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다툼. 영화의 말미에 떠오른 것은 이 한 단어였다. 그리고 소름이 쫙 끼쳤다. 자본주의는 아귀다툼의 체제였다. 정치는 가능하지 않다. 악한 자본가와 선한 프롤레타리아 따위의 구분도 없다. 그저 인간성 자체를 원시적 욕망으로 환원시켜 말살할 뿐이다. 그 아래에선 모두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두고 다툰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규모에서부터 위압감을 주는 차갑고 황량한 초현대식 아파트 <하이 라이즈>를 무대로 한다. 겉보기에 부의 상징인 이 건물에는 사실상 문자 그대로의 상층민과 하층민이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저 건물이 상징하는 '하이 라이프'를 제것으로 하고 싶었던 남자는 다양한 이웃을 겪으면서 그것이 생각보다 복잡한 일임을 서서히 깨닫는다. 중간에 서서 관망하며 우아하게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속하자니 개싸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그는 결국 현실을 회피하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다. 그리고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달은 그 순간 비로소 평화롭게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역시 다른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첨단 기술로 지어진 건물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급기야 난잡한 전쟁터로 변했을 때 고민하던 설계자는 말한다. "뭔가 빼먹은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은거야." 자본주의에서는 결핍이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항상 흘러넘치는 무언가가 시스템을 자기 파괴적으로 굴러가도록 이끈다. 인간은 이 과잉의 체제를 제정신으로 감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광기 속에서 자멸한다. 

<하이 라이즈>는 자본주의의 심장을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꺼내보이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어떤 피해자에게도 감정을 이입하지 않으며 어떤 가해자에게도 피난의 화살을 꽂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서늘한 성찰의 순간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아귀지옥이라는 섬뜩한 깨달음이 온다면, 이 영화를 본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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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지 30여분이 지난 지금도 소름이 가시질 않고 가슴은 여전히 오그라들어 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공포와 긴장감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추면 일종의 만족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신체적 반응이 동반되는 정서는 뭔가 "진짜"인 것을 경험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body cinema 라고 하는데 "몸으로 보는 영화"를 의미한다.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온몸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이 영화의 긴장감은 두가지 게임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진실과 거짓의 게임. 또 다른 하나는 감금과 탈출의 게임. 이들은 팽팽하게 짜여진 네러티브의 그물망 위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의 시험대 위에 놓이고 거짓은 드러날 듯 말 듯 숨바꼭질을 한다. 감금된 자와 감금한 자 사이에는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고 탈출은 매번 또 다른 벽 속에 갇힌다. 그리고 공포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사건들을 이어주는 매듭 역할을 한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만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게임은 승자 아닌 승자를 낳으며 끝이 난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좁은 공간에서 단 3명의 배우로 이끌어가는 폐쇄성은 영화의 긴장감을 배로 증가시키는 요소다. 중간에 잠시 집중도가 흩어지는 대목이 있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스토리는 탄탄했고 배우들은 훌륭했다. 존 굿맨은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침착한 사이코를 완벽하게 그려내는데,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가지의 성질은 그가 하는 행동에 예측 불가능성을 한층 더한다. 미셸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는 존 굿맨의 상대역으로 전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두려움과 대범함을 오가며 이야기에 추진력을 불어넣는다. 에밋 역의 존 갤러거 주니어는 두 배우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막판에 황당해하는 관객들도 분명 있겠고, 그 대목에서 영화의 결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망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전까지 보여준 장점만 가지고서도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충분히 성공적인 스릴러 영화다. 긴장과 층격과 공포를 B급 영화의 정서와 메인스트림 급의 짜임새로 경험하고 싶다면 주저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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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을 드러내고, 용변처리를 맡기고, 음식을 받아먹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이 쇠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 또는 나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시간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다. <크로닉>은  그런 마음 속으로 조용히 들어와 삶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한줌의 희망도 보여주지 않은 채 매몰찬 결론을 내리고 사라진다. 날것 그대로의 인간은 한없이 고독하고 삶과 죽음에 의미 따윈 없다. 영화는 지독히도 염세적인 세계관을 담담하게 읊조린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하기 꺼리는 그것을. 


데이빗은 이 모든 것을 경험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환자를 성심성의껏 돌보지만, 그의 눈빛은 공허하고 그의 삶은 껍데기만 남은 무덤이다. 그는 환자의 삶을 자신의 그것에 투사시킨다. 그리고 그 힘으로 버틴다. 환자들은 데이빗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데이빗에게는 지푸라기와도 같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데이빗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다. 그 도움이 삶이든 죽음이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삶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조차 항상 뜻대로 되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팀 로스를 처음 만난건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였다. 도둑의 오른팔로 나온 그는 양아치의 완벽한 체현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좀 안타까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지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반가웠었다. 나에게는 "완벽"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크로닉>에서도 그는 텅 빈 집과 같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작은 몸집과 평범한 생김새에 짙게 묻어있는 공허함은 많이 건조하게 표현되었음에도 강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제목인 chronic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은 극 중의 환자들을 향해 쓰였다기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러하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 같다. 언제 어떤 모양새로 닥쳐올지 모르는 삶의 끝으로 천천히 향하고 있는,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우리는 내일도 여전히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올 때 뭔지 모를 감정에 눈물이 터졌다. 생각해보니 그건 안쓰러움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저 안쓰럽다. 선택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지고 기우뚱거리는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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