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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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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행복한 호밀밭의 파수꾼

  언제든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그곳이 어디든 영원히 그 자리 그대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경계를 넘어간다는 건 언제고 쉬운 일이 아니다새 학기가 도래하면 맞게 되는 두려움군 입대첫 직장 등긴장감으로 속이 뒤집어질 거 같은 그 순간들시계바늘이 흐른 뒤 돌아보면 왜 그리도 무서웠을까 궁금해지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그런 때에는 이런 생각이 난다. “왜 모든 것은 변하는 걸까?” 그 자리 혹은 순간 그대로 변하지 않고 영원할 수는 없을까지난날을 붙잡고 변하지 않기를 소망하여도 소용없다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결국 변한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이런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그렇지만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정확하게 그건 아니다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그렇다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그러니 호밀밭의 파수꾼을 그저 아이와 어른의 기로에 선 사춘기 소년 콜필드의 방황정도로만 읽기엔 너무 아쉽다청소년일 때만 방황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청소년보다 어린 시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한다어떤 진로를 선택해야하는가무엇을 선택하고무엇을 포기해야하는가정답이 보이는 것은 드물고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그리고 사안에 따라 결과의 책임이 무거울수록 선택은 어려워진다.

 

  그러니 선택할 시간이 필요하다최소한 선택의 기로에 잠시 서서 이쪽저쪽을 볼 수 있는 곳까지 멀리 내다볼 시간이그리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혹은 발자국이 많든 적든 마음을 정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서툰 콜필드를 너무 나무라고 싶진 않다그는 조금 더 신중하고 여려서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거라고 말했어내가 대학을 가고 난 후에는 말이야내 말 똑똑히 들어봐그땐 모든 게 달라질 거야우린 여행 가방을 들고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겠지알고 지내던 사람들한테 전화로 작별 인사를 하고호텔에 들어가면 그림 엽서를 보내야 할 거야난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택시나 매디슨 가의 버스를 타고 출근하겠지신물을 읽거나온종일 브리지나 하겠지그게 아니면극장에 가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단편 영화나예고편영화 뉴스 같은 걸 보게 될 거야영화 뉴스라그게 또 대단한 거지언제나 경마를 보여주거나어떤 귀부인이 배 위에서 병을 깨뜨리는 모습이라든가침팬지가 팬티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 같은 것만 보여주니 말이야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넌 하나도 모르고 있어.”

 

  조금은 특이한 자신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니 콜필드는 우울하다어디를 가도 거절당하고무시당하고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모두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본다정말 좋아하는 동생 피비에게만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니눈앞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혹은 우리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지어주길 바랄까내리는 빗속에서 옷이 흠뻑 젖으면서도 회전목마를 타는 피비의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콜필드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그 후 짧은 근황을 전하지만 그때도 무언가 확실히 정해진 순간은 아니다그렇게 언제나 콜필드는 방황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기로가 존재할까언제나 정답을 고르긴 쉽지 않다때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괴로운 순간들이 올 것이다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부디 잘 이겨내길 바란다시간이 필요하다면 가능한 시간을 많이 쓰기를 바란다그리고 빗속에서 옷이 흠뻑 젖더라도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불현 듯 난 행복함을 느꼈으므로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정말이다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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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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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상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오랜만에 들어가는 홈페이지에 아이디 혹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이것저것 시험해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들어맞지 않는다어쩔 수 없이 아이디/비밀번호 찾기를 누른다이제부터 시작이다분명히 나인데 나를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다방법은 다양하다이메일로 찾기지정해놓은 질문으로 찾기혹은 자신의 명의로 등록되어 있는 핸드폰으로 인증하기방식과 절차에 따라 불필요하게 보이는 시간이 소모된다분명 나인데 왜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하는가툴툴대며 다시는 까먹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다시 같은 전철을 밟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휴대폰에 도착한 인증번호를 입력하였다면 정말 나인가분명 명의는 내 것이지만 휴대폰을 도난당했다면혹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입력해주었다면그렇다면 이는 나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나의 휴대폰을 확인한 것이다절친한 친구가 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나아가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얼굴도 비슷하고 나이도 같다그렇다고 해서 역시 둘이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에서 시작하여 로 끝나는 이야기다그리고 화자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텍스트는 어린 싱클레어가 자라면서 전쟁에 나가기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세밀히 보여준다싱클레어의 두려움방황그리고 깨달음독자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정반대의 두 세계 사이의 존재에 혼란을 겪는 어린 싱클레어의 모습은 우리들 어린 시절의 모습과 어찌나 닮아있는지어느새 독자는 주인공의 삶에 몰입하여 같이 가슴 아파하고 고민하며 환희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그리고 그 과정에 기묘한 친구 데미안이 있다.

 

  데미안은 미스터리 한 인물이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가끔 그가 보이는 모습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당시 이미 의식 저 멀리서부터 아주 독특한 무언가를 느꼈다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그가 소년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아니그 이상을 보았는데어른의 얼굴도 아닌 전혀 다른 무엇을 보았다고아니면 알아챘다고 믿었다여자 얼굴의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는 듯했는데한순간 이 얼굴에는 남자나 어린이도 아니고늙거나 젊지도 않고천 살쯤 된어딘지 시간을 뛰어넘은우리가 사는 시간 단위와 다른 단위가 찍힌 듯 보였다.”


  이런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파격적인 생각들을 심어준다. ‘카인의 표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아프락사스라는 신 이야기어린 시절 우리 곁에 데미안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나서서 이상한 아이랑 놀지 말라고 했을 것 같은 그런 존재다그런데 분명히 이상한 데미안이라는 존재로 인해 싱클레어는 성장한다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방황의 길에서 싱클레어를 인도한다그리고 매 순간 싱클레어에게 (자아)’를 찾고 따라가기를 은연중에 종용한다.

 

  다시 한 번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나는 누구인가그리고 묻는다나는 지금 나(자아)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이 질문에 확신에 차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우리는 우리 모두가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듣고 산다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진짜 그럴까?’라는 회의감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가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어느새 나이를 먹어 취업을 걱정하는 그런 삶의 흐름바쁘게 살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그렇게도 다르게 보였던 삶들이 다 비슷하게만 보인다똑같이 꽉 찬 지하철에 끼어 출근하고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여 집에 도착한다잠시 쉬고 나면 누워야 할 시간이다간혹 있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혹은 짧은 여행 등그렇게 삶은 반복하며 나아간다.

 

  SNS와 TV에는 화려한 인생들이 넘치는 것만 같은데 왜 나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독특하고 개성 넘치던 나는 어디로 가고 비슷한 우리만이 남았는가이런 상황에서 정말 고유한 나(자아)는 존재하는 것일까?

 

  분명 크게 보면 삶은 모두 비슷하다그래서 고유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하지만 특별해야만 혹은 남들과 달라야만 가 되는 것은 아니다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꽉 찬 지하철에서 어떤 노래를 듣는가무엇을 생각하는가지금 무엇을 좋아하고앞으로 무엇을 바라는가이런 작은 차이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걷다 보면 어느새 진정 (자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정답 없이 던져진 질문이다삶과의 작별을 고하게 될 때 대답할 수 있을까역시 확실치 않다정작 중요한 것은 답을 찾아 끝없이 고민하는 것이다계속 질문하고 생각하여 (자아)’에 가까워지는 것이것이 불확실한 정답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나에게로 계속 나아가자잠시 흔들릴지언정 포기하지는 말자나는 정답을 찾고 있다그리고 그 정답을 찾기 위한 삶의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데미안이 내게 속삭이고 있으므로.

 

우리 각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일자신 안에서 작동하는 자연의 소질에 완전히 어울리게 되어 자연의 의지에 맞게 사는 일불확실한 미래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일만이 우리의 의무이며 운명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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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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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힌 것과 잊히지 않는 것

  지난날의 일기장을 다시 들추어보거나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추억을 되새기다 보면 잊히지 않는 기억들과 까마득히 잊힌 기억들을 마주하게 된다전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그 장면 하나하나가 선연히 떠오르는 반면후자는 마치 거짓말처럼 기억의 끄나풀조차 잡히지 않기도 한다내가 그런 행동을 했었나그때는 내가 그랬었지현재라는 벤치에 앉아 과거라는 길을 되새기며 삶의 여정을 다시 떠올린다당장에 봤던 책의 내용도 떠올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도대체 우리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는 이러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한 번 떠올려본다내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어린 시절 부모님께 혼이 나고 속상한 마음에 나는 부모님 가게를 나와 언덕길을 올랐다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교회가 나왔다교회 입구에 앉아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울었을까내 딴에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만큼의 이른바 가출이었다그러나 저녁 날이 쌀쌀하여 결국 옷소매로 눈물자욱을 훔치며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간혹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박장대소를 하면서도 내 어린 시절의 슬픈 그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신다정말 그랬냐며 물으시고 무엇 때문에 그리 울었는지 물어보신다처음엔 나 역시 놀랐다당연히 그날은 내게는 너무도 선명한 기억이라 부모님도 으레 기억하고 계실 줄 알았다.

 

  작게 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기억을 다루는 역사가이다그런데 책에서 에이드리언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으로 동일한 역사(기억)에 대해 역사가(개인) 간의 오차가 발생한다분명히 같은 기억임에도 우리는 조금씩 다르게 기억한다그렇게 서로의 기억을 비교 대조하여 따져보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얼마나 부정확한가주인공 토니처럼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아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도 한다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이다그리고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역사가(개인)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과거를 기억하고 재단한다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가 기억하는 것 중에 무엇을 선택하고 바꾸었을까내가 기억하기로 마음먹고 기억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무엇일까?

 

  • 책임의 사슬 어디에 나는 매여 있는가?

  토니는 자신이 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그나마 기억하는 것들도 자기보호본능의 일종으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한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힌 사건들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그렇지 않다끝에 토니가 깨닫듯 우리는 모두 책임의 사슬 그 어딘가에 발이 묶여 있다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들제아무리 책임의 사슬이 길다고 하여도 우리는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항상 재고해야 한다.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 혼란과 책임의 문제에 대해.


 

거기엔 축적이 있다책임이 있다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혼란이 있다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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