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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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어느덧 푸르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귓가를 간질이는 계절이 되면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하루하루 그 과정을 준비하던 나무는 조금도 쉼이 없었건만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싱싱한 잎과 갑작스레 발아래 바스러지는 나뭇잎 조각이네요시간이 얼마나 빠른지어찌나 조용하게 모든 것들이 우리네 삶을 스쳐 지나가는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어떤 것은 눈에 띄어 내게 의미를 남기고 사라지고어떤 것은 얕게 부는 바람처럼 뒤돌면 이미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그래요때로는 내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나를 지나치는 것 같기도 해요나는 선 채로 가만히 있고삶은 내 뒤로 흘러 흘러 흘러가는현재에서 거리를 두고 나의 삶을 조망하듯 바라보면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사랑도기쁨도사건도절망도 모두 선이 되지 못한 점처럼 인생의 도화지에 작은 흔적을 남길 뿐이지요.

 

 

  • 오선지에 아로새겨지는 감정의 변주

 

  그 작은 점들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요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한때는 기쁨이었던 것이 이내 슬픔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곧게 뻗어가는 오선지처럼 삶은 계속해서 지나가고순간의 감정들은 작은 음표가 되어 아름다운 하모니로때로는 불협화음으로 변주를 이룹니다삶이라는 각자의 교향곡은 그렇게 흐르다 생의 끝에서 완성됩니다그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삶의 한 마디아름답고도 슬프게 흐르던 멜로디그해 39살이었던 폴의 삶에 브람스가 흐릅니다여러분은 어떠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고작 질문 하나에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브람스를 좋아하거나좋아하지 않거나 간단한 질문 아닌가그렇습니다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질문입니다피자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같은 질문과 다를 게 없이 들릴 수도 있지요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때로 그렇습니다짧은 그 한 마디 안에 감정이 요동치기도 합니다남자친구가 있는 39살의 폴, 25살의 젊은 시몽의 질문에 그녀의 감정이 변주를 시작합니다.

 

 

  • 요트의 작은 떨림라디오를 켜는 손등에 비친 정맥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제 인상에 깊이 박힌 것은 폴을 비롯한 주인공들의 선택이나소재의 참신함줄거리의 흥미로움이 아니었습니다소재는 이미 흔한 사랑 이야기이고줄거리는 그리 특별하지도 예상하기 어렵지도 않았으니까요다만 그럼에도 이 짧은 작품이 저로 하여금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책에 한 번 더 손길을 가게 했던 건 시시각각 변하며 미묘하게 이어지는 감정선이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에서 맥박이 파닥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그 눈물을 너무도 친절한 이 청년을 위해 흘려야 할지아니면 조금쯤 슬픈 그녀 자신의 삶을 위해 흘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그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키스했다.

 

  어쩌면 아무 상관 없을 순간순간의 행동과 말들그리고 그 순간에 흐르는 감정의 변화작은 부분에서조차 이 책은 풍부한 감정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한순간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아주 일상적이고 작은 변화로 그 모든 행복이 무너지기도 하지요.

 

당시 이미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그들은 마르크의 요트에 타고 있었다요트의 돛이 불안한 마음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그러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뱃전에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물에 손가락을 담그려 했던 것이다작은 요트가 기울어졌다마르크가 그녀에게 특유의 무사태평한 눈길을 보냈다그러자 즉각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행복감이 물러가고 조롱기가 차올랐다.

 

  폴이 유달리 예민한 걸까요그렇지 않아요우리 역시 폴과 마찬가지죠다만 우리가 시시각각 변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지금 당장 이 순간 각자의 감정을 묘사해본다면 어떨까요기쁨인가요슬픔인가요아니면 다른 어떤 것혹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나요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면그것은 그 감정이 표현하기에 가장 가깝고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순간의 그보다 작은 감정들도 우리는 분명 느끼지만그 크기가 미세하여 혹은 표현할 길이 없어 지나칠 뿐이지요지난 상황을 되돌아보아요기쁨을 느낀 순간정말 오직 순수하게 기쁨만이 느껴졌었나요그와 동시에 혹은 그 전후로 다른 감정이 섞여들어 있지는 않았나요어머니의 밝게 웃으시는 모습에서 기쁨과 짙게 패인 주름에서는 슬픔이오래된 살림 도구에서는 더 잘해드리지 못하는 죄책감이그 모든 감정이 명명할 길 없이 섞여 한 마디를 이루지는 않았던가요걔 중에 가장 컸던 감정이 기쁨이어서엄마 얼굴 봐서 좋다는 말로 나타나지 않았나요?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제의 차에 탄 폴은 방심한 태도로 라디오를 켰다그녀는 계기판의 창백한 빛에 비친 자신의 길고 잘 손질된 손가락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정맥이 드러나 손가락 쪽으로 돌진하며 이리저리 뒤얽혀 있었다. ‘내 삶을 반영하는 것 같군.’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에 드러난 정맥처럼 삶은 이리저리 뒤얽혀 있고우리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로 뒤엉켜 있습니다하나로 명확할 수가 없는 우리 감정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주어진 상황에서 모두 기쁨을 느낀다고 하여도 세세한 구성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그래서 그런가 봅니다삶이인간이이토록 복잡하고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녀는 불안했다그들이 저녁 6시에 만나는 게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을까다른 한편매일 저녁 그가 작은 자동차에 탄 채 문 앞에서 조바심을 내며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프랑수아즈 사강문제적 삶을 살면서도 그녀의 죽자 프랑스 전체가 그토록 애도했던 것은 세밀한 감정 묘사가 독보적이었던 사강 작품의 매력 때문이겠지요여러분은 어떠실까요브람스를 좋아하실까요그 짧은 질문에 어떤 감정의 변주를 이루실까요그렇게 만들어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인생을어떤 곡을 만들어낼까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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