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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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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왜 나를 살린 것일까?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들어보는 아버지의 이야기.

 

“(아기를) 어떡할래요?” 버드가 맞닥뜨린 생사에 관한 질문을, 내 아버지도 받았었다. 내가 심장 판막에 문제가 있는 조산아로 태어나서였다. 그 때의 아버지가 느꼈을 공포가 버드의 것과 똑같았을까?

 

 보는 내내 버드가 몽환적인 히미코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기를 원했다. 희생되어야 하는 아기와 나는 같은 입장이기에, 그 바람은 모순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히미코처럼 다원 우주에 매료된 탓에 소설에서나마 내가 죽어 없어진 우주를 엿보고 싶었다라고 하면 그 모순이 해결될까?

 

 하지만 그는 내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했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곳곳에 암시가 있었기에 전혀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기의 생사 문제에만 전념하는 그였으니까. 그가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 양상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다른 문제를 잊고 일본에 머무르는 델체프의 모습과 똑같다. 동류인 델체프가 버드에게 건네준 것은 ‘희망’이었다. 히미코 역시 아이러니하게 그의 결정에 강력한 계기로 작용한다. 히미코는 아프리카에 도취되면서 버드에게 같이 가자며 탈주로를 열어준다. 너무도 그럴듯한 탈주로가 생기자 버드는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자신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탈주로는 필요 없는 법이다.) 만약 히미코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여 아기를 살리는 결말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 위해 두려움과 맞선다. 멀리 도망 다니던 그가 마주하게 되는 실체는 김이 샐 정도다. 아기의 병은 죽음조차 고려하게 만들었던 뇌 헤르니아가 아닌, 단순한 육종이었다.

 

 소설 창작 수업에서 이런 말을 들었었다. “소설은 윤리 교과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점에 비추었을 때, 이 소설은 매력적이었다. 생명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를, -생명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윤리적 계산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버드는 이기적인 이유로 그 결과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소심했던 버드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 죽을 위기의 아기는 기쿠히코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기적인 결과가 두 개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금방 죽을지도 모른다는 날 왜 살렸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유가 윤리적인 것이 아닌, 버드와 같은 개인적인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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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가 멸망한대도, 난 사과나무 곁을 지키겠어요.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를 읽고

 

 

 

 보는 내내 ‘내일 지구가 멸망한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명언을 몸소 실천하듯이 주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과나무를 열심히 심었다. 그는 왜 그렇게 사과나무에 집착했을까? 사과밭은 야에코 가족의 삶 자체이며 가장을 죽인 가혹한 현실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런 야에코의 밭에 열리는 사과가 제일 맛있다고 여기는 그는 야에코 뿐 아니라 그녀의 인생 전체를 사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사과나무 골짜기로 갈 수는 없었다.

 

 그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마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잔인한 세상-을 사과나무로 채워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야에코의 아버지가 죽은 소방 도구 오두막을 없애고 자신과 야에코의 나무를 접목시킨 어린 나무를 심을 결심을 하는 장면에선 과거의 아픔마저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겨내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 역시 사랑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법사’라는 분신을 내세워 자신의 그런 일부를 방황하게 한다. 하지만 그 법사조차 손에 빨갛게 익은 사과 한 알을 쥐고 숨을 거둔다. 좌절과 고통마저 사랑 앞에 사그라진 것이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다른 비극들처럼 처참하거나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서글픈 까닭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어조 때문일 것이다. 슬픔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보다는 무표정하게 있는 사람이 더 처연하게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또한, 한 편의 시 같은 서술이 자아낸 몽환적인 분위기도 한 몫 다. 소설을 읽는 느낌보다는 한 폭의 병풍에 쓰인 시를 읊조리는 기분이라 여운이 길게 남았다.

 

 책을 덮고 가장 생각나는 구절은 ‘그곳(그 사과밭)에서는 나와 야에코 그리고 백구만 살 것이다.’이었다. 중학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오르게 해서였다. ‘달에 울다’의 ‘나’에게 사과 골짜기가 있었다면 이 시의 화자에게는 마가리가 있었다. 언젠가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장소를 꿈꿀 날이 올 수 있을까?

 

 

 



 
 
 
2013년 체제 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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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해소를 위한, ‘거울’ 바라보기

-<거울의 법칙>에 비춰 본 <2013년 체제 만들기>-

 

 “통일? 그런 거 꼭 해야 하나? 통일하면 세금 늘어난다잖아.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데....”

 주위의 20대들에게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이처럼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통일 후의 있을 경제적 곤란을 그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통일 후에 있을 문제는 경제적 곤란 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국가의 정치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도 문제이다. 오랜 세월 동안 떨어져 있던 민족의 화합을 이루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20대들이 다른 문제들은 생각하지 못한 채 경제적 이유만 들어 통일을 반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그들 자체가 경제적인 곤란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왜 20대들은 항상 경제적 불만을 토로하는가? 엄기호 씨의 <이게 사는 건가>라는 글에서 일면이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글에서 ‘대학은 상대적 빈곤을 절감하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라며 대학교 내 부르주아 식당이나 스타벅스 커피를 예를 들어 여유로운 대학생과 고학생의 신분이 갈라진다고 서술했다. 20대들이 꿈을 꾸고 열정을 길러야 할 공간에서조차 그들을 한숨짓게 만드는 것, 바로 양극화가 20대와 통일을 이간질한 주범이다.

 

 노구치 요시노리 저의 <거울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감동시킨 이 이야기는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다. 평범한 주부인 에이코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왕따를 당한다. 그녀는 이웃집 부인으로부터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아들과 대화를 하여 풀어보려 하지만 아들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이 갈등의 원인은 겉으로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 있었다. 에이코 자신이 아버지와 벽을 쌓고 있었고 남편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기에 아들과의 단절이 생긴 것이다. 결국 에이코가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과 앙금을 털자 마법처럼 아들과의 갈등도 해소된다. 저자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모든 현실은 우리 마음 속을 비추는 거울”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마음속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계속 그런 일들만 연이어 일어난다.”라는 것도.

 

 우리는 왜 가난한가? 심화되는 양극화현상으로 그 체감 빈곤 지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단순히 복지의 부족으로 여기거나 모든 책임을 재벌에게만 떠넘기려 한다. 하지만 <2013년 체제 만들기>는 거울의 법칙처럼 그 원인을 내부 깊숙한데서 찾으려고 한다. 바로 87년 체제가 넘지 못한 ‘분단’이라는 우리나라의 상처와 한계가 양극화란 안 좋은 일을 불러온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면서 ‘민주화’로 상징되었던 87년 체제는 그 빛을 잃고 말았다. 표현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국민의 의견도 듣지 않은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이 책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수구 세력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국민의 작은 바람-그저 남한만 잘 살면 된다-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단 체제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기득권층의 무기가 있음에도 국민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분단 체제 하에서는 기득권에 반발하는 세력을 “빨갱이”로 낙인찍으며 그들의 발언을 저지할 수 있다. ‘내부의 단결을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라.’라는 전략을 기득권이 잘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에 비판을 가하다가도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지면 북쪽을 경계하며 기득권에 대한 반발을 접는다. 분단 체제 하에서는 언제 외부에서의 침략이 올지 모르다는 걱정에 비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 백낙청은 이런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2013년 체제로 가기 위한 전략을 내놓았다. 그 첫째는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하는 것이다. 그 기세를 말미암아 대선에서도 박근혜 이외의 인물이 당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여당을 몰아내기 위해서가 아닌, 수구 세력을 약화하고 통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후, 악화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인 남북 연합을 추진해야 한다. 모두가 남북 연합을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 연합은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시동이 걸린 상태였지만 이명박 정부 때에 이르러 모든 것이 포맷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비핵,개방3000’은 포용이 아닌, 남한 측에서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 요구였다. 자신들의 체제를 보장받지 못하는 북한 쪽에서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김대중, 노무현 정책이 이뤄왔던 포용 정책 1.0은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포용 정책 2.0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참여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한다. 정부는 자신의 기득권이 통일로 위협받을 것을 알기에 통일을 이루는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민간 기업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남북 연합을 만드는데 있어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만의 민주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북측도 포함한 민주화에 힘써야 하며 그것이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분단 체제를 비추는 양극화의 해소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결국 양극화로 고통 받는 우리는 통일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통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거울의 법칙>에서의 에이코가 아들과의 갈등이 자신과 아버지의 갈등을 비추는 거울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제일 첫 걸음인 남북연합이라는 막중한 일을 해낼 수 있을만한 정당에게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덮고서도 생각해 볼 문제는 남아있다. 일단 국내에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 연대가 결렬이 되었다. 여당과 야권의 1대 1구도로 맞서려던 계획이 실패했는데 어떻게 야권이 이를 타개할 지가 주목된다. 또한, 국외의 문제로는 중국의 북한 포로 송환 문제이다. 지금 단 한 명의 정치인만이 북한 포로 송환 반대를 위해 싸우고 있다. 북한이 비민주적인 행태를 저지르는 것을 눈감는 것은 결국 남북연합을 저 멀리 떼어놓는 행위인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남한 측의 도발에 북한 측에서 우리 정부를 비방하는 대규모의 군사와 민간인 행진이 있었는데, 이에 무작정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라고 한 번 더 생각해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박종화 2012-03-22 02:55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013년 홍익민주주의,홍익경제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http://cafe.naver.com/hongiksystem/120

http://cafe.naver.com/hongiksystem/12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disc, 일반판) 
데이비드 핀처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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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가 아닌, 버튼의 시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리뷰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하기도 전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그들의 하소연은 한결같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했을텐데.’ 모든 사람은 어려지길 희망한다. 사람들의 그 염원이 모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의 희망을 약간 배반한다. 으레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불로불사의 주인공이 아닌, 죽을 때까지 어려지는 독특한 주인공이다. 그에게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적용된다. 그렇기에 그 역시 인간이다.

 

 

 이 영화는 나이 든 데이지와 그의 딸 캐롤린의 대화와 벤자민 버튼의 삶, 이렇게 두 내용이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시적 내용이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액자식 구성은 데이지와 캐롤린, 그리고 벤자민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이 셋이 무슨 관계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내부 액자인 벤자민의 삶은 순차적 구성으로 진행되며 내부 액자의 마지막에는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영화의 도입부 역시 묘미이다. 내부 액자에 들어가기 전, 1918년 새로 지어진 기차역에 걸린 거꾸로 가는 시계 이야기가 나온다.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제시하여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100%의 허구보다 99%의 허구와 1%의 진실이 섞였을 때 힘을 갖게 되듯이. 어쩌면 별로 필요 없어 보이는 시계 이야기는 사실 벤자민 커튼의 삶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미스터 케토의 거꾸로 가는 시계는 그 당시 1차 세계대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강한 염원이었다. 사실 쓸모도 없는 시계가 오랜 시간 걸려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염원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 시계가 인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벤자민이 태어났다. 그것이 비록 친부인 토마스에게 버림받은 그지만 이름은 벤자민(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자)이 된 까닭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가 역에서 내려진 뒤 벤자민이 죽는 장면이나 그것이 바닷물에 잠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과 시계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왜 하필 벤자민의 성은 ‘버튼’일까? 그의 부친 토마스가 단추 공장을 했기 때문인데 여기서 ‘단추’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지퍼는 옷을 잠그기 위해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릴 수밖에 없다. 옷을 채우기 위해 지퍼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단추는 아래에서부터든, 위에부터든 채우는 순서에 상관없이 옷을 잠글 수 있다. 전자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후자는 벤자민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럼에도 지퍼와 단추의 역할은 비슷하다. 바로 옷을 잠근다는 것이다. 이처럼 벤자민이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살아간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육체의 불완전성이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벤자민의 첫 사랑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 때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려 했지만 궂은 날씨에 겁을 먹고 포기한다. 죽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육제 때문이었다. 데이지는 노화와 다리 부상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인 춤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건강할 뿐 아니라 젊어지는 육체를 지닌 벤자민의 삶은 완벽할까? 영화의 후반 부분에 데이지와 벤자민의 이런 대사가 있다.

데이지 : 자기는 내가 늙고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사랑할 거야?

벤자민 : 자긴 내가 여드름투성이어도 사랑할 거야? 침대에 오줌을 싸도? 내가 계단 밑을 무서워해도?

벤자민 역시 사람이기에 불완전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나이 들면 갓난아기라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그뿐 아니라 데이지와 딸 캐롤린에게 든든한 가장이 될 수도 없어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에봇은 열 아홉 살에 포기했던 영국 해협 횡단을 여든의 나이에 결국 해낸다. 데이지는 다시 춤을 출 수는 없게 되었지만 발레 교사로 생을 이어가며 벤자민 역시 가족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항상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영화 중반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처럼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 개 마냥 미쳐버릴 수도 있고 운명을 탓하며 욕을 퍼부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아 다가오면 가게 놔둬야만 해.’ 이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데이지와 벤자민이 삶의 미련을 내려두고 눈을 감는 것처럼.

 

 죽은 후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 대한 키워드는 바로 ‘벌새’이다. 이 영화에서 벌새는 바다 중간에서 혹은 폭풍우를 뚫고 등장한다. 벌새가 살지 않는 지역에 나타나는 점으로 봐서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 답은 술집에서의 마이크 선장의 대사에서 볼 수 있다. 날개 치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내면 무한대를 상징하는 8자 모양이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 벌새는 영원을 상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의 삶인 거꾸로 가는 시계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바다 역시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누군가는 어려진다는 점에서 벤자민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삶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 의견 차이에 따라 벤자민의 삶은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인생을 살든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것은 똑같다. 삶 속에서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 역시도. 벤자민에게 인생은 축복도, 저주도 아닌 그저 삶일 뿐이다. 삶이 고통스럽고, 뭔가를 시작하기에 나이가 많은 것같이 생각하는 우리에게 영화는 이렇게 말해준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그것 역시 삶이다”라고.

 



 
 
 
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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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은 라쇼몽이란 책 안에 들어있는 단편 중 하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왠지 먼 옛날 일본에 있었던 민담을 재현한 듯한 기분이 든다. 대다수의 단편들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닌 옛날에 배경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쇼몽'이나 '용' 같은 다른 단편들도 많았으나 '지옥변'이란 소설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인 '광염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제 3인칭 서술자가 독자인 우리들에게 직접 들려주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아마 이 서술자는 이 소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오토노사마의 하인 중 하나로 추측되는데 그래서인지 그 주관적인 생각이 소설의 일부가 되어 우리는 진실을 알아내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오토노사마가 요시히데의 딸을 사모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서술자는 이를 단호히 부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왜 하필 요시히데의 딸을 비참하게 죽게 했느냐는 점에서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대한 복수'이다 라는 소문도 억지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의 오토노사마에 대한 충성심이 그의 눈을 멀게 했는지는 독자의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충성심이 강한 서술자의 주인인 '오토노사마'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괴짜 화가인 '요시히데'와 오토노사마의 밑에서 일했던 요시히데의 딸과 원숭이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빙빙 돌다가 드디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옥변'은 괴짜 화가 '요시히데'가 그린 지옥을 나타낸 최고의 그림이다. 서술자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치 그것의 중심인 듯한 불에 타는 마차에 타고 있는 여인 그림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옥변'의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시히데는 지옥변이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형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 많은 제자들을 괴로움에 겪게 한다. 나는 이것까지는 요시히데의 리얼리즘을 높게 생각했고 우리나라의 진경 산수화를 추구했던 이들과 맞먹지 않을까까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란 광기어린 그의 예술에 대한 시선까지도 멋있게 여겼다. (사실 나도 예술은 광기의 표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에 타는 마차와 여인을 그리기 위해 남의 죽음을 요구한데서 시작된다. 이에 오토노사마는 요시히데의 딸을 불에 타는 마차에 태워 보냄으로서 응답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묘사가 걸작이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처참하면서도 화려하다. 비극적인 장면인데 화려하다니.. 어찌보면 아이러니하지만 마차에 타고 있던 요시히데의 딸의 모습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불에 타는 마차에서조차 아름답게 묘사되어 독자인 나조차 숨막히게 했으니.. 그 정경에 처음에는 울부짖던 요시히데조차도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느라 바쁠 정도였다. 그 비정한 부정 아래 그림은 완성되었고 그를 욕하던 사람들조차 그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요시히데는 결국 다음 날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소설 '광염 소나타'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의 광기와 소설 자체를 태울 듯한 불길 때문이기도 했고 주제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비록 광염 소나타는 음악에 관한 것이지만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나에게 묻는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인간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교수가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의대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단다.

 "어떤 아기가 엄마 뱃 속에 있는데 이 아기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며 아기는 유전적으로 간질을 앓고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될 확률도 높습니다. 이 아기를 낳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낙태시키는 것이 좋을까요?"

 많은 학생들이 외쳤다. "낙태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네, 여러분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약간은 뜬금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 역시 두 소설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는 너무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예술계에서의 판도를 바꿔놓은 베토벤. 나는 그야말로 인간과 예술의 투쟁에서 결국은 예술이 승리한 산 증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지옥변'과 '광염 소나타'는 얼핏 보기에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둘 다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엄청난 예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변'의 요시히데는 자살하고 '광염소나타'의 백성수는 정신 병원에 갇히고 만다. 이 결말들은 결국 인간을 죽이면서까지 예술을 완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아닐까?

 

 지금은 예술과 인간의 대결보다도 과학과 인간의 대결이 더 깊어지고 있다. 똑같은 전제에서 예술을 과학으로 바꾼 대결이 이런저런 이슈화가 되고 있다. '지옥변'에 대한 약간은 횡설수설했던 리뷰를 마치면서 끝으로 '아일랜드'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무엇인가를 위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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