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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포퓰리스트인가 - 그가 말하는 ‘국민’ 안에 내가 들어갈까
얀 베르너 뮐러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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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969년에 출판된 어떤 책의 서론에 적혀 있다던 이 말은 지금도,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시기에 적절해 보인다. 


저자는 일단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까지 한 포퓰리즘의 정의들을 늘어놓고 추스리며 개념을 다듬는다. 우선 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포퓰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여기서 국민은 순수하고 도덕적인 단일체로 신비화되고 포퓰리스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외의 국민들은 "진정한" 국민이 아니다. 국민들간의 이 구분은 "노동"에 의해 지어질 수도 있고 "인종"에 의할 수도 있으며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질 수가 있다. 트럼프가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며 인종적인 분열을 만들어내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 "진정한 국민"은 다수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실질(substance)" "정신" "진정한 정체성" 으로 표상화된 상징적 대상이다. 즉 포퓰리스트들은 국민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대중의 의지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 실질"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누구도 반대해서는 안되는 단 하나의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상정하여 자신들만이 그것을 대표해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대의정치에 영구히 따라붙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포퓰리즘 정권은 민주주의 제도에 손을 대고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망가뜨리려 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권위주의 정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선거제는 유지하되 법치주의 및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준수하지 않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체제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타락한 자본주의나 방종한 도덕, 혹은 소수자나 다양성, 다원주의 등과 연관된다. 권위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면서도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까닭에, 또한 대의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순된 개념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퓰리즘이 특히 유럽에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일단 개방을 둘러싼 시민들간의 경제적, 문화적 갈등을 꼽는다. 그리고 전후 유럽 정치의 DNA 속에 깊이 새겨진 무제한적 국민주권(파시스트의 집권을 도왔던)에 대한 불신을 이야기한다. 포퓰리즘은 이 국민주권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 질서(헌법재판소처럼 비선출 기관에 힘을 실어준다든가 하는)를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무제한적인 권리를 부여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기술관료주의가 있다. 유럽 재정 위기를 풀어가는 기술관료주의는 오직 하나의 올바른 정책적 해결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는 오직 하나의 진정한 국민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포퓰리즘과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포퓰리즘은 "국민" 과 "침묵하는 다수"를 신비화하여 비판과 다원주의를 허용하지 않고 민주주의적 질서를 위협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배제된 자"들을 포용하겠다는 모토를 내세우지만 포용되는 것은 구체적인 그들이 아니라 "하나의 국민"이라는 허구적 상징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저자가 구체적이거나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어떻게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불만과 분노와 좌절에 둘러싸인 사람들로 낙인 찍지 않고 동등한 시민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이슈를 논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가져다준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치 형태가 되었다. 트럼프나 르펜과 같은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대선에서도 우리는 국민을 과도하고 공허하게 외치던 한 후보와 그의 당을 경험한 바 있다. 그리고 이제는 언론권력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포퓰리즘과 언론은 원래 상극이지만 한국의 언론은 포퓰리즘을 견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들을 공격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자신도 "국민"이라는 개념을 단일한 총체로 신비화하고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거듭 되돌아봐야할 것이다. 포퓰리즘과 국민주권에 대한 열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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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과학과 그 너머를 질문하다 작은길 교양만화 메콤새콤 시리즈 3
박영대.정철현 지음, 최재정.황기홍 그림 / 작은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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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The theory of everything>에서 호킹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를 발견해내려 노력한다.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의 눈으로 봐서 그럴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만한 것이 아닐까. 단 하나의 원리가 아니더라도 과학은 정립된 이론에 대해 신뢰하는 정도가 인문학에 비해서 훨씬 큰 것 같다. 특히 물리학쪽에서는. 그게 어떤 경우에는 맹목적이거나 폐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게 과학의 정의이자 역할일까.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토마스 쿤이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여정을 담은, 즉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를 쓰는 과정과 그 뒷 이야기들을 그린 만화책이다. 쿤은 과학사 연구를 통해 답을 얻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보아 그러하였듯이 지금 정론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론도 언젠가는 부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상대주의라는 비판도 받게 된다. 그러나 쿤은 과학에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같은 것은 없다고 보았다. 정상과학의 시기에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은 과학자들 사이의 논리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어떤 외적 진리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관찰과 실험에 의한 경험적 결과물로 진공상태의 이론처럼 여겨졌던 과학에 사회적인 요인이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 쿤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정상과학, 즉 기존의 이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면 위기를 겪게 되고 급기야는 혁명적으로 전환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과학은 연속적이라기 보다는 이렇게 단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단절'이라는 개념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고전(뉴턴)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고전역학이 적용되는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에 대해 모든 자연현상을 단일한 원리로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며 실제로 그런 이론은 없고 언제나 다양한 이론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에도 사실상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은 '탈(포스트) 정상과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도 있다. 유전과학, 인간복제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과학 분야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과학이 단지 실험실에서만 머물 수 없고 사회적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탈정상과학 보다는 과학만능주의가 강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일까.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보면 이미 정립된, 혹은 '동의된' 이론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를 흔히 볼 수가 있다. 의심은 곧 무지로 조롱받는다고 하면 나름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물론 워낙 어려운 이론들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러니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 점이 바로 과학을 움직이지 않는 상아탑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 외적인 지식이 만나는 접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점을 잘 파악해내서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나름 '유행'인 이 이 시대에 과학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먼저 묻고 보는 일도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런 목적에 잘 부합하는 책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고 과학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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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다툼. 영화의 말미에 떠오른 것은 이 한 단어였다. 그리고 소름이 쫙 끼쳤다. 자본주의는 아귀다툼의 체제였다. 정치는 가능하지 않다. 악한 자본가와 선한 프롤레타리아 따위의 구분도 없다. 그저 인간성 자체를 원시적 욕망으로 환원시켜 말살할 뿐이다. 그 아래에선 모두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두고 다툰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규모에서부터 위압감을 주는 차갑고 황량한 초현대식 아파트 <하이 라이즈>를 무대로 한다. 겉보기에 부의 상징인 이 건물에는 사실상 문자 그대로의 상층민과 하층민이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저 건물이 상징하는 '하이 라이프'를 제것으로 하고 싶었던 남자는 다양한 이웃을 겪으면서 그것이 생각보다 복잡한 일임을 서서히 깨닫는다. 중간에 서서 관망하며 우아하게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속하자니 개싸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그는 결국 현실을 회피하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다. 그리고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달은 그 순간 비로소 평화롭게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역시 다른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첨단 기술로 지어진 건물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급기야 난잡한 전쟁터로 변했을 때 고민하던 설계자는 말한다. "뭔가 빼먹은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은거야." 자본주의에서는 결핍이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항상 흘러넘치는 무언가가 시스템을 자기 파괴적으로 굴러가도록 이끈다. 인간은 이 과잉의 체제를 제정신으로 감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광기 속에서 자멸한다. 

<하이 라이즈>는 자본주의의 심장을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꺼내보이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어떤 피해자에게도 감정을 이입하지 않으며 어떤 가해자에게도 피난의 화살을 꽂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서늘한 성찰의 순간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아귀지옥이라는 섬뜩한 깨달음이 온다면, 이 영화를 본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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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지 30여분이 지난 지금도 소름이 가시질 않고 가슴은 여전히 오그라들어 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공포와 긴장감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면 일종의 만족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신체적 반응이 동반되는 정서는 뭔가 "진짜"인 것을 경험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body cinema 라고 하는데 "몸으로 보는 영화"를 의미한다.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온몸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이 영화의 긴장감은 두가지 게임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진실과 거짓의 게임. 또 다른 하나는 감금과 탈출의 게임. 이들은 팽팽하게 짜여진 네러티브의 그물망 위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의 시험대 위에 놓이고 거짓은 드러날 듯 말 듯 숨바꼭질을 한다. 감금된 자와 감금한 자 사이에는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고 탈출은 매번 또 다른 벽 속에 갇힌다. 그리고 공포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사건들을 이어주는 매듭 역할을 한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만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게임은 승자 아닌 승자를 낳으며 끝이 난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좁은 공간에서 단 3명의 배우로 이끌어가는 폐쇄성은 영화의 긴장감을 배로 증가시키는 요소다. 중간에 잠시 집중도가 흩어지는 대목이 있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스토리는 탄탄했고 배우들은 훌륭했다. 존 굿맨은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침착한 사이코를 완벽하게 그려내는데,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가지의 성질은 그가 하는 행동에 예측 불가능성을 한층 더한다. 미셸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는 존 굿맨의 상대역으로 전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두려움과 대범함을 오가며 이야기에 추진력을 불어넣는다. 에밋 역의 존 갤러거 주니어는 두 배우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막판에 황당해하는 관객들도 분명 있겠고, 그 대목에서 영화의 결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전까지 보여준 장점만 가지고서도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충분히 성공적인 스릴러 영화다. 긴장과 층격과 공포를 B급 영화의 정서와 메인스트림 급의 짜임새로 경험하고 싶다면 주저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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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클라우스 슈밥 지음, 송경진 옮김 / 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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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포럼은 올해 초, 세계는 이미 제4차 산업혁명 단계에 진입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보고서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 사물인터넷을 특징으로 하며 그속에서 물리학, 생물학, 디지털 분야의 기술이 융합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는 이 거대한 변화에 대비할 이해력, 제도, 담론이 부족한 실태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2부에서 변화를 수용하고 가능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고 했지만, 정작 내용은 변화의 종류와 그것의 효과를 정리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누구도 지금 상태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실용적 낙관주의자임을 누차 강조하고 있는 저자는 마치 변화를 받아들이고 혁신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논지를 전개시킨다. 게다가 그것은 대개 기업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최소한의 해법일 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불평등에 관해서는 예측만 하고 넘어가는 식이다. 저자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다가올 변화가 가져다줄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불평등 문제임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아쉬운 부분임은 사실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정의와 그것을 이끌고 가는 기술들을 정리하고, 경제, 기업, 국가, 사회,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을 예측한다. 이 중 영향력 부분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하는 다른 책들 보다 좀 더 세밀한 영역까지 다루고 있는데, 분량이 많지는 않으며 아주 짧게 건드리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물론 그럼에도 핵심적인 부분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빈약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독자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영향력에 대해 가볍게 인지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가려고 하다보면 "최선을 다해" "서로 협력하여" "혁신을 이루어" 등 누군가가 많이 쓰던 표현들이 답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삽입형 모바일폰, 사물인터넷, 로봇약사 등 2025년까지 등장하거나 상용화될 가능성이 큰 21개의 기술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예측하고 현재의 동향을 설명해놓고 있다. 이 부분은 지극히 실제적인 사례를 기술하고 있으며, 비슷한 류의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모양새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가늠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직 진입단계에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은 항상 두가지의 얼굴을 갖고 있다. 시민사회가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아질 수도 있는 반면 공권력이 감시기술을 남용할 수도 있고, 소비재의 가격이 내려갈 수 있는 반면 임금이 낮아질 수 있고, 휴먼 클라우드가 노동조건의 구속력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줄 수도 있는 반면 불안정한 고용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예측하는 일은 쉽지 않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에서 자신의 이익에 맞게 대처할 힘 또한 더 많이 갖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결국 기업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불평등 심화의 문제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첨예한 사안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제4차 산업혁명의 위험성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 그것을 중심에 놓고 지금부터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술의 편리함 속에 안주하며 자기 살을 뜯어먹고 사는 신인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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