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버거(John Berger) 지음 | 김현우 옮김 | 열화당

 

 

[I] 작가의 글쓰기

노()작가의 문장은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시작한다. 80 가까이 글을 써온 버거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 활동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활동 덕분에 나는 의미를 찾고, 계속할 있었다.라고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버거가 발표한 다른 책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담긴 작가의 글쓰기는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우 직관적이다. 어떤 외부의 소재로부터 글을 시작하여 곧바로 소재가 이어주는 현상/기억 등의 내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다시 어느 순간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곤한다. 버거는 외부의 소재/사물이 내면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소재와 자신의 내면이 나누는 담소를 듣는 것같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저자는 순간을 인식하며 현재와 하나가 된다. 버거의 문장은 차분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함축적이다. 

 

책의 곳곳에서 버거는 오랜 지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사망한 지인들의 장례식에 찾아가며 이들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고 이들과의 추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저자 자신의 오랜 지인을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버거의 지인들은 평생지기들이다. 보통이 30 정도인 듯하고, 사진가 모르처럼 50 지기도 있다. 책은 현재를 충실하고 온전하게 사는 버거의 방식 또한 살펴볼 있다. 개인의 제한적인 시간성 속에서 망각에 저항하고영원을 사는 법이 담겨있는 것이다. 

 

 

[II] 자연의 텍스트 읽기 - 드로잉

버거는 진정한 번역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글을 써내려 가지만 어느 번역 맥락은 언어의 문제에서 벗어나 본인의 관심사인 드로잉으로 옮겨간다.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어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그는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는 저자의 오랜 지인의 모습이나, 채플린과 같은 이의 초상 또는 그림의 부분을 보고 거칠게 스케치한 그림과 장미를 비롯한 여러 식물들의 그림들이 실려있다.

 

   버거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텍스트 번역의 과정과 다르지 않는 듯하다. 아무리 손기술이 좋은 화가도 자연의 모습을 동일하게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데, 화가는 자연을 대상화하여 인지한 화가에게 떠오른 심상, 형성된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뿐이다.  

 

   이미지를 이야기 , 작가 자신이 그린 붓꽃 그림과 사진작가 타토 올리바스(Tato Olivas) 버거의 편지에 대한 답신으로 무용수 사라 바라스(sara Baras) 사진을 보내온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버거의 붓꽃 그림과 무용수의 사진을 순간 소름이 돋았다. 책에 나온 내용을 보니 버거 자신도 사진작가 타토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없었다라고 하였다. 사진에 포착된 무용수의 역동적인 동작이 주는 에너지와 붓꽃 그림에서 보여주는 동적 형태가 주는 정서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사진과 그림을 보면 때서야 버거의 설명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붓꽃 그림과 무용수 사진) 무한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리듬의 관점에서는 함께 움직이고 있다.”(81)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간결하게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동작’(81)이란 표현이 스스로 맥락을 드러내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III] 신자유주의 비판

아흔에 가까웠던 작가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책의 곳곳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영원히 바꿔버린 투기 금융자본주의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날카롭게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 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 활용한다.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35)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자신들의 정유 시설을 지키기 위해 삼백 개가 넘는 부대를 은밀히 파병했다는 소식”(56)

 

버거는 현대의 금융 자본주의가 야기한 폭력성에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던 작가였다. 대한민국에서 1997 외환위기를 통해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기억을 떠오려보면, 작가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명료한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 1990년대를 지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렸다. 시기에 대리인들, 로비스트들, 다국적 투기 자본이 지구촌의 길을 정하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게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약어들을 남발하는 역시, 내용 없음을 향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60-61)

 

모든 정치적인 활동의 노력이 투기 자본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해 있음에 노()예술가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을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곳을 메우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고백과 비교하면 얼마나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새삼 발견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면 버거에게 글쓰기란 의미를 찾도록도와주는 수단으로써, 이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항상 깨어있게 해주며 망각에 저항하도록 해주는 평생의 지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 다수는 아니더라도 -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16면)
-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중에서

˝(고아는) 혼자 살아가는 프리랜서가 된다.˝ (27면)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57면)
- 작가 자신이 수영을 하다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과 관련하여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 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10면)

본인의 드로잉과 관련하여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외양이라는 텍스트를 풀어내서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 외양이라는 텍스트는 이미 나의 모국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9면)

“자연의 외양들을 텍스트로 ‘읽어내는’ 일이 가능할까”(104면)



신자유주의 비판

“마찬가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밀턴 프리드먼의 말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89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정보들은 대부분 한때 정치라고 불리던 활동에 관한 것이지만, 정치는 이미 주식 거래인과 은행의 로비를 앞세운 전 세계적 투기 자본의 독재로 대체되어 버렸다.”(104-5면)

신자유주의 사회의 ‘언어‘ 비판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험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털구름은 북족, 수영장의 끝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물에 뜬 채로 가만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로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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