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죽음 공부
최준식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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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우리는 저마다 가정을 일구고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함께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젠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영원한 이별의 순간, 바로 죽음이다. "야! 죽는 거 이야기하지 마. 재수 없어!" 이 말이 낯설지 않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한 마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에 대해 금기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나는 유독 더 심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죽음'을 마주한 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유난히 더웠던 초여름에 부모님 손을 잡고 시골로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난 장례식장도, 장지에도 가지 않았다. 정확하게 부모님께서 가지 못하게 외할머니 댁에 나와 동생을 두고, 두 분이 장례를 위해 가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동생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말로만 들었을 뿐 방학 때와 다름없이 외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뒤, 내가 할머니 댁으로 갔을 때 이미 할머니의 흔적은 할머니 방, 그 공간만 남아 있고 많은 물건들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 후에도 친척 분이 돌아가신 일이 있었지만, 내가 장례식장을 간 건 20대가 되고서였다. 그제야 부모님과 인터넷을 빌려 '장례'에 대해 배운 뒤 장례식장에 갔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임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좀처럼 배우지 못했다. 나 역시 나의 죽음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몇 차례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에 있어서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고, 그 사람과의 이별은 결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저마다 다른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몇 차례 임종을 바라본다고 하여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경험'으로 배우기엔 가슴 아프고, 힘겨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하면 삶을 품위 있게 마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임종을 어떻게 준비해야 이번 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느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맞이하기 위한 방법이 존재할까?
저자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라는 슬로건으로 '임종학 강의'를 펼친다. 그 임종학 강의를 엮은 것이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다. 우리는 삶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죽음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을 살아가며 "죽음"이란 화두를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 듣는 죽음에 대한 소식들을 듣는다. 죽음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혹은 내 삶을 뒤흔들어버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이 처음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인식하면 삶의 진리와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하게 됩니다.


저자는 죽음은 회피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회피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이 임박했을 때 생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기 보다, 나의 삶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연명 의료"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몇 분 혹은 며칠, 몇 달 운이 좋으면 몇 년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연명 의료"를 '최후의 희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회생 불가능한 환자에게 독한 약을 투여하는 것은 오히려 환자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마저 제대로 보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또 생을 계속 살아야 하는 가족에게 많은 의료 비용을 사용하게 해,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저자는 연명 의료 보다,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의료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극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강한 진통제를 처방해 보다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우리는 보통, 삶을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오해다. 저자는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삶을 잘 마무리하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할 때, 우리는 삶을 제대로 완성해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죽는' 사건 하나만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족들이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끝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죽음에 대해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가, 나의 주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떻게 이별해야 하는가를 모두 다루고 있다. 환자의 임종을 곁에서 함께 해야 하는 가족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가족을 바라보는 유족들이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가볍지 않고 간결하게 그 방안을 제시한다. 임종에 임박한 가족 구성원이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보다 삶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하는 말을 건네는 방법, 아직 우리나라에는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임종실의 필요성에 이르기 포괄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린 글을 쓴다. 특히, 사별에 대한 10단계의 태도는 그 단계마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며, 슬픔에서 헤어나는 방법을 알려준다.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장례 절차에 대해 이야기하며 과연 고인을 기리는 장례 문화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화려한 장례식장보다 고인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유품을 전시하여 유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는 장례식 문화를 권면한다. 죽음은 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만, 사회 속에 속한 개인은 또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연결되어 있다. 가장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이 바로 유족들이다. 유족들의 삶이 다시 저마다의 삶의 궤도로 돌아왔을 때에 한 사람의 죽음이 진짜로 끝났다는 말은, 죽음 지닌 사회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입 밖으로 내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죽음은 엄연히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삶의 단계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하듯,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을 어떻게 맞이할지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준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를 읽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기보다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이란 학문의 세계를 열었던,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에 대한 집착'과 '생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거나, 피하거나, 때로는 금기시하지만,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더 나아가 죽음 자체가 삶의 한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생각의 끝에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생에 대한 궁금증"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생을 더 절박하게 살게 된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죽음은 삶의 한 단계다. 삶이 유한하14기 때문에 생은 더없이 빛나고, 소중해진다. 그 죽음을 금기시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삶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할 기회를 그만큼 늦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를 통해 나의 생이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지를 점검해볼 수 있었다. 책 제목은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너무 늦는 때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나의 삶에 대한 고찰은 언제 어느 때에 해도 늦음이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한다면 자신의 삶이 빛나는 순간을 보다 일찍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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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상회 - 거짓말 파는 한국사회를 읽어드립니다
김민섭.김현호.고영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 블랙피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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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파는 한국 사회를 읽어드립니다

 

자신 있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낼 자신이 있는지 묻는다면, 확신에 차서 대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거짓말 상회》를 읽기 전까지 나는 말이다. 나의 예상은 첫 장 '자기계발'을 읽으면서 천천히 빗겨나가더니 두 번째 장 '사진'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지막 '음식'을 읽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예상보다 사회에 만연한 거짓말들이 많다는 걸 알았고, 내가 살고 있는 일상 속에 이렇게 거짓말이 깊숙하게, 당연하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말 상회》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대중이 기댔던 위안과 도피, 환상의 서사"를 말한다.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은 허상이다.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쉽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좀처럼 진실의 가면을 벗기지 않고 자신을 감추는 거짓말은 대중의 욕망에 기대에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거짓말 상회》의 저자들은 2010년대 대중을 기만한 거짓말로 "자기 계발", "사진", "음식" 을 꼽았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어떻게 태어나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지 혹은 더 큰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드는지 혹은 아예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 현황을 진단하는 책이다. '자기 계발', '사진', '음식' 이를 '청춘', '이미지, SNS', '먹방'으로 바꾸면 지금과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위 세 가지 키워드가 2010년대의 핵심 키워드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키워드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 상회》와 같은 책이 존재한다. 이 책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지 말지는 오로지 독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자의 결정에 말이다. 나는 《거짓말 상회》를 읽기로 결정했다. 거짓말을 간파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짓말의 위치와 방향을 해석하기 위한 거짓말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

 

자신들은 한 사람의 활동가로 대우받기를 원하지만 기성세대 활동가, 혹은 상사에게서는 더욱 잘 보살피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주체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보육 교사가 아이를 대하듯 하는 것이다.
근대 국가는 국민을 통제함에 있어서 감시와 감금과 같은 폭력뿐 아니라 여타 세련된 방식을 활용한다. 그중 하나가 '돌봄'이다.


'청춘'이라는 담론, '자기 계발'이라는 담론은 2010년대 초반에 뜨거운 화두였으나, 더는 뜨겁지 않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청년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더는 청년들은 아프고 싶지도 않고, 그 아픔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계발'에서 시작한 담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양태로 존재한다. 시작은 기성세대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조언이 꼰대짓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그 흐름을 저자는 차근차근 정리한다. 시작은 '자기 계발'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거짓말로 판정 나기까지 10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자기 계발'은 성실하게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성공 신화에서 우리나라가 싫다고 거부하는 헬조선 담론으로 바뀌었다. 희망이 분노로 바뀌었고, 나아가 분노가 이제는 허무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 계발' 담론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자기 계발은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계발이 아니라, 이 시대에서 생을 버티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남과 비교해서 '잘'하는 것, '잘'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아직도 자기 계발의 비교 기준은 어제의 나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딱 남보다 잘하는 정도, 남보다 더 나은 정도를 추구하고 있다. 

 

개인은 나약한 존재다. 집단의 폭력과 광기에 쉽게 노출되고 그 구조에 함몰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집단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잘못된 구조에 눈 감고 동조하게 된다. 나중에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공적 비판을 스스로를 향한 사적 모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럼 이제 자기 계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 저자는 자기 계발이 스스로를 발전시킨다는 긍정적인 맥락을 통해 스스로 그 사고 과정에 가두게 되는 메커니즘을 지적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선택 혹은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이 사고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은 일종의 패러다임이다. 자기 계발이란 사고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논의 거리가 나와 기존의 주장에 균열을 내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물론 그 방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기 보다,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즉시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 어느 순간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은 그 모습이 다른 거짓말들에 비해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자기 계발은 결국 일자리, 경제 활동, 생계와 직결되어 있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논의가 개인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이 없었다면 '자기 계발'은 2010년대 초반과 2018년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요 화두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견디기에, 개인의 삶은 팍팍해졌고, 버틸 수 있는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기에 '자기 계발'이 건네는 희망에 가득 찬 거짓말은 금방 벗겨져 버렸고, 그다음에 분노가 찾아왔고, 분노조차 무용지물이 되자 허무함과 비하로 이어졌다. '자기 계발' 자체를 대하는 감정은 계속해서 달라졌지만, 그 핵심에서 '자기 계발'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어진 사회 구조를 포장하는 도구가 아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거짓말로 기능을 상실한 '자기 계발'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사진의 거짓말

 

홍보와 선전에 능한 국가와 권력자일수록 사진 속의 인물들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러운' 사진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러운' 사진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한 신뢰와 믿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등장과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실제 모습과 동일하게 보여준다는 뜻으로, 회화의 위치를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회 그 경계에 있는 장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사진은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담지만 동시에 텍스트 정보와 마찬가지로 시각 정보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진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오늘날 사진이나 동영상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시민이 사진을 송출하고 발화하는 행위"가 익숙함을 넘어 자연스러워졌다. 여기에는 인터넷도 한몫했다.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 있는 대중은 단지 정보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재가공하여 다시 송출하는 발화자가 된다. …(중략)… 사진과 그것에 덧대어진 믿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복잡한 네트워크를 타고 사진은 정보가 되어 밀물처럼 몰아치다가 다시 사라진다." 우리에게 사진은 익숙한 정보가 되었고, 그 신뢰도 역시 높아졌다. 이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 사회적 메시지를 의도적 혹은 의도치 않게 담긴다. 하지만 그 맥락을 읽어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사진의 그 영향력에 비해 이를 읽어내는 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사진 미디어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 불균형한 전달되는 것과 수용되는 것 사이의 정보 격차를 '사진의 거짓말'은 집어내고 있다.

 

하지만 희망이란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고 행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권력을 교체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우리가 겪어 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이는 일이다. 더 나은 세계는 어쩌면 지극히 강고하고 당연해 보이는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희망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사진은 크게 정치인,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이를 이용하여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며, 그 메시지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속에서 해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모습의 사진이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진이 개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독일이나 러시아 영화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영상 매체의 구도 배치에 따라 사람이 받아들이는 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 상회》의 저자 역시, 히틀러가 사진을 어떻게 선전도구로 활용했는지 지적한다. 지금은 더 고도화된 방식으로 사진을 이용한 선전하고 있다. 단지 이를 사용하는 언어가 선전 효과에서 이미지메이킹, 이미지 마케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상 역시 유명인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일상화되고 있다. 하지만 일상화되었지만, 사진이 개인의 심리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정도는 일상화되지 않은 듯싶다.

 

더 나은 세계를 궁금해하고 요구하는 수많은 상상력이 존재하는 사회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기 원하는 곳일 것이다.


그 외에도 로타의 사진, 촛불집회의 사진 속에 담긴 맥락을 집어낸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우리는 사진 속의 굶고 있는 약자들의 육체를 바라보며,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딛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깊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간디가 단식을 했을 때 사진 한 장이 가지는 위력과 오늘날 단식 투쟁을 하며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외치는 사진은 전혀 다르다. 제3 세계 시민들이 굶주림, 지구온난화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감정도 10년 전과 달라짐을 느낀다. 점점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누군가의 슬픔 앞에 더뎌진 나의 감각을 말하는 것 같아 글을 읽으며 마음이 찌르르 떨렸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이를 다루는 감각이 근육처럼 단련되지 않고, 피부처럼 두꺼워져 거칠어진다는 메시지 앞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음식의 거짓말

 

복원이란 말을 함부로 쓰며, 복원했다는 음식의 사진과 영상으로 재미를 보던 사람들이 지식의 성장에 눌려 슬며시 "재현"으로 말을 바꾸는 즈음이다. 한때 복원을 내걸었던 단체와 기관이 누리집에서 복원이란 단어를 재현이란 단어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시대가 왔다. 


음식의 거짓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맥락으로 진행되었다. "식욕" 혹은 "먹방"을 통해 1인 미디어, 1인 가구 등의 맥락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었다. 저자는 음식 가운데, 우리가 믿는 '전통'이라는 환상을 다루고 있다. 전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근거 없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다. 저자는 '맥적'의 맥락 없음을 지적하고, '냉면'문화사 등을 통해 역사와 문화 사이에서 어떤 가치 기준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는다. 음식의 거짓말은 역사적 사실, 진실이 문화 산업과 결합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왔는지 보여준다. 씁쓸한 사실인 "오늘, 몇몇 한식·음식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모습과 100년 전의 한식·음식 전문가 안순환이 만든 나 홀로의 세계가 자꾸 겹친다. 음식밖에 모른다는 전문가들 때문에 한식에 종사하는 이들이 혹시 세상모르는 사람으로 몰리고, 시민의 도리를 모른다는 꾸짖음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생활의 실감이 살아 있는 오늘의 음식 문화를 가꾸는 데 실패만 거듭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된 문제의식이 아니다. 음식의 거짓말 속의 음식은 하나의 콘텐츠일지 모른다. 지적 콘텐츠로서 가치 있는 소재의 가치가 정말 그 가치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는지 혹은 어떤 의도 혹은 물질적 욕망이 덧입혀진 비틀어진 욕망을 드러내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문제로 바라볼지, 혹은 산업의 하나로 인정할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문화비평학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화두가 바로 이 세 가지였다. 점점 시들해져가는 화두이지만, 여전히 이 거짓말들이 만들어낸 에너지는 주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계발, 사진, 음식은 각각은 하나의 콘텐츠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콘텍스트다.  완전이 이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은 계속 거짓말을 만들어낼 것이고 우리는 그 거짓말을 믿거나 믿고 싶어하며 살아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고 싶어서 믿는 거짓말이나 진실인줄 믿는 거짓말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짓말 앞에 개인은 약하다. 이때 필요한 건 합리적 의심이다. 사실 의심은 피곤한 일이다. 무감각하게 당연하게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사실은 거짓말의 역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녀석이 괴물의 모습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야까지 가린다. 어디가 문제의 근원이며, 사고의 뿌리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없게 만든다. 위험하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모두 위험한 상황이다. 피곤하지만, 우리가 합리적 의심을 해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작은 물음표 하나’는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조금만 예민하게 우리 사회를 느끼는 것이다. 거짓말에 무뎌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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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유정아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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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제목부터 톡! 마음을 동(動) 한다.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는 스스로 "아픈 거 힘든 거 싫어하고, 눈물 많고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요령도 피우고 잔꾀도 부리는 흔한 30대 초반 직장인"이라고 소개한 작가 유정하의 에세이다. 글 속에 아름다운 수사나, 냉혹하게 파고드는 분석은 없다.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도 없고, 추억에 잠기게 하는 포근함도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글이 밋밋하고, 담담하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밋밋함이, 담담함이 좋다. 아름다운 수사, 냉정한 분석, 재미있는 유머, 지난 기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것조차 피곤하다 느낄 만큼 지쳤을 때 필요한 글은, 깔끔한 에세이 한 권이 아닐까.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에서 잠시 멀어져 오로지 내 안에 존재하는 감정들, 생각들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가 딱, 그런 에세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들, 나누고 싶은 공감의 한마디"라는 카피 문구처럼. 마음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글들을 한 아름 품고 있는 에세이집이다.   

 

 

나는 '어차피 해피엔딩이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운다.
어쨌든 나는 결국 행복해질 것이고,
지금의 고통은 만화 속의 한 에피소드 정도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놀랍게도 이 생각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는 작가 스스로가 느꼈던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어떤 글의 방향을 생각했는지, 공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책의 첫 번째 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하는 유일한 얘기는 비슷한 처지에 놓였을 때 내 심정이 지금의 그와 얼마나 똑같았는지, 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작가는 견뎌 내야 했던 상황들, 버텼던 시간들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그 경험이 자신의 삶의 자취에 남긴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경험은 단지, 작가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주했던 고민이다. 장기 해외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 학벌 앞에 한없이 작아져 편입을 고민했던 것, 엄마와 수다를 떨면서 들었던 생각들, IMF 앞에 휘청거리던 가정, 낡은 워크맨의 감촉을 더듬는 것.. 소재는 다를 수 있어도 누구나 한 번은 마주했을 법한 경험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작가는 공감을 떠올린다. 피곤함이나, 외로움이나, 힘듦 속에 잠겨 있던 '나'라는 존재를 살짝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휘리릭 넘겨버린 것들을 나의 일상 속으로 살짝 밀어 넣어준다.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잘못 든 길에도 풍경이 있있다" "슬퍼하기 위해 돈을 번다" "목표 없는 삶도 행복할 수 있다" "박완서처럼 늙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겨우 자기가 좋아하는 걸 말하는 일에도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

 

 


요즘 우리 시대를 보면 나를 잃어버리기 딱 좋다. SNS 속에 완벽하고 화려하고, 행복이 넘쳐흐르는 사진과 글과 자신을 비교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를 잃어가게 된다. 별거 아닌 일에도 불안을 느끼고, 조급함을 느낀다. 나의 부족함이 다른 사람이 위로를 건네는 조건이 된다는 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섣부른 위로 한마디가 위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 종종 있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게 위로를 기대하지도, 나를 좋아하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여유로워질 나를 꿈꾸기 급급하다. 하지만 그 조바심 속에 지금의 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저자는 그런 조바심을 잠깐 내려놓고 지금의 '나'를 좀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하는 게 절대 잘 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리고 자기 자신도 '나도 그렇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나는 여전히 이루고 얻는 것보다 버리고 포기하는 게 더 많은 시시한 삶을 산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조소를 짓기보다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저자 스스로도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나'만이 '나'를 아껴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하는 게 글 속에 은은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농도 짙은 시간을 돌이켜 보는 즐거움에는
분명히 여행 경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일기인지, 편지인지 그 정체성을 알 수 없는 게,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다. 어떤 글은 일기 같기도 하고, 어떤 글은 편지 같기도 하다. 작가 스스로 과거를 돌아볼 때면 누군가의 일기를 살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글에선 '툭' 나에게만 하는 글 같아 보인다. 어떻게 읽던 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과장일 수 있지만, 나는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를 읽으며 내 마음이 어디에서 열려 있고 어디에서 닫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글을 읽으며 낯설게 느끼고, 삐죽하고 볼멘소리가 나왔다. 부끄러워 말할 수 없지만, 그건 나 스스로 아직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는 아픈 부분이란 뜻이다. 작가가 노크를 두드리며 마음의 문을 열 것을 말했지만 내가 아직 열기 망설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어떤 글에선 저자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그 부분은 어쩌면 저자보다 더 활짝 내 모습을 들어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를 읽을 때 내 마음의 빗장이 어디에 열려 있고, 어디에 닫혀 있는지 살펴보며 읽는다면 조금 더 책을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이유가,
오로지 그 사람만 생각했던 시간을
예쁘게 포장해 선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는 것을.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는 딱 지금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한 권의 책 속에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작가 유정아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풀어보며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겠다.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를 읽으며 난 한 달간 열심히 준비했던 것에서 똑! 떨어진 경험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를 배웠다. 어차피 "내 인생은 해피엔딩"이라는 (근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자신감을 얻었다. 또 좋아하는걸, 싫어하는 걸 말하기 한참 망설이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할 문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그녀의 생각을 내 것인 듯 따오는 상투적 표현을 늘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발견 뒤에, 나만 느끼고 나만의 생각, 나만의 이유는 무엇일까를 곱씹게 되었다. 언젠가 그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처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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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는 것 같다 시요일
신용목.안희연 지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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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누군가를 사랑했을 것이다.
어느 날 떠나간 연인 때문에 잠을 설치고 그만 집중력을 잃었겠지.
세상 모든 이유들이 휘발되어버린 순간에도
살아내야 할 하루가 있고 채워나가야 할 일상이 있어서
그는 진흙 반죽을 앞에 놓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어색하다. 아버지보다 아빠. 아빠보다 우리 아빠가 익숙하다.

 

이런 내가 아버지에 대한 시집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문인들의 시를 엮어서 만든 시집, 『당신은 우는 것 같다』. 우리 아빠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시집 안에 담겨 있어서 읽으며 몇 번이나 곱씹고 곱씹었다. 사실 난, 시를 즐겨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것을 낯설어했다. 시는 나에게 참 어렵다. 아마 시를 국어 시간에 배워서 그럴 수도 있고,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은 시를 읽어낼 혜안을 가지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소재의 시라면, 마음에 금방 와닿을 것 같아, 골랐는데. 시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좋았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우리 아빠와 시속의 아버지들은 달랐다. 우리 아빠의 모습과 닮은 모습은 별로 없었지만, 시인들과 시인들의 아버지의 관계와 우리 부녀 관계가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정확하게 내가 생각보다 우리 아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 그 점이 시를 쓴 시인들과 나의 공통점이었다. 시가 아버지를 닮은 건지, 아버지가 시를 닮은 건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나는 우리 아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몇몇 부분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 닮아 있었다, 시와. 그렇게 시를 닮은 아버지란 존재를 시를 통해 살펴보다가 문득 어떤 사실 하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니었다"라는 그 당연한 사실에 왠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꽝하고 울림이 있었다.

 

눈사람이 검은 입술로 노래를 했다
이토록 스물일곱
이토록 따가운 스물일곱
개가 나무에 매달렸다
검은 두 눈알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젊음이 호주머니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딸이어서, 그것도 맏딸이어서 아빠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빠에게 첫 번째였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난 큰 병을 앓지는 않았지만, 한밤중에 나는 팔이 빠지거나, 배탈이 나서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늦은 밤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병원에 갔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또 사춘기 시절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아빠에 짜증을 부린 적도 많이 있었다. 심통 부리는 딸의 화를 다 받아주신 적도 있었고, 따끔하게 혼내신 적도 있었다. 난 아빠와 관련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아빠가 아빠가 아닌 시절의 이야기는, 아빠가 어떤 사람 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들여다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어느덧 아빠의 삶이 아빠가 되기 이전 동안 보낸 시간과, 아빠가 된 이후에 보낸 시간의 길이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에 와서, 아버지도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빠에게 아빠가 아빠가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는 '군대' 경험과 '학창 시절에 있었던 아빠 친구분들 이야기'가 전부인데. 아빠에게 아빠가 된다는 것에 어떻게 와닿았는지 궁금해졌지만, 이 질문이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빠도 나처럼,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이 있지만 입 밖으로 질문하지 못하시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고 모레는 아버지 제사다.
문득 나는 전생을 믿는 심리학자의 노트처럼 복잡해진다.

십일년 전에 나는 결혼했고
그때는 네 아이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처럼, 아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마치 아버지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가, 아버지 탓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기도 하는. 혹은 끝내 아버지와의 기억을 좀처럼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시집 군데군데 담겨 있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시인의 글 속의 아버지와 시인의 관계는 울퉁불퉁 투박하다. 그 관계가 얼마나 거친 길을 걸어왔는지, 시안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시 다음에 이어져 나오는 글들은 그 시의 투박함을 이해하게 만들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굉장히 오래되어 있지만, 모든 존재에게 몇 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모두가 처음이기에 서투른 모습이 보인다. 물론 그 서투름이 모든 경우에 용납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보내온 세월을 시를 쓰며 돌아본 이들의 생각 속에는 꽤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원망이 담겨 있지만 끝에 그리움으로 끝이 나는 시들을 보면, 아버지란 존재는 어머니와 다르게 자녀의 마음에 그만의 자취를 남기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솔직한 심정과 아버지가 된 자신의 심정이 교차하듯 써 내려간 시가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결혼기념일과 아버지의 기일이 연이어 나오는 것을 보며, 왠지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부자간 미묘한 감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시만으로도 충분히 그 특수한 감정이 전해졌다. 아들에게 아버지란 단어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싶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은 것도 상처가 많은 것도 모두 힘겹다. 

 


그 어떤 수식도 필요 없는, 그저 아름다웠다는 말이면 충분할 것 같은 시간들. 어느 누구도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어떤 불행도, 슬픔도 침입해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 집을 떠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깎이고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리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떠난 뒤에 그 집은 빈집이 되었으리라.

 

 

 

시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다시금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좀 더 아빠에게 애정 표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후회하지 않도록, 더 많이 웃어드리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히 아버지에게 모나게 굴었던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시인들의 마음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더 많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든, 지금의 나이 든 모두 아버지 앞에서 자식으로 존재하는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를 읽는 내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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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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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관계의 물리학이란 이름 하에 어떤 글들이 모여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기대감을 한껏 담고 있는 궁금증이 해소될수록 기대는 만족으로 바뀌었다. 잔잔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이 넉넉히 담긴 책이었다. 《관계의 물리학》은.

 

요즘 들어 인간관계를 피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신경 끄기 기술》, 《미움받을 연습》, 《불행 피하기 기술》. 위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 분위기가 인간관계가 더 이상 관계를 맺는 데서 관계를 정리하는 쪽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피곤함, 시간 투자, 관리의 대상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관계조차 하나의 미션처럼 과업처럼 자리 잡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을 재고 따지게 된다. 마치 물건 대하듯이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인간관계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마음 한편에 공허함이 스친다고 해도 말이다.

시인 림태주는 '인간관계'가 '인간 관리'가 되어가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리는 불협화음에 주목했다. 흔히 '고민'이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다. 《관계의 물리학》은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인간관계의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관계학개론'을 통해 생각을 환기하게 끔 도와주는 책이다. 자신의 이야기부터, 자녀의 이야기, 후배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 저자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관계가 글 속에 담겨있는 데 덕분에 글에 생동감이 있다. 자신의 서툴렀던 모습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며, 후회와 반성이 교차한 글들 덕분에 마치 내 이야기인 듯 받아들일 수 있다. 남의 이야기나, 시인 림태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이야기인 것도 같다.

 

《관계의 물리학》은 관계의 날씨, 말의 색채, 행복의 질량, 마음의 오지라는 장으로 나누어 약 70여 개의 글들이 담겨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다. 글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싶지만, 읽다 보면 하나같이 전부 인간관계가 어려워 마음에 밤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북극성처럼 빛나는 글들이다. 인간관계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원소 주기율표의 원소, 열역학 제2 법칙, 팽창하는 우주, 수축하는 우주 등 다양한 개념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합에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물리학의 수많은 법칙들이 인간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심리학 법칙인 양 딱 들어맞는다. 절묘하게 인간관계와 물리학의 접점을 찾아내 글을 풀어나가는 림태주 시인의 필력의 깊이와 참신함에 놀랐다.

 

림태주 시인의 글은 '조깅'과 닮았다. 서정적인 시인의 글이란 느낌이 묻어나지만, 읽다 보면 문장 하나하나에 여운을 담기보다 문장들이 모인 한 편의 글에서 드러내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그래서 문장 하나 하나는 빠르게 읽힌다. 간결하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읽힌 문장들이 한 편의 글로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글을 통해 전한다. "관계는 수제품이다. 수공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 그것이 관계를 대하는 안목이다."라고 말에는 저자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대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글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의 글의 주제는 보통 하나뿐인 소중한 수제품을 만들듯 공을 들이는 내용과 그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에 대한 내용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크게 보면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한 편 한 편이 낯설고, 저마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현학적이거나 은유적인 문장 뒤로 의미를 감추지 않는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글로 조깅하듯 기분 좋은 속도감을 느낄 수 있게 글을 독자에게 전한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 무슨 책을 읽어왔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읽은 책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믿어서 그랬다.
그러나 책이 다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의 지적 관심사나 교양이나 취향에 대해서는
책 목록이 실마리를 제공해줬으나
그가 어떤 본성을 지녔는지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그 사람의 진실은 어떤 책의 장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투나 습관적인 몸짓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니까.

 

여러 구절들이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중에 이 구절을 읽는데, 내 이야기를 적은 글인 줄 알았다. 습관처럼 물어본다. 마음에 든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책 좋아하세요?", "어떤 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다. 좋아하는 책이 겹치기라도 하면 왠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흥미로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듣고 싶어졌다. 이렇게 시인의 글을 읽으면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보다 먼저 다른 기준으로 넘어간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늦음'은 느림이고 게으름이고 불성실이고 무능력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큰 뜻을 세우고 사는 것도 아니고 빛나는 업적을 남기기에는 애당초 깜냥이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죽기 전까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나의 진짜 값어치가 얼마인지 나 자신도 가늠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말하는 현실 뒤에 오는 답도 참 현실적인데도 이유 없이 그 글에 위로 받기도 했다. 이처럼 별거 아니고 사소한 이야기를 림태주 시인의 언어로 완성된 형태는 그만의 감성이 묻어 있었다. 짧은 산문들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내가 혼자 생각했던 것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늦음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내가 유난히 고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늦는 일들이 떠오른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가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글은 내 생각의 타래와 함께 다른 그의 글로 엮어져 나갔다. "사람을 잃기 좋은 때, 마음 하나면 충분했던 일인데 한없이 옹색해져 관계를 그르치는 때, 자신도 하지 못하는 역지사지를 타인에게 요구하고 있는 때, 아픈 후회의 씨앗을 생각 없이 삼고 있는 때."라는 메시지로 이어져 또 다른 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생각과 기억이 이어져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도 《관계의 물리학》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재미 중 하나였다.
 
당신도 나도 살아가면서 이것 하나만은 잊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심장에 보관된 말은 소멸시효가 없다.
심장에 박힌 상처의 말은 화살의 주인과 상관없이
한 존재의 일생을 잔인하게 갉아먹는다.

 

저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당신의 대상은 때로 연인에게 향하는 듯, 독자에게 향하는 듯하다. 분명한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말하지만, 꼭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약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길 권하고 싶다. 나는 나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힘든 마음을 감싸는 위로부터, 나의 마음에 대한 깊은 공간 그리고 따끔한 충고까지. 글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관계의 물리학》은 글마다 다른 상황과 관계 속에 저자와 내가 존재하는 책이다. 그의 말이 내 안에서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다음엔, 내 주변과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다. 살짝 마음이 상기되어 책을 덮었다. 열역학 제2법칙 "열은 반드시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한다." 림태주 시인의 말처럼 관계가 빛이 아니라 열이라면, 내가 은은한 따뜻함을 유지해, 다른 사람의 온도를 빼앗지 않고 나누어줄 여유를 《관계의 물리학》을 통해 가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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