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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포퓰리스트인가 - 그가 말하는 ‘국민’ 안에 내가 들어갈까
얀 베르너 뮐러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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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969년에 출판된 어떤 책의 서론에 적혀 있다던 이 말은 지금도,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시기에 적절해 보인다. 


저자는 일단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까지 한 포퓰리즘의 정의들을 늘어놓고 추스리며 개념을 다듬는다. 우선 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포퓰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여기서 국민은 순수하고 도덕적인 단일체로 신비화되고 포퓰리스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외의 국민들은 "진정한" 국민이 아니다. 국민들간의 이 구분은 "노동"에 의해 지어질 수도 있고 "인종"에 의할 수도 있으며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질 수가 있다. 트럼프가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며 인종적인 분열을 만들어내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 "진정한 국민"은 다수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실질(substance)" "정신" "진정한 정체성" 으로 표상화된 상징적 대상이다. 즉 포퓰리스트들은 국민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대중의 의지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 실질"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누구도 반대해서는 안되는 단 하나의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상정하여 자신들만이 그것을 대표해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대의정치에 영구히 따라붙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포퓰리즘 정권은 민주주의 제도에 손을 대고 민주주의적 원칙들을 망가뜨리려 하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권위주의 정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선거제는 유지하되 법치주의 및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준수하지 않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체제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타락한 자본주의나 방종한 도덕, 혹은 소수자나 다양성, 다원주의 등과 연관된다. 권위주의적 전통을 따르고자 하면서도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까닭에, 또한 대의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순된 개념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퓰리즘이 특히 유럽에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일단 개방을 둘러싼 시민들간의 경제적, 문화적 갈등을 꼽는다. 그리고 전후 유럽 정치의 DNA 속에 깊이 새겨진 무제한적 국민주권(파시스트의 집권을 도왔던)에 대한 불신을 이야기한다. 포퓰리즘은 이 국민주권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 질서(헌법재판소처럼 비선출 기관에 힘을 실어준다든가 하는)를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무제한적인 권리를 부여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기술관료주의가 있다. 유럽 재정 위기를 풀어가는 기술관료주의는 오직 하나의 올바른 정책적 해결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는 오직 하나의 진정한 국민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포퓰리즘과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포퓰리즘은 "국민" 과 "침묵하는 다수"를 신비화하여 비판과 다원주의를 허용하지 않고 민주주의적 질서를 위협한다. 포퓰리스트들은 "배제된 자"들을 포용하겠다는 모토를 내세우지만 포용되는 것은 구체적인 그들이 아니라 "하나의 국민"이라는 허구적 상징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저자가 구체적이거나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어떻게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불만과 분노와 좌절에 둘러싸인 사람들로 낙인 찍지 않고 동등한 시민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의 이슈를 논의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가져다준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치 형태가 되었다. 트럼프나 르펜과 같은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그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대선에서도 우리는 국민을 과도하고 공허하게 외치던 한 후보와 그의 당을 경험한 바 있다. 그리고 이제는 언론권력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포퓰리즘과 언론은 원래 상극이지만 한국의 언론은 포퓰리즘을 견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정치적으로 각성된 시민들을 공격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자신도 "국민"이라는 개념을 단일한 총체로 신비화하고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거듭 되돌아봐야할 것이다. 포퓰리즘과 국민주권에 대한 열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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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과학과 그 너머를 질문하다 작은길 교양만화 메콤새콤 시리즈 3
박영대.정철현 지음, 최재정.황기홍 그림 / 작은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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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The theory of everything>에서 호킹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를 발견해내려 노력한다.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의 눈으로 봐서 그럴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만한 것이 아닐까. 단 하나의 원리가 아니더라도 과학은 정립된 이론에 대해 신뢰하는 정도가 인문학에 비해서 훨씬 큰 것 같다. 특히 물리학쪽에서는. 그게 어떤 경우에는 맹목적이거나 폐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게 과학의 정의이자 역할일까.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토마스 쿤이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여정을 담은, 즉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를 쓰는 과정과 그 뒷 이야기들을 그린 만화책이다. 쿤은 과학사 연구를 통해 답을 얻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보아 그러하였듯이 지금 정론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론도 언젠가는 부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상대주의라는 비판도 받게 된다. 그러나 쿤은 과학에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같은 것은 없다고 보았다. 정상과학의 시기에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은 과학자들 사이의 논리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어떤 외적 진리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관찰과 실험에 의한 경험적 결과물로 진공상태의 이론처럼 여겨졌던 과학에 사회적인 요인이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 쿤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정상과학, 즉 기존의 이론을 부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면 위기를 겪게 되고 급기야는 혁명적으로 전환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과학은 연속적이라기 보다는 이렇게 단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단절'이라는 개념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고전(뉴턴)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고전역학이 적용되는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에 대해 모든 자연현상을 단일한 원리로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며 실제로 그런 이론은 없고 언제나 다양한 이론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에도 사실상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은 '탈(포스트) 정상과학'의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도 있다. 유전과학, 인간복제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과학 분야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과학이 단지 실험실에서만 머물 수 없고 사회적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탈정상과학 보다는 과학만능주의가 강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일까.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보면 이미 정립된, 혹은 '동의된' 이론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를 흔히 볼 수가 있다. 의심은 곧 무지로 조롱받는다고 하면 나름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물론 워낙 어려운 이론들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러니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 점이 바로 과학을 움직이지 않는 상아탑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 외적인 지식이 만나는 접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점을 잘 파악해내서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나름 '유행'인 이 이 시대에 과학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먼저 묻고 보는 일도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런 목적에 잘 부합하는 책이다. 과학에 관심이 있고 과학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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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클라우스 슈밥 지음, 송경진 옮김 / 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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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포럼은 올해 초, 세계는 이미 제4차 산업혁명 단계에 진입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보고서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은 로봇, 인공지능, 사물인터넷을 특징으로 하며 그속에서 물리학, 생물학, 디지털 분야의 기술이 융합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는 이 거대한 변화에 대비할 이해력, 제도, 담론이 부족한 실태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2부에서 변화를 수용하고 가능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한다고 했지만, 정작 내용은 변화의 종류와 그것의 효과를 정리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누구도 지금 상태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실용적 낙관주의자임을 누차 강조하고 있는 저자는 마치 변화를 받아들이고 혁신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논지를 전개시킨다. 게다가 그것은 대개 기업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본 최소한의 해법일 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불평등에 관해서는 예측만 하고 넘어가는 식이다. 저자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다가올 변화가 가져다줄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불평등 문제임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아쉬운 부분임은 사실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정의와 그것을 이끌고 가는 기술들을 정리하고, 경제, 기업, 국가, 사회,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을 예측한다. 이 중 영향력 부분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하는 다른 책들 보다 좀 더 세밀한 영역까지 다루고 있는데, 분량이 많지는 않으며 아주 짧게 건드리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물론 그럼에도 핵심적인 부분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빈약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독자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영향력에 대해 가볍게 인지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가려고 하다보면 "최선을 다해" "서로 협력하여" "혁신을 이루어" 등 누군가가 많이 쓰던 표현들이 답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삽입형 모바일폰, 사물인터넷, 로봇약사 등 2025년까지 등장하거나 상용화될 가능성이 큰 21개의 기술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예측하고 현재의 동향을 설명해놓고 있다. 이 부분은 지극히 실제적인 사례를 기술하고 있으며, 비슷한 류의 다른 책들에서는 보기 힘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모양새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가늠해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직 진입단계에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은 항상 두가지의 얼굴을 갖고 있다. 시민사회가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아질 수도 있는 반면 공권력이 감시기술을 남용할 수도 있고, 소비재의 가격이 내려갈 수 있는 반면 임금이 낮아질 수 있고, 휴먼 클라우드가 노동조건의 구속력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줄 수도 있는 반면 불안정한 고용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예측하는 일은 쉽지 않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에서 자신의 이익에 맞게 대처할 힘 또한 더 많이 갖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결국 기업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불평등 심화의 문제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첨예한 사안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제4차 산업혁명의 위험성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 그것을 중심에 놓고 지금부터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술의 편리함 속에 안주하며 자기 살을 뜯어먹고 사는 신인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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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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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Authenticity는 한국어로 이해하자면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단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진정성이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래, 본래, 또는 진짜라는 성질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한때 정치인을 가리켜 "표리부동하지 않음"이라는 뜻을 가진 수사로 많이 사용된 까닭에 혼동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이 책은 "진정한 것들"을 향한 욕망에 대한 비판서로 보면 될 것이다. 


현 시대는 근대성의 여러가지 측면에 부정적인 가치를 매기고 그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행처럼 힘을 얻는 공간이다. 개인주의, 소비주의, 기술의 발전, 자연의 파괴가 가져온 인간의 소외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거나 소박한 삶을 살자는 등의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언뜻 당위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현상에 저자는 이견을 제시한다. 그러한 욕망에는 근대화 이전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묻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잘못된 가치판단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원시적 삶이 조화롭고 평화로웠을 것이라는 낭만적 상상에 대해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보아 완벽한 헛소리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근대화가 가져온 인간의 소외에 대해서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대와 어떻게 관계맺음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근대화의 특징을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일단은 종교 속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환멸이 생겨났다. 그리고 세상은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배당받던" 곳에서 개별적 개인이 모인 집합체로 변했다. 개인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개인주의는 경제적 개인주의인 자본주의로 이어졌고, 이는 의미와 가치가 있던 자리에 시장 교환이라는 허무주의를 가져다 놓으면서 소외를 발생시켰다. 저자는 루소가 이 소외를 극복할 방법으로서 제시한 대안이 현재까지 우리가 근대화와 관계맺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루소는 인간이 타인을 의식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문명사회에 내재된 악의 근원이라고 보는데, 이는 곧 남과 비교를 하고 우위에 오르려 하는 이기심을 낳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외가 발생하며 그것은 개인이 좀 더 강하고 자족적인 존재로서 주류와 투쟁하는 외로운 반항아가 되는 것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해법이다. 물론 저자는 이 방법이 근대화와 조화롭게 화해하는 길을 막는다고 말한다. 


이는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의미없어진 현대의 예술 분야에서 주류에 반해 원본의 아우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작품보다 작가의 이름값을 상표로 삼아 거래하는 판매전략에 넘어가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소비에서는 저항적 소비문화가 베블렌 효과에 의해 과시적 소비로 귀결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제 유기농도 한물이 갔고 로컬푸드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스스로를 과다하게 노출시키는 것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인정해달라는 욕망의 표출로 해석된다. 정치인의 진정한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허위로 진정성을 꾸며내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계화 시대에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문화를 진정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경향 또한 그 안에 속한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예능 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얼"에 대한 강박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결국 진정한 것들에 대한 욕망은 환상의 산물이거나 원치 않던 문제들을 일으키는 경향을 보인다. 


저자는 시니컬하고 사카스틱한 어조를 구사하며 근대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을 비판하고 근대 외부에서 진정한 것들을 찾으려는 욕망을 허상이라고 규정한다. 여기까지는 시대 상황을 잘 읽어내고 핵심을 제대로 끄집어낸 분석이라고 본다. 자연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 사이에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오류를 나 역시 종종 본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단순한 환상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어젠다가 되는 것을 보면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저자 역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근대와 화해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면서 논리는 급작스럽게 빈약해지고 현실타협적으로 나간다. 자유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마치 모든 것의 해결책인 양 추켜올리는 모양새는 너무 나이브해 보이고, 종종 인간의 이성에 대해 무한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또한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거센 비판과는 배치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세계화에 대해 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가져온 불균등과 불평등의 정황을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어떻게 세계시민주의 같은 것을 역설할 수 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인 듯한 저자는 전근대적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분노와 억압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이들의 숨통을 터준 권리와 자유를 해치는 사회질서를 완벽한 것으로 이상화하며 갈망해서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 자유가 지금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이용되고 있는지 또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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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나 2016-06-07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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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고 앉아있네 3 - 김상욱의 양자역학 콕 찔러보기 스낵 사이언스 Snack Science 시리즈 3
원종우.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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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밝히는 학문이 양자역학이다. 그런데 왜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가 중요할까. 전자들 사이에는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있고 이것을 전자기력이라고 한다. 전자기력은 중력, 핵력과 더불어 사물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4가지 힘들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손으로 책을 밀어 위치를 옮기는 힘은 전자기력이다. 책을 구성하는 원자의 전자와 손을 구성하는 원자의 전자가 서로 밀어내기 때문에 손이 책을 통과하지 않고 책이 밀리면서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은 운동에 관한 학문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 된다. 

그런데 양자역학 이전의 고전역학(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법칙)도 운동에 관한 물리학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quantum)는 불연속적인 알갱이라는 뜻이며 에너지의 최소단위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에너지의 최소단위가 알갱이, 즉 입자라는 것은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띄엄 띄엄 떨어진 상태로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에너지가 입자성이 아닌 파동성을 갖고 연속적으로 흐른다는 고전역학에 위배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자역학은 어떤 물리적 객체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다고 말한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자연이 그렇게 '말도 안되게' 생겨먹은 것이다. 양자역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상식'에 위배되는 성질을 자연이 갖고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에 인간은 '이해'하기 전에 그 사실을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과학하고 앉아있네 3>은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처드 파인만)는 양자역학을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한다. 일단은 고전역학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 보통 이중 슬릿 실험부터 시작하는 기존의 '쉬운' 설명 방식과 달리 아주 친절하고 유용한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이 어떻게 기존의 역학과 다른지에 대해서 간명하게 알 수 있고 그로써 양자역학이 물리학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으로 들어가서 전자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님을 보여준다. 이로써 물리학은 결정론에서 확률론과 불확정성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거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자역학의 이러한 특성은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 세계를 보는 인식론적 시각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는 더이상 완성되고 안정된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파편화되고 상대화된 불안정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확률성과 불확정성의 문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통해서 설명된다. 예를 들어 전자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전자를 맞고 튕겨나온 빛을 봐야 하는데, 그 순간 전자는 빛의 에너지에 의해 움직여버린다. 즉 '관측'이 전자의 위치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치를 정확히 알려 하면 할 수록 큰 에너지를 가진 빛을 써야 하고, 이는 전자의 속도가 불확실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아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이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고전역학에서는 위치와 속도가 가장 중요하며 임의의 순간 두가지가 확실히 결정되어 있어야만 운동이 이루어져 우주가 굴러간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에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는 위치와 속도를 단지 확률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뒤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거쳐 다중우주까지 설명을 이어가면서 '관측'의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룬다. 그리고 관측에 의해서 상태가 변한다면 과연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는 양자역학과 시공간의 문제를 짧게 다루면서 책을 끝맺는다. 

<과학하고 앉아있네 4> 는 3의 심화버전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론 자체의 심화라기 보다는 양자역학의 역사와 관련 과학자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정보를 다루는 것이 주요 골자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3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아주 짧게 언급된 양자도약이라든가 양자얽힘 등의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비판에 대해서도 넉넉하게 다뤄준다. 그러면서 다시 실재나 실체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우주는 실체가 없다는 입장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 밖으로 나가서 관측해야 하는데 우주는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 양자 컴퓨터의 원리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해준다. 

영자역학에 대해 간결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과학하고 앉아있네 3> 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좀 더 가지를 쳐서 관련된 이런저런 이론에 대해 알고 싶다면 4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다가도 조금 생각하다보면 줄줄이 의문부호가 이어지긴 하지만 양자역학 입문용으로는 이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얇고 쉽게 읽히니 부담 없이 사서 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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