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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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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오후 네 시의 산책은 어떤 의미였을까. 휴식이자 사유의 시간, 영감을 주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저자에게도 루브르는 추억과 사유의 시공간이었을테고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통해 그 느낌이 충분히 전달되는 듯 하다.

저자가 들려주는 여러 그림이야기를 일단 미루고 내게는 그러한 시간, 공간이 있는지 골몰하게 된다. 쌓인 책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잠시의 웃음이나 차 한 잔의 여유마저도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업무에서 몸과 마음이 벗어날 수 있는 잠시의 독서시간이 내게는 그들의 오후 네시와 닮아있으리라 자족해본다.

루브르의 소장 예술품에 대해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한대로 과거 식민 문화재 착취 등의 소장품 유입에 대해 비난도 있고 나 또한 반환 요구가 응당하다고 생각한다.(좀 다른 경우지만 놀리 메 탄게레와 같이 원래 있던 자리에 합성했을 때 그 아우라가 제대로 느껴지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역사 속 원화들을 직접 만나는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 세계의 미술품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루브르를 정당화 시킬 만큼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세계 곳곳, 루브르만큼의 자국 예술품을 관리하는 여러 멋진 미술관에서 원화의 감동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일단 관광지로서의 루브르에 대한 인식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저자는 매우 견고한 구성으로 루브르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이미지도 무엇보다 그림을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면에 전면으로 싣고 있고 필요시에는 부분확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작가소개와 작품의 사적배경, 용어 설명과 관련자료 제시 등 깔끔한 구성으로 작품에 접근해 나간다. 하나의 작품을 이야기하더라도 단편적으로 그치지 않고 영향을 주고 받은 작가를 소개하고 시기적인 화풍과 소재의 유행에 대해서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사례로 드는 화가도 많고 언급되는 작품도 많다. 이들은 루브르 내의 작품이기도 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타 미술관의 소장품들이기도 하다. 저자는 언급되는 작품과 화가를 설명하고 제시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또 다른 챕터에서 다루는 화가의 작품이 있으면 그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어서 책의 앞뒤를 펼쳐가며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챕터간의 유기성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집중력을 대변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모든 미덕이 예술 작품을 이야기 하는 모든 책의 기본이 아닌가 싶지만 사실 이를 모두 충족시키면서 산만해지지 않는 미술서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저자의 집중력은 아마도 몸에 밴 루브르, 그리고 개인적 감상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에 대한 애정, 반복적인 감상과 연구로 인한 작품에 대한 소화력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이렇게 쓰고 보니 저자의 작품해설이 굉장히 전문적인 지식의 나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저자의 가장 큰 매력은 재미나게, 쉽게 읽히는 글에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독자라도 즐겁게 루브르 곳곳을 채우고 있는 15세기, 16, 17세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저자가 들려주는대로 붓을 든 화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정이 된다. 오히려 문제라면 그림들에 대한 저자의 강렬한 애정이 전달력이 좋아서 조금은 비판적으로 그림을 읽기보다는 들려주는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림의 탄생배경을 충분한 사적자료를 통해 여러 가지 가능성 또한 놓치지 않고 있지만 그림의 감상 부분에서는 풍부한 저자의 해석이 약간의 독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책이 공부하는 책이라기 보다 예술품과 진정 교감하는 관객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며 예술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얼마나 교감을 시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위안을 주는지 다시금 예술의 역할 또한 실감하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그림을 제시하는 것 외에 현장, 즉 루브르에 걸린 그림과 현장을 찍은 자그마한 사진들이었다. 단 하나의 사진만을 제외하고는 타이틀 그림의 현장스케치들이었는데 이 사진들만으로 루브르에 걸려있는 그 그림만의 현장감을 온몸으로 느끼기엔 부족하겠지만 묘하게도 이 작은 사진들 덕에 책을 읽는다기 보다 그림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사진 안에서는 관객들이 그림 앞에 서 있는 경우들이 많아서 수치상으로 실감할 수 없었던 그림의 사이즈 또한 한눈에 실감할 수 있기도 했고 종종 전시장을 묘사한 글들 또한 한번도 가지 못한 루브르에 대한 간접경험이 되기도 했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선택한 그림들이라고는 하나 소재별로 적절하게 묶여 있는 걸 보면 그 중에서도 고르고 골랐을 그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알지 못했던 그림들이 많이 소개되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유럽 북구 미술과 네덜란드 미술 등이 가장 그렇다. 그 중에서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더불어 델프트파에 속하는 그림들이 마음을 끌었다. 저자는 피터르 더 호흐의 술 마시는 여자시리즈에 애정을 표하고 있었는데 피터 브뤼헐의 거지들과 함께 루브르에 걸려 있을 델프트파의 그림을 직접 만나고픈 욕심이 잠시 든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굉장히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가 아닐까. 그림 속의 민초들에게 연민들 보내는 저자의 시선이 피터르 더 호흐나 브뤼헐과 같지 않았을까.

()’챕터에서는 관음증과 시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호기심 많은 소녀들과의 시선교환이나 저자를 압도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한 작센의 모리스 공작 초상등 뿐만 아니라 그림 안과 밖에서의 수많은 시선의 교환을 인정하고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부분에 상당부분을 할애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시각예술에 있어서 가장 먼저, 그리고 끊임없이 관객에게 사유하게 하는 매력이 바로 이 시선의 교환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챕터에서도 끊임없이 저자가 시도하고 있는 작품읽기방법 중 하나이다. 그림 안의 인물, 화가, 관객 간의 시선에 대한 읽기가 사실 가장 그 작품의 내면에 근접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 그림의 설명에서 언급된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금세공 작업실의 성 엘리기우스에서 그림안의 볼록렌즈에 매료되었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렌즈 안의 종교적 상징에서 나아가 그림의 시선을 확대하여 프레임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는 사례의 그림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거울을 통해 프레임 밖의 공간과 인물을 들이고, 새로운 이야기과 의미를 넣는 여러 시각예술에서의 이러한 기법들이 매번 재미나고 흥미롭다.

 

이와 같은 나의 경우에서처럼 나는 저자가 사료에 근거한 정확한 정보만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다양한 그림 이야기와 저자만의 감상과 해법은 분명 우리에게 어떻게 예술과 교감할 것인지, 단지 배경지식으로만이 아닌, 그림 속 인물과 그리고 그리는 이와의 대화와 호기심이 과거 아닌 과거, 예술품의 내면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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