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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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인생이란.

 

  요즘 어때요잘 지내세요별일 없죠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라면 마치 수학공식처럼 나오는 질문입니다대답 역시 공식적이죠잘 지내지그냥 지내물론 잘 못 지낸다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제 그렇게 대답하는 경우는 드뭅니다더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잘 못 지낸다고 답하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지겠죠.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먼저 바라건대 우리 모두 잘 지냈으면 좋겠지만현실은 그렇지 않죠유토피아가 아닌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잘 지내기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먼저 잘 지내시는 분들은 계속 가능한 오래 잘 지내시길 바라며지금은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인생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보입니다주인공들의 삶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지루할 틈이 없이 사건이 생기고 시간은 흘러가죠실제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조용할 날 없었던 학창시절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다사다난한가요혹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진 않으신가요어제와 오늘의 모습이생활이생각까지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무료하다고 이야기합니다특별한 일이 없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한 그래서 무료한 삶이라고 이야기하죠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인생의 무료함을 느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그리고 그 속의 는 소설가로바로 이런 이들을 찾고 있습니다그리고 이들 중에 자신의 고객이 될 사람을 찾아냅니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리도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고객을 찾는 것일까요말하자면 는 자살 조력자입니다인생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고 그런 삶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이들을 찾아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것이지요그렇다고 가 자살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을 일부러 꼬셔 자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정말로 원한다면 필요한 방법을 상세히 안내하죠도중에 그만두어도 절대 강요하거나 하지 않습니다이쯤 되면 아주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의 고객은 다양하지만 그중 먼저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은 세연에 대해 말해보죠그녀는 특이합니다특이하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입니다세연은 뜬금없이 북극 이야기를 하며 북극에 가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거짓말을 쉽게 하고, C를 옆에 둔 채로 자위를 하고섹스를 하면서도 언제나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습니다.

 

  세연은 삶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습니다그녀는 방향 없이 떠돌며 여기저기 제멋대로 움직이는 삶에 염증을 느끼죠.

 

  “그게 그거지우리가 떠다니든 북극점이 움직이든 결국은 마찬가지 아냐그럴 때 없어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릴 때 말야여기가 어딜까 하면서.”

 

  학창시절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입관 체험에도 그녀는 관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이 너무 편안해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던 세연입니다그러니 폭설로 강원도 도로 어디인가에서 C와 함께 차 안에서 고립되었을 때그녀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죠정작 C가 잠든 사이 세연은 목적지였던 자신의 고향 주문진과 정반대 방향으로 홀로 사라집니다무료한 인생에서 자신을 흥분시킬 것을 찾는 데에 지쳤던 세연에게 마로니에 공원에서 마주친 낯선 의 제안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겠죠입에 물고 있던 사탕까지 내버릴 정도로.

 

그때 유디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생기그녀는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미세하게 들뜬 유디트를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입에 추파춥스를 물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 소개한 많은 방식 중 가스를 선택해 자살합니다.

 

  ‘의 또 다른 고객은 미미라는 여성입니다그녀는 행위 예술가죠늘 해오던 것처럼 퍼포먼스를 하고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겨울밤.낯선 남자가 다가와 클림트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그녀는 좋아한다고 대답하고그 남자와 이틀을 보내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여기가 아닌데이게 아닌데하면서도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욕조에서 손목을 긋는 방법을 선택한 미미의 첫 시도는 실패합니다. ‘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그동안 절대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기를 권유하죠그래서 그녀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C와 자신의 작업을 녹화하기로 합니다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을 녹화해서 본 적이 없었고그러지 않으려 했었기 때문이죠작업 후 그 결과물을 눈으로 본 그녀는 영원할 자신의 복제품에 두려움을 느낍니다자신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복제될 비디오 속 모습그리고 그 비디오의 소유가 자신이 아닌 C에게 있음을 견딜 수 없었죠. C는 미미의 모습을 담은 테이프에 끝없이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그게 마치 자신의 도피처라도 되는 양. 자신이 가둔 프레임 속의 그녀를 탐닉합니다.

 

길을 걸어도 프레임으로 시야를 구획하고비디오에 담겨진 것들자신이 편집한 것들을 그의 두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신뢰한다아니 애착한다그리하여 비디오는 다시 그의 무기가 되고작지만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C는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입니다이에 조롱하듯 미미는 작품 전시 날 C의 영상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퍼포먼스를 보입니다영상 속의 그녀는 절대 자신이 아님을 C에게 눈으로 보여준 것이죠.

 

그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화랑을 나와서 인사동 거리를 걸어갔다어느 찻집이든 찾아 들어가 따듯한 녹차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그는 등뒤에서 미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었어이제 페달을 힘차게 구르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리겠지.”

  미미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아니었어.”

 

  그리고 미미는 역시 의 도움을 받아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합니다.

 

  ‘가 소개한 고객은 세연과 미미 두 명입니다하지만 이 둘 말고도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은 혹은 꺾으려는 인물들도 있죠. ‘가 베니스에서 만난 에비앙을 마시면 토하는 홍콩 여자그녀는 구역질 나는 자신의 삶에서 도망쳐 여행을 하고 있었죠혹은 C의 동생이자 유디트의 전 연인이었던 K. 택시를 운전하던 K는 C의 작품을 보고 구역질을 느끼며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망설였던 엑셀을 밟겠다고 이야기합니다. C를 제외한 모두 삶의 무료함에서 벗어나려는 존재들이죠.

 

 

  아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료한 것이라면물론 인생에 대한 이런 가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분명 가슴 저리게 느껴지곤 하는 삶의 무료함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바라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때인생에 의미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웁니다그러면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탈출하고픈 욕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그리고 죽음에 대한 욕구는 본능처럼 내면에 자리 잡고 있겠죠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인생의 무의미함이 반드시 자살이라는 결말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무의미한 삶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짧지만 강렬합니다당연하게 생각해오던 주어진 삶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하니까요인생에 대한 어떤 가정이 맞건 틀리건 정답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어차피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 테니 말이죠다만 그렇기에 여러 방면에서 인생을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희망만을 이야기하다가 절망의 존재를 까먹어서는 안 되니까요시간이 된다면 그리고 제게 기회가 온다면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작품입니다앞으로 <마라의 죽음>, <유디트 1>, <사르다나팔의 죽음>을 보면 ’, 세연미미, C와 K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그리고 골목길 모퉁이 혹은 공원 아니면 미술관 등 어디에선가 를 만날 수 있을까요그는 제게 어떤 말을 건넬까요그리고 저는 그의 고객이 될 수 있을까요?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위대한 극작가보다 훨씬 후대에 시인실비아 플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피의 분출은 시()이다그건 막을 도리가 없다.” 그 시를 쓴 그녀는 가스오븐의 밸브를 열어놓고 자살했다.

  내 고객들도 실비아 플라스 같은 문재(文才)를 지니지 못했을 뿐, 삶의 마지막을 그녀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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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주세요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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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인연이 된다는 것

  세상만사가 행복하기만한 사람이 있을까요주변에 고민상담할 필요도 없이 모든 일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그런 삶이 있을까요누구나 힘든 일괴로운 일고민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참 좋겠지만쉬이 해결될 거였다면 고민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고민은 무엇인가요그리고 그 고민을 나눌 사람이 있나요?


  때로는 어떤 고민은 참 말하기 어렵습니다이런 고민은 그저 안에 쌓아둘 수밖에 없어서 처치곤란입니다가까운 가족친구에게 더욱 말하기 힘든 고민은 더욱 이고요자신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힘든 소리 쉽게 할 수 있는 대상은 흔치 않기 때문이죠자칫 나의 고민이 상대방에게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두려움에 고민을 나누기란 정말 어렵습니다그래서 가끔 우리는 전혀 낯선 이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전문 상담가부터우연히 마주친 사람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인터넷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요속속들이 사정을 알고 있는 지인들보다 필요한 부분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일수도 있겠네요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스치듯 지나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인연으로 남기도 하죠.

 

  특별한 인연…….

  이 지상에 수십억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그런 확률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천문학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그만한 인연이었기 때문에 당신도 내게 답장을 보냈겠죠나는 그런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리리카씨는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있나요?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사실 낯선 이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님을 압니다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믿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죠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져 상처를 받은 리리카는 이미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처음 자신에게 왔던 모토지로의 편지에 반감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하지만 그녀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나 봅니다그렇게 아주 작은 틈새로 리리카와 모토지로의 인연은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초반에 나오는 모토지로의 제안은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낯선 성인 남성의 편지에 어린 여학생은 의문이 먼저 생길 수밖에요그런 의문과 무서움을 모토지로의 방식은 단숨에 불식시킵니다이런 방법이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기도 할 정도네요.

 

그냥 편지를 주고받으면 어쩐지 멋이 없는 것 같아 작은 제안을 하나 해볼까 해요나도 때로는 고민거리가 있고 누구에겐가 진실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어요그러면 우리서로의 편지를 통해 둘만의 비밀을 가져보는 건 어떤가요?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진실만을 쓰겠다는 약속을 하는 거예요(우와이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다!).

……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규칙을 정하는 거예요우리는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규칙어이없는 소리인지도 모르지만나는 꽤 재미있을 거 같은데어떤가요서로 우주를 향해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로가 절대로 만나지 않으면서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펜팔이런 관계라면 한 번 믿어보고 싶기도 합니다결국 진심은 통한다 했던가요모토지로와 리리카는 착실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서로에게 편지를 쓰죠상처가 많고 아직 어린 리리카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스스로에게는 치부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모토지로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꾸지람 듣기를 원하지요혹은 격려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이에 대한 모토지로의 답장에서 진정 상대를 위하는 참된 인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힘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힘내라는 격려의 말을 기대하고 있니그건 지금의 네게는 역효과야. ‘힘내라열심히 살아라’ 라고 격려하는 소리들만 넘치는 세상이제 사람들은 그런 말로는 참된 힘이 솟지 않아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어.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힘을 내려고 애쓰는 바람에 네가 엉뚱한 길잘못된 세계로 빠져드는 것만 같아굳이 힘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잖니인간이란 실은 그렇게 힘을 내서 살 이유는 없어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거꾸로 힘이 나지몹쓸 사람들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야힘을 내지 않아도 좋아자기 속도에 맞춰 그저 한발 한발 나아가면 되는 거야.

 

  

  적당한 위로를 건넬 수도 있습니다복잡한 문제에 끼어들기 곤란하여 거리를 두며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요사실 우리는 많이 그러기도 합니다서로가 상처받지 않는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그런 거리를 두고 좋은 듯 지낼 수도 있지요그러니 모토지로의 사려 깊은 답장은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적당한 거리가 아니라 리리카의 곁에서 그녀의 힘듦을 같이 고민하고 위로를 건네는 것이지요서로를 믿을 수 있는 인연이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상처를 주거나 받는 게 두려워 필요한 만큼의 거리만을 유지하는 것은 서로에게 비겁한 행동일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내편에 서서 나를 꾸짖고 나를 위로하고 내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그런 인연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정 공감해야만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겠죠나도 모르게 사람에게 거리를 두고온전히 믿기를 망설이는 요즘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한발 서로에게 내딛지 않으면 진정한 인연을 만들 수 없음을그리고 뒤돌아서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보게 되기를.

 

나는 멀리서나마 너를 항상 응원할 거야언제라도어디서라도 응원할 거야,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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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카롱 에디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마이클 헐스 해설,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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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이 녹아든 진한 핫초코

  처음 그의 슬픔을 읽어 내려갔던 때는 중학교 때였다고 기억합니다공부방 책장에 질서 없이 꼽아진 책 중에 이 책을 골랐었지요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제목이 맘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고표지가 맘에 들어서였을 수도 있었겠죠그 시작이 무슨 연유였던 상관없이저는 곧바로 이 책에 매료되었습니다젊다고는 하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청년의 사랑과 슬픔비슷한 일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 나이였음에도 그의 슬픔에 같이 마음 아파하던 저를 기억합니다이후에도 생각이 나면 읽곤 했습니다고등학교 때대학생 때그리고 작년과 올해 역시청년의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언제나 이야기의 말미를 읽을 때에는 마음이 아리고 슬픔이 차올랐습니다그리고 책을 덮을 때면 쉬이 손을 떼지 못했죠.

 

  누구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작가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앞서 말했던 그리고 지금부터 말할 책은 괴테가 20대에 썼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그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이 작품을 괴테는 단 4주 만에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그 스스로의 경험담과 지인 카를 빌헬름 예루잘렘의 자살이 계기가 되었죠젊은 주인공의 자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말이었습니다오죽하면 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큰 유행이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하여 괴테의 책은 금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요하지만 단언컨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방조하기 위한 책은 아닙니다그저 빠져서는 안 될 사랑에 빠진 청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일 뿐입니다비록 그 결말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이었지만요.


 

  우리는 흔히 행복과 불행을 정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그리고 나아가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공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죠행복하면 불행하지 않고불행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하지만 정말 그런가요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요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순간은 없었을까요?

 

  행복을 느끼는 일과 불행을 느끼는 일이 서로 다르다면사실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불행한 일은 최대한 피하고행복한 일을 가능한 한 열심히 쫓으면 되기 때문이죠그런데 만약 어떤 일이 행복을 주면서 동시에 불행을 주기도 한다면 어떨까요불행하기에 피해야 할까요아니면 행복하기에 쫓아야 할까요멀리 떠나온 도시에서 젊은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이하 로테)를 처음 만납니다그녀에게 약혼자가 있음을 미리 들었음에도 첫눈에 그는 로테에게 반하지요그리고 그 순간은 베르테르에게는 행복의 시작과 불행의 예견이었고축복과 저주의 시작이었습니다. 1771년 6월 16친구에게 쓰는 편지에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는 그녀에 대한 말은 모두 역겨운 헛소리요그녀의 참모습을 조금도 표현해 내지 못하는 불쾌한 추상화에 불과하네.

 

  베르테르가 조심했다면 로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하지만 어찌 조심할 수 있었을까요그녀를 본 순간 이미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졌고시작된 사랑은 본디 감정의 주인조차 어찌할 수 없게 되는 법이지요물론 그렇다고 그 시작부터 베르테르가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고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로테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로테에게 불가항력으로 이끌리는 베르테르는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음악과문학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했지요베르테르에게는 로테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행복에 빠진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베르테르의 사랑은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돌아온 이후에도 말이지요더욱 괴로운 것은 알베르트가 몹시도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알베르트가 조금이라도 나쁜 사람이었다면 베르테르는 로테를 위해 어떤 행동도 했겠지만베르테르가 대화해본 알베르트는 지극히 로테를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남자였습니다.

 

아무튼 나는 알베르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네그의 침착한 매너는 감출 수 없는 내 불안한 성격과 너무나도 현격하게 대조를 이루었네그는 감정도 풍부했으며 로테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잘 알고 있었네그는 우울증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였어.

 

  알베르트와 로테는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입니다이는 베르테르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그러니 누군가는 베르테르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그만둬야 하는 게 맞아.”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미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습니다이성적으로는 그런 충고가 맞는 것이라 해도 베르테르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뿌드득 이를 갈며 처량한 내 신세를 비웃는다네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단념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겐 두세 배의 조롱으로 갚아주겠네내게서 이런 허수아비들을 없애 주게나.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테르의 감정은 격해집니다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비참한 신세에 점차 우울에 빠지죠원래 베르테르는 스스로 우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알베르트가 아직 도착하기 전로테와 함께 한 어느 모임에서 슈미트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죠이때의 베르테르는 우울증에 관해 아주 공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마치 우울증은 본인이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극복할 수 있고주변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때문에 악덕과도 같다는 듯이요.

 

우울증이란 태만과 비슷한 겁니다아니 태만의 일종이지요우리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그런 기질이 있어요하지만 우리가 단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를 다잡을 힘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젊은 친구는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으며 절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네.

 

  이토록 우울증에 대해 강하게 공격하는 베르테르는 우울과 전혀 상관없는 인간이었을까요그렇지 않습니다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면서도 알베르트를 미워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합니다그는 점점 우울해지지요그렇다고 베르테르가 우울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자신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상황을 바꿔보려 노력하지요그래서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인사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납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결코 평안할 수만은 없었지요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결국 사교계 모임에서 다시 상처받고 맙니다그리고 로테에게 돌아오지요이후에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11월 3일 편지에서 베르테르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도 자주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아니 가끔은 그렇게 기대하면서 잠자리에 눕는다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실 거라네그러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또다시 태양을 바라보면 나는 비참해진다네내가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모든 것을 날씨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제삼자에게 전가하거나 실패한 사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내 마음속 불만의 참을 수 없는 짐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텐데딱하구나모든 잘못의 책임이 내게 있음을 나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아닐세잘못은 아니지지난날 나의 모든 기쁨이 그랬듯이 나의 모든 슬픔의 근원 역시 내 안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네.

 

  극도로 우울에 빠진 모습이지요결국 슈미트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요우울증은 태만이라고 비난하던 그가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제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이 바로 사랑일까요로테를 사랑하여 그토록 행복했던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여 이토록 불행하게 변했습니다그리고 얼마 안 가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베르테르를 충격에 빠뜨리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여주인을 사랑한 머슴이 불화로 쫓겨나자 새로 고용된 하인을 죽인 사건입니다전에 베르테르는 이 머슴과 마주친 적이 있었고 여주인과 머슴의 사랑을 아름답게 생각했었습니다그러나 결과가 처참하게 이어짐을 보았고 베르테르는 광기에 휩싸인 머슴에게 말 못할 깊은 동정심을 느낍니다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비참한 선택을 한 머슴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겠지요베르테르는 머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변호하는 마음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이에 힘들어하던 베르테르는 슬슬 마지막을 결심하게 됩니다.

 

어제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나와 그 모든 것들로 인해 온 마음에 짓눌림을 느끼며 당신 곁에서 지내는 기쁨도 희망도 없는 생에 끔찍하도록 차갑게 직면했을 때나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털썩 무릎을 꿇었소하느님당신은 이 쓰라린 눈물로 제게 마지막 청량제를 주시는군요수천 가지의 가능성과 계획이 내 마음속에서 몸부림쳤소그러다 결국 한 가지가 남더군요굳고 완전하게 말이오마지막의 유일한 생각나는 죽고 싶다는 것이오나는 자리에 누웠어요아침이 되어 차분한 마음으로 깨어났을 때에도 그 생각은 여전히 너무나 확고했소. ‘나는 죽고 싶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확신이었소.

 

  이 편지는 베르테르가 죽고 나서야 로테에게 전해집니다그리고 로테의 손을 통해 건네진 권총을 시종에게서 받아 자신의 방에서 생을 마감합니다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일까요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다 보면 그의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그리고 더욱 크게 보면 로테에 대한 사랑으로 어둡게 변해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죠젊은 베르테르는 사랑을 했고사랑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사랑 때문에 환히 웃던 그가사랑 때문에 차가운 주검으로 변하고만 것이지요그의 사랑은 깨어지지 않을 만큼 강했으나젊은 베르테르는 이를 견디기에 너무나 연약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사랑을 해서 아프다면 그 사랑을 계속해야 할까요우리는 행복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바라곤 합니다서로가 좋은 연인이 서로 사랑하여 결실을 맺는 사랑을요베르테르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그렇지만 이상적인 사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베르테르의 사랑을 격하할 수는 없습니다사랑에 정답은 없기에 말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에 마음이 아픕니다그의 진실 된 사랑이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초장에 말했듯 간혹 베르테르의 죽음을 두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불륜 혹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옹호하는 이야기라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습니다물론 아주 잘못된 의견이지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라는 청년의 감정과 생각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한 텍스트입니다그의 생각과 기쁨 그리고 아픔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선택 역시 마음 아프지만 이해하게 되지요비록 아주 비극적인 선택이었지만요슬픔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과 그러한 행동을 권장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몇 번이고 읽는다고 하여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아마 평생 가도 답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고제게 그러한 순간이 올 수도 있음에 조심한다고 하여도 속수무책일 수도 있죠한때는 비극적이고 슬픈 사랑을 해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아플 것 같아 힘들 것 같습니다.


  비유해보면 제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진한 핫초코 한 잔과도 같습니다슬픔이 녹아든 이 핫초코는 너무도 진하여 혀가 마비될 정도로 슬픈 맛이 느껴집니다삼킨 뒤에도 진득한 슬픔이 입안에 얼얼하게 남아있습니다그러니 물론 매일 마시지는 못하겠습니다하지만 가끔 슬픔이 너무나 절실할 때에는 괜찮지 않을까요언젠가 생각이 나면 언제고 다시 집어 들 한 잔이자 한 권의 책입니다이런 책 한 권쯤은 비상용으로 항상 마음 한편에 꼽아두려 합니다슬픔이 필요할 때 언제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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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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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살 난 소라와 웃고 있는 마스크


  일전에 산속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적이 있었습니다한 3개월 만에 집으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탔었죠버스를 오랜만에 탔긴 했지만 그간 자주 타왔던 버스였습니다그런데 차창 밖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저는 경탄을 담은 눈빛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매끈한 도로늘어진 건물들그리고 공사 중인 건물들그 모든 익숙한 풍경들이 어찌나 신기하게만 보이던지요인간이 이 모든 것을 이루었고내가 그 인간이라는 족속에 속해있다니당시 제게는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세상만사가 신비하게만 보였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합니다지나가는 자동차지하철가로등 등이들이 당연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당분간 없어질 거라 생각지 않지요간혹 세상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내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을 쓰고 노트북을 꺼내듭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혹은 인터넷이 불가능하던 시절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그런데 만약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기던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된 소년들의 무인도 생존기를 다루고 있습니다무인도 표류이야기라고 하면 사실 여러 작품들이 떠오릅니다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책 말미에도 언급되는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 등이 있죠골딩의 파리대왕은 이전 작품들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파리대왕은 1954년 출판되었고이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습니다그리고 이 시기를 고려하면 골딩의 파리대왕이 유독 다른 색채를 띠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는 이성의 결정체로 대표되는 문명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인간이 이룬 것들로 문명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잿더미가 된 문명을 목도했기 때문이지요그렇기에 인간 그리고 문명의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에 제동이 걸린 것은 당연하겠죠이런 시각이 파리대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살아남은 소년들은 처음에 각자 역할을 정해 화합을 이루려 하죠.물론 뜻대로 쉽게 일이 흘러가진 않습니다봉화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랠프와 멧돼지 사냥을 중시하는 잭잭이 사냥을 나가면서 맡았던 봉화가 꺼진 사이 배가 지나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갈라서게 됩니다텍스트를 보다 보면 랠프와 잭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앞서 말한 것처럼 봉화를 중시하고 규율을 지키며 소라를 불어 회합을 여는 랠프 일행은 이 무인도에서 문명을 회복하려 하는 반면사냥을 좋아하고 춤을 추며 얼굴에 칠을 하는 잭 일행은 중반 이후 오랑캐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만 그 자체가 되어가죠.


  분명 랠프 일행이 옳아 보이고 잭 일행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점차 많은 인원이 잭에게 가면서 랠프네는 그 중시하던 봉화를 피우는 일조차 버거워지고오랑캐(잭 일행)들은 멧돼지를 사냥하고 고기를 먹으며 파티를 벌이죠소년들은 점차 야만 쪽으로 기웁니다처음에는 잭이 무서워서 따랐고이후에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이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입니다심지어 문명을 대표한다는 랠프조차 자신 내면의 폭력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못합니다오히려 즐기는 순간도 있죠.

 

갈색의 연약한 살점을 한 줌 손에 쥐고 싶었다상대를 눌러 해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였다.” (랠프)

 

  점점 봉화를 통한 탈출은 비현실처럼 느껴지기에 눈앞에 쾌락을 주는 사냥은 힘을 얻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 이윽고 잭 일행이 돼지의 안경을 훔쳐 간 행위에 대해 항의를 하러 간 랠프 일행은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잭 일행이 떠민 돌덩이에 돼지가 치여 즉사하고 동시에 문명의 상징이자 랠프가 가진 권력의 기반이었던 소라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폭력과 야만의 승리이는 텍스트를 읽다 보면 그리 놀라운 결과는 아닙니다성가대원이었지만 랠프와 함께했던 사이먼은 소년들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야만적인 폭력성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바로 텍스트의 제목인 파리대왕을 만나게 되면서요.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파리대왕)

 

  실상 파리대왕은 작품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지요파리대왕은 잭 일행이 사냥을 하고 산 정상에 있던 괴물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단지 꼬챙이에 꽂힌 암퇘지 머리에 불과합니다이를 먹기 위해 수많은 파리가 들러붙었고 이를 파리대왕이라 사이먼은 생각합니다그리고 환상 속에서 파리대왕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작품의 결말은 좀 더 남았지만 돼지가 죽은 랠프 일행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야만에 문명이 굴복하고만 것이지요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우리가 누려온 문명이 허망할 정도로 깨지기 쉽다는 사실은 읽는 이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그간 비슷한 소재의 작품들이 이성을 활용한 문명의 승리를 점쳤던 낙관주의였다면골딩의 파리대왕은 세계대전을 경험으로 이 낙관주의에 의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소년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의 저항과 실패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엄청난 흡입력을 보여주는 파리대왕은 분명 충격적인 텍스트입니다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기도 하고문명에 대한 불안한 시선을 던지기도 하죠하지만혹시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잘못한 것은 잭이 아니라 랠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잭은 바뀐 환경에 적절하게 반응하여 현실적으로 적응하였고되려 랠프가 이미 지나간 문명에 대한 미련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멸을 초래했던 것은 아닐까요그 어느 쪽이 되었든 파리대왕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여전히 끊이지 않는 전쟁과 끝을 모르는 문명의 진보지금도 어디선가 파리대왕은 우리를 보고 웃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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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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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에 손을 뻗는 남자

 ‘개츠비라는 이름을 들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있다그중 첫 번째는 개츠비의 미소다.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그런 미소였다."

 

  대체 누가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그리고 그 누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이런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눈을 뗄 수 있겠는가개츠비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그렇기에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개츠비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그의 돈사랑능력그 어느 것 하나 중요치 않다며 간과하고 넘어가기 어렵다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해 보이는 사랑은 낭만이라는 단어를 쉬이 떠올리게 만들 만큼 맹목적이고화려한 집과 그곳에서 열리는 현란한 파티는 이 젊은 남자에 대한 괴소문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유례없는 경제 호황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던 시대지나친 음주에 대한 우려로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대였지만 모두들 언제나 술에 취해 있던 시대절제는 보기 힘들고 가진 모든 것을 표출하기에도 모자란 그런 시대였다그리고 외부적으로 개츠비는 이에 가장 잘 어울려 보이는 인물이다어마어마한 돈을 매주 쏟아부어 향락의 결정체인 파티를 열고 초대하지도 않은 방문객에게 고가의 선물을 보내는 개츠비에 대해 좋은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그의 미스터리함은 시대의 이미지에 맞게 갖가지 의혹만을 증폭시킨다재미있는 점은 정작 개츠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취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모든 향락을 베풀면서도 자신은 절제하고 정도를 넘어 즐기지 않는다.

 

  개츠비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톰 뷰캐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이른바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톰은 요즘 말로 금수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톰은 금지된 것 없이 사치를 부리고 그를 숨기지 않는다톰의 위협적일 정도의 강인한 육체와 데이지가 톰을 놀려대던 괴물이라는 표현은 그를 잘 나타내는 이미지다그런 톰이기에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다어느 날 갑자기 닉을 데려다가 자신의 정부를 보여주기로 하고평생 두 번 만취했던 닉의 마지막 만취가 그날 저녁이 된다이 날의 조촐한 파티는 앞선 개츠비의 파티처럼 거대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그보다 더 은밀하고 퇴폐적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가지고 있는 재산의 배경태생성격 등 톰과 개츠비는 많은 것이 다르다그나마 비슷한 것이라고는 둘 다 돈이 많다는 사실뿐이겠다.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생긴다닉은 왜 개츠비를 그리 높게 평가했을까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그 제목왜 개츠비 앞에는 위대한(The Great)’가 붙었을까?

 

  여기서 개츠비 하면 떠오르는 두 번째 이미지를 언급하고 싶다.

 

나는 그를 부르려고 했다저녁식사 때 미스 베이커가 그의 얘기를 꺼낸 바 있었고그 얘기만으로도 운을 떼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그러나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그에게서 혼자 있고 싶다는 어떤 암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그는 두 팔을 어두운 바다를 향해 뻗었는데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분명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할 수 없이 나도 바다를 바라보았다부두의 맨 끝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초록 불빛을 제외하곤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바다에서 저 멀리 보이는 초록 불빛에 아련히 손을 뻗는 개츠비의 모습그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목표였다단계로서 그 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 도착지인 목표였다그리고 돈은 데이지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었고과거 자신의 가난함으로 성취하지 못했던 데이지에게 찾아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다필요하다면 데이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던 개츠비였다개츠비가 울프심과 같이 다니고 밀주를 팔며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온 인물임을 생각하면 그가 데이지에게 갖는 순수한 열정은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

 

  희망을 정하고그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개츠비가진 것 없는 무일푼에서 기어코 희망의 앞에까지 다다랐던 개츠비그의 위대함은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희망을 현실로 이루는 순수한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렬한 열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초록 불빛을 향해 뻗은 그의 손끝과 데이지를 파악하고 나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마음은 아름답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희망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1925년 출판 이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사랑을 받고 있다최근에는 지난 2013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기회가 된다면 책과 같이 보면 더욱 좋다여러 번 읽었지만 매번 좋았던 개츠비다앞으로 또 어느 순간에 다시 집어 들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에도 여전히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뻗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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