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론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6
플라톤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 유명한 이름이건만 스스로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요즘에도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이 나에게 새겨진 것은 수능을 갓 마친 19살, 
정치사상에 대한 책을 통해서였다. 
정치학자의 친절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 대해 접하지 않았던 나는 그의 사상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론>에 대해 
독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4년후가 지난 요즘 
나는 이 책을 접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번역한 여러 책 중에서 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생각했던것만큼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중간에도 책에 대한 리뷰나 해설을
간간히 읽었다. 그러면서 플라톤의 사상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하게도 그에게서 서양철학을 맛보기보다
인생에 대한 조언을 찾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아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 좁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나에게 빛이 될만한 '앎'을 그 철학자에게서 얻고 싶었다.

플라톤이 살던 세상에 대해 나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보다는 불완전한 세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플라톤은 20대의 나에게 70대의 소크라테스를 만났고,
새롭게 눈을 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막 시작되던 그리스의
시민들은 플라톤이 옳다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켰고,
그것은 플라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고,
플라톤은 그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오늘 내가 사는 이 세상과 플라톤이 살던 그 세상이
어느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다.
바로 '잘못된 가치관' 에 대해서 말이다. 참으로 어렵다.
가치관이라는 것이 '좋고 나쁨'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잘못된' 이라는 형용사를 '가치관' 이라는 단어에
붙이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다만 그 기준을 나라는 개인,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가 행복할 수 있는 가치들을 지향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점에서 어긋나는 것은 '잘못된' 이라고 붙였다.

어쨌든 이러한 세상 속에서 플라톤은 
어떻게 세상을 바로 잡고자 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플라톤은 <국가론>을 시작한다.
그렇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답을 얻었으며,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내가 이해한 플라톤의 정의는 '모두의 이익' 이고,
특히 '약자들을 위한 것' 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가 현실에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런 정의가 자신들에게 이익보다는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싶다.
'정의' 에 대해서 말하면 바보취급을 받기도 하고,
기본적이고 당연한 '정의로운 일' 조차 세상에 보기 드물어
칭찬받는 것이 오늘날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익' 때문이다.
정의로운 일을 하면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불이익을 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정의가 불의보다
이익이 더 크고 교활한 자보다 정의로운 자가 더 현명하가도 말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정의실현의 동기가 그 시대의
일부 소피스트들이 말한 정의를 실현했을때의 이익때문에 정의가
실현된다 라는 맥락과는 다르다.

어쨌든 이러한 생각을 가진 플라톤은 그러한 것들을 증명하고
싶었고,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힘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정의실현을 위해
'정의로운 국가' 를 이상적으로 나마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국가론>에서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라톤은 '현명하고 정의로운 소수의 철학자가
통치하는 귀족정치' 를 꿈꿨다.
심지어 그는 '민주정치' 를 악으로 여겼는데, 아마도 직접민주주의를
했던 그리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사형한 것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견을 펼친 것 같다.

사실 이 밖에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의견들이 꽤 많다.
하지만 그가 2500년 전의 사람이라고 고려했을 때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때의 그의 생각들이 지금에 와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플라톤은 지도자계급이 반드시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사적인 이익추구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지도자계급은 재산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심지어 배우자와 아이까지 공유해야 한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원시공산주의자라고도 불리지만,
어떤 정치사상책에서는 그의 의견이 지도자계급에서만 해당하지
전체가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산주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오늘 날 보았을 때 다소 황당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어떻게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플라톤이 지도자계급에게 요구하였던 것들은 지도자계급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불의를 행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 중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파격적은
생각으로 플라톤은 혈통이 아닌 능력에 의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아들이라 하여 그 아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건 능력이 되는 자가 지도자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분 세습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계급이 갖추어야 할 덕목도 제시한다.
지도자는 지혜, 군인은 용기, 시민은 절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지혜, 용기, 절제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3요소이며,
동시에 정의가 있어야 갖출 수 있는 필요충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해야 하는 일도 언급한다.
어떤 동굴에 벽만 볼 수 있게 사람들이 묶여 있다.
사람들 뒤에는 횃불이 있어 어떤 물체가 지나갈 때,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 물체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그림자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물체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다 한 사람이 풀려나 그 물체를 보고, 또 동굴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기 된다. 세상은 동굴보다 넓고 빛을 만드는 태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때 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내려가 묶이고,
사람들에게 그림자의 실체와 세상에 대해 알려준다.
바로 그것이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것을 보고, 자유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스로 원상태로가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대의 철학자에게서
어떤 조언을 받은 것인가?

아마도 '정의롭게 살라' 라는게 아닐까?
이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플라톤이 말한 덕목들은
각 계급이 갖추어야 할 것으로 말했지만, 제네럴리스가 필요한
오늘날 한 개인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지혜를 갖추어야 하며, 용기가 있어야 하고,
절제할 줄 안다는 것이다. 세상이 불투명하고 힘들수록
'정의로운 삶' 이 한 개인, 그리고 공동체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가르침이다. 심신을 수련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 행복하게 산다.
그것이 내가 받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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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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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당한 고민거리를 제시해주는 이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라는 헤르만 코흐의 『디너』라는 작품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인들은 저녁에 외식을 하면 정찬으로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아페리티프부터 시작해서 디저트까지 참 배부르지 못한
저녁을 매너있게 또는 고급스럽게 먹는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호간의 친목도모나
삶의 협상(?) 등을 한다. 쉽게 말해 우리와는 달리 서양인들은
식사시간을 무지하게 오랫동안 가진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최소 2시간 이상이란다.
그래서 자리값이 상당히 비쌀 수 밖에 없다.

이 작품도 그런 이야기이다. 
형제지간에 고급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식사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 중심에는 '아이' 라는 심각한 주제가 숨어있다.

소설은 디너라는 저녁시간의 순서적 행위를 따라간다.
스테이크 나오기전에 와인으로 입가심하고 야채나 간단한 음식부터
식욕을 자극시켜준 다음 메인요리가 나오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달콤한 후식을 즐긴 후 계산하고 집에 가는 이야기이다.
그 식사시간중에 벌어지는 과거와 현재, 주위의 상황적 묘사와
심리적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파울 로만이라는 남자이다.
그리고 아내 끌레르가 있고, 이 이야기의 의도적 중심이 되는 대상인
세르게 로만이라는 파울의 형이 나온다. 이 형은 차기 네덜란드의
수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바베테가
나온다. 이들의 식사와 그들의 이야기와 주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 중심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 이다.

이 형제들에게는 아들들이 있다.
파울에게는 미헬이 있고, 세르게에게는 릭이라는 아들이 있다.
그리고 세르게의 가족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베아우라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특히 릭과 미헬이 벌여놓은 사건이
어른들의 디너시간의 주제인 것이다. 심각한 사건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사건에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할 것인가를
저녁을 먹으면서 상의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아주 충격적이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결론이다.
작가의 의도한 부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역시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그들의 선택이었다.

좀 이해가 가지 않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처음부터 넌지시 소설의 주제적 의도를 내비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중심은 중후반에 나온다.
중간중간 뭔가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문제점을
제시해놓긴 하지만,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저녁식사 시간에
조금은 예민하고 뭔가 일반적이기 못한 감성을 소유한
파울이라는 남자의 상황적 심리와 감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하나의 상황이 등장하면 이에 따른 곁가지적인 부수적 상황이
등장하는 것. 쉽게 말하면 와인이 나오면 와인에 대한 개인적 심리를
중심으로 와인에 얽힌 과거나 주변 상황을 하나하나 묘사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재미는 있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도대체 이 이야기의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곁가지를 드러내야하는지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간한다.
그러니까 한 두시간정도의 식사시간을 하는동안 우리가 보는 모습은
두 형제와 관련된 수십년치의 과거의 모습과 식당 주변 인물과
상황의 묘사인 것이다.

이런 서술적 상황묘사들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사적 구성의 이야기의 형태를 좋아라하는지라
다가서기가 좀 어렵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이 소설의 중심은 자신의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이에 대응하는 부모의 반응과 부모로서의 아이에 대한 해결방식이
무엇보다도 당신이라면, 당신의 아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보다 극단적이면서 충격적인 형태의 해결방법을
제시해놓고 있다. 일반적인 도덕적 관념과 사회적 행위의
기준선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누구나가 이렇게 행동할 소지가
다분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마치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너희들이라면 이렇게 안 할 자신이 있느냐' 라고 물어보는 듯 하다.
그것이 전 짜증났다. 물론 이러한 결말이 이 작품의 주제에
맞닿은 아주 좋은 구성의 방법임에는 부인할 필요가 없다.
충격적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 더 가혹할 만한
사회적 딜레마의 문제 제기를 보여준다는 점도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자는 작품에 공감하고 자신을 대입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짜증스럽고 황망스러운 해결방식은 
상당한 후유증을 남긴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의 구성이 별로였다.
작가의 이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파악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처음의 진행방식이 빠르게 지루해졌고,
실질적 주제인 아이의 행위에 대한 부모의 역할론에 대한 이야기도
결과적으로 작가는 독자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충격적 방법을
제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로 인해 더욱 더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인으로서 삶속에서의 룰에 맞춰 살아온 일반인들의 행동이
오히여 바보스러워 보인다고나 할까,
괜한 반감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상당히 충격적이지만,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충격은 아니라는 것.

이런 모든 감정을 차지하고라도 이 헤르만 코흐라는 작가의
문장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문장 하나하나만 두고 볼 때
이 작가의 대중적 공감을 끌어내는 일반적 감정선을 표현한
묘사의 방식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누구나가 한번씩은 겪어봄직한 그런 감정적 묘사와
상황적 심리를 있는 그대로 끌어주니까 말이다.
그게 너무 과하게 다가오니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와, 라는 감탄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작품을 읽어본 바가 없기 때문에, 이 한 작품으로 작가를
평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런 문장적 공감의 역량에
서사적 이야기의 긴박감을 잘 조율한 작품이 있다면 정말 대박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감정적 통찰력이라 할까,
이런 느낌이 대단한 작가임에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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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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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당 7달러의 임금으로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사실 7달러라 하면, 현재 환율로 8000원가량된다.
시간당 4300원 하는 한국에 비해선 7달러는 굉장히 많은 돈 이지만,
문제는 미국의 살인적인 '주거비'애 있다.


"나와 함께 포크와 나이프를 닦고 있던 게일에게 이야기 했다.
'아니 어떻게 하루에 40달러에서 60달러를 방 값으로 낼 생각를 해요?'
게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무슨 수로 한 달치 집세에다 보증금을 마련해 두겠어요?'
나는 결국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P.47


한 음식점에서 만난 친구가 하루에 40달러 이상의 방세를 내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친구가 왜 그렇게 돈을 관리하냐고 물었다가,
치명타를 입는다. 모아둔 돈이 없으면 '절약' 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특히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투자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보증금 혹은 월세를 일시불로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모텔에서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집세 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이라고는 끽해야 전열기 하나 밖에
없는 방에 살아야 한다면 콩 스튜를 잔뜩 끓여 냉동시켜 놓고
일주일 동안 먹는다는지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주로 페스트푸드
또는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수프 같은 걸 사먹게 된다. 의료보험에 들 형편이 안되니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약도
구할 수 없고, 그러나 그 대가를 받게 된다.

- P.48


특히 근로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건강 문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주에 비해 방값이 싸고
임금이 후하다는 도시에서 일하면서 저자는 큰 위기에 봉착한다.


"일이 익숙해진 대신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우선 근육과 관절은
잘하고 있는데 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팔과 다리에 분홍색
두드러기들이 돋아 가려웠는데 이게 점차 심해졌다.
(중략) 너무 괴로웠다. 밤 사이에 가려움증이 너무 심해져 거의
발작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 때문에 거의 30달러의 약값이 들어갔다."

- P.124


결국 아무리 열심히 살더라도 목돈을 모을 때까지 모든 일이
잘 풀려야만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만일 이 과정에 한번이라도 아프면 모든 저축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임신해 아이라도 태어나는 상황이라면, 상황은
더욱 악화 될 것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일도 못 할테니 생활 수준은 급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왜 미국의 인종간 임금격차가 그토록 심하며, 또 갈수록 그 격차가
악화되는지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된 듯 하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어도 생산성의 향상 수문만큼은 임금이 상승되야만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의 향상
속도보다 실질임금의 향상 속도가 믿도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공화당의 집권기에는 생산성보다
실질임금의 상승률이 낮으며, 민주당의 집권기에는 실질임금이
생산성 수준을 따라가는 것을 확인하니..이건 매우 흥미롭다.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남부의 주들이 왜 공화당을 지지하는지,
이 부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은 경제적 이해에 따라
투표하기 보다,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착각)하는 집단의 이해에
따라 투표한다고 볼 수 있는 듯 하다.

책을 읽고 난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없는 사람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변화가 나타나기 어려우며,
현재 미국 사회는 최저임금 수준의 소득으로는 아이를 키우며
제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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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 복음을 통한 철저한 돌이킴
데이비드 플랫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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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꼭 읽어보라고 추천 해 주셔서 읽어본 책.
메세지가 굉장히 강한 책이다. 참 인상깊게 읽었고
이 시대에, 또 현재의 나에게 참 필요한 메세지가 많았다.
그동안 안개낀 것 같았던 영적상태에서
안개를 한꺼풀 벗겨낸 것만 같은..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래디컬(Radical)은 '급진적인', '개혁적인' 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책을 읽기 전 글의 제목을 봤을 때에는 '이게 무슨 뜻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래! 이거구나!" 라고 하는 감탄사가
입에서 나올 수 있었다.

복음은 우리에게 확실한 돌이킴, 철저한 순종을 원한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였고, 그것이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던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게
원하셨던 헌신도 그것이었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그것을 원하셨다. 복음은 원래 그렇다.
그만큼 힘든 길이고, 철저하지만 그만큼 매력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 안에 많은 불순물들이 들어가있다.
자본주의적 개념과 기복적 요소가 들어가 있어서 현대인에게
딱 맞는 입맛, 딱 원하는 맛만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부르지만 정작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듯 하다.

부흥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부흥이 무엇일까?
'넓은 주차장과 잘 훈련된 양육 시스템.
그리고 듣기 좋은 설교가 있으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것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부흥일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일까?

저자인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이 생각하는 부흥은
"확실한 돌이킴" 이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했을 때,
우리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영접 기도문을 따라 읽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 왠만한 죄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래, 괜찮다." 라고 인정해주시기 때문도 아니다.
복음을 통한 부흥은 철저한 전쟁이다.
철저한 전투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당연하던 것들이 이제는 그것을 돌아서기 위해서
엄청난 부담감과 혈투를 벌여야 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
매일 십자가를 지는 과정. 이러한 돌아섬이 바로 부흥인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주님을 알리기 원하신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목적어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에게 맞춰져 있다. 이것이 곧 복음이고 구원의 조건이다.

단순히 선행으로 사는 인생이 아닌 복음을 위한 조건으로
선행을 바라보면 또 다른 세상과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이 곧 주님의 나라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다.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주의에 물들어 버린 교회와 예배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리는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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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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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읽었던 책들은 머리에 쥐가 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의 어려운 책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남들은 어렵게 느끼지 않겠지만..)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과부하가 걸린 나의 머리에

조금이나마 쉴틈을 주었다. 프랭클 박사가 직접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이론을 정립해 나갈 뿐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안개를 한층 걷어내 주었기 때문이다. 빌려보겠다는 생각은

탁월했다. 가히 장담하건데 이 책은 가치가 있는 소중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프랭클 박사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갖게 됐고,

심리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기 시작했다.

 

당신은 삶이 죽을만큼 힘들다고 느꼈던 때가 있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에서 희망을 느끼기도, 좌절과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반가운 손님과 불청객이 번갈아오며

찾아오는 삶, 누구나 불청객은 맞이하기 싫은 법이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수용소 생활을 겪은 프랭클 박사에게

삶은 분명 좌절일 수 있었다. 프랭클 박사뿐만 아니라 죄수가

되버린 유대인들에게 좌절과 죽음은 일상이었다.

거친 노동과 폭력이 난무하고 먹을 것이라곤 멀건 스프나

빵조가리밖에 주어지지 않는 배고픔의 나날들,

그러나 프랭클 박사는 특유의 낙천적이고 학구적인 성격으로

중요한 깨달음을 발견한다.

 

"삶이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고통도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통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프랭클 박사는 러시아의 유명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서도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발견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뿐이다."

 

고통에 의미를 찾는 일이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 닥쳐올 때는 올바른 생각을 갖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은 고통을 견뎌내는 혹은

넘어서는 정신을 갖고 있다는게 프랭클 박사의 생각이다.

모든 이에게는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내면적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세상이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더라도

나의 정신은 온전히 나만의 자유며 나만의 것이다.

내면적 자유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하는 것도

자유다.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고 자포자기 해버릴 수도 있다.

고통을 견뎌냈다고 해서 또다른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고통과 죽음의 엄습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 그대로 운명적인 고통과 죽음이냐,

자의적인 고통과 죽음이냐는 따져볼 문제다. 자의적인 고통과

죽음은 운명적인 고통과 죽음 이전에 스스로가 벌인

자기참혹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프랭클 박사는 무엇보다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을 강조한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고 니체가 얘기했듯 사소한

것이라도 나만의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 처음 들어갈 때 관리자에게 빼앗긴 자신의 논문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 비록 논문은 빼앗겼지만, 반드시 살아남아

밖에서 논문을 완성시키겠다는 목표를 정한 것이다. 수용소에서

꿋꿋이 버텨낸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신앙' 등

자신만의 생존의 이유를 하자씩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더이상 삶에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 자조하는 이들은

불행하게도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숨을 거뒀다고 한다.

 

전쟁이 종결되고 수용소에서 해방된 프랭클 박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를 창시하게 된다. 로고테라피의 '로고'는

의미라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 logos>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쾌락주의',

아들러 심리학의 '권력을 추구하는 의지' 와 대비해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에 중점을 둔 심리분석학이 바로

'로고테라피' 인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에게 답을 주기보다는 환자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심리학이다. 각자의 삶에서 주어진 문제의

해답을 찾는 일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 이자

하나의 '과업' 이기 때문이다. 프랭크 박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중요한 것" 이라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추고, 대신 자신의 삶으로부터 끊임없는 질문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 했다. 결국 삶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책을 덮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나의 시도를 조금은 되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속의 엄청난 쾌락이나 부와 명예, 이런 인간적인 것들이 아닌

진짜 내 마음속에 계시는 하나님 한분만이 내 삶의 이유이시고

그 분께는 전적으로 내 삶을 맡기고 살아 나가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고 살아가는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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