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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ㅣ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이렇다 할 수확이 없었던 지난 11개월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굳은 위지로 달려들게 되는 12월의 시작, 그 육중한 몸매로 책장의 한자리를 제대로 차지하고 앉아서 언제쯤 눈길이 닿을까 기다리며 벌써부터 고서의 향기를 풍겨가는 책, 언제쯤 저것을 먹어치울 수 있을까 노려만 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올해가 가기 전에 해치우기로 겁 없는 결심을 하며「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N.A. 바스베인스의 「젠틀 매드니스」등과 함께 애서가들에게 그 놀랄만한 몸집으로 명성이 자자한 책 목록에 이 책도 빠지지 않는다.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의 「위험한 책」에 등장하는 바닷가의 책으로 만든 집의 한 부분을 벽돌보다 더 튼튼하게 지탱해주고도 남을 만한, 떨어지는 책에 맞으면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을 위험한 책의 위상을 보여주는 묵직한 책들 말이다. 이런 책들은 흔히 두 번의 희열을 선사한다. 우선 덩치 값을 하느라 주머니 사정을 위협하는 가격의 벽을 넘어 우리 집 책장에 들여놓았을 때의 뿌듯함과 책장 앞을 오가며 노려보기를 계속하다가 작정하고 덤벼들어 마지막 장까지 말끔하게 먹어치웠을 때의 그 충만함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의 기쁨을 다 맛봤으니 이제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를 작성해 보자. 하지만 친절한 안내서가 되리라고 장담은 할 수 없다. 이 방대한 양의 글을 쏟아낸 작가조차도 오류들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노라 공개적인 발언을 했으니 내게 따져 묻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혹시 내 안내서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또 다른 ‘이동조사원’이 시정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도 있으니 알아서 업그레이드 하길 바란다.
이 책은 우선 여섯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분권이 된 책들은 다섯 권인데 합본의 다섯 번째 이야기인 ‘젊은 자포드 안전하게 처리하다’는 분권된 책 4권에 보너스 스토리로 실렸다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은하계 곳곳을 여행하는데다 영국이나 노르웨이처럼 경험은 없지만 익숙한 지명도 아닌 생소한 행성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오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얻게 되는 깨달음에 기준하면 어느 곳을 어떻게 여행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책속으로 여행하고 싶은 히치하이커들을 위해서 간략한 정보만 요약해본다.
우선 중심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서 덴트, 우회로 공사 때문에 집이 헐리는 순간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친구가 지구인이 아니라 외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초공간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지구가 20분 후에 파괴될 거라는 엄청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본의 아니게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 목욕가운 차림으로 은하수를 여행하게 될 운명에 처한다. 포드 프리팩트,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 안내서>의 개정판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 조사차 지구에 파견된 출판사 소속의 이동 조사원이다. 지구인 행세를 하며 지낸지 15년이 지났건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행성에 발이 묶여 지나가는 우주선을 만나 히치하이커를 해서 얻어 타고 떠나고 싶어 하는 참에 지구가 파괴될 순간에 가까스로 아서 덴트와 함께 탈출하게 된다. 자포드 비블브락스, 각각 독립적인 생각을 하는 두 개의 머리와 세 개의 팔을 가진 은하제국의 대통령이다. 은하계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혁명적인 우주선 ‘순수한 마음 호’를 탈취해 우주를 지배하는 진정한 지도자를 찾아 나선다. 다소 충동적이고 난폭하고 제멋대로지만 매력있는 캐릭터다. 트릴리언(트리시아 맥밀런), 아서 덴트가 마음에 들어 했지만 어느 날 가장무도회에서 다른 행성에서 온 자포드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그와 함께 우주로 떠난다. 지구가 파괴된 후 지구를 극적으로 탈출한 아서 덴트와 재회한다. 훗날 아서 덴트가 유전자은행에 기증한 정자를 이용해서 랜덤이라는 딸을 얻게 된다. 이 중심인물들 주변의 흥미로운 캐릭터는 바로 로봇 마빈, 행성 하나 크기 만한 뇌를 가진 고급 로봇임에도 레스토랑에서 주차원으로 일하고 우주선의 문을 열어주는 하찮은 일에 쓰이는 신세에 대해서 심한 우울증과 편집증 증세를 보이는 로봇이다. 시니컬한 철학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마빈의 캐릭터가 더 멋지게 확장된 시리즈가 없어 아쉬움이 크다. 더글러스 애덤스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다면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계속 나왔을 테고 멋진 마빈을 그냥 그렇게 버려두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인물 소개만으로도 벌써 전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온 듯 힘이 든다. 이들이 시공간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며 여행하는 행성을 대표적으로 몇 군데 꼽아보자면 행성을 주문 제조하는 행성 마그라테아, 그곳에서 지구라는 행성의 노르웨이 피오르드 해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슬라티바트패스트라는 이름의 노인을 통해서 지구가 초지능적이고 범차원적인 존재들에 의해서 프로그램된 슈퍼컴퓨터였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한 컴퓨터 말이다. 그리고 초지능적이고 범차원적인 존재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 밖에도 우주의 폭발장면을 보면서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우주 끝 레스토랑 밀리웨이스, 전 우주를 파괴하려는 크리켓 행성, 선사시대의 지구, 파괴되기 전의 지구, 지구를 그리워하며 떠돌다 지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서 덴트가 정착해서 샌드위치의 명인으로 살던 행성 라무엘라, 우주의 진정한 지도자라 불리는 노인이 사는 오두막. 시간을 거스르고 앞서가며 우주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이 기상천외하고 황당한 여행에 빠져들다 보면 차츰 내성이 생겨서 거대한 우주라는 개념이 시시껄렁해진다. 생쥐들이 주문 의뢰해서 만든 슈퍼컴퓨터 지구 안에서나 어느 행성 어느 시간대 속에서의 구성원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의 구분에 너무 연연하여 기대치를 높이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놀라운 과학적인 지식의 경이로움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SF소설, 코믹 풍자소설이 SF의 옷을 빌려 입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구가 폭발하기 전 아서 덴트의 집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도마에 오른 관료적 행정주의를 꼬집는 장면, 점성술의 점괘에 의거해 지구를 파괴해 버리고 마는 루퍼트 행성의 그레불론인,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바쁜 군상들을 보면서 전 우주를 희롱하는 더글러스 애덤스를 만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치밀한 구성과 논리와 개연성을 기대하지 마라.
앞의 이야기 속에 살짝 비친 복선을 뒤 이야기에서 발견했다 호들갑떨지 마라. 그건 아마도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된 우연의 일치이지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닐 거다. 각각의 인물들의 결말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마라. 정 궁금하다면 히치하이커 시리즈의 광팬이었다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죽음으로 중단된 히치하이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을 집필하게 된 이오인 콜퍼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모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권한다. 누가 알겠는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세상이 온다면 당신의 이야기가 히치하이커 시리즈에 슬쩍 끼워 넣어질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전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시‘롱랜드의 노래’를 쓴 랄라파에게 접근한 미래의 수정액 판매업자들처럼 어떤 변수가 개입한다면 가능할 법도 한 이야기다.(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참조.)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해서 책, TV드라마, 영화, 연극, 음반, 게임 그리고 타올 사업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시리즈 4번째 ‘안녕히, 물고기는 고마웠어요.’는 마감에 쫓겨 호텔에 갇혀서 원고를 썼을 정도라 하니 꼼꼼함과 치밀함까지 요구하기는 힘들 듯도 하다. 그나저나 타올 사업은 분명 대박이었겠다. 지나가는 우주선을 잡아 타고 우주를 여행하길 꿈꾸는 히치하이커의 필수품이 바로 타올이 아니던가. 언젠가를 대비해 슬그머니 솔기가 아주 튼튼한 타올을 미리 챙겨두고 싶어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약간의 후유증을 조심하라.
아서 덴트가 알려주는 하늘을 나는 기술 ‘땅바닥을 향해 몸을 던지되 그 땅바닥이라는 목표물을 놓치는 것’ 그럴싸해 보이지만 2010년 지구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라. 생쥐들이 주문 제작한 슈퍼 컴퓨터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비참해 하지 마라. 로봇 마빈처럼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라고 별거 아니라는 거 이제는 다들 알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