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칼이 되어줘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김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부서진 삶의 조각을 이어준
'편지', '일기' 그리고 '만남'에 대하여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한 남자에게서 편지가 온다. 야이르라는 남자가 말한다. 나를 보았고, 단번에 반했다고. 그래서 당신이 괜찮다면, 설사 괜찮지 않더라도 내 비밀 전부를 털어놓고 싶다고 말이다. 고작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를 관찰했다는 남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쓴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나에 대한 찬사도 있지만, 수시로 바뀌는 남자의 감정들과 그의 어린 시절 상처들이 짙게 남아있는 고해성사 그 자체다. 이미 부부의 연일 맺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에게 이 편지를 엄격하게 비밀로 부쳐야 한다. 남편뿐만 아니라 두 사람 외에 누구에게도 좀처럼 고백할 수 없는 내용이 담긴 이 편지들은 무려 8개월간 이어진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작. 그 시작이 점점 이어지는 방식은 "이해"나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개별적 존재에 대한 "이해"로 본다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난, 『나의 칼이 되어줘』의 야이르와 미리엄.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생(生)에 대한 간절한 "호소"로 보았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엄격하게 비밀에 부쳐야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요. 오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요. 오직 내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고, 그러면서 우리의 호흡이 서서히 한 박자로 맞춰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의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이 쓴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만으로 쏟아낼 수 있는 온갖 감정들이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어느 소설보다 섬세하고 열정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이 전해졌다. 아름다운 표현이 깃든 감정들의 높낮이는 인간의 감정의 바닥을 보여준다. 황홀한 행복과 지옥 같은 불행은 이야르는 순간순간 느낀다. 그가 이런 널뛰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녀의 편지가 늦어서, 깊은 밤이라서, 혹은 이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이유로 바뀐 감정을 글 속에 쏟아낸다. 그중에 그가 모욕적인 언사와 곧바로 미안하다는 사죄가 오가는 편지를 반복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와 깊이 닿아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종류죠?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지나치게 무거운 사랑이 놓여 있잖아요? 그걸 하찮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지난 며칠을 보내면서 난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낱말에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꽁꽁 묶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말이 틀렸으면 고쳐주세요.

 

만날 수 없고,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가진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야이르에게 미리암은 그런 존재였다.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미리암에게 야이르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움직이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그렇다고, "집착"이라고 보기에 편지 뒤에 나오는 일기가 분명 서로 오가는 감정들이 있었다고 말해주기에 확정적인 단어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감정을 쫓아가는 것이 『나의 칼이 되어줘』의 매력이다. 동창회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인 미리엄에게 느낀 감정. 그녀의 삶의 실체가 있는 존재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 단어로 그녀의 삶 속에 존재하고 싶은 야이르의 감정은 이중적을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했던 그는 그녀의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를 느낄 뿐만 아니라, 꽤나 심한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익명성을 담보로 한 야이르는 정말 솔직하게 자신 내면에 있는 욕망을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야이르의 이중적인 욕망에 대한 미리엄의 태도도 수용적이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미리엄이 야이르의 단어가 자신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일기"에서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야이르의 편지와 미리엄의 답장으로 두 사람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를 시작한다.

 

난 당신이 내 편지에 맨 처음 응답했을 때부터 알았어요. 당신이 내 한계를 넘어선 아주 먼 곳까지 나를 데려갈 거라는 사실을요. 그런데도 난 당신과 동행했어요. 왜 당신과 동행했을까요?

왜 하필 편지였을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쓴 편지여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편지는 시공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소통 수단이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시공간과 편지를 읽는 순간의 시공간이 엄연히 다르다. 지금 나의 감정을 토로하고 싶다면, 편지는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전화가 없던 시대였다면, 그럴 수 있지만. 텔레비전이 있을 정도로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은 편지라는 다소 고전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선택한다.


그리고 게다가 편지는 물질적인 흔적이 남는 매체다. 사실 각자 배우자와 아이가 있는데, 편지로 감정을 남김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애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파국을 부르는걸. 그런데도 만나지만 않았을 뿐 야이르는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미리암에게 보낸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남편이 편지를 발견할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짤막한 편지를 주고받던 무렵 당신이 물어본 적이 있죠.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요. 그제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본 뒤에 비로소 그때의 질문을 이해했어요, 단순히 '이해'한 게 아니에요. 내 몸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조금 움직였고, 깊숙한 곳에서 당신을 향해 뭔가가 울려펴졌어요.

 

『나의 칼이 되어줘』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왜 "편지"여야 했는지 말이다.

 

쓴 순간과 읽는 순간이 다른 시공성을 가지고 있고, 다시금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편지를 사용했다. 편지에 남은 단어는 말과 달리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확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달라지는 건 이 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처음 읽을 때와 그다음에 읽었을 때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읽는 사람의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편지를 쓸 때 어떤 감정을 느꼈고, 편지를 읽을 때 감정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야이르의 해석이 미리암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미리암의 의도를 야이르가 다르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로를 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편지에서 얼마나 많은 편지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일치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편지가 전달되는 과정 중에 오해 아닌 오해가 분명 있었다는 점이다. 사랑, 책망, 연민, 동정, 불안, 자책, 집착과 같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솔직한 인간의 감정을 토로하지만, 그 토로한 순간과 받아들여지는 순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고려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 오해의 가능성에 대한 배려나 고려조차 없이 쏟아내는 편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러면서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준 것인지. 서로의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스스로가 위로를 건넨 것인지조차 헷갈린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야이르와 미리암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로에게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만, 그 어려운 이야기는 내밀한 개인의 상처와 깊게 닿아 있다. 그 비밀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이야기하며 두 사람의 내면은 조금씩 달라졌다고 믿고 싶다. 즉, 서로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해주었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달려있었다고 난 믿는다. 왜냐하면, 슬픔을 극복하는 건,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때문이 아니라. 그 위로를 듣고 나서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는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야이르는 아버지가 가혹하게 그를 학대했던 기억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깊이를 말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아내 마야와의 갑갑한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보면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까지도, 그는 숨김없이 말한다. 혼자 끓어 안고 있을 때 점점 곪아 터지던 문제들이 미리엄에게 말하는 순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그 비밀을 홀로 간직했을 때 느낀 고독에서 해소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두 사람이 가진 상처에 대한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한시적인 8개월간의 편지가 말해주듯이,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제대로 목도할 수 있는 경험이었을 뿐이다. 그다음 단계는 스스로에게 달려있음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야이르의 심정이나 미리암의 감정을 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난 뒤에 오는 치유의 힘을 알고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비밀을 고백한 적 있다. 한 차례 전공 수업을 만난 교수님이었다. 그 수업이 끝난 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때 난 그 교수님의 기말고사 과제로 난 내가 그 당시에 홀로 감당한다고 믿었던 비밀을 적은 글을 과제로 제출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작은 고민이다.) 그 과제에 대한 성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 과제에 대한 어떤 코멘트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때 마음을 억누르던 상처 하나가 떨어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 소설 속에 "딱지에 부는 바람"처럼. 미묘한 상쾌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위안을 준다.

 

 

 


"편지는 거짓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고통을 가라앉혀주는 것도 아니지.
고통 때문에 내 존재의 밑바닥까지 끌려 내려간 순간에
발휘된 자비로운 여력이었을 뿐."

 

 

두 사람은 책에서 발견하지 못한 걸 편지에서 발견했다.
세상 어느 글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만족감을 편지를 통해서 느꼈다.
그 이유는 야이르의 편지가, 미리암의 편지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그 편지를 썼고, 그 편지에 대해 받은 답장을 두고,
스스로 해석했기 때문에 남다른 만족감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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