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고종황제 - 조선의 마지막 승부사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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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고종 자신에 대한 것들보다는 흥선대원군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것들뿐이다. 고종도 왕으로서의 분명한 역할과 사명이 있었을 진데 우리는 언제나 명성황후에 눈물 흘리며 흥선대원군에 답답한 만을 토로하는가? 하지만 언제나 고종은 나약하고 줏대 없이 갈팡질팡하는 군주로 기억되어 있다. 과연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럼 질문을 바꾸어 고종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든 것들이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머릿속에 품고서 책을 읽어 나가도 보니 세 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첫째, 고종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조대비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도움으로 갑자기 왕좌에 앉았다. 왕이 된 후에도 거의 모든 정치를 아버지가 관리하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는 한나라의 왕으로서 분명한 통치철학, 그리고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섭정아래에서 그리고 왕비인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실수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그는 정치를 배워갔다. 태평시대였다면 충분한 시간과 여력이 있었겠지만 난국의 시대에 그런 것은 사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종의 무능력을 탓하기보다는 그런 시대에 준비되지 않은 왕이 된 그의 불운을 탓해야 되지 않을까?

 

둘째, 인조반정이후에 권력의 중심에는 노론이 있었다. 명에 대한 사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바꿀 수 없는 진리였다.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물러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명과 오랑캐인 후금사이에서 후금을 선택한 그의 정책 때문이니 그들에게 조선의 왕보다는 명의 황제가 우선이었다. 그들의 맹신은 그들 뿐 만아니라 조선의 눈을 가려 조선을 맹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유교만을 숭상해 서학을 오랑캐의 학문이라 하여 반대했으며 일찌감치 망한 명에 대한 충성으로 주위정세에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가리고 정치를 하고 이들을 등에 업고서 어떤 왕이라도 제대로 된 정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분열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중요한 매 순간마다 갈등을 일으킨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갈등이라는 것은 분명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 내야하는 순간에는 최선의 합일점을 찾아서 문제해결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고종시대의 양반과 정치인들은 그들의 논리에 매몰되어서 다른 누구의 주장도 의견도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vs 명성황후, 개화파 vs 위정척사파, 급진개화파 vs 온건개화파 등의 갈등은 단결을 필요로 할 시점에 분열과 위기만을 조장했다.

 

위의 세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려고 노력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영선사, 수신사, 신사유람단, 보빙사 파견. 국력의 보강을 위해 신식군대 양성(물론 임오군란이라는 결과를 야기했지만 군대의 개혁을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한 제국선포를 통해 왕이 아닌 스스로를 황제로 칭함으로서 조선이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또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특사를 파견하고 이에 분노한 일본에 의해 퇴위를 강요받고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게 된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고종황제에게 망국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흥선대원군 

서원철폐, 비변사폐지, 삼정이 개혁, 서원철폐, 경복궁중건

 

병인사옥(천주교박해)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고종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최초의 불평등조약)

 

세계와 소통노력 : 수신사(일본)- 김홍집 조선책략 입수

통리기무아문(외교와 국방전문기구)

신사유람단(일본)

영선사()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일본견제하기 위한 미국과의 불평등조약) 보빙사

 

임오군란 : 신식군대 vs 구식군대 흥선대원군 재등장, 청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 을 톈진으로 납치. 일본은 손해배상을 이유로 조선과 제물포조약 체결

 

갑신정변 : 김옥균을 포함한 급진개화파의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한 거사

한성조약(조선과 일본), 톈진조약(청과 일본)-

 

거문도사건 :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이 충돌할 때 조선의 보호를 조건으로 러시아와

영흥만 조차에 합의.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 이에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 러시아의 남하 경계. 러시아의 영흥만 포기.

 

 

동학농민운동 :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청에 도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 출병

  일전쟁 : 청나라의 조선 종주권 파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권 인정. 랴오둥 반도, 타이완 차지-삼국간섭(프랑스, 러시아, 독일)으로 랴오둥 청에 반환.

 

갑오개혁(갑오경장) : 청일전쟁이후 일본에 의한 3차에 걸친 개혁. 군국기무처 발족.

 

을미사변 :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는 명성황후를 시해.

 

을미개혁(3차 갑오개혁) : 군제개혁, 단발령 등 을미의병(단발령과 국모시해반발)

 

 

아관파천 : 고종이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거주

 

대한제국 ; 칭제건원(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사용), 광무개혁

 

러일전쟁: 일본의 승리 한일 의정서(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보증하 며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존에 위험이 있을 때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반면 대한제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편의를 제공한다.)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의 조선지배 국제적으로 인정받음. 미국은 필리핀(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은 인도 지배를 인정받음.

 

을사조약 : 외교권 박탈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 순종 왕으로 등극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 군대해산, 경찰권, 사법권 위임

 

안중근 의사 : 이토 히로부미 저격

 

한일합방(경술국치) : 국권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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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 - 모든 위대한 사상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위대한 질문 시리즈
사이먼 블랙번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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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기계 속의 유령인가?

사물과 신체의 물리적 체계에서 어떻게 의식적 경험이 생겨날까? -신체 체계는 거대한 기계다. 이 기계는 정보를 유령에게 전하고 유령에게 지시를 받아 신체를 반응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기계속의 유령). p. 16” 감각을 받아들이는 신체와 그것은 인식하는 정신이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신, 즉 의식의 작용은 신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의식의 표정은 신체의 손, , 얼굴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의식=초현실적 존재보다는 의식=신체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2.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분명 내부적인 성질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 존재여부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외부에서 자극을 받고 거기에 대한 반응은 독자적인 인간의 본성을 거쳐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충분히 인간의 본성은 주체자의 말, 행동 등을 통해 이해가능하다. 그 본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육과 경험으로 체득하고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절대적인 옳고 그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와 환경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판단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

 

4.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플라톤에 의하면 뭔가를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는가, 참인가, 참이라는 생각이 정당한가를 물어야 한다. p .66” 자동차 바퀴가 세 개 인 것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많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참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눈을 통해 직접 자동차 바퀴가 세 개인 것을 인공위성의 사진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즉 경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참이라는 정당성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경험들은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삭제되거나 수정되어 새로운 정보로 갱신된다.

 

5. 인간은 합리적 동물인가?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는 것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성을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 두 가지로 분류한다. 이론적 이성은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세우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사태를 인식하고 인지하는 기능을 한다. 반면 실천적 이성은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즉 우리의 행동을 사태의 인식에 비추어 그리고 우리의 관심이나 욕망에 비추어 조정하는 것이다. p.79” 이론적 추론(이성)은 다시 선험적 추론과 후험적 추론으로 분류된다. 선험적 추론이란 굳이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예로, 나는 지금 임신 중이라는 말을 통해 굳이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은이는 선험적 추론이 절대적이어서 매력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변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거에 타당한 선험적 추론이라고 여겨졌던 견해가 의심스러워지면 지적인 대격변이 일어난다...... 그 결과 우리가 선험적이라고 부르는 진술과 추론은 절대적으로 옳은 게 아니라 우리가 쓸데없이 포기하지 않으려 버티는 것으로 전락한다. p 83-84” 후험적 추론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선험적 추론보다 더 확신성과 신뢰성이 떨어진다.

실천적 이성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권위 있는 기준, 우리가 따라야 하는 명확한 행동 방침(p.87)”을 말한다. 그렇다면 실천적 이성 또한 절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의 기준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동 판단기준이 현대의 행동 판단기준에 적합할 리가 없다. 그럼 여기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인간은 합리적(이성적)동물인가? 결국 우리가 이성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절대적인 확신성과 신뢰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의견을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6. 어떻게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앞의 질문처럼 인간이 이성적이라면 어떻게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성립될 수 없다. 거짓말이라는 말뜻 자체가 없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있거나 사실인 척한다는 의미인데 합리적인 인간인 우리가 왜 스스로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즐거움과 거부감은 믿을지 말지를 선택하는 데 자극이 되지만 이성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의 개연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믿으려 할 뿐이다. p.101” “자기 자신의 결점과 결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무리 약한 자부심이라도 해도 그것을 버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p.102-103” 인간은 이성적 보다는 감성적인 동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7.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이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 곡선을 따라 정확히 수치로 표시가능하고 예측가능한 곳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인간은 그 시장 속에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자기에게 최고의 이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작가는 반박한다. 시장이 자체 힘으로 무난하게 최선의 결과 향하는 능률적이고 법칙에 따라 굴러가는 기계가 아니라는 쓰라린 사실이 경험으로 입증되고 있다. 시장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지진, 수도관 속의 급류처럼 혼란스럽고 항상 예측불가능하다. 시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감정과 신념이 매우 다양하며, 남들의 영향에 극히 민감하다.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이미지는 어디에서든 참담하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p.123”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예측가능하지도 않다. 감정적인 욕구에 따라 서로 협력할 수도, 경쟁할 수도, 그리고 연합할 수도 있다. 결국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고 개인의 도덕심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킬 사회(국가)가 필요하다.

 

8.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언어는 사회의 약속이다. 같은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언어체계를 사용한다. 그 말은 언어가 품고 있는 그 의미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특별한 사항이 아니라면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고의 폭과 너비 그리고 경험에는 개인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언어라도 개인이 품는 내면적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언어의 기호적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를테면 수학에서 수식을 풀 때 풀이 과정은 개인차가 나지만 도달한 답이 서로 같다면 답이 같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우리는 서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

 

9. 기계도 사유할 수 있는가?

컴퓨터는 01의 수의 배열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정확히 수치화할 수 있다. 사유라는 의미에는 추상화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는 사고도 있다는 말이다. 숫자의 조합인 컴퓨터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유는 주체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지금의 컴퓨터는 누군가에 의해 정보가 입력되고 정보를 요청할 때에만 계산을 통해 요구하는 답을 주는 식이다. 게다가 인간 사회 안에 포함된 문화적 언어적 요소들이 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주어진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해 결론을 도출하는 컴퓨터는 존재할 수 있어도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것과 같은 로봇의 등장은 어렵다.

 

10.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인간은 공감, 동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서 일생을 살아간다면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줄 이유도 받을 이유도 없기 때문에 도덕이라는 단어자체가 필요 없다. ‘선하다, 악하다라는 말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간의 교류와 소통을 필요로 한다. 태초부터 인류가 사회라는 무리 안에서 형성한 DNA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새겨져 있다. 무리에서 형성된 이런 도덕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행동하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거나 추방당한다. 인간이 선한 것은 결국 인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생존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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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3인류 1~4 세트 - 전4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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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자연은 언제나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줄어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다. 다른 동물보다 육체적으로 기술적으로 이점이 있는 종들이 항상 우위를 점하며 긴 세월을 살아남는다. 초등학교 자연생활에서 배운 것처럼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다. 그런데 왜 피라미드일까? 굳이 약육강식을 나타내고 싶다면 층층을 나타내는 구조로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그럼에도 피라미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비록 강자와 약자가 구분되는 자연이지만 그 매커니즘 안에는 그들만의 조절과 조정 그리고 조화가 있다는 것이다. 1차 소비자인 초식동물은 수풀을 파괴할 정도로 많이 종을 늘리지 않고 항상 일정 수를 유지하며 3차 소비자인 육식동물은 자신의 배를 채운 이후에는 더 욕심을 내지 않고 만족한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법칙을 유지해 간다. 하지만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그 어떤 종보다 우수하다는 자만심과 만족을 모르는 욕심으로 더불어 사는 지구라는 생명체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베르베르의 최근 소설 3인류는 지금 시점에서 인류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책에서는 인류의 성장방향을 인류의 진화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 같다.) 인류의 변화방향을 총 7개로 설정하고 이 중 인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1. 현재의 자본주의체제 유지. 2. 종교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 3. 자아를 의식하는 로봇 4.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5. DNA조작으로 인한 젊음과 생명의 연장. 6. 여성화 7. 소형화 이다.

 

  1번째와 2번째는 폭력과 파괴를 대표한다. 자본주의의 유지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해서 경제적 수치를 높이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자연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종교로 인한 전체주의는 이해와 배려보다는 폭력과 배척의 길을 이끈다. 십자군원정, 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여러 테러사건 등이 2번이 전체주의로 빠졌을 때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3번째는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로봇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성장하기 위해 애완동물들을 인간처럼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게 만들자는 논리와 같다. , 로봇자체가 인류의 외부적인 면에 이점은 되기는 하겠지만 로봇이 인류가 될 수는 없다. 인류의 성장방향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중심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 4번째는 회피이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험을 다른 행성에 가서 다시 반복하자는 것이다. 5번째는 표면적인 변화이다. 같은 성능을 가진 자동차를 차제만 바꾸었다고 기능이 향상되었다라고 보지는 않는다. 6번째와 7번째가 작가가 선택한 인류의 진화방향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화 되면서 소형화된 제3인류인 에마슈를 인류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인류의 진화를 결정한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생활양식의 문제도 아니고 소비주의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인간은 크기가 어떠하든 쩨쩨하거나 관대할 수 도 있고, 이기적이거나 연대를 중시할 수도 있어요. 눈앞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멀리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들도 있죠. 그건 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의식이죠. 3p. 253-254” 나와 다른 너를 용납하지 못하는 자세와 인간만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생각은 인간스스로의 진화를 저해한다. 다름과 같음을 구별하지 않고 나음과 못함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선상에서 대하는 자세. 그것이 의식이며 그것이 인류 진화의 바탕이다. 작가는 인류의 성장가능성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내 역사의 현 단계에서 나는 인류가 진화하리라고 믿는다. 3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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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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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얇은 쪽수와 연극대본으로 되어있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읽은 작품이다. 그 속에 담긴 내용과 깊이는 다른 어느 문학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도 보다 얼마나 쉽고, 마음에 와 닿게 글을 썼는지가 중요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서 밀러의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경제공항 동안 한 세일즈맨의 하루 동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주인공 윌리는 과거시점과 현재시점을 오가며, 과거의 화려한 모습에 연연하며, 현재의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과거 운동선수로 잘 나가던 큰 아들 비프의 현재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바라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게 되어 결국 가정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이 지점,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에게 기대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 완전한 인격체로써 아들을 바라보기 보다는 아직까지 자신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아들을 더 힘들게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우리 가족의 문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주인공 윌리는 막 시작하는 신생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써 회사발전에 힘을 실어주면서 승승장구한다.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책임감과 자긍심도 그와 더불어 커져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일즈맨으로서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내근직으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사장은 윌리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여기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시켜버린다. 윌리를 회사에 기여한 한 인물이 아닌 회사를 굴러가게 만드는 부품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장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낡은 부품을 바로 교체해 버린 것이다.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인간이 아닌 자본과 이익이라는 것이 침입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강한연결고리는 사라지게 되고,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기업들의 노동자에 대한 횡포는 이미 일반화된 현대에 그 당시에 벌써 자본의 위험성을 표현한 점이 이 작품의 높은 문학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더 슬픈 점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살아온 가장이 결국 가정을 위해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실이다. 윌리의 부인 린다는 윌리의

 무덤 앞에서 주택할부금도 다 갚았기 때문에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가족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 실제로 자살까지 하지만, 정작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집을 사기위한 돈도 세일즈맨으로써의 명성도 아닌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내면을 기독교적인 측면으로 해석했다면, 아서 밀러는 인간을 혼자로서가 아닌, 사회에서의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거기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사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모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하나의 사회, 국가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데 거기서 인간이 빠지게 되었을 때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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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 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6
작자미상 지음, 김광순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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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거리가 나온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도대체 위정자라는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가? 한 나라를 책임진 위치에 있는 자들이 훗날을 기약한다는 말로 도망가는 모습에 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명을 섬기듯 조선을 섬기고 주자를 존경한 만큼 백성을 존경하고 아꼈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DNA는 언제나 백성을 말하지만 언제나 백성보다 한 발 앞서 부를 축적하고 두세 발 앞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다.

정묘호란에 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결국 인조는 청 황제에게 세 번 무릎 굻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자업자득, 자승자박이다. 그들을 위해 분노가 일어나거나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위정자들은 목숨을 건졌고, 그들의 부를 유지했으며 그들의 자손을 보호했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은 어떠한가? 볼모로 인질로 노비로 그리고 첩으로 청에 끌려갔다. 여기서 화냥년, 호로자식이라는 말이 유래했으니 과연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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