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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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루샤 애벗 양이 키다리 아저씨 스미스 씨에게 보내는 편지들
혹은
쓰는 사람은 몰랐던 연애편지






누군가는 들장미 소녀 캔디  누군가는 빨간 머리 앤  누군가는 보노보노  누군가는 곰돌이 푸  누군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생각하면 "사랑스러움"이 떠오른다고 한다. 나에게 "사랑스러움"의 대명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고를 수 있다. 바로,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느낀 열등감에 대해 숨기지만 키다리 아저씨에게는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는데 망설여지지 않는 모습.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좌절하기보다 그 모습을 바꾸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대학이라는 지성의 전당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모습. 그리고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주디 그 자체로도 무척 사랑스러운 존재가 바로 '주디'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주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문이 절로 나올 정도로 몹시 사랑스러운 '주디'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주디와 만남이 더 행복했던 이유는 나의 상상보다 더 아름답게 그림으로 주디를 담아낸 《키다리 아저씨》도 한몫을 했다. 주디의 미소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인디고 《키다리 아저씨》 리커버 북이 보여주었다. 물론, 초판본에 엉성하게 담겨있던 주디의 그림들은 줄어들었지만, 소설을 읽으며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더 커졌다. 이미 초판본의 그림을 다 본 나에게 리커버 북의 일러스트는 조금 심심했던 주디의 그림 이상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새로운 《키다리 아저씨》와 어린 시절 읽었던 《키다리 아저씨》

'우울한 수요일'에서 시작해 '설레는 목요일'이 되기까지를 담은 《키다리 아저씨》. 어린 시절 읽었던 책도 있고, 이번에 새롭게 읽은 책을 나란히 놓으니 기분이 오묘하다. 망설임 없이 내 첫 로맨스 소설은 《오만과 편견》이라고 말했는데,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으며. 《키다리 아저씨》가 내 첫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 쓸 때 본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가, 연애편지 소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국은 연애편지들이었으니. 이걸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아야 할까 싶다가도, 말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주디의 사랑 이상으로 주디가 대학에 4년 다니는 동안 성장한 이야기가 《키다리 아저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편지마다 성장한 모습이 은연중에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에 비해, 영상화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콘텐츠 중 하나다. 충분히 영상화되어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이상하게 《키다리 아저씨》는 그 자체가 콘텐츠화 되기보다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캐릭터가 부각돼 다른 콘텐츠 속에 녹아든 경우가 많다. 물론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은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 있지만)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편지가 주는 그 감동을 영상으로 담기 어려워서다. 편지. 글이 주는 그 즐거움은 오로지 책으로 느꼈을 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키다리 아저씨》를 가장 잘 즐기는 법은 당연히 책이다.

그래서 전 평의원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어요.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그냥 저 혼자 부르는 애칭이니까요. 그러니까 리펫 원장님께는 비밀로 하기로 해요.
이렇게 사랑스럽게 애칭을 만들어주는 '주디'의 편지를 읽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설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난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스 도련님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주디처럼 똑같이 놀랐던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 결말 이전의 말랑말랑한 감정을 두고 읽으니. 마치 내가 저비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몇 번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지만, 이번에 읽었을 때 주디가 가장 사랑스러웠다.





고아원에서 18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그 사실은 주디에게 '우울한'이라고 표현할 만큼 힘든 시간이고, 이따금 주디의 삶에 그림자를 그리기도 하고,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일부다. 사실 이 요소는 꽤 우울한 사실이고, 무거운 현실이다. 주디에게 갑자기 부모님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혹은 나타나시더라도 바뀌지 않을 현실 그 자체다. 이 사실이 소설에서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괴로움을 경쾌하게 자기화한 문장으로 써 내려갈 줄 아는 주디의 글 덕분이다. 그리고 그 글이 ""안의 문장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주디의 편지로 옮겨져서 좋았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말이 주디의 생각과 해석이 더해져 그려진다. 우리는 등장인물 모두를 주디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본다. 그게 편지가 가진 힘이다.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게 편지가 가진 힘이다.
그런데 서간체 형식의 소설은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다. 편지라고 함은 특정한 한 사람을 생각하며 특정한 한 사람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관계자가 아닌 누군가가 볼 때, 처음에는 엿보는 듯 두근두근 설렐 수 있지만. 그 길이가 길어지면 지루해질 수 있고, 무료해질 수 있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 지루해질 틈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매워준다. 글을 읽으며 다 채우지 못했던 상상의 공백을 그림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주디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사랑스러움 자체를 오히려 더 키운다.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책을 부르는 책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앎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읽었던 책을 보고, 나 역시 읽을 책으로 삼았다. 어린 시절 "아니, 이게 상식이라고?"라고 흠칫 놀라며 말이다. '미켈란젤로' 정도가 대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가 주디가 되어 대학교에 있을 때, 과연 주디와 다른 반응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 대답은 아니었고, 나처럼 모르는 주디는 열심히 부족함 지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주디가 재미있게 읽었고, 알려고 노력했던 것들을 하나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생각엔 제가 어떤 책을 좋아할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요즘 저는 좋아하는 책이 사흘에 한 번씩 바뀌거든요. 지금 가장 좋아하는 책은 《폭풍의 언덕》입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그 책을 쓴 에밀리 브론테는 하워스 교회 뜰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대요. 평생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히스클리프 같은 남자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까요?"

사흘에 한 번씩 좋아하는 책이 바뀐다던 주디가 편지에 구체적으로 소설 이야기를 쓴 것은 "폭풍의 언덕"이 거의 유일했다. 물론, "작은 아씨들"이나, "제인 에어"도 있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적은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겁 없이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그리고 주디보다 훨씬 어렸던 난, 주디의 평에도, 평론가의 평에도, 그 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생각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보다, 그때의 나에게 주디와 저비스의 사랑처럼 직관적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 책 추천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제인 에어"는 이보다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책장보다 읽은 책장이 더 많아지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정말, 읽다 보니 금방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자신에게 온 행복을 온 맘을 다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주디와 함께해 내가 다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일상 속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느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알아가고 있다. 주디는 자신이 어디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 어디에서 슬펐는지, 어디에서 행복했는지, 어디에서 기뻤는지를 알고 이를 글로 적는다. 때로 그 감정의 중심에 다시금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얽혀있다고 해도 이를 밝히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솔직한 주디의 모습에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행복했다.


온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마음이 아파요. 그분이 곁에 없으니 아름다운 달빛도 원망스러워요. 어쩌면 아저씨도 누군가를 사랑해 봤을 테니 이런 제 마음을 아시려나요? 그렇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지 않대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지만요.
아무튼 제 마음은 그렇답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스미스씨가 지었을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그리고 왜 스미스씨가 주디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고, 지미와 가까워지는 걸 이해할 수 없는 '키다리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주디에게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몸이 아팠는지 등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주디는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키다리 아저씨》의 결말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아 아쉽다. 아무래도 《키다리 아저씨》 속편을 읽어야겠다. 샐리의 편지 중간중간 나올 주디와 스미스씨의 사랑을 엿보기 위해서 말이다.

《키다리 아저씨》의 리뷰는 주디가 쓴 편지 중 가장 멋진 인사말을 따서 마무리 지어본다.
(스티븐슨의 편지글을 인용한 인사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작별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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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 크기의 생물학
모토카와 타츠오 지음, 이상대 옮김 / 김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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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에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시간은 유일하고 절대 불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저자가 쓴 첫 문장을 보고 나 역시 놀랐다. "동물에 따라 시간이 달리 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첫 문장에서부터 배울 점이 많은 책이란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았다. 정말 난 이 개념을 처음 알았을까? 이렇게 문장으로 보았을 때는 마치 처음 듣는 개념 같았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미 강아지의 나이와 사람의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강아지를 기르셨다. 처음에는 꼬물꼬물 작았던 녀석이 내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훌쩍 커버리고, 또 너무 빠르게 이별의 순간이 왔었다. 아마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동물의 나이가 인간의 나이가 다르다는걸. 그리고 동물들 간에도 나이가 다르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강아지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함께 담겨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동물의 나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랐다. 동물의 시간이 다른 건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난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왠지 첫 문장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배울 점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은 한마디로 동물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동물학 책이다. 이름부터 생소한 동물학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동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재미있는 학문이다. 저자는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차근차근 답변을 해준다.


"동물들은 몸의 크기가 다른데, 그건 왜 그럴까?"
"동물이 움직일 때 사용하는 도구는 왜 사람의 도구와 닮지 않았을까?"
"동물의 호흡계나 순환계가 몸의 크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이렇게 발전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식물과 동물의 생장 단계에서 어떤 차이를 보일까?"
"곤충, 산호, 성게와 불가사리 무리의 적응 능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질문을 하나하나 읽으면, 입에서 툭 이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게, 왜 그러지?' 나도 그랬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그 설명이 궁금해서 책장을 넘겼다.




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처음 배운 것 중 하나는, 시간은 시계로 제기 때문에 배가 고프다고 제멋대로 점심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와는 관계없이 결정되는 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인간만이 아니라 곤충과 꽃, 짐승, 무기물까지도 모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초월적 절대자가 바로 시간이라고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저자의 경험처럼 우린 정해진 단위 속에서 살아간다. (문득 『단위의 세계』란 책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단위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정도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우린 그 감도에 무뎌지게 하는 공부를 오랫동안 했다. 사회가 정해진 시간에 따라가도록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도 같은 생각으로 바라본다.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속도로 느끼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 속에 동물이 함께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하지만, 동물을 정말로 사랑하고 함께 공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동물의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그 첫 단추로 '시간'을 꼽았다. 동물이 체감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이야기하고, 이를 계산하는 공식을 알려준다. 동물의 시간은 자신의 몸길이의 4분의 3제곱에 비례한다. 이건 단세포동물이나 변온동물이나 정온동물이나 모두 동일한 점임을 계산을 통해 증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이야기다. 동물의 시간은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만, 평생 동안 동물이 1kg당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을 계산하면, 시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 이 이야기는 코끼리가 평생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와 쥐가 평생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럼 도대체 보통 코끼리보다 일찍 죽는 쥐는 평생 동안 얼마나 분주하게 사는 걸까? 이를 두고 저자는 에너지 소비량이 체중의 4분의 3제곱에 비례한다고 이야기한다.


운동에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다면, 아무 목적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욕심을 부리면 얼굴에 나타나는 법이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헤엄치는 돌고래를 보고 있으면, 왜 이들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편애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알 것도 같다.


이렇게 소비하는 에너지가 평생 동안 같은 이유는 상식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대신, 이를 증명하는 과정에 조금 높은 상식을 요구할 뿐이다. 작은 동물에 비해 큰 동물은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확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저자는 코끼리의 사례를 통해서 이야기하는데, 코끼리는 빠르게 걷지 않는데, 그 이유는 움직이는 것 자체가 코끼리 스스로에게는 다리에 엄청난 무리를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끼리의 다리뼈를 보면 여러 번 골절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작은 동물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는데 제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수식으로 증명하다 보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위체중당 산소 소비량은 체중의 마이너스 4분의 1제곱에 비례한다. 즉 제중이 늘어나더라도 몸이 소비하는 산소 소비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는 뜻이 된다. 즉, 큰 동물일수록 체중에 비해 에너지를 적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코끼리보다 쥐의 조직이 같은 단위당 소비하는 에너지가 더 많다. 몸집이 클수록 세포 활동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왠지 동물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분명 나는 동물의 시간을 배우고 있는데, 인간의 시간이 동시에 겹쳐 보여서 더 재미있다.


이렇게 흥미로운 사실을  왜 배우지 않을까. 혹은 이 사실은 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꽤 흥미로운 사실인데도 말이다. 저자는  어떤 법칙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설명할 수 없으면 학문이 아니라는 생각은 당연하지만, 학문의 폭을 좀 더 넓혀서 비록 설명이 안되더라도 억지가 아니라면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이 비과학적이거나 논리의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산호 개체 하나하나에는 수명이 있지만, 군체에는 정해진 수명이 없다. 수명은 개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개체는 유전자를 넣어둔 일종의 주머니이며, 낡게 되면 새것으로 교체하는 식이다. 그래서 생물의 개체에는 수명이 있지만, 군체는 사정이 다르다. 산호의 군체는 오래오래 살아서 자꾸자꾸 커진다.

내가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다. 왜냐하면,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읽으며 가장 잘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난 산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부터가 흥미로웠다. 산호는 몸속에 조그마한 단세포식물이 함께 공생하고 있는데, 이 공생 과정에서 산호는 자신의 세포보다 훨씬 많은 조류와 함께하며 이들이 주는 영양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한마디로 산호는 그 자체가 생물이면서 생물들의 터전이 되는 신비로운 생물이다. 그리고 그 성장과정은 나무와 닮았다. 자신과 공생하는 조류가 광합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햇빛이 없는 곳에서 산호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나무와 마찬가지로 햇빛이 있는 곳에서 자라고, 깊은 심해에서 산호를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생장을 하는 산호 곁에 자신과 동일한 산호가 있다면 어떨까?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산호는 오히려 군체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하나의 산호가 다른 산호와 뭉쳐져 한 덩어리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산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게 되지만, 죽은 이후 석회질 껍질은 그대로 남아서 새로운 산호가 그 위를 덮어 산호 군체의 수명을 연장시켜준다.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일이 산호 군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떤 동물의 디자인을 발견해야 비로소 그 동물을 이해할 수 있다. '디자인'은 그 동물이 근거하고 있는 논리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은 결코 동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논리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이 동물학자의 커다란 사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왜 동물에 대하여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마지막에 한번 더 강조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 제대로 된 앎을 발견해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밝힌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조화와 균형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조화와 균형보다는 서로 간 거리감을 유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동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더 이 문제에 대해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했지만, 동물에게 어떤 관심을 보여야 할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내게 그 방향성을 알려줄 수 있는 책을 이제껏 만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은 쉽고 간결하게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동물을 사회나 감정적으로 다루는 책들과 달리 하나의 생명체로 동물의 존재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동물의 생장 과정을 물리학적으로 접근한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은 다른 동물에 대해 서술한 책들과 분명 달랐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읽다 보면 어렵게 느껴지는 수식과 도표 속에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정의 배려들이 눈에 들어온다.


동물과 함께 공생한다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시작점으로 동물들이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한다. 동물은 어떻게 존재하고, 동물은 어떤 속도로 살아가며,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지. 그 모습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말이다. 과학적 방법론을 취하지만, 저자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책을 읽다 보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과학적으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알고 보면 이 책은 동물을 정말 사랑하는 동물학자의 사랑이 담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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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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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알쓸신잡>에서 "소설가는 언어를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소설가는 사람의 감정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스무 살 이란 나이의 복합적인 감정을 이토록 담담하고 매력적이게 담아내다니. 그는 과연 사람의 내밀한 그 감정을 글로 풀어낼 줄 아는 대가였다.  『노르웨이 숲』,  『해변의 카프카』,  『1Q84』 등.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길었다. 사람의 감정을 글로 전하기 위해 그는 모래알 한 알 한 알을 쌓아 올리듯 글을 쓴다. 그의 글을 읽을 때면 숨을 죽이고, 글에만 몰입하곤 했다. 이렇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어떤 결을 지니고 있는지 나를 비롯해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가 내놓은  『버스데이 걸』은 조금 달랐다. 쉽게 '길이가 짧아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단숨에 한번 읽은 책을 다지 집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의 결을 찾아서. 


『버스데이 걸』. 제목이 이러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스무 살과 생일로 가득 찬 글을 읽다 보면 '스무 살 생일'이 머리 안을 맴돈다. 그리고 마법에 빠진 듯 어느 11월 17일 604호실에서 들어갔다가 나와, '작가 후기'를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에 툭 걸린다.

"당신은 스무 살 생일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그의 질문에 난 고개를 저었다. 난 스무 살 생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일기장을 들춰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여느 생일이 일기장을 들춰보지 않아도 기억이 나는 반면. 스무 살 내 생일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제법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을 것이다. 카카오톡을 처음 시작한 해였으니,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이더라도, 카톡으로 생일 문자를 받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 년 중에 딱 하루, 시간으로 치면 딱 스물네 시간, 자신에게는 특별한 하루"라고 하지만, 그 하루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다니.


그에 대한 변명을 조금 늘어놓자면, 내 생일은 3월에 있다. 그래서,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이하는 해의 생일을 좋아하지 않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에 입학해 맞이한 생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스무 살 생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한국 나이로 스물한 살, 세계 통용의 스무 살 그 이후로 맞이한 생일들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생일 마나 소소한 이벤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버스데이 걸』의 주인공처럼 고단한 일상과 마법 같은 선물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 『버스데이 걸』의 작가처럼 마지막까지 즐거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어서 마치 인생을 암시하는 듯 우울해지는 하루가 아니어서 일 수도 있다. 평온한 어느 하루처럼 지나가서 기억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혹은 기억도 하지 못할 스무 살 생일을 보낸 내가 스무 살 생일의 감정을 『버스데이 걸』에서 찾았다. 특별한 생일에 대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생일은 (여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참 우울하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바꿔주기로 한 친구가 몸이 좋지 못해 결국 일터에 나왔고, 스무 살 생일을 함께 보낼 거라고 믿었던 남자친구와는 지난주에 어떤 일로 소원해졌다. 그리고 게다가 6층에 있는 아르바이트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식당의 주인에게 식사를 전달해야 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머피의 법칙처럼 보이는 그녀의 생일이 이대로 진전되었다면, '특별한' 생일이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녀는 생각했다. 상당히 기묘한 말투다. 내가 대체 무엇을 원한다는 것인가."

기묘한 말투를 쓰는 알 수 없는 식당 주인. 그가 그녀의 생일에 새로운 변화점을 만들어준다.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일까.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몇 마디 말만 주인공에게 할 뿐, 특별히 주인공에게 무엇을 주지는 않는다. 몇 마디 말이, 고작 몇 마디 말이 아니라 그 말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준다. 그리고 그 말속에 정확하게, 스무 살에 내가 가졌던 그 낯간지럽던 단어의 감촉을 표현한 부분과 정확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속으로 '아니 이걸 어떻게 알았지.'라고 말했다.


 

아가씨, 오 분쯤만 자네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는가?


노인이 말했다.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네."

아가씨
그 단어를 듣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나도 스무 살에 '아가씨' 혹은 '~씨'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주인공처럼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혹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 스무 살이 되어서 그럴까? 별거 아닐 수 있는 '아가씨'라는 단어가 낯간지러웠다. 늘 학생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는데. 그때는 이 단어 하나도 신기했었다. 처음 듣는 단어이기도 했고, 성인이라는 걸 처음 인정받았던 때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보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그 낯섦. 그리고 '난 아직 아닌데..'라는 생각이 교차해 만든 쑥스러움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를 포착해 내용에 넣은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굵은 글씨로 '아가씨'를 처리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스무 살에 느낄 수 있는 그 감성을 포착해 썼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이 된 참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무 살이 된 주인공의 모습은. '아가씨'란 말에 얼굴을 붉힌 사람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담담하게 자신의 생일임을 말한다. 그녀의 말에 자신의 생일이니 축하를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이 나온 지 정확하게 스무 해가 지났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생 한 번뿐인 생일에 대해 주인공은 지나칠 정도로 덤덤하다. 아마도, 스무 번째 생일에 덮치고 덮친 악재들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암담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너무나도 담담하게 스무 번째 생일을 말한다.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스무 살 생일이라는 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것이야. 그리고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네. 아가씨."라는 말을 하며 담담해하는 주인공에게 무심한 듯, 축하를 전한다. 술 한 모금과 함께. 그리고 소원을 묻는다. 기묘한 말투로. 

 

『버스데이 걸』의 핵심은 이다음에 시작된다. 어떤 생일을 받고 싶은지 묻는 질문과 어떤 생일 선물을 받고 싶다는 답이다. 그리고 『버스데이 걸』은 질문은 보여주지만 답은 들려주지 않는다. 이미 스무 살의 생일을 지나왔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스무 번째 생일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딱 한 가지야.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도로 물릴 수는 없다네.

 

이 깜짝 선물에 뭐라고 답을 할까. 아마 주인공처럼 "내가 뭔가 소원을 빌면 그게 이루어지는 건가요?"라고 반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한 목소리로 묻는 소원의 유무를 다시금 묻는다면. 나도 아마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미인이 되고 싶거나, 똑똑해지고 싶거나, 부자가 되고 싶거나 하는 식의 답을 하지 않았을 자신은 없다. 지금의 나라면 말이다. 하지만 막 스무 살이 된 때의 나라면, 그런 소원 말고 다른 소원을 빌었을 것 같다. 그 소원이 주인공과 같을지는 알 수 없다.

나라면,

내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왠지 주인공이 빌었을 "그런 소원"이 이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시간이 걸려서 이루어지는 소원이고,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소원이라면. 이보다 더 적절한 소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한 사람(혹은 요정)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게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무 살이기에 어색하기보다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일 년 중에 그리고 내 생에 단 한 번뿐인 스무 살의 생일이 아닌가. 그런 날에 비는 "그런 소원"은, '시간이 걸려서' 평생에 거쳐서 이루어질 스스로에게 뜻깊은 소원인 게 좋지 않을까. 그게,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스무 살 다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내 스무 살을 곱씹어 본다. 내 기억에 비어있는 스무 살 생일에 『버스데이 걸』의 생일을 넣어두면 어떨까. 시간이 걸려서 이루어질 소원을 빌었던 생일로 나도 기억하고 싶다. 아니, 기억하려 한다.


『버스데이 걸』 어디에도 기발한 상상력, 섬세한 감성도 없다. 그저 스무 살이라는 소녀와 아가씨의 경계에 선 사람의 감정이 담겨있다. 스무 살 생일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옅은 미소를 지을 정도의 감성 그 자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책을 만나는 건 정말 어렵다. 정말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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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그런 마음
김성구 지음, 이명애 그림 / 샘터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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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산문이 좋습니다. 솔직 단백하고 무엇보다 짧지만 그 길이로는 가늠할 수 없는 여운을 주는, 이런 산문이 저는 참 좋습니다. 아, 수려하게 적힌 글은 아닙니다. 또 롤러코스터를 탄 듯 생의 기복이 남다른 사람의 글도 아닙니다. "김성구"라는 개인의 삶의 순간을 기록한 글입니다. 굴곡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비교하면 심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심심함이 이 수필집의 묘미입니다. 분명 그만 겪었던 일들을 적은 글인데, 이상하게 내 삶의 순간과 포개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에 그의 삶이 포개지 지기 보다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 더 자주 떠올랐습니다.

샘터 김성구 대표가 전하는 "좋은 마음"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성구씨는 1995년부터 《샘터》를 발행한 발행인이자, 잡지로 독자들과 만났던 칼럼니스트였습니다. 『좋아요, 그런 마음』은 수만 독자들과 글로 소통한 것을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글 아래 붙은 연도가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10년도 더 전에 적힌 글들이 2018년 4월 어느 날 읽는 제 마음속에 와닿아 울림을 줍니다.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사실입니다. 글이란, 시공간을 넘나들어 메시지를 주는 법이니까요. 그런데도 이 사실에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건 십여 년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글들에 변치 않을 가치들을 글로 잘 표현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글에는 우리가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것들이 담겨있습니다. 잃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잃어버리길 권하는 사회에서 이를 따뜻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 글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그런 그의 글은 《샘터》와 닮아 있습니다. 많은 글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으로 꽉 차지 않은. 알맞은 글의 밀도를 가지고 있는 잡지와 그의 글은 닮아 있습니다. 넌지시 독자들에게 마음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샘터》와 가장 닮아 있는 지점입니다.
요즘 SNS를 보면, 나 빼고 모두 다 잘 지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어느새 마음에 열등감이 자리 잡곤 합니다. 그 순간을 그는 두 페이지 남짓한 글로 그 열등감을 아주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공한 인생이라고 인정받는 분들조차도 드러내놓지 않아서 그렇지 종기처럼 갖고 있는 게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있어서 열등감은 더 이상 고질병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자극제로 삼거나 더 나아가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치료제로 이용하지요."

만약 그 글의 첫 문장이 위문장이었다면, '에이, 모야.'라고 말하며,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뻔한 이야기라 생각하며 여느 평범한 글들과 다를 바 없다며 외면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먼저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한 가지씩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라는 글을 시작하고 마무리합니다. 그의 글에는 훈계나 자랑이 없습니다. 자신이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오며 배운 지혜들만 모여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혜라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변한 어르신들에게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는 연륜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속에 마주한 경험을 어떻게 자기 화해 왔는지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축적해온 시간이 많을수록 지혜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꼭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역'은 반드시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좋아요, 그런 마음』입니다. 40대 초반에 주례사를 해야 하며 했던 고민을 따라가면, 지혜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좋아요, 그런 마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그의 가족입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의 성찰 곁에 함께합니다. 그 대상이 부모님이 될 때도 있고, 아내가 될 때가 있고, 자식들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대상은 조금씩 달라져도, 이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예쁜 문장에 담아낸 것도 아니고,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요, 그런 마음』를 다 읽고 나면, 가족들 생각이 저절로 나는 이유는 아마, 그의 글 곳곳에 나타난 가족들의 자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처럼, 여기서 생각을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상에 홀로, 나만의 개성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건 관계란 생각이 듭니다. 내 주변의 가족들과 맺은 인연과 관계들이 내 안에 축적되어 발현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자라며 부모님께 받은 영향력 중 어떤 것은 고스란히 남기도 했고, 어떤 것은 조금 독특하게 남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개인은 홀로 우두커니 사회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피어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글 전반에 은은하게 드러납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래 문장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좋은 옷을 버려서는 안 되듯이 우리 인생, 가족은 절대 포기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출한 딸과 이를 두고 아내와 다투어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느끼는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혹시 지금의 가족들 사이가 마냥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넌지시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아요, 그런 마음』에서 보기 드문 절박함이 담긴 글이었고, 엉클어져 있는 단추를 찾지 못하고 막막한 개인만을 보고 가족을 뒤로하는 잘못된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필요한 글이란 생각이 듭니다.

 

 


"꿈이나 이상은 늘 현실을 직시할 때 좁은 문을 살짝 열어줍니다.
자, 그럼 이제 대답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에게 행복은 무엇이지요?"

저자는 조급하고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호흡을 되찾을 수 있는 호흡법을 알려주는 사람 같습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시달리며, 마치 당장 잡지 않으면 달아날 것이 행복인냥 생각하고, 어차피 잡을 수 없는 행복이라면 내가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요즘에  저자의 질문은 조금 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의 질문을 단순히 세상의 모든 것을 욕심내지 말고, 원하는 행복의 양과 크기를 줄이라는 메시지로 생각한다면 촌스러운 이야기처럼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크기를 줄인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을 세상이 만든 비교하는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을 가리킵니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채울 수 있는 만족감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적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저자는 말합니다. 아, 그렇다고 작지만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소확행"은 아닙니다. 아,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저자의 저 명쾌한 질문에 답을 내놓기가 더 어려워지네요.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생각화 간접경험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무한한 삶의 경험을 모두 본인만의 체험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자신만의 좁은 세상에서 보다 넓고, 다양한 삶을 여행할 수 있는 책의 세상에 한번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4월 23일은 책의 날이었습니다. 그때 이 문장을 읽어서인지.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생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은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가리켜 다른 세계와 만나는 여정이라고 칭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런 마음』에서 저마다 자신에게 와닿는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걸어본다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을 촘촘히 기획한 김성구씨의 좋음 마음 덕에 생각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책과 어울리는 굿즈, 때밀이 수건!


책과 함께 받을 수 있는 '한번 밀어주라' 때수건과 책갈피! 피식 웃음이 나오는 굿즈였다.


내가 받은 굿즈 가운데, 우리 부모님이 느끼시기에 실용성 최고는 이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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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 - 매일같이 털리는 직장인에게 필요한 멘탈 스트레칭 에세이
불개미상회 지음 / 허밍버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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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털리는
직장인에게 필요한
멘탈 스트레칭 에세이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가 한가득 담겨 있는, 웃픈 공감 에세이다. 정말,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픈, 웃픈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책이다. 직장생활에서 누구나 한번씩 겪었을 법한 일들을 한컷의 만화로 풀어낸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저자의 이름부터 남다르다. "불개미상회".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재미있는 닉네임을 사용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저자가 개인이 아니란다. 춘천에 있는 소규모 디자인 회사로, 디자인 일 외에 "직장생활 툰"을 그렸다고 한다.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를 여느 직장인처럼 받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지점을 발견해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직장생활이란 쉽지 않다. 아마 그 이유는 직장생활을 하며 '나'를 잃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직장생활 중에 ‘나’를 지켜내며 ‘타인’과 공존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직장인들의 실제 경험이나 동료들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친구의 직장동료 이야기가 모두 모인 결과물이라 남다른 공감을 자아낸다. 과연 이를 만들고 회사에서 어떤 반응을 얻었을지 궁금하다. 실제 회사의 구조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직장인들의 애환을 너무 잘 다루고 있다.

 

 

 


수정과 수정을 더한 시안을 빠꾸 반은 야근자,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월급, 진짜 가족들이 모여있는 회사, 남들 피서갈 때 회사로 피서오는 일까지. 회사생활을 하며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이야기를 한컷 만화로 만들어 회사생활의 민낯을 비꼬며 보여준다. 그 안에 담겨있는 야근, 선배, 후배, 상사, 월급, 점심시간마다 반복하는 일상을 보고있노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철저하게 각자생존을 주장한다. 내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회사생활. 모두가 함께 살기 보다, "나부터 살고 보는 궁극의 기술"을 말한다. "이게 옳지 않을까"라는 당위적인 생각에 앞선, "이렇게 하고 싶어."라는 본능에 충실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본능이 잘못된 걸까?
조금만 생각해도 "나만 생각하는 본능"이 나쁘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가 보인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누군가를 챙길 여유는 별로 없다. (직장생활을 해본적은 없지만, 왜 이렇게 공감이 가는지... 책을 읽으며 내 눈가에 스치는 무언가가 웃으며 흘리는 눈물인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가 없다..) 나만 챙긴다고 표현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내 몫이라도 제대로 하기도 쉽지 않고, 남에게 폐안끼치는 것도 힘들다. 나 혼자 내 몫을 잘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나라도 잘챙기겠다고 말하는 데 눈살을 찌푸릴 직장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사실 남을 위해서도. 나만 생각하는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심오한 "나혼자 잘 살겠다"는 메시지의 이면을 다루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때로는 지나칠정도로 나혼자 해야할일이 많아서 웃픈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은 많고 그 일은 혼자서 혹은 정말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상황도 있다. 팀이라고 하지만, "선배님 노는 어떻게 저어요?"라며 바라보는 후배를 보는 팀원 총 2명의 팀장님의 웃픈 상황도 있다.

하지만, 인력 충원을 했는데... 그 충원된 인력이 사공이 아니라 짐이 된다면... 더 슬픈 상상은 그만 하자.

직장생활을 하면, 사람이랑 안맞아서 하는 고민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하는 고민까지 보니, 어느 상황도 편치 않은 현실에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시원한 한방이 담겨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만, 나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시원하게 던진다. "사장에게, 직장상사에게, 후배에게". 이 시원한 한방은, 마치 뒷담화를 하는 것 같은 쾌감과 닮아 있다. 직장생활에 대한 뒷담화를 하다가, 친구가 내 일처럼 욕해주는 순간 풀리는 해소같다. 한컷 만화로 나도 긁지 못한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꽤 많은 만화가 담겨 있고, 아마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가지 상황은 겪었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며 이정도 일을 겪지 않았다면, 정말 엄청난 긍정적인 사람이거나 혹은 금수저 가운데 금수저가 아닐까. 보통 중의 보통에 속하는 우리는 만화 한컷 한컷에 웃고 운다.)
모두가 꾹 참을 수 밖에 없는 그 갑갑한 현실을 향한 사이다 한방을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마치, 내 회사처럼 생각했으면 진작에 쉬었을 것이란 말에 공감하지 않을 직장인이 어디에 있을까? 뿐만 아니라 어느 장단에도 맞출 수 없어 마이웨이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나, 회식비를 월급으로 왜 넣어주지 못하느냐고 꼬집는 내용은 고구마 같은 직장생활을 뚫어줄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 같다. 어쩌면 실제 직장인들이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 대신하는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가 전하는 건 "무심한 듯 툭 더하는 위로와 힘들지만 그럼에도 버티는 우리들을 향한 응원"이란 생각도 든다.

 

 

 


나부터 챙기는 작은 잽 01~13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에서 가장 오랫동안 눈이 머물렀던 장들이다. 나부터 챙기는 작은 팁이 아니라, 잽이란다. 직장생활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날리는 공격 속에 개인이 날릴 수 있는 공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법에서, 스트레스 해소하는 방법은 아주 소소한 잽이다. 생존을 위한 아부법이나 업무 실수 대처법이나 퇴사 충동 극복법과 같이 매우 실질적인 이야기들까지 나온다. 과연 이 잽들이 얼마나 강력한 한방이 될지, 직장인 분들이 검증해주면 좋겠다. 아마 많은 직장인 분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의 화두가 "워라벨"이다. 워라벨의 "WORKING"을 담당하는 직장생활을 꼬집는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직장생활에 삶의 자리를 많이 내준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모습 자체다. 아직 사회 구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기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하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아직 "워라벨"이라는 논의가 더 적극적으로 공론화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적극적인 공론화가 이루어지기 전 타협점으로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가 사랑받는 것이 좋지만. 언젠가,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같은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 책 속의 웃픈 상황이 정말 웃긴 상황으로 바뀔 날을 꿈꾸는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를 응원한다.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는 아직 직장인을 동경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는 나에게 "예비 직장인"을 위한 호신술 같았다. 내가 지금 당장 느끼는 문제도 아니고,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회사에 다닐 거면 이정도는 알아야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느낌 나만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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