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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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루샤 애벗 양이 키다리 아저씨 스미스 씨에게 보내는 편지들
혹은
쓰는 사람은 몰랐던 연애편지






누군가는 들장미 소녀 캔디  누군가는 빨간 머리 앤  누군가는 보노보노  누군가는 곰돌이 푸  누군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생각하면 "사랑스러움"이 떠오른다고 한다. 나에게 "사랑스러움"의 대명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고를 수 있다. 바로,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느낀 열등감에 대해 숨기지만 키다리 아저씨에게는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고백하는데 망설여지지 않는 모습.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좌절하기보다 그 모습을 바꾸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대학이라는 지성의 전당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모습. 그리고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주디 그 자체로도 무척 사랑스러운 존재가 바로 '주디'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주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문이 절로 나올 정도로 몹시 사랑스러운 '주디'를 다시 만나고 싶었고,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주디와 만남이 더 행복했던 이유는 나의 상상보다 더 아름답게 그림으로 주디를 담아낸 《키다리 아저씨》도 한몫을 했다. 주디의 미소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인디고 《키다리 아저씨》 리커버 북이 보여주었다. 물론, 초판본에 엉성하게 담겨있던 주디의 그림들은 줄어들었지만, 소설을 읽으며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더 커졌다. 이미 초판본의 그림을 다 본 나에게 리커버 북의 일러스트는 조금 심심했던 주디의 그림 이상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새로운 《키다리 아저씨》와 어린 시절 읽었던 《키다리 아저씨》

'우울한 수요일'에서 시작해 '설레는 목요일'이 되기까지를 담은 《키다리 아저씨》. 어린 시절 읽었던 책도 있고, 이번에 새롭게 읽은 책을 나란히 놓으니 기분이 오묘하다. 망설임 없이 내 첫 로맨스 소설은 《오만과 편견》이라고 말했는데,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으며. 《키다리 아저씨》가 내 첫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 쓸 때 본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가, 연애편지 소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국은 연애편지들이었으니. 이걸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아야 할까 싶다가도, 말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주디의 사랑 이상으로 주디가 대학에 4년 다니는 동안 성장한 이야기가 《키다리 아저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편지마다 성장한 모습이 은연중에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에 비해, 영상화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콘텐츠 중 하나다. 충분히 영상화되어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이상하게 《키다리 아저씨》는 그 자체가 콘텐츠화 되기보다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캐릭터가 부각돼 다른 콘텐츠 속에 녹아든 경우가 많다. 물론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은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 있지만)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편지가 주는 그 감동을 영상으로 담기 어려워서다. 편지. 글이 주는 그 즐거움은 오로지 책으로 느꼈을 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키다리 아저씨》를 가장 잘 즐기는 법은 당연히 책이다.

그래서 전 평의원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어요.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건 그냥 저 혼자 부르는 애칭이니까요. 그러니까 리펫 원장님께는 비밀로 하기로 해요.
이렇게 사랑스럽게 애칭을 만들어주는 '주디'의 편지를 읽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설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난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스 도련님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주디처럼 똑같이 놀랐던 경험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 결말 이전의 말랑말랑한 감정을 두고 읽으니. 마치 내가 저비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몇 번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지만, 이번에 읽었을 때 주디가 가장 사랑스러웠다.





고아원에서 18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그 사실은 주디에게 '우울한'이라고 표현할 만큼 힘든 시간이고, 이따금 주디의 삶에 그림자를 그리기도 하고,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일부다. 사실 이 요소는 꽤 우울한 사실이고, 무거운 현실이다. 주디에게 갑자기 부모님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혹은 나타나시더라도 바뀌지 않을 현실 그 자체다. 이 사실이 소설에서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괴로움을 경쾌하게 자기화한 문장으로 써 내려갈 줄 아는 주디의 글 덕분이다. 그리고 그 글이 ""안의 문장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주디의 편지로 옮겨져서 좋았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말이 주디의 생각과 해석이 더해져 그려진다. 우리는 등장인물 모두를 주디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본다. 그게 편지가 가진 힘이다.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게 편지가 가진 힘이다.
그런데 서간체 형식의 소설은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다. 편지라고 함은 특정한 한 사람을 생각하며 특정한 한 사람이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관계자가 아닌 누군가가 볼 때, 처음에는 엿보는 듯 두근두근 설렐 수 있지만. 그 길이가 길어지면 지루해질 수 있고, 무료해질 수 있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 지루해질 틈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매워준다. 글을 읽으며 다 채우지 못했던 상상의 공백을 그림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주디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사랑스러움 자체를 오히려 더 키운다.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책을 부르는 책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앎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읽었던 책을 보고, 나 역시 읽을 책으로 삼았다. 어린 시절 "아니, 이게 상식이라고?"라고 흠칫 놀라며 말이다. '미켈란젤로' 정도가 대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가 주디가 되어 대학교에 있을 때, 과연 주디와 다른 반응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 대답은 아니었고, 나처럼 모르는 주디는 열심히 부족함 지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주디가 재미있게 읽었고, 알려고 노력했던 것들을 하나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생각엔 제가 어떤 책을 좋아할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요즘 저는 좋아하는 책이 사흘에 한 번씩 바뀌거든요. 지금 가장 좋아하는 책은 《폭풍의 언덕》입니다. 아주 젊은 나이에 그 책을 쓴 에밀리 브론테는 하워스 교회 뜰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대요. 평생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고요. 그런데 어떻게 히스클리프 같은 남자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까요?"

사흘에 한 번씩 좋아하는 책이 바뀐다던 주디가 편지에 구체적으로 소설 이야기를 쓴 것은 "폭풍의 언덕"이 거의 유일했다. 물론, "작은 아씨들"이나, "제인 에어"도 있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적은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겁 없이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그리고 주디보다 훨씬 어렸던 난, 주디의 평에도, 평론가의 평에도, 그 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생각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보다, 그때의 나에게 주디와 저비스의 사랑처럼 직관적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 책 추천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제인 에어"는 이보다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책장보다 읽은 책장이 더 많아지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정말, 읽다 보니 금방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자신에게 온 행복을 온 맘을 다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주디와 함께해 내가 다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일상 속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느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알아가고 있다. 주디는 자신이 어디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 어디에서 슬펐는지, 어디에서 행복했는지, 어디에서 기뻤는지를 알고 이를 글로 적는다. 때로 그 감정의 중심에 다시금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얽혀있다고 해도 이를 밝히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솔직한 주디의 모습에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행복했다.


온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마음이 아파요. 그분이 곁에 없으니 아름다운 달빛도 원망스러워요. 어쩌면 아저씨도 누군가를 사랑해 봤을 테니 이런 제 마음을 아시려나요? 그렇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지 않대도 달리 설명할 길은 없지만요.
아무튼 제 마음은 그렇답니다!





이 편지를 읽으며 스미스씨가 지었을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그리고 왜 스미스씨가 주디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고, 지미와 가까워지는 걸 이해할 수 없는 '키다리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주디에게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몸이 아팠는지 등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주디는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키다리 아저씨》의 결말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아 아쉽다. 아무래도 《키다리 아저씨》 속편을 읽어야겠다. 샐리의 편지 중간중간 나올 주디와 스미스씨의 사랑을 엿보기 위해서 말이다.

《키다리 아저씨》의 리뷰는 주디가 쓴 편지 중 가장 멋진 인사말을 따서 마무리 지어본다.
(스티븐슨의 편지글을 인용한 인사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작별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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