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
제프 다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하고 싶은 게 뭐야, 루크?”
“무슨 뜻이지?”
“인생을 어쩔 거냐고?”
“지금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
“나중에 말이야.”
“나중에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 계속 이렇게.
그러니까, 내 인생. 내가 자기 핵심에 닿았다고 했지?
나도 같은 느낌이야. 내 인생의 중심, 핵심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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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렵다, 사랑."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를 읽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루크'와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벌써 머리가 아득해진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런던에서 파리로 온 사람은 루크였지만,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에서 루크의 이야기를 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스였다. 사실상 주인공인 루크의 연애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알렉스가 전달했기 때문에 루크의 입장에서 루크의 생각을 알 수 없기도 했지만 이걸 감안해서 보아도 루크는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까지 받아들인) 니콜도 루크와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을 바라보는 시각, 앞으로를 바라보는 시야가 루크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니콜은 스물여섯 살 파리에서 만난 루크를 열렬히 사랑했고, 루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20대에 파리에서 서로가 만났을 때는 그 차이보다 사랑한다는 감정에 집중했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는 소설가 제프 다이어가 쓴 장편 소설이다. 그리고 그가 쓴 유일한 연애 소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의 연애 소설과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는 조금 다르다. 연애 이야기를 하지만 연인 간의 사랑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연인인 두 사람의 삶, 일상도 비슷한 정도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연애담이기 보다 제프 다이어가 쓴 청춘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작가"라며 제프 다이어를 극한한 사람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그가 그린 청춘물이 어떨지 조금 더 쉽게 와닿을 것이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도 책을 읽고 나니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두 작가는 오묘한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 오묘함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다 이해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뭐, 꼭 다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자기를 알아가는 일, 보는 게 아니라 아는 일. 어떻게 다른지 알겠어?”
“그건, 말하자면,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같은 건가?”
“나는 자기 아주 잘 알아, 루크. 그게 좋고, 그게 날 행복하게 해. 복제한 자기가 있다고 쳐봐. 또 한 명의 자기, 완전히 똑같은 자기가 있다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복제 자기와 자기의 차이점을 백 개나 천 개쯤 알아볼 수 있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런 뜻일까? 그이에 대한 작은 것들을 세세하게 구분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루크, 알렉스, 니콜, 샤라.
네 사람은 파리로 온 이방인이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목민'과 같은 입장인 그들은 파리에 온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확실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을 쓰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파리에서 보내고 싶은, 그 마음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면, 그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겠지만, 그들의 목표는 흐릿했고 자신들의 삶은 불안정했다. 그래서 고민과 걱정을 하면서도,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서로에게서 받았다. 고달픈 이방인의 삶이지만,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그 고민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싶었고, 꼭 그 고민이 종결되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관계였고, 그 관계를 맺은 곳이 파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당연히 달라졌다. 각자가 달라져서 일 수도 있고 혹은 원래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렉스도 저자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그들은 서서히 멀어졌다. 모든 관계의 시작할 때 좋았던 이유가 불명확하듯, 멀어진 이유도 불명확하다. (나의 경우에 그랬다.) 아마 천천히 서로의 차이가 한눈에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처음에는 그 차이가 작아 보였는데 갑자기 커져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 둘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싸우게 되는 일이 잦아져 버린 어느 때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난다. 소설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루크는 네 사람과 멀어진다.

 

“아니야. 행복.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우연한 거잖아, 거의 부수적인 거. 하지만 루크는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을 사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어. 다른 부분에서 야심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은 루크와 알렉스가 처음 만났을 때, 루크가 니콜을 만났을 때. 알렉스와 샤라가 만났을 때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작의 순간을 기록한 때는 이미 루크와 멀어진 이후다. 그때 그 순간에 집중한 듯 글을 쓰지만 중간중간 루크가 멀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온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생각을 토대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 말은 연인이었던 니콜의 입에서 나오기도 했고, 알렉스의 생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행복을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생각하는 건, 그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던 니콜과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행복의 시선이 현재에 머물러 있었던 니콜과 행복의 시선이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 루크. 헤어지는 이유로 자주 꼽는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의 이별에서도 유효했던 것 같다.

 

“이보다 더 행복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어떻게 알아?”
“천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한계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재밌다. 눈을 씻고 봐도 천장 하나 없는 이런 곳에서.”
“저 별들이 천장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둘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위성 하나가 지구를 맴돌았다.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했다. 혹은 그 차이가 수용 가능했던 때가 말이다. 그때를 소설의 마지막으로 작가가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헤어진 연인이고, 각자 가정을 이루고 서로의 연인 혹은 배우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미 지나간.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일지 모르는 그때를 강조하듯 마지막으로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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