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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ㅣ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6
플라톤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 유명한 이름이건만 스스로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요즘에도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이 나에게 새겨진 것은 수능을 갓 마친 19살,
정치사상에 대한 책을 통해서였다.
정치학자의 친절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 대해 접하지 않았던 나는 그의 사상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론>에 대해
독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4년후가 지난 요즘
나는 이 책을 접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번역한 여러 책 중에서 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생각했던것만큼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중간에도 책에 대한 리뷰나 해설을
간간히 읽었다. 그러면서 플라톤의 사상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하게도 그에게서 서양철학을 맛보기보다
인생에 대한 조언을 찾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아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 좁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나에게 빛이 될만한 '앎'을 그 철학자에게서 얻고 싶었다.
플라톤이 살던 세상에 대해 나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보다는 불완전한 세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플라톤은 20대의 나에게 70대의 소크라테스를 만났고,
새롭게 눈을 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막 시작되던 그리스의
시민들은 플라톤이 옳다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켰고,
그것은 플라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고,
플라톤은 그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내가 사는 이 세상과 플라톤이 살던 그 세상이
어느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다.
바로 '잘못된 가치관' 에 대해서 말이다. 참으로 어렵다.
가치관이라는 것이 '좋고 나쁨'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잘못된' 이라는 형용사를 '가치관' 이라는 단어에
붙이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다만 그 기준을 나라는 개인,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는 가치들을 지향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점에서 어긋나는 것은 '잘못된' 이라고 붙였다.
어쨌든 이러한 세상 속에서 플라톤은
어떻게 세상을 바로 잡고자 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플라톤은 <국가론>을 시작한다.
그렇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답을 얻었으며,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내가 이해한 플라톤의 정의는 '모두의 이익' 이고,
특히 '약자들을 위한 것' 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가 현실에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런 정의가 자신들에게 이익보다는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싶다.
'정의' 에 대해서 말하면 바보취급을 받기도 하고,
기본적이고 당연한 '정의로운 일' 조차 세상에 보기 드물어
칭찬받는 것이 오늘날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익' 때문이다.
정의로운 일을 하면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불이익을 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정의가
불의보다
이익이 더 크고 교활한 자보다 정의로운 자가 더 현명하가도
말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정의실현의 동기가 그 시대의
일부 소피스트들이 말한 정의를 실현했을때의 이익때문에 정의가
실현된다 라는 맥락과는 다르다.
어쨌든 이러한 생각을 가진 플라톤은 그러한 것들을 증명하고
싶었고,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힘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정의실현을 위해
'정의로운 국가' 를 이상적으로 나마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국가론>에서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라톤은 '현명하고 정의로운 소수의 철학자가
통치하는 귀족정치' 를 꿈꿨다.
심지어 그는 '민주정치' 를 악으로 여겼는데, 아마도 직접민주주의를
했던 그리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사형한 것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견을 펼친 것 같다.
사실 이 밖에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의견들이 꽤 많다.
하지만 그가 2500년 전의 사람이라고 고려했을 때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때의 그의 생각들이 지금에 와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플라톤은 지도자계급이 반드시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사적인 이익추구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지도자계급은 재산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심지어 배우자와 아이까지 공유해야 한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원시공산주의자라고도 불리지만,
어떤 정치사상책에서는 그의 의견이 지도자계급에서만 해당하지
전체가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산주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오늘 날 보았을 때 다소 황당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어떻게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플라톤이 지도자계급에게 요구하였던 것들은 지도자계급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불의를 행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 중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파격적은
생각으로 플라톤은 혈통이 아닌 능력에 의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아들이라 하여 그 아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건 능력이 되는 자가 지도자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분 세습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계급이 갖추어야 할 덕목도 제시한다.
지도자는 지혜, 군인은 용기, 시민은 절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지혜, 용기, 절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3요소이며,
동시에 정의가 있어야 갖출 수 있는 필요충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해야 하는 일도 언급한다.
어떤 동굴에 벽만 볼 수 있게 사람들이 묶여 있다.
사람들 뒤에는 횃불이 있어 어떤 물체가 지나갈 때,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 물체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그림자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물체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 한 사람이 풀려나 그 물체를 보고, 또 동굴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기 된다. 세상은 동굴보다 넓고 빛을 만드는 태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때 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내려가 묶이고,
사람들에게 그림자의 실체와 세상에 대해 알려준다.
바로 그것이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것을 보고, 자유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스로 원상태로가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대의 철학자에게서
어떤 조언을 받은 것인가?
아마도 '정의롭게 살라' 라는게 아닐까?
이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플라톤이 말한 덕목들은
각 계급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말했지만, 제네럴리스가 필요한
오늘날 한 개인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용기가 있어야 하고,
절제할 줄 안다는 것이다. 세상이 불투명하고 힘들수록
'정의로운 삶' 이 한 개인, 그리고 공동체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가르침이다. 심신을 수련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 행복하게 산다.
그것이 내가 받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