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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가기 위한, 아름다움에의 갈구>
아름다움에게 외면당한 사람이야말로 살기 위해 더욱 아름다움을 갈구하게 된다. 금각사의 주인공인 미조구치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위의 문장이 될 것이다. 미조구치는 우이코와 금각사로 형상화된 아름다움에게 외면당한다. 그들은 매번 미조구치의 생을 빼앗아간다. 그가 여자와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순간, 그야말로 몽상적인 금각사의 환영이 그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단 한번, 여자와의 사랑에 성공한 때는 ‘우이코가 외출하고 없는’ 때이다. 미조구치를 억압했던 미적 관념이 사라진 때이다. 이로 보았을 때, 우이코나 금각사로 나타나는 ‘미’에 대한 그의 추구는 결코 탐미적인 정신에 그치지 않는다. 삶을 찾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름다움은 번번이 그를 괴롭히는 것인가? 이 답은 미조구치가 사귀었던 두 명의 친구들에게서 알 수 있다. 밝음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쓰루가와는 그를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 빠뜨린다.(천수암에서 기모노의 여인을 주인공이 우이코의 환생이라 여기는 장면) 그러나 추함의 이미지인 가시와기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직시하게 한다.(그 기모노의 여인은 우이코의 환생이 아니라, 꽃꽂이를 가르치는 여자일 뿐이었다.) 이 순수와 추함의 두 영역에서 미조구치는 방황한다. 순수의 영역에서 그가 아름다움을 이기는 방법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미조구치는 처음에는 주지가 되어 금각사를 가지려 한다.) 그러나 추함의 영역에서는 그 미를 부수는 것이다.(후에 미조구치는 금각사를 파괴한다.) 이 두 영역에서 밝음으로 나타나던 쓰루가와조차 자신의 어두움 때문에 자살함으로 그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인간의 어두움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마치 금각사가 어두운 역사를 바탕으로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듯이. 결국 미조구치가 금각사를 태우는 행위는 자신의 어두운 면조차 없애버리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금각사를 태운 그가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야지’하며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입증한다.
이런 미조구치의 행위가 공감된다고 하면, 나의 오만인 것일까? 나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로 상징되던 아름다움에게 외면당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은 어머니를 떠나 실체가 없는 아름다운 여인의 환상으로 변모했다. 나 역시 삶을 방해받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면 그 환상이 떠올라 괜히 주눅이 들고 만다. “나 같은 것은 사랑받을 수 없을 거야.”라며. 미조구치는 삶을 찾기 위해 금각사를 불태웠다. 그렇다면 나는, 살기 위해 무엇을 없애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