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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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 '초년'의 맛

 

 

 


음식 작가라는 뚜렷한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티아 먼로는 뉴욕에 온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배경은 예일대에서 공부했다는 것과 뉴욕대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이름이 걸린 기사를 낸 적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굉장히 대단한 것이지만, "모델, 디자이너, 백만장자 셀러브리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욕망의 도시"인 유럽에서는 그리 대단한 이력이 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이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도 성공할 수 없고, 이보다 더 못한 조건에서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단지 뉴욕의 맛』은 사회 초년생 티아 먼로가 뉴욕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공"이 무엇인지 찾고, 이를 이루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처음이기에 미흡하고, 처음이기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했던 그녀가 겪은 일들을 따라가면, 누구나 한 번쯤 겪은 "처음"과 마주할 수 있다. 처음 해본 '경험', '실수', '성공', '방황' 등이 맛있게 담긴  『단지 뉴욕의 맛』은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의 맛이고, 누군가에게는 씁쓸한 현재의 맛이고, 누군가에게는 맛보지 못한 동경의 맛이다.

  

책을 읽다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몇 편 있다. 티아 먼로가 뉴욕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인상적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떠오른다. 원하지 않았던 런웨이 잡지사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현실과 타협하던 미아의 모습과 티아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이라는 콘텐츠 자체만 들여다보면, "줄리&줄리아"가 생각난다. 소설 속에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가 아주 잠깐 언급된 이유도 있지만, 미국에 최초로 프랑스 요리 레시피를 전달한 요리사의 요리법을 따라 하는 블로거의 모습이 묘하게 티아와 그녀가 동경하는 헬렌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게 하는 즐거움까지.
이렇게  『단지 뉴욕의 맛』은 초년의 맛부터, 맛있는 요리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맛있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시작, 티아의 시작은 티아 스스로 보았을 때 조금도 무모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분명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과 자신감이 티아 스스로에게는 충분했지만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그 말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티아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무모하게 뉴욕에 온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뉴욕에서 자신의 위치는 나쁘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성취한 경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티아가 '기회의 땅' 뉴욕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글이 실렸고, 그 글에 대해 그 분야의 최고라 불리는 '헬렌 란스키'가 긍정적인 평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 말 한마디가 그녀의 삶을 바꾸었다. 아마 이때 티아는 가슴 설레는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근거리는 설렘은 융커스에서 나고 자라던 티아를 뉴욕으로 이끌었다.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다쿠아즈에 대한 이야기가 《뉴욕타임스》에서 기사화되어, 티아가 뉴욕에 온 점은 조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기회의 도시. 아메리칸드림의 산실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뉴욕이 아닐까. 뉴욕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상징은 바로 기회다. 그리고 그 기회의 땅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도시 곳곳에, 사람들 머릿속에 담겨 있는지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아, 너도 미래를 찾으러 뉴욕에 왔구나. 세계를 재발명해주는 도시에 온 걸 환영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꼭 이루길, 알았지?"

 

티아에게 멜린다가 하는 말은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함. 그 자체다. 그 이유는 티아가 뉴욕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뉴욕에서 성공할 수 있는 땅이라 믿었던 뉴욕이 얼마나 모순적인 도시인지 말이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얻기에 뉴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교묘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뉴욕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뉴욕뿐만 아니라, 성공을 기대하며 입성한 어디든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모습과 전혀 다른 현실은 존재한다.

 

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초년 그 자체인 티아에게 '고스트 라이터' 제안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이클 잘츠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제안한 것 자체가 또 다른 인정이라고 믿었고, 그의 미각만큼이나 자신이 맛을 느끼는 감각의 폭과 글 솜씨가 높이 평가받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나는 이곳 뉴욕에서 내가 열렬하게 매달릴 무언가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지식, 권력, 방향.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 나는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뉴욕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 과정이 어떤 형태이고, 어떤 모습일지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고려하기에 뉴욕 레스토랑의 음식은 너무 맛있었고, 화려한 명품들이 자신의 것이 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고급 파인 다이닝에서 먹는 식사, 멋진 셰프들과 사랑을 키우는 모든 과정이 너무 달콤했다. 이 모든 것에 취해, 티아는 고스트 라이터이지만, 분명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조차 잠깐 잊는다. 명품, 사랑, 글을 쓰는 즐거움만으로 티아는 자신이 이미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이미 너무나도 화려하고, 충만함 그 자체이기에.

 

하지만 그 화려한 삶에 가까워질수록 원래 그녀 주변에 함께 해온 사람들은 점점 멀어진다. 가족, 룸메이트 에메랄드, 사랑하는 남자친구 엘리엇까지. 관계는 소원해지고 두 가지를 모두 이루기 힘든 상황들이 펼쳐진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과 멀어지는 순간, 티아는 깨닫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이클의 명성을 높이는 것뿐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는 순간, 마이클은 돌변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권력을 토대로 티아를 협박한다. 이 뉴욕에서 티아와 자신의 말 가운데, 누구의 말이 더 신뢰를 얻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는 티아를 미식업계에서 내쫓을 수 있을만한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빛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티아에게 이를 발휘할 기회는 좀처럼 잘 찾아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기회가 말이다. 그래서 티아는 더 빨리, 더 높이 나아가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한다. 이 이후에 티아에게 온 시련은 티아에게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하기 위해서 어떤 기회를 잡을지 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악마의 유혹이 판치고 있는 곳을 날카롭게 비꼬고 있다. 어떤 기회는 티아가 잡은 것처럼 가지고 있는 재능을 이용당하기만 할 뿐, 성장할 기회는 주지 않는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과연 티아가 마이클에게 반격한 것과 같은 일이 가능한지 생각해보면, 티아가 맛본 씁쓸한 맛이 입에 감도는 듯싶다.

 

 

 

"내가 도와줄게. 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잖아. 너는 네가 비밀을 가두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비밀이 널 가둔 거야."

 

『단지 뉴욕의 맛』이 매력적인 이유는 티아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티아에게 깨달음을 주는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에메랄드처럼 티아 곁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이 있기에 더 좋다. 개인이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초년의 맛을 함께 맛본 혹은 조금 앞서 느낀 사람들 간의 관계에 이 소설이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티아만이 겪는 일이 아니고,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을 극복하는 과정이 티아가 스스로 기획해, 스스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해 반격한 것이라면 이 정도로 만족스러웠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단지 뉴욕의 맛』을 읽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티아의 곁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말과 행동으로 티아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외롭게 느껴지는 초년의 어려움을 완전하게 다 감싸주는 단 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조금씩 보듬어주는 존재가 우리 곁엔 있다. 가족, 친구, 연인, 선후배 혹은 스승 등의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 또한 가족, 친구, 연인, 선후배(그리고 훗날에 스승)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힘듦을 감싸 안아줄 존재가 되어준다면 냉혹한 도시가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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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칼이 되어줘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김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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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삶의 조각을 이어준
'편지', '일기' 그리고 '만남'에 대하여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한 남자에게서 편지가 온다. 야이르라는 남자가 말한다. 나를 보았고, 단번에 반했다고. 그래서 당신이 괜찮다면, 설사 괜찮지 않더라도 내 비밀 전부를 털어놓고 싶다고 말이다. 고작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를 관찰했다는 남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쓴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나에 대한 찬사도 있지만, 수시로 바뀌는 남자의 감정들과 그의 어린 시절 상처들이 짙게 남아있는 고해성사 그 자체다. 이미 부부의 연일 맺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에게 이 편지를 엄격하게 비밀로 부쳐야 한다. 남편뿐만 아니라 두 사람 외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백할 수 없는 내용이 담긴 이 편지들은 무려 8개월간 이어진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작. 그 시작이 점점 이어지는 방식은 "이해"나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개별적 존재에 대한 "이해"로 본다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난, 『나의 칼이 되어줘』의 야이르와 미리엄.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생(生)에 대한 간절한 "호소"로 보았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의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이 쓴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만으로 쏟아낼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어느 소설보다 섬세하고 열정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이 전해졌다. 아름다운 표현이 깃든 감정들의 높낮이는 인간의 감정의 바닥을 보여준다. 황홀한 행복과 지옥 같은 불행은 이야르는 순간순간 느낀다. 그가 이런 널뛰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녀의 편지가 늦어서, 깊은 밤이라서, 혹은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이유로 바뀐 감정을 글 속에 쏟아낸다. 그중에 그가 모욕적인 언사와 곧바로 미안하다는 사죄가 오가는 편지를 반복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와 깊이 닿아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종류죠?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지나치게 무거운 사랑이 놓여 있잖아요? 그걸 하찮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지난 며칠을 보내면서 난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낱말에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꽁꽁 묶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말이 틀렸으면 고쳐주세요.

 

만날 수 없고,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가진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야이르에게 미리암은 그런 존재였다.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미리암에게 야이르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움직이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다고, "집착"이라고 보기에 편지 뒤에 나오는 일기가 분명 서로 오가는 감정들이 있었다고 말해주기에 확정적인 단어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감정을 쫓아가는 것이 『나의 칼이 되어줘』의 매력이다. 동창회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인 미리엄에게 느낀 감정. 그녀의 삶의 실체가 있는 존재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 단어로 그녀의 삶 속에 존재하고 싶은 야이르의 감정은 이중적을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던 그는 그녀의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를 느낄 뿐만 아니라, 꽤나 심한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익명성을 담보로 한 야이르는 정말 솔직하게 자신 내면에 있는 욕망을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야이르의 이중적인 욕망에 대한 미리엄의 태도도 수용적이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미리엄이 야이르의 단어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일기"에서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야이르의 편지와 미리엄의 답장으로 두 사람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시작한다.

 

난 당신이 내 편지에 맨 처음 응답했을 때부터 알았어요. 당신이 내 한계를 넘어선 아주 먼 곳까지 나를 데려갈 거라는 사실을요. 그런데도 난 당신과 동행했어요. 왜 당신과 동행했을까요?

왜 하필 편지였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쓴 편지여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편지는 시공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소통 수단이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시공간과 편지를 읽는 순간의 시공간이 엄연히 다르다. 지금 나의 감정을 토로하고 싶다면, 편지는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전화가 없던 시대였다면, 그럴 수 있지만. 텔레비전이 있을 정도로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은 편지라는 다소 고전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선택한다.


그리고 게다가 편지는 물질적인 흔적이 남는 매체다. 사실 각자 배우자와 아이가 있는데, 편지로 감정을 남김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애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파국을 부르는걸. 그런데도 만나지만 않았을 뿐 야이르는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미리암에게 보낸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남편이 편지를 발견할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짤막한 편지를 주고받던 무렵 당신이 물어본 적이 있죠.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제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본 뒤에 비로소 그때의 질문을 이해했어요, 단순히 '이해'한 게 아니에요. 내 몸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조금 움직였고, 깊숙한 곳에서 당신을 향해 뭔가가 울려펴졌어요.

 

『나의 칼이 되어줘』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왜 "편지"여야 했는지 말이다.

 

쓴 순간과 읽는 순간이 다른 시공성을 가지고 있고, 다시금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편지를 사용했다. 편지에 남은 단어는 말과 달리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확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달라지는 건 이 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처음 읽을 때와 그다음에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읽는 사람의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편지를 쓸 때 어떤 감정을 느꼈고, 편지를 읽을 때 감정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이르의 해석이 미리암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미리암의 의도를 야이르가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로를 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편지에서 얼마나 많은 편지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일치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편지가 전달되는 과정 중에 오해 아닌 오해가 분명 있었다는 점이다. 사랑, 책망, 연민, 동정, 불안, 자책, 집착과 같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솔직한 인간의 감정을 토로하지만, 그 토로한 순간과 받아들여지는 순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 오해의 가능성에 대한 배려나 고려조차 없이 쏟아내는 편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러면서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준 것인지. 서로의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스스로가 위로를 건넨 것인지조차 헷갈린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야이르와 미리암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로에게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만, 그 어려운 이야기는 내밀한 개인의 상처와 깊게 닿아 있다.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이야기하며 두 사람의 내면은 조금씩 달라졌다고 믿고 싶다. 즉, 서로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해주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달려있었다고 난 믿는다. 왜냐하면, 슬픔을 극복하는 건,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때문이 아니라. 그 위로를 듣고 나서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는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야이르는 아버지가 가혹하게 그를 학대했던 기억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깊이를 말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아내 마야와의 갑갑한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보면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까지도, 그는 숨김없이 말한다. 혼자 끓어 안고 있을 때 점점 곪아 터지던 문제들이 미리엄에게 말하는 순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그 비밀을 홀로 간직했을 때 느낀 고독에서 해소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두 사람이 가진 상처에 대한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한시적인 8개월간의 편지가 말해주듯이,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제대로 목도할 수 있는 경험이었을 뿐이다. 그다음 단계는 스스로에게 달려있음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야이르의 심정이나 미리암의 감정을 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난 뒤에 오는 치유의 힘을 알고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비밀을 고백한 적 있다. 한 차례 전공 수업을 만난 교수님이었다. 그 수업이 끝난 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때 난 그 교수님의 기말고사 과제로 난 내가 그 당시에 홀로 감당한다고 믿었던 비밀을 적은 글을 과제로 제출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작은 고민이다.) 그 과제에 대한 성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 과제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때 마음을 억누르던 상처 하나가 떨어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 소설 속에 "딱지에 부는 바람"처럼. 미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위안을 준다.

 

 

 


"편지는 거짓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고통을 가라앉혀주는 것도 아니지.
고통 때문에 내 존재의 밑바닥까지 끌려 내려간 순간에
발휘된 자비로운 여력이었을 뿐."

 

 

두 사람은 책에서 발견하지 못한 걸 편지에서 발견했다.
세상 어느 글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만족감을 편지를 통해서 느꼈다.
그 이유는 야이르의 편지가, 미리암의 편지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그 편지를 썼고, 그 편지에 대해 받은 답장을 두고,
스스로 해석했기 때문에 남다른 만족감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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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It Up! - Music Craft Studio, 남무성·장기호의 만화로 보는 대중음악만들기
남무성.장기호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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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기초에 대한 모든 것!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문화'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배운 내용은 '대중음악'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미국과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과 음악산업 전반에 대한 내용이었다. 수업은 음악적 지식을 많이 요구하기보다 '사회'안에서 '대중'음악이 가지는 맥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음악적 기초가 없는 나에게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조금 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 아쉬움을 채울만한 책이 바로 <POP IT UP>이었다. 음악의 기초가 아닌 '대중음악의 기초'에 초점을 맞춘 책! 일상의 당연한 일부라고 생각해온 대중음악의 역사 와 함께 기초 중의 기초 이론을 꽤 밀도 있게.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민한 책! 그래서 잘 모르는 내가 읽어도 조금도 부담이 없는 책이었다.

 

 

 


지금 <POP IT UP>을 듣는 와중에, 내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도 대중음악이다. 애드 시런의 음악과 콜드 플레이의 음악을 오가는 플레이리스트가 책의 리뷰를 더 흥겹게 만들어주고 있다.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가 하면, 연인이 그리워질 때도 누군가의 노래가 생각난다. 이렇듯 대중음악은 늘 우리 곁에 함께하는 동반자인 것이다."

대중음악은 우리의 일상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대중음악이 왜 대중적인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한 개인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 두고 왜 그 음악을 듣는지 묻는다면 "좋으니까." 혹은 "진짜 좋으니까." 그리고 "그냥 좋으니까."라는 이유를 제외하고 이유를 좀처럼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로 대중음악은 대중적이지만 동시에 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 건 대중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아주 훌륭한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중음악을 좋아할까? 아니,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대중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는 책이 바로 <POP IT UP>이다.

 

 

 

 


"뮤지션이 되고 싶거나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 이 책을 읽을 것이다. 아니면 대중음악을 이론적으로 좀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이유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다른 취향이 특정 음악 형식과 장르에 수렴한다는 건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대중음악의 어떤 음악적 요소가 대중들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귀를 매혹시키는지 설명한다. 그 음악적 요소에 대한 용어가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저자는 그 낯섦을 간파하고,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을 통해 설명을 더한다.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빌보드 차트의 음악을 통해 설명하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한 가수들의 음악을 통해 이야기한다.

 

 

 


<POP IT UP>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수가 있다면, 단연 비틀스일 것이다.

"비틀스의 업적은 당대에서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송라이터들에게 대중음악 작곡법에 대한 창의적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틀스의 음악을 즐겨듣지 않지만, 이들의 음악은 몇 번 듣지 않아도 귓가에 맴도는 매력이 있다.
한 번 들으면 귀에 꽂히는 어떤 요소" 바로 Hook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Hook이 빨리 나와서 대중의 머리에 각인 시키기 때문이다. 비틀스는 자신만의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방법은 대중들이 사랑하는 음악을 만드는 비법이었다. 미국 레코드 산업 협회에서 1958년 이후 미국 내 음반 판매 기록을 조사한 결과 총 1억 600만 장 이상의 음반이 팔린 가수라고 한다. 팝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곡들이 정말 많이 있다. (여담이지만, 세계에서 단일 앨범으로 가장 많아 팔린 앨범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Thriller)>라고 한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은 폴 매카트니의 작곡법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폴 매카트니에게 작곡 수업을 받은 뒤에 만든 노래들은 연이어 대박을 냈고 그래미상도 싹쓸이했다고 한다.)

 

 

 

 


곳곳에 이렇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 요소들이 많이 있다.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 부분이 탁월했는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네분토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음악의 형식을 이야기 한 부분이었다. Verse와 Chorus와 같이 용어만 보았을 때 낯선 개념을 재미있게 설명한다, "대중음악의 작곡 형식"이라고 하면 왠지 어려울 것 같지만, 배철수씨, 장기알(?), 남무동(?) 그리고 돌아가신 존 레논과 오노 요코까지 등장하며 작곡의 형식에 대해 적절한 무게감을 가지고 설명한다. 새로운 음악 형식을 비틀스가 시도했던 이유를 그들의 음악이 왜 존경받고 있는지 다시 한번 짚어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비틀스가 왜 "비틀스" 이름 자체로 높이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다.

 

 

 


대중음악을 두고 감각이나 느낌만으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자는 그 분야만의 이치와 논리를 알 때 진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에 얼마나 많은 뮤지션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폴 매카트니와 마이클 잭슨을 보면 대중음악이 존재해온 그 법칙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세계화가 시작됨에 따라 음악적 취향이 다양해졌고, 그 다양성이 증가한 만큼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으로 사랑하는 음악이 탄생할 여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과 같이 대중적인 뮤지션과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흥미로운 곡이 또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과연 이 책의 법칙을 따라가 정말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까. 대중음악이 탄생했고, 대중성의 지위를 확보했을 때의 상황과 지금은 또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POP IT UP>이 말하는 음악적 기초가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다. 기초가 없다면, 그 기초를 변형해서 만들어낼 다양한 음악들 역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기초라는 토대가 다양성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초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서 파생한 다양한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POP IT UP>은 말한다.

 

 

 

 


<POP IT UP>은 대중음악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책이고, 음악이라는 언어를 배우는 책이다. 우리가 말만큼이나 많이 듣는 음악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POP IT UP>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아마 음악이 조금은 낯설게 들리는 기분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비틀스의 음악을 조금 낯설게 들을 수 있는 즐거운 회화 시간으로 <POP IT UP>을 읽은 시간을 기억할 것 같다.

 

기억에 남았던 컷!

 

 

 


"Don't  talk about music, music speaks itself"
음악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말라, 음악은 그 자체로 훌륭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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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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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읽어야 할 책!

 

 

 

 


내가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본 건 지난달 어느 봄비 내리던 날이었다. 만약 맑은 날 봤다면, 이 영화가 지금 다시 생각할만큼 감동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날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온 세상에 수증기가 한껏 떠도는 날이어서, 영화가 더 좋았다. 그런 날씨에 이 영화를 만나서 난 참 운이 좋았다.

 

비와 잘 어울리는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던 난 기다렸다.  책 <셰이프 오브 워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날씨를. 그리고 지난주 찬바람을 데리고 온 봄비를 느끼며 읽었다. 눅눅함을 촉촉함으로. 차가움을 포근하게 감싸줄 사랑 이야기를 말이다. 만약, 아직 <셰이프 오브 워터>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비 오는 날 보길 추천한다. 이야기 서사 내내 짙게 드리워진 "Water"를 느끼기에 이만한 소설이 없다. 특히, 톡톡 땅을 가볍게 적시는 봄비 내리는 날 읽기에 좋은 소설이다. 정말.

 

"사람에게나 야수에게나 나돌아 다니기에 좋은 밤은 아니었다. W.C. 필즈가 말했지."
자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침을 삼키고 앞에 펼쳐진 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함께 가는 거야. 끝까지 가 보자."

 

야수와 사랑에 빠지는 것. 어렸을 때 난 종종 생각했었다. 충분히 가능한 사랑이라고 말이다. <개구리 왕자>, <미녀와 야수>, <박씨부인전> 등 몇몇 이야기만 보아도. 동화 속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 레퍼토리만큼이나, 주인공이 괴물의 상태에 있는 일은 잦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형상은 진정한 사랑과 만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가진다. 이렇게 보면, 내가 생각했던 사랑은 야수와 사랑은 통과의례였다. 사실 그다음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야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려운 사랑을 시도하는 것이 인간이고, 그 불가능을 사랑으로 완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가슴 벅차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축복의 시선이 아닌 의심의 눈총을 받을 사랑이라고. 불가능한 사랑. 그래서 누군가가 보기에 무모해 보이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셰이프 오브 워터> 보는 내내 읽는 내내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마음 한켠을 아련하게 만드는 씁쓸함이 오는 사랑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런데,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나의 예상은 틀렸다. 그들의 사랑은 내가 생각한 사랑의 형태 그 어디에도 없는 가장 완전한 사랑이었다. 불가능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틈이 없는 사랑 말이다. 

 

"불가능을 꿈꾸고 이를 실현하는 사랑"

 

아무나 이룰 수 없고, 어쩌면 이야기로 밖에 만날 수 없지만, 영화 속 자일스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사랑 말이다.


엘라이자는 그 영화를 보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빙의 노래를 들으며 감옥에 간 여주인공처럼 자신도 힘겨운 삶이라는 형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여주인공을 기다리겠다는 그런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도 나타날지 생각했다. 하지만 곧 부질없는 생각을 접었다. 그동안 그녀를 기다려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은 검은 눈이 아름다운 엘라이자다.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엘라이자다. 자신에게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인 엘라이자의 별명은 '벙어리'였다. 하지만 보육원 선생들은 그녀를 '22'라고 불렀다. 보육원에서 그녀에게 붙어 있는 건 숫자만이 아니었다. 말을 들을 수 있지만, 할 수 없게 만든 목의 큰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말하지 못하고. 목에 큰 흉터. 이 두 가지만으로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처럼 삶을 살아간다. 또 누군가는 그녀를 모자란 존재인듯 여긴다. 보육원 사람들이 그랬고, 직장 상사가 그랬다. 특히. 잔인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처럼 생겼어, 데릴라. 나처럼, 당신처럼 생겼지."
그는 고개로 여자들에게 문을 가리켰다.
"솔직히 말하면 신은 당신들보다 나와 더 비슷하게 생겼지."


엘레이자는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녀는 사회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주변부를 맴돌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괴물이나 괴생명체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그녀가 사회에서 느낀 시선은 눈총에 가까웠고,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생각을, 자신의 감정을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만, 그리고 반응하지만, 실재하지만 우리의 공간에 들어서지 못하고 서 있는 기분을 엘레이자는 거의 항상 느끼고 있었다. 이미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소설 초반부에 잘 담기지 않았지만. 엘레이자의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쓸쓸한 감정을 담담히 적어낸 글 속에서 아프게 다가왔다. 아마 엘레이자가 그 존재와 사랑에 빠졌던 건,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엄청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존재보다,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더 괴물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셰이프 오브 워터>의 배경은 미소간의 경쟁이 극을 치달아가던 시기다. 냉전체제가 군사부문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기술 등 전 영역에서 경쟁이 과열되고 있었다. 엘레이자가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곳도, 구 소련과 과학 기술 특히, 우주선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경쟁관계에 있는 NASA의 어느 비밀 연구소다.
그 배경이 재미있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이 집결되어 있는 곳. 그곳에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괴생명체가 들어선다. 아마존 강가에서 스트릭랜드가 데려온(포획한) 괴물은 온갖 실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가장 현실적인 곳에 존재하는 비현실적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신비롭다. 모순된 공간이 주는 신비감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극적이게 만들었다.
마치 <오페라의 유령>의 오페라 극장처럼, 비현실적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 바로, 연구소다. 이곳에서 엘레이자는 자신의 사랑을 만난다. <미녀와 야수>의 성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신비한 공간이지만, 가장 진보된 과학기술이 태어나는 곳에서 피어난 사랑이 사랑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파괴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전리품이었다. 엘라이자는 울 것처럼, 아니 웃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살아남은 것을 기뻐했다.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엘라이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 두려움보다 단번에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에게 무언가 강렬한 이끌림을 느겼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파괴자 앞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가쁜 숨을 몰아시며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자신의 감정을 엘라이자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너무 멀리 떨어진 그였지만, 이미 시작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그에게 다가간다. 엘라이자에게 망설임은 없다. 심지어 생각보다 대범한 행동으로 자신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그모든게 시작한다.


엘라이자도 난생 처음,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글렌 밀러의 음악에 담긴 색깔과 모양, 질감을 왜 그동안 알지 못했을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강한 이끌림을 느끼지만. 그 이끌림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왜 사랑에 빠졌는지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그 눈빛과 공간에 감도는 공기를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두 존재의 사랑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독자인 나뿐만 아니라 두 존재도 알아챈다. 가까워지게 된 기간은 매우 짧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는 둥근 창 바로 뒤에서 헤엄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몸을 홱 돌려 구르고 양손으로 기포를 만들며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수화로 말했다.
안녕.
엘-라-이-자.
음악.

영화보다 이렇게 문장으로 하나씩 들어설 때, 책의 감성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영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에 책 속의 많은 장면들이 머리속에서 이미지로 그려졌다. 나는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엘라이자의 표정으로 추론했던 그 감정들을 글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표정으로 가늠하는 것과 글로 그 감정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다른 감동을 준다. 그리고 엘라이자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내며 등장하는 말보다 “”없이 묵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비친 표현들이 많아 좋았다. 글을 읽으며 나만 들을 수 있는 생각의 소리, 마음의 소리에 오로지 집중하며 읽을 때 가질 수 있는 순간이 <셰이프 오브 워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독서법이었다.

영화는 엘라이자란 인물 자체에 집중을 한다. 하지만 소설에선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선이 다채롭게 그려진다. 그만큼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엘라이자. 스트릭랜드. 데릴라. 자일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묘사가 두드러진다. 스트릭랜드의 입장이 아니라 그의 아내 입장에서 바라볼때 스트릭랜드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듯.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끌어내는 과정이 영화와 다른 책이 주는 감동 중 하나였다.

두 존재의 사랑. 정말 깊이 있는 사랑. 그 사랑은 불가능해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진짜 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는 수단으로 누군가에게는 파국으로 만들고 싶었던 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많지만, 이 소설 속에서 절대 놓치지 않는 건. 사랑이 가진 숭고함이다. 그 감정 자체가 가진 숭고함을 넘어서는 그 어떤 중요한 것도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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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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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 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속은 기분이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은 이런 소설이 아니었다. 스웨덴. 북유럽의 무료한 감정을 덤덤히 그려내서, 건조한 느낌이 들지만. 그의 소설은 유머가 넘쳤다. 이야기 전개가 느렸지만 소소하게 미소 지을 부분이 넌지시 내비칠 수 있는 작가, 그가 프레드릭 배크만이었다. <베어타운>은 그의 전작과 완전히 다른 결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동명이인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프레드릭 배크만이란 작가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내게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속은 기분이라며 읽었지만,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알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키는 한심하고 별 의미 없는 스포츠다. 우리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거기에 몇 년의 세월을 바친다.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불사르고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인생에 또 뭐가 있을까.

 

이 책은 어느 작은 소도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을 둘러싼 이야기이자, 하키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또 받은 이야기다. 마을의 희망이자 열망 그 자체였던 존재가 더럽혀진 것이 대한 이야기다. 하키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베어타운은  쇠락해가는 마을이다. 그 저물어가는 마을에 열정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하키"다. 모든 것이 용인되고, 승리 앞에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베어타운의 공동체는 정말 끈끈함 그 자체다. 하지만 3월 어느 토요일에 있었던 두 개의 사건이 "베어타운"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희망은 마을 전체가 느끼고 공유했지만, 절망은 소수의 사람만 느꼈다는 그 사실을 글로 읽어가며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서늘해졌다.

 

세상에는 왠지 모르게 상처가 되는 것들이 많다. 불안감은 내면의 인력과도 같아서 영혼을 쪼그라뜨린다.

 

하키가 삶의 전부이자, 살아가는 이유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 보험을 판매하며 하키와 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그의 삶은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아이스링크장으로 이끌었다. 얼음판에서 서걱이는 소리를 내고 승리에 대한 강한 투지를 불태우며 그는 이 마을의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을 지도하고 있다. 모두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 불가능에 망설임 없이 도전했고, 수많은 고통이 따라왔지만 결국 그는 훌륭한 멤버들을 모았고, 그 멤버들이 팀을 이루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최강자 아이스하키 청소년 대표 팀과 경기를 앞두고 있다. 그에게 하키는 삶의 전부였다. "그때 나이가 고작 네 살이었지만 하키는 그에게 완벽한 몰입을 요구할 거라고 지체 없이 선언했다. 그는 그래서 좋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아이스하키는 무료할 수 있는 인생에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생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 자체였다. 이 남자의 이름은 페테르다. 하지만 그의 삶에 아이스하키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레오와 아이스하키를 사랑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딸 마야가 있었다. 하키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베어타운에 머물며, 그는 자신이 온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찾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3월 어느 토요일 전까지는 말이다.

 

이런 그에게 말도 되지 않는 일이 고작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다. 사건만 두고 본다면 하루에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오간다.


그가 이끈 청소년 대표 팀이 승리한 것이다. 그의 도전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고, 베어타운에 하키에 대한 사랑과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마을의 스타가 되었고, 승리의 기분 좋은 여운이 마을 곳곳에 스며들었다. 승리만을 바라보았던 학생들은 이길 수 없다고 모두가 생각한 경기에서 승리한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문제는 이들이 승리를 했지만, 그 승리를 위해서 훈련받았던 과정에서 용인될 수 없는 폭력적인 생각이 거리낌 없이 오갔다는 것이다. 이기는 방법이자, 이기는 생각이라는 명목하에 굉장히 잔인한 생각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술과 폭력, 섹스와 같은 단어가 거칠게 오가던 아이스하키팀의 에이스가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이 두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폭력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바로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면 여긴 빌어먹을 하키 타운이니까."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지만 이를 말할 수 없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하키팀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가해자인 하키 선수의 편이란 걸 열다섯 살 소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야가 겪었던 일은 머리로 넘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넘겨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칠 틈도 없이 마야의 마음과 영혼을 순간순간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이 아이가 빼앗긴 수많은 것들 중에는 절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공간도 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그런 공간이 있지만 도둑맞으면 다시 되찾지 못한다. 마야는 앞으로 모든 곳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이 문장은 베어타운에 살고 있던 마야에게 현실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일주일간 견디려 몸부림쳤던 마야는 결국 입을 연다. 눈을 감고서 입을 열고 말을 한다. 하기 쉽지 않았던 그 모든 것을 전부 이야기한다. 자신의 딸이 겪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듣고 페테르의 삶은 달라진다. 하키를 정말 사랑했고, 베어타운을 아꼈던 그의 생각에 균열이 일어난다. 아니 시작은 마야에게서 시작했고, 그 균열이 서서히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파고든다.

 

그들은 적을 원했다. 이제 적이 생겼다. 그런데 그들은 딸아이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를 해친 사람을 추격하러 나서야 하는 건지, 그녀가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책임지고 적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건지, 그 둘이 같은 게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다. 증오가 그 반대말보다 훨씬 더 쉽다.

부모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교차적으로 서술했기에 <베어타운>은 인물 소개를 꼭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어렵지 않으나 많은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가 거의 같은 밀도와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료되지 않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이스하키 팀의 승리 그리고 그들에 대한 영웅 대접에서 마야가 당한 끔찍한 폭력 그리고 이 폭력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들까지. 그 생각을 드러내는 와중에 오가는 사람들의 많은 말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아래 문장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사회에서 허용하는 대로 하지."

 

<베어타운>이야기를 정통으로 관통하고 있는 이 메시지는 무섭고 서늘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 일이 베어타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베크만은 그것이 옳은지 나쁜지 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던지고 그는 문제만을 정확하게 말한 뒤 글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 작가였다.

 

 

이 소설은 포근한 표지와 달리 서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커다란 사회 문제로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가 저지른 잘못을 좀처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탓하는 게 익숙했던 사람들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다. 좋은 소설은 어떤 각도에서 어느 정도 밝기로 비추었을 때도 그 가치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주제의식이 커다랗기도 하고 동시에 작은 것이기도 해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과 각도로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처럼 강렬한 조명을 받을 때도 빛나고, 은은한 스탠드 속에서도 그 가치를 내는 소설. 표현하기 어렵지만, <베어타운>은 좋은 소설이었다. 프레드릭 베크만이 유머러스한 작가만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소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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