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 몸도 마음도 내 맘 같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본격 운동 장려 에세이
가쿠타 미츠요 지음, 이지수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젊음이 새로움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됐다.
내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새로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엉망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때 뭔가를 깨우쳤다고 생각한다.
젊음과 새로움이 동의어가 아니듯,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image_1446824001528474986226.jpg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이 말에 공감한다고 한다면, 가쿠타 미쓰요(저자)는 크게 웃지 않으실까? 하지만 정말, 난 이 말이 공감한다.  아직 20대이지만. 운동을 하고 안 하고 차이를 체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운동을 하지 않는 모순덩어리가 또 '나'다. 올 초부터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생각에만 멈춘 지 벌써 6개월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데 마음을 쿡쿡 찌르는 문장이 많았다. 중년의 심정에서 쓴 글이라고 저자는 끊임없이 글로 상기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로서 꼭 중년의 마음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에도 공감을 불러왔다.

느긋하게, 당당하게, 씩씩하게
건강한 어른으로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

 

 

 


"먼저 단언하건대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운동을 꾸준히 하게 된다면,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난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무언가 운동을 시작해도 금방 싫증을 내는 편이다. 딱 가쿠타 미쓰요 작가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이것저것 색다른 운동에 잘 도전하지만, 그 도전이 꾸준히 이어진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마라톤을 시도한 적도 있으나, 결국 2주 정도 연습을 하고 그만두었다. 좋아하지 않는 운동을 내가 그만둔 이유는 역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저자는 시종일관 말한다. 자신은 달리는 걸 싫어한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 역시 올곧게 지켜나간다. "달리는 걸 싫어하는 나는 몇 번인가 대회에 나가봤지만 당연히 중독되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 솔깃하게 된다. 그런데도, 운동을 지속하게 된 원동력이 무엇인지. 그 솔직한 고백이 더욱더 궁금해졌다.

 


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온 힘을 다해 괴로운 것을 피하면서 운동해왔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괴로운 것을 떠안으면 더욱더 싫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하기로 했으니 하는 거다.
어떻게든 하는 거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심심하다. 그리고 그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더 심심했다. "별거 아니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게 할 만큼 정말 누구나 한 번은 했을 법한 생각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쿠타 미쓰요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달리기 팀의 뒤풀이에 어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달리기는 혼자가 아니라서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못해 달린다. 어째서 마지못해 달리는가 하면, 한 번 쉬면 다음 주도 쉬고 싶어질 게 분명하고 다음 주도 빼먹으면 그다음부터는 틀림없이 내내 빼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번 쉰다는 건 내게는 팀을 그만둔다는 뜻이며, 그 말인즉슨 앞으로 평생 달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꽤 날카로운 자기 분석이다. 그리고 운동을 중도 포기하게 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장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난 이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운동은 정말 꾸준히 해야 한다. 조금하더라도 쉬면 안 된다. 살아오면서 운동을 한 날보다 하지 않은 날이 많다. 결국 몸은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주는 편안함에 강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 않으려는 강한 관성 혹은 본능에 질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마지못해' 나를 믿지 못한다면, 결국 매일매일 조금씩 운동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만 쉬자가, 영원히 쉬자로 바뀌기는 정말 쉽기 때문이다. 계속 지속한 이유,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팀을 그만둘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문장으로 요약하면 거창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글로 만나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여한 작은 이유, 목표가 쌓인 결과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체념 섞인 말투, 달리는 내 발걸음을 붙잡는 뱃살에 대한 고백, 하나하나 달성하며 느끼는 쾌감, 오버페이스 앞에 무너진 체력, 조금씩 단축되는 기록들. 그 모든 과정 중에 떠오르는 생각과 가쿠타 미쓰요 자신과의 마주침. 이 모든 것들이 달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동시에 달리는 것을 지속하게 만든 이유였고, 이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달리기를, 운동을 권하는 이유였다. 

 

 

"뭐,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골인한 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 어쩐지 아무래도 괜찮다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늘 있는 , 어쨌거나 걷지 않았던 것만큼은 자신을 좀 칭찬해주자. 노력할지 말지는 그다음에 생각하자."

 

역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운동을 권하며, 자신을 위해 '맥주 한 잔'이라는 보상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건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술이 근육과 운동에 얼마나 해로운지 모두 알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운동을 하라고 말하면, 과연 이렇게 말할까. 때때로 맥주 한 잔을 마셔도 괜찮다고,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치기 보다 스스로 적당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아직 난 완벽한 몸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 이런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 이해를 바탕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하지 않을까.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는 운동을 여느 운동 에세이, 건강 에세이와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저자는 꽤 과감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말한다. 술을 마시는 것도 괜찮다고, 운동의 빈도가 잦지 않더라도, 강도가 강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을 것만을 말한다. IBM 검사에서 복부 비만은 여전하고, 근육량도 늘지 않지만, 10년 전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데도 꾸준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고백.. "나는 아직 여행지에서 달리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도 그럴 게, 달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라며 여행지에서 달리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고백.. 그런 글을 읽으면 웃음이 나오면서, 운동을 해볼까 싶은 의욕도 함께 나온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누구나 보면 감탄할법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는 없다. 저자는 달리기를 이야기하지만, 꼭 달리기를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 운동에 적용해도 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운동하는 걸 권하는 책이다.

 

느긋하게, 당당하게, 씩씩하게
즐거운 운동을 위한 어른의 여덟 가지 자세


1. 무리는 금물! 중년임을 자각한다.
2. 살 빼기, 체지방 줄이기, 인생의 권태 없애기 등 이득을 얻으려 욕심내지 않는다.
3. 그만두고 싶어질 때쯤, 값비싼 도구를 갖춰 마음이 그만두는 시기를 늦춘다.
4. 높은 뜻을 품지 않아야 오래 운동할 수 있다.
5, 시원한 맥주, 따뜻한 스파, 마사지 등 운동이 끝나면 자신에게 포상을 준다.
6.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바보 같은 짓. 경쟁자는 늘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기억한다.
7. 연습 후 친구들과 회식하기, 여행 겸 떠날 수 있는 지방 대회 신청하기 등 이벤트를 만든다.
8. 가슴 설레는 제안을 해주는 활동적인 어린 친구를 만든다.

 

우리는 운동을 왜 할까.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다른 걸 의식한다.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는 운동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꾸준히 할 수 있는 생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에세이다. 나를 위해, 멋진 몸을 만드는 도전에 앞서 그 허들을 낮추어 나를 위해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 허들 앞에 먼저 서보는 게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
제프 다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하고 싶은 게 뭐야, 루크?”
“무슨 뜻이지?”
“인생을 어쩔 거냐고?”
“지금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
“나중에 말이야.”
“나중에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 계속 이렇게.
그러니까, 내 인생. 내가 자기 핵심에 닿았다고 했지?
나도 같은 느낌이야. 내 인생의 중심, 핵심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

 

 


 

image_2915997111528265797858.jpg


 

 


"아.. 어렵다, 사랑."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를 읽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루크'와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벌써 머리가 아득해진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런던에서 파리로 온 사람은 루크였지만,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에서 루크의 이야기를 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스였다. 사실상 주인공인 루크의 연애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알렉스가 전달했기 때문에 루크의 입장에서 루크의 생각을 알 수 없기도 했지만 이걸 감안해서 보아도 루크는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까지 받아들인) 니콜도 루크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을 바라보는 시각, 앞으로를 바라보는 시야가 루크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니콜은 스물여섯 살 파리에서 만난 루크를 열렬히 사랑했고, 루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20대에 파리에서 서로가 만났을 때는 그 차이보다 사랑한다는 감정에 집중했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는 소설가 제프 다이어가 쓴 장편 소설이다. 그리고 그가 쓴 유일한 연애 소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의 연애 소설과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는 조금 다르다. 연애 이야기를 하지만 연인 간의 사랑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연인인 두 사람의 삶, 일상도 비슷한 정도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연애담이기 보다 제프 다이어가 쓴 청춘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작가"라며 제프 다이어를 극한한 사람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그가 그린 청춘물이 어떨지 조금 더 쉽게 와닿을 것이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도 책을 읽고 나니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두 작가는 오묘한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 오묘함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다 이해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뭐, 꼭 다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자기를 알아가는 일, 보는 게 아니라 아는 일. 어떻게 다른지 알겠어?”
“그건, 말하자면,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같은 건가?”
“나는 자기 아주 잘 알아, 루크. 그게 좋고, 그게 날 행복하게 해. 복제한 자기가 있다고 쳐봐. 또 한 명의 자기, 완전히 똑같은 자기가 있다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복제 자기와 자기의 차이점을 백 개나 천 개쯤 알아볼 수 있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런 뜻일까? 그이에 대한 작은 것들을 세세하게 구분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루크, 알렉스, 니콜, 샤라.
네 사람은 파리로 온 이방인이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목민'과 같은 입장인 그들은 파리에 온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확실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을 쓰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싶은, 그 마음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면, 그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겠지만, 그들의 목표는 흐릿했고 자신들의 삶은 불안정했다. 그래서 고민과 걱정을 하면서도,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서로에게서 받았다. 고달픈 이방인의 삶이지만,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그 고민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싶었고, 꼭 그 고민이 종결되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관계였고, 그 관계를 맺은 곳이 파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당연히 달라졌다. 각자가 달라져서 일 수도 있고 혹은 원래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렉스도 저자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그들은 서서히 멀어졌다. 모든 관계의 시작할 때 좋았던 이유가 불명확하듯, 멀어진 이유도 불명확하다. (나의 경우에 그랬다.) 아마 천천히 서로의 차이가 한눈에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처음에는 그 차이가 작아 보였는데 갑자기 커져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 둘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싸우게 되는 일이 잦아져 버린 어느 때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난다. 소설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루크는 네 사람과 멀어진다.

 

“아니야. 행복.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우연한 거잖아, 거의 부수적인 거. 하지만 루크는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을 사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어. 다른 부분에서 야심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은 루크와 알렉스가 처음 만났을 때, 루크가 니콜을 만났을 때. 알렉스와 샤라가 만났을 때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작의 순간을 기록한 때는 이미 루크와 멀어진 이후다. 그때 그 순간에 집중한 듯 글을 쓰지만 중간중간 루크가 멀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온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생각을 토대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 말은 연인이었던 니콜의 입에서 나오기도 했고, 알렉스의 생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행복을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생각하는 건, 그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던 니콜과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행복의 시선이 현재에 머물러 있었던 니콜과 행복의 시선이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 루크. 헤어지는 이유로 자주 꼽는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의 이별에서도 유효했던 것 같다.

 

“이보다 더 행복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어떻게 알아?”
“천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한계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재밌다. 눈을 씻고 봐도 천장 하나 없는 이런 곳에서.”
“저 별들이 천장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둘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위성 하나가 지구를 맴돌았다.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했다. 혹은 그 차이가 수용 가능했던 때가 말이다. 그때를 소설의 마지막으로 작가가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헤어진 연인이고, 각자 가정을 이루고 서로의 연인 혹은 배우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미 지나간.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일지 모르는 그때를 강조하듯 마지막으로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이유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오늘 삼킨 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

"이게 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불편하다. 작가 조남주의 소설은 나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놓고 싶지 않다. 나에게 필요한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그녀의 글을 읽었다. 불편함과 마주하기 위해서, 일상에 무뎌져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있는, 혹은 내 친구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녀의 소설을 펼쳤다. 《그녀 이름은》은 조남주의 첫 소설집이다. 이야기 27편과 한편의 에필로그 한 편이 합쳐져 총 28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있다. 이야기 하나하나는 소설보다  인터뷰를 소설의 형태로 옮겨 놓은 글이란 인상을 준다. 실제로 몇몇 이야기는 인터뷰를 그래도 옮긴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가지게 되는 명칭이 있다. 딸, 엄마, 며느리, 아내, 아줌마, 임산부, 할머니... 물론 이 안에 혐오가 뒤엉킨 단어도 있고, 직장의 속성에 따라붙은 표현이 있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또 붙는 말이 있다. 그 '언어' 속에 살아가는 '그녀'라는 존재에 집중한 소설이다. 지난 소설들이 특정한 '그녀' 혹은 '그'에게 집중한 소설이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많은 '그녀'들의 삶을 글로 비추었다. 마치 스탠드 조명을 조금 더 위로 올려 부드러운 밝기로 넓은 공간을 비추는 것 같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언저리에 이 이야기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이름은》은 《82년생 김지영》이나 《현남 오빠에게》와 같은 불편함과 다른 결의 불편함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매번 하는 생각인데, 꼭 《그녀 이름은》을 보고, "언제 적 이야기야."나 "그땐 그랬지."라고 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다음 세대가 아닌 내 입에서 나오길 말이다.

 

 

 

 

전보다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는 더 힘들고 누구는 덜 힘들고 하는 것 없이 공평하게 일하면 좋겠다. 손주들 봐야 할 때, 남편이 아플 때처럼 급할 때 한 번씩은 조금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오래 일하고 싶다. 진순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할 것이다.

 

작년 내내 캠퍼스에서 용역 업체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 더운 여름에 햇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피켓을 들었고, 옷 하나라도 덜 입고 싶은 날에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조끼와 띠를 두르고 일하시는 모습도 보았다. 계절은 빠르게 바뀌었지만 그분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캠퍼스 거리에서만 울릴 뿐 직접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어느새 내 기억 속에서 잊혔다. 무감각해진 것이다. 그러다 올봄에 신문을 통해 반가운 소식을 보았다. 드디어 학교에서 청소하는 분들을 정식 노동자로, 학교의 학내 구성원을 인정했다는 소식이었다. <20년을 일했습니다>를 읽는 데 이 사건이 떠올랐다. 국회 청소 노동자나 우리 학교 청소 노동자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정식 노동자로 인정받고, 노동자로써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놓여있다는 걸 안다. 저임금 노동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구조,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 그 구조적 약자가 중년 여성이 많았던 이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 분석에서 해결까지 나아갈 수 없었던 사정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도면, 그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분들의 삶이 '드디어 늦었지만 우리 모두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는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바란다. 그리고 응원한다.

 

 

 

 

"그래도 너는 딸이잖아."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구구절절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소연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딸이다. 그래서 뭐 어쨌는데.

 

딸과 엄마 사이.. 참 어렵다.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아가사 크리스티가 쓴 《딸은 딸이다》에서 쓴 것처럼, 딸과 엄마 사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가족이기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가족애로도, 같은 여성으로써 느끼는 동질감 뿐만 아니라 감사(고마움) ,기대, 애착, 시기, 질투, 실망, 분노, 원망, 피해 의식 등의 감정들이 얽히고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더 대왕)처럼 단번에 끊을 수도 없다. 이따금 체념으로 감정을 갈무리하기도 하고, 웃음으로 포장하며 순간순간을 넘기기도 하고, 혹은 작은 공감을 주고받기도 하고, 혹은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정말 행복한 모녀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엄마와 딸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과 (닮은 점이 있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또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한 관계이기에 오는 다양한 고민 혹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알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있고, 알지만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관계다. 이 소설에서 딸과 엄마의 관계를 밀도 있게 다루지 않아 깊이 생각할 수 없었지만, 쉽지 않은 그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와 나. 내가 엄마에게 기대하는 바와 엄마가 딸인 나에게 기대하는 바 사이의 틈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참 어렵다. 이건, 엄마랑 이야기해봐야겠다.

 

 

 

'나는 강하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강하다.'

 

《그녀 이름은》을 읽고 마지막은 이 문장으로 끝내고 싶다. 《그녀 이름은》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고, 잊지 않고 싶은 문장이기에. 이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녀 이름은》의 주인공들과 그 주인공일 수 있는 나에게 필요한 건 강한 연대라고 생각한다.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있을 때 정말 더 강하니까 말이다. 단지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 사이의 연대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나드는 연대, 조금 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다. 엄마와 딸, 직장 선후배 또 동료,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등... 그녀들의 이야기가 '혐오의 대상'이나 '무관심의 대상' 혹은 '가십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특별하지 않고 별일도 아닌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책을 펼치며 여러분의 이야기도 시작되리라 믿습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분명 낯설지 않다. 분명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혹은 당장 내 옆에서, 곧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의 경험은 비슷한 듯 다른 형태로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한다. 아마 이 일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비슷한 상황, 생각을 한 적이 있었고, 젠더 수업 시간에 친구들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확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물론, 누군가 매우 특수한 일이나 유별난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번만 시간을 내서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 생각 뒤에 묻혀 있는 다른 사회적 함축 의미로 인해 공론화되지 못한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말이다.


난 《그녀 이름은》에 대한 이야기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정도,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 생각하는 바는 모두 다를 테니까. 아니, 달라야 한다. 동일한 것이 이상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르기에, 그 생각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다른 사람들 중에 작가 조남주가 선택해 그린 인물이 완전한 보편성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고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조남주가 그 인물들을 선택해 그녀들의 이야기로 묶어 표현한 '(문제) 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녀 이름은》의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녀들의 이야기로 구분 짓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레폴레 아프리카
김수진 지음 / 샘터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프리카에서의 새로운 도전으로
조금은 더 자란 내 앞에
또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아프리카


나라의 이름이 아닌, 대륙의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땅. 아프리카다.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8개 나라를 취재로, 여행으로 다녔던 김수진 기자의 이야기, 《폴레폴레 아프리카》. 나에게 아프리카는 이중성을 가진 대륙이었다. 세렝게티와 같은 광활한 초원, 그냥 자연이 아닌 '대자연'을 품은 대륙이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야생동물의 보고라고 불릴 만큼, 기린, 하마, 악어, 사자, 하이에나, 치타, 물소, 코끼리까지 좀처럼 보기 힘든 동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끝없이 광활한 땅이 이어지는 아프리카는 여느 대륙과 다른 자신만의 빛깔을 과시하는 대륙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에 슬픔과 고단함이 묻어있는 아픈 대륙이다. 식민지 역사 뒤에 따라온 부족 간 갈등 그리고 내전, 에이즈, 말라리아, 기아, 빈곤한 아프리카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든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가보고 싶은 땅이면서 동시에, 선뜻 가기 미안하고 또 두려운 곳이다. 두 가지 이미지가 공존해서 일까. 아프리카는 나에게 느낌만 남은 미지의 땅이 되었다.

탐구심 강한 난, 아프리카 관련 여행서가 보이면, 바로 읽는다.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책에 비해 여행서를 읽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대한 대륙의 모습을 한 사람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거대한 땅 아프리카는 커다란 주제를 가지고 만나면, 먹먹함이 많이 남지만 여행서로 만나면 먹먹함 뒤에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폴레폴레 아프리카》도 그런 책이었다. 아프리카 순회 특파원으로 갔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 혼자서 여행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위험한 곳이고, 저자가 글로 남기지 않았지만 아마 겁이 났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곁에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귀인들, 소중한 친구, 든든한 보디가드 그리고 스스로를 믿는 '나'가 동행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여자 혼자서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라는 '아프리카'라는 이미지가 흐릿해져간다. 그리고 수많은 만남이 존재하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폴레폴레. 누비고 싶어진다.

 

"폴레폴레!"
폴레폴레는 동아프리카에서 널리 사용하는 스와힐리어로 '천천히'라는 뜻이다. 이전에도 한국인 등반객을 만나본 아민은 "빨리빨리 노(No), 폴레폴레 예스(Yes)"라고 말했다.

 

《폴레폴레 아프리카》는 특파원이 쓴 여행기입니다. 위험천만한 순간보다 행운 같은 만남이 더 많이 존재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작가 혼자서 사색에 잠기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한 이야기가 더 많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케이팝 팬들이나 아프리카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떠난 카로족, 하메르족과 같은 아프리카 소수민족과의 만남, 두바이까지 날아온 남동생을 꼬셔서 탄자니아를 여행하다가 고산병에 걸린 동생을 걱정하기까지. 아프리카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도 있고, 아프리카가 아닌 여행이어서 가능한 이야기 그리고 김수진이라는 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골고루 담겨 있다.

사람과 교감하고, 동물과 교감하고, 땅과 교감하는 저자의 시선은 참 따뜻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6달 동안 8개 나라를 오가던 그녀에게 한순간 한순간은 참 소중했다는 게 글에서 느껴졌다. 폴레폴레 지나가길 바랐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마음에 담은 이야기들 가운데 '르완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 중학교 때, '호텔 르완다'를 본 적이 있었다. 참혹했던 르완다 내전을 보고 나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고, 그 어떤 무서운 영화보다 더 심한 공포를 느꼈었다. 이웃이 한순간 적이 되고, 가족이 흩어져야 했고, 바퀴벌레를 청소하듯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약 20년 전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르완다에 대한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다행히 저자의 글을 통해서 확인한 르완다는 과거의 그늘을 기억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나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숙소 때문에 고생했던 저자에게 '즐거운 우리 집'이라는 수식어를 붙게 만든 포근한 집이 있던 곳이 르완다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르완다의 달라진 모습과 그 모습 이전에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현재를 적절하게 담아내, 어느 부분보다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6만 5천 명 가운데 30명만 살아남았던 그 일을 기억하기 위해 "르완다 정부는 그 끔찍한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학교를 추모관"으로 만든 곳에서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람들의 입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나오지 않고, 네버 어게인이라고 지나간 역사를 단호하게 말하는 르완다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실제로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면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가 있기는 하지만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언제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 역시 아프리카에 온 지 수개월이 됐지만 에티오피아, 남수단, 우간다, 르완다를 다니며 상상했던 장면을 현실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대신 소 떼, 양 떼와 같은 가축들이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린 경험을 몇 차례 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지에서 빅 파이브와 고릴라를 만난 이야기 역시 재미있었다. 사진이나 동물원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아프리카는 동물들의 공간에 인간이 들어가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그 경험이 동물을 보다 동물답게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관광객들에게 보다 많은 동물을 보여주기 위해 무전기를 들고 동분서주하는 초원 가이드의 모습은 씁쓸하게 보인다. 그래도 드넓은 자연 속에서 동물과 마주했을 때, 인간과 동물이라고 구분 짓지 않고 생명과 생명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향하는 게 아닐까. 이 복잡한 감정을 무겁지 않게 저자는 담아냈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담으며, 찰나의 순간에  드는 깨달음은 모순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을 가리켜 생각의 산파라고 하였다. 낯선 경험이 주는 충격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어쩌면 인공적인 문명에서 가장 멀리 있고,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라면 가장 낯선  땅인 아프리카에서 보낸 6개월의 기록은 생생한 생각이 많이 담겨 있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낯설고 생소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글을 읽다가 마음을 찌릿 울리는 '어린 엄마'(조혼, 여성 할례 등), '생리대가 소중한 이유'와 같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권리가 무너진 현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 여기가 아프리카의 끝이로구나.'
나는 왜 이곳까지 왔을까. 대륙 끝까지 와서도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아니 답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내가 30년 동안 만들어둔 내 마음속 G. P. S.가 "아는 길로만 가면 재미없잖아. 한번 가봐"라고 말해준 덕분이다. 이는 미국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2013년 5월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한 말이기도 하다.
"인생의 비결은 당신이 어디로 갈지를 말해주는 내적, 도덕적, 정서적 G.P.S.를 개발해나가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이야기는 6개월의 여정과 함께 끝난다. 아쉬운 느낌보다 곧 다음이 올 것 같은 기대감처럼 글이 끝났다. 역설적이게도 끝난 것이 끝이 아니란 느낌이 든다. 나도 그녀처럼 아프리카 땅에 서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마음에 했던 말과 오프라 윈프리가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한 말이기도 한 그 말을 따라 폴레폴레 아프리카로 가보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 한 번도 글쓰기가 쉬웠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 글을 읽는 것에 비해 글 쓰는 것은 참 어려웠다. 나만 읽고 보는 일기를 제외하고 독후감, 숙제, 과제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편지를 쓰는 것까지 글쓰기 앞에 고민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글은 대학에 입학할 때 '논술 시험'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때는 이 시험만 끝나면 글쓰기의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입 논술'은 글쓰기 세계의 서막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 대학생활 내내 리포트 걱정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과목마다, 교수님마다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썼지만, 쓰면 쓸수록 자신감보다 요령만 점점 늘어났다. 리포트라는 험준한 벽을 넘고 나니, 요즘엔 "자기소개서"의 세계 앞에 서있다. 나와 같이 느끼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인지, 중고등학생을 위한 논술학원, 대학교에선 글쓰기 수업, 사설 학원에서 자기소개서를 봐준다고 한다. 10년도 넘게 글쓰기를 해왔음에도 글쓰기 앞에서 막막해진다.

 

왜 이렇게 글쓰기가 어려운 것일까?

 

그냥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참 어렵다. 좋은 글은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된 글이다. 좋은 글은 마음에 와닿는 글이다. 좋은 글은 논리가 탄탄한 글이다. 좋은 글은 하나의 선율처럼 읽히는 글이다. 좋은 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고,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잘 알지만, 막상 글쓰기 앞에만 서면 자신이 없어진다. 그럴 땐 글 잘 쓰는 사람에게 한 수 배우는 게 필요하다. 좋은 글이란 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니, 글쓰기 스타일마다 스승을 두면 더없이 완벽하다.

 

"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박지원, 이덕무, 니체, 나쓰메 소세키, 박제가, 괴테, 볼테르, 조너선 스위프트, 심노승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대를 넘나드는 글쓰기 천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바로,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빠지지 않는 것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 실력을 키워주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다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책이다. 동서양의 지식인의 글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글 속에 숨은 의미를 저자 나름대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이끌어낸다. 막상 그 결과물을 책에서 확인해보면, 뻔한 내용이라며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글쓰기 천재들은 말한다. 글쓰기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쓰는 것이고 그 글을 쓰기 위해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좋은 글쓰기 자체는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이탁오는 동심이란 곧 진심이라고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말과 글은
이미 순수함과 진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짓일 뿐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총 9개 주제마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인 4명을 선정해 주제를 관통하는 글쓰기 철학을 풀어내고 있다. 36명의 동서양 지식인들의 글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각각의 주제에 부합하는 저서에서 글쓰기를 하는 와중에 마주했던 고민까지 유추해낸다. 이 책에는 논술을 잘하는 비법, 리포트를 잘 쓸 수 있는 방법, 뽑히는 자기소개서와 같은 비결은 없다. 오히려 글쓰기의 기술적인 면모보다,  글쓰기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한 글쓰기, 정치적 사회적 목적의 글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 나를 탐구해나가는 글쓰기,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글쓰기 등. 각 글마다 동서양 지식인들은 비슷한 듯, 다른 자신의 글쓰기 결과물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두고, 저자는 이 글들과 동시대에 비슷한 글에서 주제 의식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17~18세기에 만약 극도로 압축적인 묘사와 함축적인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하이쿠'라는 시의 미학이 일본에 있었다면, 조선에는 극도로 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소품문'이라는 산문의 미학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 풍미했던 소품문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 구체적인 예시와 저자의 깊은 분석을 통해 집어준다. 그 외에도 풍자 문학에 있어서 조선의 '박지원',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영국의 '조나선 스위프트'의 글을 통해 풍자 문학이 왜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이중적인 시대, 곧  '위선의 시대'"라는  사실을 함께 말한다.

 

대작과 걸작은 그러한 담대한 정신과 거대한 열정이 있어야
비로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더 이상 진리를 '인식'하는 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자의식의 글쓰기' 부분이었다. 자의식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외에 낯선 이름들이었기에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나'란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유가 녹아진 글들을 읽는 과정이 어려워서 더 기억에 남았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난 뒤에 적은 글들은 꼼꼼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었고, 천천히 생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삶과 그 순간순간의 궤적을 스스로 돌아보고 기록하는 자서전은 특별하다. 일기나, 평전과 달리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변화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서전은 다른 사람은 결코 쓸 수 없는 내용을 담을 수 있지만 동시에 왜곡될 여지가 많다. 이에 대해 "'진실성'과 '진정성'이야말로 '글은 나의 삶이자 나 자신'이라는 자의식의 미학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가치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져 있다면 그러한 글은 자기 포장이자 자기 홍보 일 뿐이다."라는 당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진실로 나의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들어놓은 것은 두려움이나 고통도 아니었고, 쾌락과 오락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나는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는 거칠고 불친절한 자유의 오르막길에 천천히 올라갔다.


36명의 지식인들의 글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작가의 글은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어떤 작가의 글은 읽어도 읽어도 어렵기만 했다.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 36명의 작가를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난 글쓰기가 어렵다. 36명의 비결 아닌 비결을, 그들의 글쓰기 통찰력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서 배운 건 글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모든 글이 어려웠다. 특히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쉽지만 동시에 쉬울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쉽게 쓰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36명의 글과 그 글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상을 함께 배우며 18세기 이후로 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고 글도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글이 태어나는 건 어떤 천재의 선구안과 같은 판단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대에 필요한 글을 용기 있게 쓴 지식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9개의 글의 갈래의 중심에는 시대의 변화가 놓여 있었고, 글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글쓰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우리 시대에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글쓰기 동서대전』 속 36명의 동서양 지식인을 만난 건 잘한 선택이었다. 홍길주의 글에서 배울 수 있듯이 "글쓰기에서 자득의 묘리란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찾을 수 있고 또한 구할 수 있다." 36명 모두에게 혹은 몇 명에게 혹은 책이 아닌 다른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나만의 좋은 글'을 위해선 결국 다독, 다상량, 다작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