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초중반인 여성 화자는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딸은 서른이 넘었고 대학교 시간강사다. 어머니인 화자는 어머니로서 딸애가 결혼할 생각은 없 ‘여자 파트너‘를 데려와 집에 같이 머무는 게 마음에 안든다. 딸의 연인임이 분명한 ‘그 애‘는 더 거슬린다. 화자는 정상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해고된 시간강사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딸이 요양원에서 자기가 돌보는 한 여성 환자처럼 늙게 될까봐 두렵다. 독신으로 살며 입양아와 이주노동자를 위해 헌신하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는 노인 말이다.

온당한 비교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뒷북일 수 있는데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쏠린 주목이 이 책으로도 많이 옮겨가길 바란다. 퀴어, 정상가족, 여성의 이중노동/그림자 노동, 이해와 연대 등 여러 이슈가 녹아 있는 소설이다. 예순 넘은 여성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그렸고 그녀의 관점과 행동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도 설득력 있다. 의미 있으면서도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 그리고 사생활은 일과 별개예요. 제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일과 사생활을 구분해 달라는 것. 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 달라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경 생태 분야의 고전 반열에 오른 도서. 대학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책을 이제야 읽었다. 몇 년 전 헌책으로 구했는데 한참 묵혔다가 드디어 펼쳤다. 아무래도 5월 초 풀무질 서점에 다녀온 영향 때문일 것이다. 풀무질서점은 90년대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인 지은이는 1975년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잡은 ‘라다크‘를 방문했다.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이곳은 자급자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다. 지은이는 16년 동안 라다크에서 지내며 평화롭고 깨끗한 곳이 서구식 산업주의의 개발 아래 파괴되고 오염되는 걸 지켜보았다.

˝내가 라다크에 온 첫해에는 전에 본 일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달려와서 살구를 손에 쥐여주곤 했다. 지금은 낡은 서양옷을 입은, 디킨스 소설에 나옴직한 초라한 어린아이들이 외국인들에게 빈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그들은 이제 라다크 아이들에게 새로운 주문처럼 된 ˝한닢만, 한닢만˝이라는 말을 하며 졸라댄다.˝

˝여기는 가난 같은 건 없어요. -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 - 체왕 팔조르, 1983년˝

지은이는 라다크의 전통적 생활과 경제에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현대 산업문명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자립경제, 소박한 소비, 태양에너지 같은 적정기술 사용 등을 대안으로 모색해 가는 운동을 벌인다. 책 제목처럼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옮긴이의 말 인용)는 관점을 견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우리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인간본성을 포함하는-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상 수천년 동안 존재해왔던 가치-자연 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 서로서로의, 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알아보게 하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신음하는 지구와 초만원인 대한민국 수도권을 두고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당장할 수 있는 일이 욕심을 줄이고, 덜 쓰고, 일회용품 쓰지말고 다회용품 사용하기인 건 안다. 일단 가까운 곳부터 살피며 살겠다.

* 지은이가 한국어 번역본 출판을 녹색평론사에 다시 허락하지 않고 중앙일보 계열사로 갈아탄 건 정말 ‘깬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하자면 역대급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녹색평론사 출간본은 절판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쓴 소설을 하나씩 읽어나가고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고 나서 한 생각은 ‘어머, 이 사람 껀 다 읽어야 해‘였다. 그가 지은 이야기는 탐미, 관능, 쾌락이 가득해 흥미로웠고 시대를 앞선 세련미가 있었다.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월드를 섭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슌킨 이야기‘는 ˝장님 샤미센 연주자인 여성 슌킨을 남자 하인 사스케가 헌신적으로 섬기는 이야기 속에 마조히즘을 초월한 본질적 탐미주의를 그린˝ 경장편소설이다. 어릴 적부터 슌킨 곁에서 수발을 든 사스케는 아름다웠던 슌킨을 자신의 관념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녀의 상한 얼굴을 절대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기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한다.

이 소설도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 ‘치인의 사랑‘처럼 쎈 언니와 숙이고 들어가는 남자가 나오는 구도다. 다니자키가 혹시 마조히스트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아니었는데도 이런 설정을 활용해 실감나게 소설을 창작했다면 더욱 대단한 사람이었을 거고.

˝갓 상경한 사스케에게는 그 자매들이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소녀로 보였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맹인이었던 슌킨의 형용할 수 없는 기품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슌킨의 감긴 눈이 자매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보다 맑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이것이 진정한 슌킨의 얼굴이며 예전부터 이랬어야만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스케는 여자 종업원 숙소에 들어가 거울과 바늘을 몰래 자신의 침소로 가져왔다. 이불 위에 정갈히 앉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바늘로 찌르면 눈이 먼다는 지식이 있었던 게 아니라 되도록이면 고통 없이 쉬운 방법으로 맹인이 되고자 바늘로 왼쪽 눈동자를 찔러 본 것이었다. 제대로 눈동자를 찌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흰자위는 딱딱해서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검은 눈동자는 부드러워서 두세 번 찌르자 손쉽게 들어갔다. 몇 밀리미터 정도 들어갔다고 느낀 순간, 안구 한쪽이 뿌옇게 흐려지며 시력이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맹인인 사스케는 현실의 눈을 감아 버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의 시야에는 과거로 기억되는 세계만이 존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작 스파이소설로 알려진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영화 감독 박찬욱 씨가 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누누이 말해왔는데 최근 그의 추천사를 접한 뒤 이 책을 빌렸다.

냉전시기, 영국인 정보요원 앨릭 리머스는 명령을 받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그는 자기도 알아채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국가의 수족인 정보기관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추구하는 방식이다. 속임수와 배신을 서슴지 않으며, 불리하다 싶으면 적에게도 손 내밀고, 국가를 앞세워 개인을 희생시킨다.

그런데 이게 악마 취급 받는 한 진영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동독 정보기관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영국 정보부처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리즈 골드가 가입한 공산당의 연대체에서도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과연 스파이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왔을까.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집단이라는 거대 장벽 앞에서 숨진 자들의 유령이 따뜻한 곳으로 가지 못한 채 떠도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승린 작가 “지는 순간의 아름다움 말하고 싶다”
(경향신문, 2019.01.08.)

http://naver.me/xbBFdaq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