 싸우자누군가 말리라고 소리쳤고후루쿠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싸움을 말리죠삽을 들고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말려야 하나 보다고 생각한 나는 옆에 있는 도구함을 열어 안에 있던 삽을 꺼내 들고 난폭하게 날뛰는 아이한테 달려가 그 애 머리를 삽으로 후려쳤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상담도 받아보았지만전혀 소용이 없었죠후루쿠라는 다만 자신이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를 느끼며되도록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 편의점 인간: A+B+C=A+B+C

 

  그렇게 겉보기에는 그냥 조용하고 소극적인 인간으로 자란 후루쿠라는 문득 새로 오픈하는 편의점 직원 공고를 보고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되었죠편의점 인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알고 보면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그녀가 여동생의 조언에 따라 선택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그녀는 미묘하게 다른 사람의 말투행동옷차림까지 따라 합니다그런 그녀를 편의점 직원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받아들이지요.

 

  지금의 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3할은 이즈미 씨, 3할은 스가와라 씨, 2할은 점장나머지는 반년 전에 그만둔 사사키 씨와 1년 전까지 알바 팀장이었던 오카자키 군처럼 과거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흡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후루쿠라처럼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습니다알게 모르게 서로 닮기도 하죠하지만 후루쿠라의 경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그녀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그녀 자신은 없습니다우리가 A, B, C라는 사람을 모두 닮아도 그 합인 는 단순한 A+B+C가 아닙니다아예 새로운 D가 되거나 혹은 (A+B+C)'가 되죠어떤 부분에서는 타인과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하지만 후루쿠라는 단순한 A+B+C가 되어 있습니다그녀 말처럼 시간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한다고 하여도 그건 그녀가 마시는 물(환경)이 달라지면서 다른 것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그녀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요.

 

기본적으로 후루쿠라 씨가 먼저 불평을 하거나 하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보기 싫은 신참한테도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움찔했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 기묘한 인간 유형 Uncanny human type

 

  독자로서 화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읽노라면 응당 화자의 시선에 공감이 가야 하지만어쩐지 후루쿠라의 시선에는 적응하기가 힘들다책에서 은근히 비꼬는 인간 사회의 세속적이고 강압적인 면모들이 공감 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미 인지하고 있고여전히 문제시되는 것들이니까요다만 후루쿠라가 보는 시각과 이윽고 그녀가 도착하는 인간의 모습이 인간인 듯 인간 같지 않기 때문일까요?

 

  새로운 인간 유형의 탄생인 것일까효율적인 세상에 가장 효율적인 존재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최적화된 인간우리가 이런 편의점 인간’ 유형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일까요짧고금방 읽히고재미있는 책이지만 어쩐지 거부감이 드는 것은 편의점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한 기존 인간 유형의 본능인지 모르겠습니다더더욱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해야겠습니다짧더라도 말이지요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수고하세요.

 

  “아니누구에게 용납이 안 되어도 나는 편의점 점원이에요인간인 나에게는 어쩌면 시라하 씨가 있는 게 더 유리하고가족도 친구도 안심하고 납득할지 모르죠하지만 편의점 점원이라는 동물인 나한테는 당신이 전혀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편의점을 위해 또 다시 몸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좀 더 빨리 정확하게 움직이고음료를 보충하는 일이나 바닥을 청소하는 일도 더 빨리할 수 있도록편의점의 목소리에 좀 더 완벽하게 따를 수 있도록육체의 모든 것을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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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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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도로 열악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이러한 상황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희망일까요언젠가는 이 모든 고통이 끝나고 일신의 평안과 자유가 찾아온다는 희망이런 희망은 분명 작금의 고통을 감내케 합니다그렇다면 이 진통제와 같은 희망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요하루하루는 너무 짧은가요일 년여전히 희망을 품고 버틸만한 기간인가요그렇다면 십 년은 어떤가요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면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진통제가 될 수 있을까요?

 

  ‘이반 데니소비치는 죄수입니다그는 수용소에서 작업하며 형기를 보냅니다수용소에 있는 다른 인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모두 죄수로서감시를 받으며각자가 속한 반원들과 함께 하루를 지냅니다이미 수용소라는 말에서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이들의 삶은 녹록지 않습니다솔직히 말해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끔찍하지요여기 그들의 수많은 날 중 하루를 소개하려 합니다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입니다.

 

  • 구멍 난 펠트 장화희멀건한 죽 한 그릇고장 난 승강기

 

  수용소의 하루는 참혹합니다비록 이반 데니소비치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절망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그의 말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이들의 삶을 조망해본다면 분명 끔찍합니다영하 삼십 도의 추위가 수용소들을 위협하지만그런 가혹한 공격에도 이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옷가지뿐입니다제아무리 옷을 단단히 여미어도 손발이 얼고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옷을 더 껴입는 것도 허락되지 않습니다언제나 작업을 시작하기 전 죄수들은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옷을 벗어 검사를 받아야 하죠규정된 옷 이외의 무언가를 입고 있으면 혹독한 처벌이 이어집니다장화는 구멍이 나기 일쑤여서 차가운 눈이 스며들어오지만 온전한 장화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먹을 것은 더 끔찍합니다이들이 먹게 되는 것은 온전한 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죄수들에게는 빵 조금과 ’ 한 그릇이 전부입니다그마저도 없어서 매 끼니 식당은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건더기라고는 거의 없고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살점과 생선 가시들만이 있는 죽 한 그릇죄수들은 살점 없는 가시들을 쪽쪽 빨아먹으며 허겁지겁 먹어치웁니다누가 그러라고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배고픔에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생존을 위한 행동이지요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누가 쓰던 그릇이든 상관하지 않고 죄수들은 혓바닥으로 그릇을 핥아가며 허기를 채우기 급급합니다.

 

  작업환경 역시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작업을 위한 도구는 충분치 않고작업장 내의 기계가 온전히 작동하는 꼴은 보기 힘들지요승강기는 고장 난 지 오래고이를 고치러 누군가 오기도 하지만결국 못 고치고 돌아갑니다안전장치는 당연히 있을 리 만무하고죄수들은 그저 온몸을 사용하여 고된 작업을 수행해야 하지요불을 때도 온기를 받을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모두가 간절한 담배는 구하기가 힘들어 누군가 담배를 피우면 꽁초라도 받아 볼 수 있을까 눈치를 봅니다.

 

 

  • 담배꽁초양배춧국빵 이백 그램

 

  외부에서 소포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가난한 이반 데니소비치도 예외는 아닙니다104반 반원들이 그에게 형기가 얼마 안 남지 않았냐고 말하지만그의 형기는 십 년입니다설령 형기가 끝나간다고 하여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속절없이 형기가 추가되는 걸 이반 데니소비치는 잘 알고 있습니다다른 이들도 이반 데니소비치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 않은 형기를 가지고 있습니다이런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십 년이나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요형기가 끝나리라는 희망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큰 희망은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니까요이반 데니소비치를 지탱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체자리가 슈호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이반 데니소비치한 모금 피우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호박으로 만든 짧은 물부리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꽁초를 뽑아들었다.

  슈호프는 약간 당황한 채(물론체자리가 먼저 권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막상 상대방이 이렇게 말하자 약간 당황했다), 감사하다는 손짓을 얼른 하고는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행여나 땅에 떨어질까 봐 받치면서 들었다.

 

  요컨대 기대는 하였지만 정말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꽁초 하나담배가 간절하던 차의 이반 데니소비치에게는 작은 담배꽁초가 큰 선물과도 같지요혹은 죽 한 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슈호프는 현장 사무소에 있는 체자리에게 죽 한 그릇을 갖다 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는 했다(체자리는 수용소 안에서는 물론이고이런 작업장에서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파블로가 두 그릇을 자기한테 건네주는 순간에는 정말이지 심장이 다 멈춰버릴 정도였다두 그릇을 다 나에게 준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반 데니소비치에게는 큰 희망은 별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내일 혹은 내년 같은 미래의 일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은 그저 복잡한 일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이반 데니소비치를 비롯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자신에게 주어지는 죽 한 그릇과견딜만한 작업젖지 않은 펠트 장화이백 그램짜리 빵입니다부당한 것에 전복을 바라는 영웅적인 면모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습니다현실은 보다 냉혹한 법이지요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는 작은 희망이 최우선입니다설령 그것이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말이지요.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지금까지의 전생애보다 아니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우선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이제야 좀 살 것 같다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죄수들이 사는 것은 먼 미래의 순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바로 눈앞에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 놓이는 저 순간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지요.

 

 

  • 수용소의 삼천육백오십삼 일 중 하루

 

  삶에는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고달픈 순간도 있습니다고달픈 순간이 짧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겠지만그 기간이 연장되어 끝이 너무 아득히 멀어지면 버텨내기가 힘들지요이런 순간에는 먼 미래의 일 같은 희망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그 순간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것은 아주 작은 희망이지요희망이라고 이름 짓기도 애매한 그런 것들 말입니다그러니 삶이 우리를 너무 고달프게 한다면소소하지만 성취할 수 있는 눈앞의 것들을 먼저 손에 쥐어보는 것은 어떨까요벗어나기 힘든 막막하고 고단한 삶을 어쨌든 한발 나아가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사회주의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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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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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름만 들어도 어쩐지 벅차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유’.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당시의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그리고 이를 얻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지요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일지 모릅니다자유는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해보죠그렇게도 어렵게 쟁취한 자유를 우리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살고 있나요?

 

  여기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던 자유로운 인간이 있습니다기행에 가까운 그의 행동거침없는 그의 입담삶을 바라보는 시선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뜨입니다그는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말하지만자유와 삶에 대한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리고 그의 언행은 분명 하나하나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요이름은 알렉시스 조르바’. 그는 그리스인입니다.

 

 

  • 자유로운 인간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는 크레타섬으로 향하기 직전 늙수그레한 노인 조르바를 만납니다노인이지만 체격이 건장한 조르바는 대뜸 나에게 자신을 고용하라고 말하죠. ‘는 조르바에게 끌립니다잠깐의 대화로 그를 고용하기로 하죠그렇게 크레타섬에서의 조르바와의 인연이 시작됩니다당최 어떤 인간이기에 대놓고 제목마저 그의 이름인 것일까요?

 

  조르바의 독특한 언행을 소개하자면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울 지경입니다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인간이고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해둡시다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이런 문제에서만큼은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물건을 고르는 자유가 아닙니다자유를 위해서라면 그 외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상관하지 않을 정도지요심지어 그것이 그의 손가락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입니다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아프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나는 목석이 아니고나도 사람입니다당연히 아프지요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그래서 잘라 버렸지요.

 

  살짝만 들여다보더라도 조르바는 흡사 미친 사람 같습니다하지만 우리는 그의 언행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그의 언행과 삶의 경험이 기이해서만은 아닙니다조르바의 말과 행동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생각해 볼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요.

 

봅시다어느 날 나는 조그만 마을로 갔습니다갔더니 아흔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삐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군요그래서 내가 물었지요아니할아버지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오냐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단다.〉 나는 대꾸했죠저는 금방 죽을 것처럼 사는데요.〉 누가 맞을까요두목?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대답을 못 하시나?

나는 조용히 있었다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로 이끌 수도 있다.

 

  조르바의 질문 앞에서 는 맥을 못 춥니다많은 책을 읽으며소위 지식인이라고 할만한 입니다하지만 조르바의 질문에 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쑵니다그런 를 보며 조르바는 놀려대기도 합니다도대체 뭐 하나 제대로 답할 수 없는데 책 같은 거 읽어서 뭐하냐는 이야기지요이 부분에서 조르바와 는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와 달리 조르바는 언제나 온 몸으로 체험하고 깨닫는 인물입니다그런 그의 질문은 정말이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듭니다.

 

조르바가 주먹을 식탁을 치며 외쳤다그러면 씨앗은식물이 싹으로 돋아나려면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우리 내장 속에 그런 씨앗을 집어넣은 건 누구지요이 씨앗이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왜 꽃을 피우지 못하지요왜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누가 알까요?

없을걸요.

그렇다면,」 조르바는 절망적으로 부르짖으며 거칠게 자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이 모든 알량한 배들과 기계들넥타이들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 조르바의 자유

 

  조르바의 질문과 대답이 유달리 힘이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요이는 조르바가 아니면 말고 식의 가벼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조르바의 말과 행동에는 그의 모든 삶이 녹아있죠그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내장으로 삭여낸 모든 것들이요그 때문에 그가 내뱉는 모든 것이 가벼운 헛소리와는 거리가 먼 이유겠지요그는 다른 것을 믿지 않습니다오로지 자신만을 믿습니다.

 

안 믿지요아무것도 안 믿어요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나는 아무도아무것도 믿지 않아요오직 조르바만 믿지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가서가 아니오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이토록 강렬한 확신삶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조르바의 독특함에 힘을 더합니다조르바가 보기엔 다른 이들은 모두 자유롭지 못합니다그들은 무언가에 매여 있습니다그것이 종교사랑국가든 말입니다하지만 조르바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수많은 경험으로 그는 비로소 안개 같은 허상에서 벗어났지요.

 

많은 사람들이 천당을 믿고 거기에다 나귀 한 마리씩 매놓고 있어요나는 나귀도 없고그래서 자유로워요나는 지옥이 두렵지 않아요거기서 뒈질 나귀가 없으니까나는 천당도 바라지 않아요거기서 토끼풀을 신나게 뜯어 처먹을 나귀가 없으니까나는 무식한 돌대가리라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통 모르겠는데두목은 이해할 거예요.

 

  조르바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다만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지요그리고 조르바는 가능한 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가능한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이는 모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나이 먹는 것은 오래 사는 결과로 따르는 것이지 그 목적은 아니지요조르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온 존재를 쏟아붓기 위해 오래 살기를 갈망합니다자신의 힘이 다할 때까지 조르바는 멈추지 않습니다그 과정에서 노화가 그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여전히 그는 나아갑니다여전히 소진해야 할 힘이 그의 안에 남아 있으니까요자유로운 인간조르바.

 

 

  • 그 모든 것이 한낱 춤이 된다 할지라도

 

  사실 소개하고 싶은 조르바의 놀라운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때로는 질타로 때로는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하지만 그러한 한마디를 만나는 기쁨을 제가 여러분에게서 모두 빼앗을 수는 없겠죠다만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지 못한 분에게 약간의 느낌을 제공할 뿐입니다.

 

  서두에 던졌던 질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나는 자유로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내가 조르바만큼 자유롭지 못함입니다그렇다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의 올바른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지요조르바의 자유는 조르바의 것이지 그게 꼭 우리의 것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나는 혹시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나귀 한 마리를 매어 놓지 않았는가나는 은연중에 주변에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의 한정된 자유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는가내가 조금 더 얻을 수 있었던 자유의 열매를 스스로 포기한 적은 없는가삶이 그런 것이라고 멈칫하지 않았던가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수액을 빨아올릴 흙이 하나 없는 허망한 대지에서 나는 조르바처럼 춤출 수 있을까자유롭던 그 그리스인처럼.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채 온몸을 던져 위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처럼 보였다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전능하신 하느님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죽이기밖에 더 하겠소그래요죽여요상관 않을 테니까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도 실컷 추었으니……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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