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그림 엽서북 : 옐로우 에디션 -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려보는 손그림 엽서북
공혜진 지음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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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린다.
그린다는 동사는 머릿속 상상을 나타내는 말이지, 내 손에서 그리려는 걸 나타내는 말이 아닌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고등학교 2학년 미술 시간 이후로 그림을 그린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림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한 낙서를 한 적은 많지만. 왠지 그림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진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기보다, 어떻게 그리세요.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리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손그림 엽서북》이라니. 도전이었다. 나에게 《손그림 엽서북》은 말이다. 하지만 막상 한두 개 그리고 나니 생각보다 쉬웠다. 나를 위한 그림이라, 나를 잘 아는 내가 그린 손그림 엽서를 뜻깊게 받아줄 상대를 생각하니 말이다.

 

 

 

 

캘리그래피나 그림 그리는 책과 친하지 않은 나에게 그림 그리기 좋은 펜과 종이에 대한 정보는 꽤 유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참 오랜만에 큰 문구점에 가서 펜 앞에서 이것저것 써보았다. 이 펜 저 펜 써보며 내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을 느끼며 고른 펜은 결국 네임펜이었다. 익숙하기도 했고 얇은 펜과 보통 굵기의 펜이 합쳐진 형태가 신기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손그림 엽서북》의 저자가 "적당한 굵기라서 어떤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하다"라는 말이 나의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을 펼친 여러분과 마음껏 끄적이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편안함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 중 한 시간이라도 '손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작가의 따뜻한 당부에 처음으로 책장을 열고 펜을 꺼냈다. 혼자만의 시간을 끄적이며 보내길 권하는 그 마음 뒤에는 작게 보이는 그림 그리기가 우리 마음에 주는 위로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손 엽서 그리는 과정이 엽서를 쓰는 과정과 닮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엽서도 쓸 때 그 사람만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오로지 하나의 일에만 몰두하는 순간. 시시콜콜 잡생각은 멀리 달아나며 느낄 수 있는 편안함. 이 편안함을 《손그림 엽서북》의 작가이자 그림 가이드 공혜진씨가 추구했던 바가 아닐까.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펜을 손에 쥐는데 자꾸만 힘이 들어가서. 결국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책을 덮었다. 자꾸 옆에 있는 그림에 시선이 가서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 그려볼까 싶었지만,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나의 첫 손그림 엽서 도전은 '유보' 되었다. 만약에 성공을 거두었다면 아드만 편지지와 나의 아드만 손그림 엽서가 함께 봉투에 담겨 소중한 사람의 우편함에 들어갔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나의 첫 손그림 엽서

 

 

 

첫 손그림 엽서다. 결국 첫 '작품'은 나에게 주기로 했지만. 막상 그려보니 별거 아니었다. 산타 할아버지를 그릴까 하다가 결국 책 읽는 두더지로 바뀌었지만. 그리고 나니 자꾸만 애착이 갔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나만의 손그림 엽서가 태어난 거다. 진짜 처음으로 도전했을 때와 달리, 그냥 수염을 그렸고 그러고 나니 꽤 그럴싸한 그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펜을 들고 엽서에 툭하고 점을 하나 찍고, 선을 하나 그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무언가 완성되어가는 게 신기했다. 새하얀 백지가 아니라 이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작은 소재가 중간에 놓여 있어서  그런지 더 자신감 있게 그림을 그렸다. 따라 그려볼까 생각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책 읽는 두더지 그림이 완성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난, 책이 머리에 떠올라 책을 그렸다.
그런데...
뭔가 바쁜 두더지보다 책 읽는 두더지의 등이 더 곧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삐뚤삐뚤한 점 하나, 선 하나로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요.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그려보세요!

 

저자의 말은 진짜다. 내 그림은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기보다 누구도 따라 그리지 않을 그림이지만. 나만의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즐거움은 크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크기는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 다음에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는 내 손그림 엽서를 함께 보내주어야겠다. 다음엔 좀 더 나만의 개성이 가득 담긴 엽서가 완성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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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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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책은 무엇일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때로는 명쾌한 듯 답을 내리지만, 마음 한구석에 답에 대한 찜찜한 감정이 남아 있다. 어떤 답을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책마다 나에게 주는 의미가 달랐고, 내가 받은 감동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이라는 복수에 대한 정의는 어떤 책들을 소외시키는 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떤 때 소외시킨 줄도 몰랐던 책이 내 마음을 울리는 책이 되는 경험을 자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꽤 자주 만들어준 나의 책 가이드 중 한 명이 바로, 정혜윤 피디였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던 책에 의지하곤 한대

 

이런 말과 함께 친구에게 소담한 위로를,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책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 같아 보이지만, 자신의 경험이 없다면 혹은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하기 힘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책이 가진 힘을 믿고, 좋은 책이 사람에게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아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세상에 무수히 많은 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책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새로운 지식이 담겨 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책은 사람에게 ‘책’이라는 이름 이상의 의미로 함께 해왔다. 대화. 선물. 만남. 친구. 취미. 진실. 성찰. 교훈. 영혼... 수많은 단어로 많은 사람들이 정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시 또는 한편의 글 -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
좋은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
좋은 책과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진짜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뜻밖의 좋은 일』은 유명한 북 칼럼니스트이자 개성 있는 에세이스트인 CBS 정혜윤 피디의 책에서 배운 삶의 기술이 응축된 북에세이입니다. 많은 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숨은 명저에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이 가도록 만든 그녀는 이번에 책과 삶을 이어 글을 썼다. 이번 글에도 책과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이번 책 속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사는 맛”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자아”를 거쳐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이해한 뒤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로 『뜻밖의 좋은 일』의 여정은 끝이 난다. 각 장에 담긴 이야기는 분절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삶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흐름 속에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완성해나간다. 그러므로 책을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개인적으로 한 흐름으로 책을 읽어나가길 추천한다.

 

삶의 본질은 사소한 사건들에서 더 잘 드러나고,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이 특별한 이유, 어느 평범한 날이 빛나는 날로 바뀌는 것, 진실한 마음으로 사소하게라도 뭔가를 변화시켜서이다.

 

『뜻밖의 좋은 일』을 읽다가 건너뛰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쉼표를 찍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마침표나 느낌표, 물음표를 찍기도 하며 읽었다. 정혜윤 피디의 경험과 방대한 독서가 만난 삶의 기술을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이해하기엔 나의 앎의 영역은 그녀와 달랐기 때문이다. 무심결 툭툭 나오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을 주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엘레나 피란테, 가즈오 이시구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작가를 알고 있었다. 이 작가들이 만든 세계이자 이야기를 읽었다. 하지만 이들의 세계에서 내가 발견한 보석과 다른 정혜윤 피디의 보석은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각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삶의 기술은 정혜윤 피디의 글 속에서 이야기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글은 현실을 붙잡고 있으나, 관통하는 메시지의 중심은 소설로 삶에서 마주할만한 일들에 어느 정도 답을 주는 이야기가 많다. 뚜렷한 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지만, 그 답으로 향하는 실마리를 주는 듯했다. 마치 소설이 넌지시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길 권면하는 것처럼 정혜윤 피디는 그 화법으로 삶의 기술을 알려준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은밀한 꿈이 있다. 이렇게 지상의 아름다운 양식들에 나를 연결시키는 최고로 럭셔리하고 부유한, 한마디로 끝내주는 축제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나를 창조하고 다른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말리라는 꿈이다.

 

그 삶의 기술 중심에 놓인 감정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글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 주변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을 사랑하였고, 자신이 사랑하는 책 속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담긴 시선에서 삶을 읽어낼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많은 책을 읽었고,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그 책들과 일상을 연결하기 쉬웠던 것이 아니다. 정혜윤 피디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뜻밖의 좋은 일』은 혼자 보다 함께인 이야기가 많다. 누군가와 동행하다, 누군가와 함께 맞서다, 누군가와 함께 맞이하다 얻게 된 것들이 책과 절묘하게 녹아져 있다.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를 꿈꾸는 정혜윤 피디만의 아름다운 생각, 사랑이 『뜻밖의 좋은 일』에 담겨 있다.

 

우리의 시간 속에, 영원의 흔적이 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여행 중이다.

 

믿고 읽는 정혜윤 pd, 나에게 정혜윤 pd의 책 앞에 붙는 수식어가 바로 “믿고 본다”다. 『뜻밖의 좋은 일』에도 어김없이 이 수식어를 붙일 수 있어 좋았다. 책 읽는 시간이 참 좋았다.

 

“책 속에서 지혜와 삶의 해법을 찾는 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항상 독자인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의 고독을 떠올리고, 당신의 아까운 시간이 이 책으로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 당신의 삶 또한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 혼자서 책을 읽는 당신에게 말할 필요도 없이 기쁜 뜻밖의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

 

저자의 독자를 향한 마음처럼, 혹은 바람이 깃든 책이 바로, <뜻밖의 좋은 일>이다. 정말 뜻밖의 좋은 책을 만났고 그래서 읽음이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 “좋은 책은 그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상이 달라 보이게 한다."라는 말을 바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 좋은 책들 가운데 몇 권을 나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으니, 이 책은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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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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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살기 위해서 적정 체온을 유지해야 한다. 36.5도. 인체는 놀랍게도 항상성을 유지한다. 단지 신체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도 똑같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외부 환경 그리고 내부 환경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건 중요하다. 물론, 마음의 정온 상태를 지향하는 사람의 경우에만. 마음이 정온 상태가 아닌 변온 상태인 사람도 있다. 마음의 상태가, 생각의 온도가 오르내리는 사람이 말이다. 나는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의 작가 홍승희씨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모든 관계가 n개의 몸처럼 n개의 다양성이다.
우리만의 분류를 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
너와 나는 친구나 연인 사이’ 말고,
‘너와 나는 바나나, 참외 사이’처럼.
각자의 몸과 색깔만큼이나
관계의 방식도, 이름도 무한하다.

 

그녀의 삶은 정온 상태로 마음을 유지하기 보다, 다채로운 온도를 오가는 변온 상태를 추구해온 듯싶다. 몇 줄 짜리 글로 정리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의 자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자취를 곱씹기보다 그녀의 생각에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글들이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에 담겨 있다.

 


해석되는 존재는 늘 해석당하고,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는 기존의 언어는
늘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해석한다.

 


생각들은 정말 독특하다. 아니, 신기하다. 그래서 제목처럼 '이상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도 짐작이 간다.  성의 경계를 허무는 주장, 권력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발언,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자살을 대하는 방식은 '보통'이나 '일반적인', '다수의'라는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그녀는 '폴리아모리'라는 무질서한 관계를 지향하며 공동 사랑(?)을 추구하는 관계론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구속될 수 없고, 누군가를 구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그녀의 생각을 전해 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툭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하나의 문장이 아닌 한 편의 글로 읽으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나와 다를 뿐, 틀린 생각이 아니라는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녀가 글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길, 공감해주길 바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글에는 이해할 수 있는 설득의 근거가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녀의 생각이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고 부정할만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인정을 이끌어낸다.

 

너와 나는 당연하게도 다르고,
매일매밀 달라지는 별과 햇빛의 농도처럼
너는 어제 알던 내가 아니다.
기준을 잡고 싶어서 공부하다 보면 기준이 사라져버리고,
기준을 붙잡으려던 나까지 사라져버리게 되는
서늘한 순간을 선물 받는다.

나라는 장벽이 무너지고 타자의 얼굴이 보인다.
텅 빈 공간이라서 신비다.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자유로운 사유는 그녀만이 향유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자유로운 사유는 익숙한 '옳음'이라는 틀에 갇혀, 그 틀의 존재 여부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왜"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은 채, 남들이 쫓는 행복을 당연한 듯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방향을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은 시선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저자는 "가엾은 타인을 염려하는 건 자기효능감을 느끼면서 건강한 자아로 살아간다고 믿기 편리한 방식이다. 도덕주의자들은 그 낙으로 생의 허무를 견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아닌 눈총에도 지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간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구태여 자살을 감행할 필요도 없다"고 쓴
벤야민의 흔적을 더듬는다.
애초에 생과 세상에 무엇을 기대했던
열정 과잉이 문제였을지 모른다.

자살을 감행하려는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내게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끔찍한 디스토피아도 없고
찬란한 유토피아도 없이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하게' 이어지는 오늘이다.
열정에 간간이 불을 지피면서 물을 건넌다.

 

하지만 그녀가 늘 괜찮은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그 선언 뒤에 따라오는 눈총을 감내하는 건 쉽지 않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선택한 삶이지만 저자의 삶을 둘러싼 주변은 그녀를 그대로 놓지 않는다. 여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 서울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꿈꿔야 하는 것들,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양배추를 삶아 먹는 그녀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쉽게 붙이고 그녀의 삶을 해체하고 해석한다. 그 해석 앞에서 항상 '나다움'을 내세운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때로 자신은 틀린 것은 아닐까 싶은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삶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틀렸다고 낙인찍고, 부정당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 원동력이 궁금했다. 나라면 버티지 못했을 모든 것에 지지 않는 그녀의 자유로움의 원천이 궁금했다.

편견에 동의하면서 나를 걱정하는 말에 대꾸해줄 수 없는 이유다.


편견과 낙인은 부수라고 있는 거다.
내 등에 스티커가 붙었다면
스티커의 허술함을 폭로할 기회가 생긴 것이기도 하다.
낙인찍힌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을 살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그 자체로 균열이지 않을까.


그 힘에는 적지만 확실한 홍승희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일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고, 그녀의 행보에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만 마무리 짓는다면 무언가 아쉽다. 나라는 개인이 오로지 존재하기 위해 설사 존중하는 역할로 주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글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홍승희씨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며 그 의지를 표출하는 데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이나 유화 작품, 거리에서 완성한 수많은 예술 작품이 그녀의 삶을 지지해주는 힘이란 생각이 든다. 나를 표현하고 표출하며, 나의 자유로움을 표현할 때 그녀는 무언가를 얻는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속 글은 어두워 보이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이 깃들어 있는 듯 내가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특별함과 이상함의 경계에 서서 글을 썼기에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유로움은 단순히 그녀 내면의 생각을 그대로 쓴 결과물이 아니라, 자유로움이 함께 글을 썼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롤랑바트르의 저자의 죽음처럼. 언어가 글을 쓰듯, 자유가 그녀의 글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착각은 폭력을 휘두를 근거가 된다.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권태와 오만, 혐오. 모른다는 걸 알기에 환대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환대를 느끼는 이유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를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고. 생각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 책을 덮기도 전에 강하게 한 방 맞은 듯싶다. 지금까지 쓴 리뷰를 다시 재고해봐야 하나 고민이 된다.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으니까.'
편지 마지막에 꼭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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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 - 단 한 번뿐인 오늘을 살고 있는 당신에게
아오야마 슌도 지음, 정혜주 옮김 / 샘터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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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은 꽃을 피워내는 중요한 재료입니다.
진흙이 없으면 꽃은 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흙은 꽃이 아니지요."

 

 

 

"바티칸을 비롯하여 로마인들은 동시대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역사의 눈은 두려워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심판을 내릴지 두려워하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려고 하지요."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음과 교훈을 전하는 데에는. 짧고 간결한 글이라도 그 안의 메시지가 분명하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전해진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깊이 있는 참선 끝에 얻은 교훈이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스님이 쓰신 책이라 불교에 관한 메시지가 많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종교로 한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넘나들며 인생을 꿰뚫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의 메시지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마음을 울리는 사례와 함께 있어 더 좋았다.

 

과거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미래를 여는 것도 닫는 것도, 지금 현재의 삶에 달려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석가탄신일에 맞추어 읽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석가탄신일을 넘기고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를 읽었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듯. 석가탄신일에는 나도 모르게 스님들의 지혜가 남긴 메시지를 찾아보게 된다. 수행과 참선 끝에 얻은 삶의 지혜를 오로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날에 읽으면 그 깨끗한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넘기고 읽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조금 불량한) 가부좌 자세로 천천히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모두가 다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가치들이 빛을 내며 사회를 일구어 가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문을 보면 과연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양한지 잘 모르겠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예를 들면 돈과 같은 것을 맹신하게 된 것 같다. 물질만능주의 사회라는 말에 단호하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이것만이 사회의 기준이 되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수많은 석학들과 많은 사람들은 비물질적인 가치들을 발굴해낸 책들을 쓰고 읽는다. 인생을 살아가며 좀처럼 놓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에 계속 글과 말로 이 가치를 확인해야 하는 것 같다. 반복적으로 계속 말이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 이 책은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책이다.

 

'내가 고통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진흙은, 안테나를 세우라는 부처님의 자비가 보내 준 선물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안테나를 세우지 않으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가르침도 구할 수 없으니까요. 좋은 스승, 좋은 가르침이라는 인연에 이끌림으로써 비료로 바꾸고 한 송이, 한 송이 꽃을 피워가길 바랍니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는 인생이 아름답게 꽃피우는지를 알려준다. 만약 우리 인생이 한 송이의 꽃이라면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할까.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지나쳐와야 할 과정이 있다. 매서운 겨울의 추위도 견뎌야 하고, 차가운 바람에도 지지 않아야 하고, 세찬 빗줄기에도 꿋꿋이 버텨야 한다. 집안에서 키우는 꽃도 마찬가지다. 난이 꽃을 피우는 시기도 가장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때에 이를 때 꽃을 피운다. 저자는 연꽃에 비유한다. 맑은 연못이 아닌 진흙 위에서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우리의 인생에 시련과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인생이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온실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환경과 같이 인생이 평온하면 좋겠지만,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험난하다. 그 인생을 견뎌야 하는 지혜를 아름다운 연꽃에 비유한 것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는 귀한 이야기들이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에 담겨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가, 입장이 바뀌면 옳고 그름이 바뀐다는 것은 참 진실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신의 이름 아래 부르짖는다 해도 말이지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 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아오야마 슌도의 한 편 한 편의 글에 담긴 이야기에 내 마음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고, 따끔함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뒤흔들리는 정도가 작았다. 한마디로 잔잔한 감동이 많은 책이었다. 마음을 오르내리게 하는 강렬함이 남다른 책이 있지만, 참선과 득도가 고요함 속에 얻을 수 있듯이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도 그런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메시지에 밑줄 치며 읽었다. 다 긋고 나니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인생은 '행복을 추구하는 여행'이라고 해도 좋을 일면이 있습니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할까, 선별하는 눈의 깊이와 높이로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인생은 행복과 불행이 계속 교차한다. 어느 하나의 감정만 따라오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건,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행복한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아 보인다. 물론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인생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생을 완벽하게 사는 건 불가능하지만, 인생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방법은 존재한다. 《진흙이 있기에 꽃은 핀다》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온전한 행복을 좇기보다 행복을 선별하는 안목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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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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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과 일본을 가면 자연스레 두 나라의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한옥과 비슷한 듯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건지 그 답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에게 건축이란 무엇일까. 건축을 생각하면, 건물이 떠오른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에게 익숙한 건물들이 머리에 스칠 것이다. 그런데 그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잘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나라 건축물이 아닐까.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 대해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고궁, 사찰을 종종 다니며 종종 해설을 들었지만 좀처럼 우리나라 건축물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한옥은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 한옥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과 어떻게 다를까?

내가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은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한옥 건축만의 특징을 알고 싶었다. 건축 분야에 대한 관심은 원래 많은 편이었고, 타전공 수업인 '서양건축사'와 '실내건축디자인사'등을 듣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건축 혹은 동양 건축을 제대로 다룬 수업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 건물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 왔는지 그 맥락이 궁금했다. 단순히 하나의 건축물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한옥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따금 해외 여행을 갈 때면, 이 호기심은 높아졌다가, 귀국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꽤 오랫동안 묵어 있던 호기심에 불을 붙인 건, <알쓸신잡2>였다. 
   

 

 


 <알쓸신잡 2>의 유현준 교수는 첫 여행지 안동에서 우리나라 한옥 건축의 지붕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인상 깊게 보았다. 한옥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이 알고 보면 우리나라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우리의 생활과 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며, 우리나라 건축의 맥락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한옥에 담긴 이야기를 잘 정리된 책을 찾다가 알게 된 책이 바로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이었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건축 특징을 정리한 책이다. 보통 건축에 대해 다룬 책은 건축물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혹은 건축물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에 주목한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기존의 건축 관련 책과 사뭇 달랐다. 건축물이란 콘텐츠보다 건축물들이 계속 바뀌어온 컨텍스트에 집중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왕궁, 사찰, 고택에 집중했다면 '건축'이 아니라, '건축물'이라고 했을 것이다. 건축이란 두산백과(네이버 검색)에 따르면 "사람이나 물품 ·기계설비 등을 수용하기 위한 구축물의 총칭으로, 용도라는 목적성에 적합하여야 하며, 적절한 재료를 가장 합리적인 형식을 취하여 안전하게 이룩되어야 하는데, 그 요소는, 예술적 감흥을 목표로 하는 공간형태, 진실하고도 견실한 구조기술, 편리성과 유용성으로서의 기능이다."라고 한다. 건축물은 건축의 일부이며 건축을 이루는 것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포괄적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단순히 한국 건축, 중국 건축, 일본 건축을 나열하여 비교하는 책이 아니라 국가마다 비슷한 듯 다른 건축물이 만들어졌던 이유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건축 자재, 기후, 역사적 배경, 각국의 특징을 함께 정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나라, 중국, 일본 건축물을 비교한 책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건축에 대한 책을 조금 들여다본 사람은 건축의 컨텍스트를 다룬 책만이 풀어낼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지 알 것이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건축을 다룬 책이며 동시에 동아시아 역사를 다룬 책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조금 더 쉽게 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사를 잘 모른다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기초적인 역사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건축의 시작은 대부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축조 기술이 한반도를 거쳐 섬 나라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각 지역에 적합한 방식으로 건축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유현준 교수가 방송을 통해 설명한 지붕의 곡선미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의 경우에도 중국식의 대칭적인 배치 원칙을 따르지 않고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을 살려 자연에 어울리는 건물의 배치나 형태를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자세는 건축의 세부에 까지 확대되어 고려의 건축은 중국과는 일정한 차이를 지닌, 개성이 뚜렷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처럼 중국의 건축 방법을 들여왔지만, 이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각 국가는 개성있는 건축물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고대 동아시아 문명의 특징은 활발한 문화 교류, 그중에도 사람들이 직접 왕래하는 인적 교류를 통한 문화 교류"를 꼽았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1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문화 교류를 통해 우수한 기술이 전해지고, 발전하였다. 여기서 중국의 왕조가 어떤 입장을 취했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건축 문화는 영향을 크게 받았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다른 나라와 문화교류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자, 조선 역시 다른 나라와의 문화 교류에 대해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유교의 문화적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화려하거나 웅장한 건축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서 실용적 기술들이 높이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건축도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건축은 이전 시대에 이루어온 건축 축조 기술을 보다 아름답고 완결성 있는 단계로 격상하였으나 500년간 이 단계에 멈추었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동아시아에 목조 건축이 발전한 이유

서양 건축물은 돌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성은 거대한 암석을 쪼개어 쌓아 올린 투박한 형상을 가지고 있거나, 정교하게 조각한 석조 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나는 서양의 목조 건축물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반면에 동양 건축물은 석조 건축물도 있지만, 나무가 핵심 소재인 목조 건축물이 많다. 왜 동양 건축물은 목조로 만들어진 것이 많을까? 왜 돌로만 만든 건축물은 많지 않을까?

 

저자는 비교적 짧은 건축 시간, 부드러운 나무의 속성이 보다 다양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한 점, 신전과 같은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은 문화적 속성 등을 꼽았으며, 동양 건축의 시작을 열었던 중국인들의 건축에 대한 세계관이 깊이 반영된 결과였다.  "1,000년 지속하는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100년 후에 누가 살게 될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조화를 이룬 한정된 집에, 이를 감싸는 즐겁고 안락한 장소를 만들면 충분하다."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에서 보편적인 건축 개념은 오늘날 건축 개념과 달랐다. (이 부분을 읽으며, 그래서 우리나라는 30년만에, 50년만에 재건축을 하는 아파트를 원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동양에선 대부분 단층 건물을 지었지만, 현대적 건축 재료인 철근과 콘크리트가 나오기 전까지 돌보다는 나무가 고층의 건물을 짓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도 충분이 만들 수 있었음을 한중일 건축물을 통해 짚어준다. 아쉽게 그 터만 남아 있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의 위용은 경주 타워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은 목조 건축을 이용해 시대의 필요성에 맞게, 시대의 미적 기준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건축을 시도했다. 아쉬운 점은 1,000년을 지속하는 돌을 이용한 서양의 건축물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동양의 수많은 목조건축물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목조 건축이 주를 이루었던 동양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붕이었다. 서양 건축물만의 독특한 입면만큼이나, 동양 건축에서 지붕의 곡선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한중일 지붕은 비슷해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일본의 지붕 구조가 독특하다. 일본은 온난한 기후와 잦은 지진으로 인해 중국과 우리나라와 다른 지붕 구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건축은 횡방향에서 기둥을 붙잡아주는 대신에 상부의 무거운 지붕이 내려 누르는 힘을 가지고 기둥의 안정화를 꾀했다. 따라서 지붕을 가볍게 하면 오히려 위에서 눌러주는 힘이 적어져서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질 우려를 느꼈을 수도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지붕에 많은 양의 흙을 올리고, 암기와와 수기와를 이용하는 반면에 일본은 이 두 가지 기와를 합쳐 지붕에 자신만의 기와를 얹었다. 처음에는 일본 건축의 주요 특징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기둥을 일직선상에 나란히 세우지 않고 가운데 쪽을 안쪽으로 살짝 휘어지게 하는 것은 철근 콘크리트로 집을 짓는 현대건축에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과거의 목조건축 세계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원인은 안쪽으로 휘어진 지붕 처마의 곡선과 건물의 벽면이 서로 자연스러운 조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데 있다. 그만큼 과거의 건물에서 지붕의 곡선은 평면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동아시아 3국 중에 우리나라 건축물에서 지붕에 부여하는 의미 정도가 남달랐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지붕의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지붕 곡선을 가지게 된 과정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우리나라의 지붕이 아름다운 이유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같은 형태의 지붕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건축은 고려시대나 조선 말이나 지붕 구조에서 혁신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다른 형태를 시도하거나 혁신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의 문화 자체가 다양한 건축 기법을 시도할 만큼 대규모 건축물을 짓는 일이 적었고, 그런 일을 시도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시기의 일본은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막부 시대가 들어섬에 따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화려한 성을 축조하였고, 이 시기에 일본 건축은 꽃을 피웠다. 오사카성의 화려함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국 건축의 처마 곡선은 확실히 이웃한 나라들의 처마보다 멋이 있다." 우리나라 건축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 지붕이나, 일본 지붕에는 없는 단아하고 기품 있는 멋이 살아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할 줄 알았다. 저자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고 했지만, 그 지나침 덕분에 아름다운 처마 곡선을 볼 수 있으니 마냥 나쁘게 볼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마 곡선에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사실은 일반 살림집까지 지붕 처마에 곡선을 살렸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궁궐이나 종교 시설이라면 모를까 살림집 지붕까지 곡선을 살린다는 것은 정체성으로 보아서 좀 지나쳤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창덕궁의 아름다운 처마 곡선과 같은 결을 가진 건축물을 북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북촌의 건축물들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는데도 창덕궁처럼 아름다운 처마 곡선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우리나라 건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미에 대한 기준은 유현준 교수가 방송에서 말했듯이 과학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당대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후 세대가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따라 건축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치마 곡선은 각 지역의 풍토나 강우량 같은 자연 요소에도 영향을 받지만 건물의 용도나 건축주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라는 저자의 말을 보면, 건축은 과학적 요소와 함께 사회적 요소 그리고 인문학적 요소가 결합된 융합 학문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지붕을 약 500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할 필요가 있었는지, 그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세상일은 역시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이어서 이런 멋진 처마를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수고가 따랐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아름다운 지붕을 얻는 대신 더 많은 것을 500년간 잃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건축에 있어서 뜻 깊은 족적을 남긴 왕이라고 하면, 임진왜란 이후 궁을 다시금 지었던 광해군이나, 수원화성을 축조한 정조외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건축이란 것이 시대 흐름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것인데 그 부분에서 뒤처진 것"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석조 건축물 살펴보기

동양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은 목조 건축이지만, 석조 건축 역시 함께 발달했다. 사람이 주거하는 공간을 만든 건 아니지만, 생활 공간 곳곳에 석조 건축물을 세웠다. 그 중에서 화강암을 이용한 건축물이 많이 있다. 하지만 화강암으로 만들었지만, 돌의 투박함을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 석조 건축물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하게 조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석조 건축 흔적은 우리의 선조들이 나무를 다루는 능력 만큼, 돌을 다루는 능력도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자주 사용했던 대리석과 달리, 단단한 화강암은 다루기 힘들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화강암은 어디까지나 부재료로 머물렀고, 주재료는 나무였다.
화강암을 이용한 건축물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박석'이었다.

 

박석은 궁궐 마당을 덮는 일종의 보도 블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돌을 다루는 능력으로 볼 때, 반듯반듯하게 동일한 모양으로 맨질맨질한 형태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묘의 박석을 보면 굉장히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화강암'이 가진 속성을 들어 설명했다. 화강암은 성분상 빛을 반사하는 속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형태로, 맨질맨질하게 다듬으면 지나치게 눈 부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투박한 형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궁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투박한 돌판에서도 굉장히 눈부시다.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져서 화강암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눈부심을 강하게 체감하지 않도록 다듬는 기술이 발전했다. 가령 표면을 거칠게 하거나, 오히려 돌의 태도를 낮게 설정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롯한 궁의 정전이나, 종묘에서 볼 수 있는 박석이 더 아름답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단지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 돌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던 건 아니다. 이미 오랜시간부터 한반도의 돌 사랑은 남달랐다. 그 기원을 고인돌에서부터 찾는 저자의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면 그 고마움을 한 가득 느끼는 '온돌'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백제를 통해 온돌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지만 발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전해진 지역의 기후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홋카이도 지역에 전해졌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전통적으로 온돌방의 실내는 바닥이고 벽이고 천장이고 전체를 종이로 싸바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바닥은 두터운 장판지를 깔고 벽과 헌장은 흰 도배지를 바르는데 창문틀이나 기둥도 모두 종이로 감싸서 실내에서는 종이 외에는 다른 것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했다. 반면에 마루 쪽은 원재료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구들과 온돌방의 실내를 감싸는 형태와 대청마루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원칙을 고수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온돌이 보편화됨에 따라 부엌의 위치, 문의 높이가 달라진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는 뛰어난 온돌 문화도 좋지만, 이로 인해 "실내 전면에 온돌이 보급되면서 방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소위 좌식 생활이 정착되었다. 즉, 실내에 의자나 침대가 들어설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도 전면온돌 도입이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 "가 생긴 점도 함께 알려준다. 우리나라 건축의 우수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의 융성이 불러온 또 다른 면을 함께 비교한 점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멋이 담긴 가구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구가 발전한 편은 아니었고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온돌로 보편화된 좌식 생활에 있다는 점도 함께 배울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며 찾은 우리나라 건축美

비교는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중국 건축과 일본 건축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다루어 우리 나라의 문화만의 특성을 살린 저자의 통찰은 결국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만 배운 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지금의 문화를 일구며 놓친 점이 무엇인지 확인하며 동양 건축안에 우리나라 건축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건축의 공포는 반드시 이런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면서도 불규칙한 세부들이 조합을 이루는 경우가 흔하다. 또 동일한 형태의 공포를 다른 건물에서 반복하는 경우도 거의 볼 수 없다. 화반의 경우에는 기능이나 형태가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변형이나 개성을 드러낸 창작이 훨씬 자유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선 두공이라고 부르는 공포와 화반은 지붕의 곡선미와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양 건축의 대표 요소다. 단지 국가마다 다른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건물마다, 이 건물을 만든이의 개성을 담아낸 흔적이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알고 있는 건물 설계자는 경주 불국사를 세운 김대성이나 도산 서원을 기획안 이황이 전부다. 건축가들의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던 문화로 인해 수많은 건축가들은 건물주 뒤에 자신의 이름을 감추었다. 앞으로 화반을 보며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건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과거 건축가들의 마음을 헤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6세기 인문학자 화담 서경석이 쓴 글 중에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이 있다. 글의 요체는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형체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에 있다. 줄을 튕겨 듣는 거문고 소리보다 줄 없는 거문고에서 오히려 그 미묘함을 체득하고 형체를 보는 것보다 형체가 없는 것을 즐기므로 오묘함을 얻는 다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눈에 보이는 목적이나 용도에 한정한 건물이 아니고 용도가 정해지지 않으면서 그 용도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데 누각의 존재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은 이따금씩 놀러가는 궁궐을 더 자랑스럽게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지적 토대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고궁투어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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