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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내 아버지는 왜 나를 살린 것일까?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들어보는 아버지의 이야기.
“(아기를) 어떡할래요?” 버드가 맞닥뜨린 생사에 관한 질문을, 내 아버지도 받았었다. 내가 심장 판막에 문제가 있는 조산아로 태어나서였다. 그 때의 아버지가 느꼈을 공포가 버드의 것과 똑같았을까?
보는 내내 버드가 몽환적인 히미코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기를 원했다. 희생되어야 하는 아기와 나는 같은 입장이기에, 그 바람은 모순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히미코처럼 다원 우주에 매료된 탓에 소설에서나마 내가 죽어 없어진 우주를 엿보고 싶었다라고 하면 그 모순이 해결될까?
하지만 그는 내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했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곳곳에 암시가 있었기에 전혀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기의 생사 문제에만 전념하는 그였으니까. 그가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동 양상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다른 문제를 잊고 일본에 머무르는 델체프의 모습과 똑같다. 동류인 델체프가 버드에게 건네준 것은 ‘희망’이었다. 히미코 역시 아이러니하게 그의 결정에 강력한 계기로 작용한다. 히미코는 아프리카에 도취되면서 버드에게 같이 가자며 탈주로를 열어준다. 너무도 그럴듯한 탈주로가 생기자 버드는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자신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면 탈주로는 필요 없는 법이다.) 만약 히미코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여 아기를 살리는 결말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 위해 두려움과 맞선다. 멀리 도망 다니던 그가 마주하게 되는 실체는 김이 샐 정도다. 아기의 병은 죽음조차 고려하게 만들었던 뇌 헤르니아가 아닌, 단순한 육종이었다.
소설 창작 수업에서 이런 말을 들었었다. “소설은 윤리 교과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점에 비추었을 때, 이 소설은 매력적이었다. 생명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를, -생명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윤리적 계산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버드는 이기적인 이유로 그 결과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소심했던 버드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 죽을 위기의 아기는 기쿠히코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기적인 결과가 두 개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금방 죽을지도 모른다는 날 왜 살렸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이유가 윤리적인 것이 아닌, 버드와 같은 개인적인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