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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상회 - 거짓말 파는 한국사회를 읽어드립니다
김민섭.김현호.고영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 블랙피쉬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거짓말 파는 한국 사회를
읽어드립니다
자신 있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낼 자신이 있는지 묻는다면, 확신에 차서 대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거짓말 상회》를 읽기 전까지
나는 말이다. 나의 예상은 첫 장 '자기계발'을 읽으면서 천천히 빗겨나가더니 두 번째 장 '사진'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지막 '음식'을 읽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예상보다 사회에 만연한 거짓말들이 많다는 걸 알았고, 내가 살고
있는 일상 속에 이렇게 거짓말이 깊숙하게, 당연하게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말 상회》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대중이 기댔던 위안과 도피, 환상의 서사"를 말한다.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은 허상이다.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쉽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좀처럼 진실의 가면을 벗기지 않고 자신을 감추는 거짓말은 대중의 욕망에 기대에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거짓말
상회》의 저자들은 2010년대 대중을 기만한 거짓말로 "자기 계발", "사진", "음식" 을 꼽았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어떻게 태어나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지 혹은 더 큰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드는지 혹은 아예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 현황을 진단하는 책이다. '자기 계발',
'사진', '음식' 이를 '청춘', '이미지, SNS', '먹방'으로 바꾸면 지금과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로 보일 것이다. 위 세 가지 키워드가
2010년대의 핵심 키워드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키워드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 상회》와 같은 책이 존재한다. 이 책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지 말지는 오로지 독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자의 결정에 말이다. 나는 《거짓말 상회》를 읽기로 결정했다. 거짓말을 간파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짓말의 위치와 방향을 해석하기 위한
거짓말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
자신들은 한 사람의 활동가로 대우받기를
원하지만 기성세대 활동가, 혹은 상사에게서는 더욱 잘 보살피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주체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보육
교사가 아이를 대하듯 하는 것이다.
근대 국가는 국민을 통제함에 있어서
감시와 감금과 같은 폭력뿐 아니라 여타 세련된 방식을 활용한다. 그중 하나가 '돌봄'이다.
'청춘'이라는 담론, '자기 계발'이라는
담론은 2010년대 초반에 뜨거운 화두였으나, 더는 뜨겁지 않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청년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더는 청년들은 아프고 싶지도 않고, 그 아픔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계발'에서 시작한 담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양태로 존재한다. 시작은 기성세대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조언이 꼰대짓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그 흐름을 저자는 차근차근 정리한다. 시작은
'자기 계발'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거짓말로 판정 나기까지 10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자기 계발'은 성실하게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성공 신화에서 우리나라가 싫다고 거부하는 헬조선 담론으로 바뀌었다. 희망이 분노로 바뀌었고, 나아가 분노가 이제는
허무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 계발' 담론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자기 계발은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계발이 아니라, 이 시대에서 생을 버티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남과 비교해서 '잘'하는 것, '잘'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아직도 자기 계발의 비교 기준은 어제의 나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딱 남보다 잘하는 정도,
남보다 더 나은 정도를 추구하고 있다.
개인은 나약한 존재다. 집단의
폭력과 광기에 쉽게 노출되고 그 구조에 함몰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집단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잘못된 구조에 눈 감고
동조하게 된다. 나중에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공적 비판을 스스로를 향한 사적 모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럼 이제 자기 계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 저자는 자기 계발이 스스로를 발전시킨다는 긍정적인 맥락을
통해 스스로 그 사고 과정에 가두게 되는 메커니즘을 지적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선택 혹은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이 사고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은 일종의 패러다임이다. 자기 계발이란 사고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논의 거리가 나와 기존의 주장에 균열을 내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물론 그 방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기 보다,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즉시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이 어느 순간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의 거짓말'은 그 모습이 다른 거짓말들에 비해서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자기 계발은 결국 일자리, 경제 활동, 생계와
직결되어 있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논의가 개인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이 없었다면 '자기 계발'은 2010년대 초반과 2018년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주요 화두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견디기에, 개인의 삶은
팍팍해졌고, 버틸 수 있는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기에 '자기 계발'이 건네는 희망에 가득 찬 거짓말은 금방 벗겨져 버렸고, 그다음에
분노가 찾아왔고, 분노조차 무용지물이 되자 허무함과 비하로 이어졌다. '자기 계발' 자체를 대하는 감정은 계속해서 달라졌지만, 그 핵심에서
'자기 계발'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틀어진 사회 구조를 포장하는 도구가 아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거짓말로 기능을 상실한 '자기
계발'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
사진의
거짓말
홍보와 선전에 능한 국가와
권력자일수록 사진 속의 인물들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러운' 사진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러운' 사진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한 신뢰와 믿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등장과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실제 모습과 동일하게 보여준다는 뜻으로, 회화의 위치를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회 그 경계에 있는 장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사진은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담지만 동시에 텍스트 정보와 마찬가지로 시각 정보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진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오늘날 사진이나
동영상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시민이 사진을 송출하고 발화하는 행위"가 익숙함을 넘어 자연스러워졌다. 여기에는 인터넷도
한몫했다. "인터넷 미디어 환경에 있는 대중은 단지 정보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재가공하여 다시 송출하는 발화자가 된다. …(중략)…
사진과 그것에 덧대어진 믿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복잡한 네트워크를 타고 사진은 정보가 되어 밀물처럼 몰아치다가 다시 사라진다."
우리에게 사진은 익숙한 정보가 되었고, 그 신뢰도 역시 높아졌다. 이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 사회적 메시지를 의도적 혹은 의도치 않게 담긴다.
하지만 그 맥락을 읽어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사진의 그 영향력에 비해 이를 읽어내는 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사진 미디어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 불균형한 전달되는 것과 수용되는 것 사이의 정보 격차를 '사진의 거짓말'은 집어내고 있다.
하지만 희망이란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고 행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권력을 교체하기 위해 행동하는 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 우리가 겪어
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이는 일이다. 더 나은 세계는 어쩌면 지극히 강고하고 당연해 보이는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희망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사진은 크게 정치인,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이를 이용하여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며, 그 메시지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말한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속에서 해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모습의 사진이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진이 개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사실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독일이나 러시아 영화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영상 매체의 구도 배치에 따라 사람이 받아들이는 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 상회》의 저자 역시,
히틀러가 사진을 어떻게 선전도구로 활용했는지 지적한다. 지금은 더 고도화된 방식으로 사진을 이용한 선전하고 있다. 단지 이를 사용하는 언어가
선전 효과에서 이미지메이킹, 이미지 마케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상 역시 유명인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일상화되고 있다.
하지만 일상화되었지만, 사진이 개인의 심리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정도는 일상화되지 않은 듯싶다.
더 나은 세계를 궁금해하고
요구하는 수많은 상상력이 존재하는 사회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기 원하는 곳일 것이다.
그 외에도 로타의 사진, 촛불집회의 사진
속에 담긴 맥락을 집어낸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우리는 사진 속의 굶고 있는 약자들의 육체를 바라보며,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딛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우리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깊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간디가 단식을 했을 때 사진 한 장이 가지는 위력과 오늘날 단식 투쟁을 하며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외치는 사진은 전혀 다르다. 제3
세계 시민들이 굶주림, 지구온난화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감정도 10년 전과 달라짐을 느낀다. 점점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누군가의 슬픔 앞에 더뎌진 나의 감각을 말하는 것 같아 글을 읽으며 마음이 찌르르 떨렸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이를
다루는 감각이 근육처럼 단련되지 않고, 피부처럼 두꺼워져 거칠어진다는 메시지 앞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음식의
거짓말
복원이란 말을 함부로 쓰며,
복원했다는 음식의 사진과 영상으로 재미를 보던 사람들이 지식의 성장에 눌려 슬며시 "재현"으로 말을 바꾸는 즈음이다. 한때 복원을 내걸었던
단체와 기관이 누리집에서 복원이란 단어를 재현이란 단어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시대가 왔다.
음식의 거짓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맥락으로 진행되었다. "식욕" 혹은 "먹방"을 통해 1인 미디어, 1인 가구 등의 맥락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었다. 저자는 음식 가운데, 우리가 믿는 '전통'이라는 환상을 다루고 있다. 전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근거 없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다. 저자는 '맥적'의 맥락 없음을 지적하고, '냉면'문화사 등을 통해 역사와 문화 사이에서 어떤 가치 기준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는다. 음식의 거짓말은 역사적 사실, 진실이 문화 산업과 결합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왔는지 보여준다. 씁쓸한 사실인 "오늘, 몇몇 한식·음식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모습과 100년 전의 한식·음식
전문가 안순환이 만든 나 홀로의 세계가 자꾸 겹친다. 음식밖에 모른다는 전문가들 때문에 한식에 종사하는 이들이 혹시 세상모르는 사람으로 몰리고,
시민의 도리를 모른다는 꾸짖음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다. 생활의 실감이 살아 있는 오늘의 음식 문화를 가꾸는 데 실패만 거듭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된 문제의식이 아니다. 음식의 거짓말 속의 음식은 하나의 콘텐츠일지 모른다. 지적
콘텐츠로서 가치 있는 소재의 가치가 정말 그 가치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는지 혹은 어떤 의도 혹은 물질적 욕망이 덧입혀진 비틀어진 욕망을
드러내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문제로 바라볼지, 혹은 산업의 하나로 인정할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문화비평학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화두가
바로 이 세 가지였다. 점점 시들해져가는 화두이지만, 여전히 이 거짓말들이 만들어낸 에너지는 주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계발, 사진,
음식은 각각은 하나의 콘텐츠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콘텍스트다. 완전이 이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은 계속 거짓말을
만들어낼 것이고 우리는 그 거짓말을 믿거나 믿고 싶어하며 살아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고 싶어서 믿는 거짓말이나 진실인줄 믿는 거짓말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짓말 앞에 개인은 약하다. 이때 필요한 건 합리적 의심이다. 사실 의심은 피곤한 일이다. 무감각하게 당연하게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사실은 거짓말의 역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녀석이
괴물의 모습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야까지 가린다. 어디가 문제의 근원이며, 사고의 뿌리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없게 만든다.
위험하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모두 위험한 상황이다. 피곤하지만, 우리가 합리적 의심을 해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작은
물음표 하나’는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조금만 예민하게 우리 사회를 느끼는 것이다. 거짓말에 무뎌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