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움 속 역겨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와 ‘해피트리프렌즈’ 엮어 읽기-

 

 

 유럽에 열지 말라는 방문을 연 자신의 아내들을 죽인 푸른 수염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 금지된 방에 있던 것은 예전에 방문을 열었던 처들의 시신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방이 시신으로 덮이기 전인, 푸른 수염의 첫 아내는 왜 죽음을 당한 걸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하성란의 소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녀는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이었을까.

 

 

 요새 미디어 매체들은 잔인해질수록 호응을 얻는 추세이다. 너무 노골적으로 야한 미디어에는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리얼하게 묘사된 폭력에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그 예로 원빈의 출연에 힘입어 엄청난 흥행을 누렸던 <아저씨>가 있다. 이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는 지금 이 글에 있어 중요치 않다. 우리의 목적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풀기에 앞서 사람들이 왜 고어 물에 열광하는지는 짚고 넘어가보자.

 

 첫째는 쾌락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왕성한 리비도를 억제하는 것이 역겨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잔인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 역겨움마저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인다. 아마 내 생각에, 교활한 성 본능이 자신을 억제하려는 감정마저 자신을 위한 감정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폭력 매체나 고어물 시청에 있어서 눈이 생식기의 역할을 대신한다. 앞서 말했지만 고어물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역겨움은 생식기로 향하는 리비도를 막는다. 그렇다면 이 리비도가 소멸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 리비도는 시각으로 후퇴하여 눈을 성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때부터 잔인한 영상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순간, 컴퓨터 모니터는 영상에서 학대당하는 대상과 보는 대상의 관계를 단절하는 대상이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렇듯이 연민이라는 분별력의 결여가 성적 본성을 이루고 있는 잔인성과 성욕을 연결시켜 준다. 이런 합일로 고어물을 보면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성적 본능은 가학적 측면과 피학적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어물이나 폭력 매체만큼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비록 모니터가 차단시켜 주는 것 같지만 사람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몰입하는 대상은 다발적이다. 우리는 폭력을 가하는 상대에도, 당하는 상대에도 몰입한다. 피해자의 학대 장면을 보는 행위는 다분히 가학적이지만 그 피해자의 고통 어린 장면에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것은 피학적이다.

 

 둘째는 일종의 허세이다. 야한 포르노를 밥 먹으면서 본다고 공공연한 장소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드물다.(여기서 공공연한 장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잔인한 영화를 라면이나 닭다리를 먹으면서 봤다며 자신의 강한 비위를 드러내는 사람은 상당수 존재한다. 이 경우 그들은 은연 중 뿌듯함과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 있어서 그런 잔인한 장면은 시시한 것이며 그런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라는 듯. 그런데 사실상 이들 중 대다수는 원래 그런 고어물에 끔찍한 공포를 느꼈었을 확률이 높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공포에 시달리던 사람이 몇 번 그런 매체에 맞닥뜨리니 상상보다 실제 영상이 시시했다는 기억이 남아 자기 자신에게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항상 상상은 직접 보여지는 실제보다 공포스럽다. 정성일 씨의 글에도 “모든 이미지는 보여질 때 무력해진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은 그 무력해진 이미지에 안도감과 시시함을 느끼면서 공포보다 자신이 우월해진 느낌을 즐긴다.

 

 

 그런 고어 물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어떨까? <해피트리프렌즈>라는 미국의 블랙 코미디가 그렇다. 매우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아기자기한 동화를 꾸며나가다 어느 순간 끔찍한 잔혹 동화로 변한다. 뇌수가 뿜어 나오고 눈알이 도려지는 것은 기본이다. 그 충격을 한 번 맛본 시청자들은 평화로운 장면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의 감정도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들의 감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녀에게 펼쳐진 풍경은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이 가득 찬 하얀색 페인트칠이 된 목조 건물이다. 마치 <해피트리프렌즈>의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기 전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러나 화자 역시 잔혹물의 전조를 읽듯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그런 전조는 여지없이 제 1차 충격을 가한다. <해피트리프렌즈>에서 끔찍한 살육 장면이 펼쳐지고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오클랜드에서 제이슨과 챙을 목격한다. 그런 1차 충격 후에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는 동영상을 잽싸게 꺼버리고 다른 일에 매진하며 그 기억을 잊으려 할 것이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 역시 그 일을 제이슨에게 묻지 않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챙에게 짐을 맡긴다. 이들에게 아무런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가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저항도 해 본다. 그러나 잠재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다. 충격의 이미지를 상상 속에서 꺼내어 눈앞에서 발가벗기는 것이다. 아름다운 집안 풍경이나 평화로운 동영상 썸네일 속의 역겨운 장면을 눈앞에 끄집어 내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노크도 없이” 열지 말라 주의를 받았던 제이슨의 방문을 밀어젖히고 시청자들 역시 검색창에 해피트리프렌즈를 치고 만다. 그들의 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생각보다 시시한 장면이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화자는 그 장면을 덤덤히 서술한다. 충격이 배제된 서술이다. <해피트리프렌즈>의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 감정이다. 그들은 무력화된 이미지로 인해 공포보다 우월해졌다는 만족감까지 얻는다. 또한, 앞서 말했던 가학적·피학적 욕망까지도 채울 수 있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에서의 화자 역시 고어물을 보는 사람의 심리와 유사한데, 보는 행위는 제이슨과 그 상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가학적 행위이지만, 남편의 외도-그것도 동성애-를 보는 행위는 그녀에게 상처를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맨 처음의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녀의 잘못은 제이슨의 외도 장면을 봤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름다움 속의 역겨움을 눈앞으로 끌어 올렸다는 것이다. 현실에 일어나는 공포를 아무런 대책 없이 무력화 시키려 했던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이렇게 답은 나왔지만 우리는 그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내가 잘못을 저지르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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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름 2012-03-0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 소설이로군요.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하성란 작가님의 작품은 잔잔한 필치로 상당히 예리하게 긋고 가는 느낌이 있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고 그 당시에는 아직 공공연하게 얘기되지 않던 동성애를 소재로 했던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깜씨 2012-03-27 13: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도 하성란 작가님 작품을 수업 듣다가 교수님 추천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예리한데 숨겨진 예리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문장 중간마다 사소한 장치들이 있던 걸 몇 번 읽고 나서 발견하니 전율이 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