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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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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속의 영화’는 영화이론선집으로, 영화를 읽는 현대비평의 초석이 된 논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192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선별된 이 아티클들만으로 영화 비평의 흐름을 한눈에 보기란 어렵겠지만 영화로 사유하던 유럽철학의 정점에 있던 주옥같은 아티클을 한권의 번역서로 만나 볼 수 있을 기회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이론의 필독서들로 채워져있지만 우리는 이 아티클로 인해 영화 뿐 아니라 세상과 미디어를 읽는 비평의 여러 기준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사회주의적 비판 등의 정치적 비평과 기호학적 비평에 대한 좋은 접근법을 찾는 데 영감을 줄 것이다.
단권만으로 영화비평이론을 섭렵하려 하기 보다는 여러 이론서 혹은 각 아티클의 주인공들인 학자들의 글이 많이 실린 다른 번역서들을 참고하면서 학자의 의견의 앞뒤 맥락과 번역의 오류 등을 짚어가면서 공부해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영화이론 공부가 될 것이다. 영화이론 공부가 막연했다면 이 한권에서 학자들의 여러 다른 아티클로 가지를 쳐 나가는 독서를 권유하고 싶다.
영화이론서들의 직독직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그렇게 했듯 가독성보다는 의미의 오류를 견제하는 것이 조금 느리더라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 또한 가독성보다는 의미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몇몇 번역서의 의역과 번역의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한 시도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사유 속의 영화’는 더욱 어려운 독서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이론 번역서, 특히 이 책에 실린 아티클 중 번역된 몇몇의 논문의 기존 번역서들보다는 (앞뒤 문장이 바로 번역되어서인지) 더 현대적인 표현과 현재 철학용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직역되어 있으면서도 시기성을 고려한 부분이 엿보인다.(기존의 번역서들이 쉬운 풀이문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의역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벤야민의 논문에서 가장 잘 알게 되었다.)
영화이론서에서는 기본적인 영화의 용어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쇼트와 프레임, 미장센, 앵글, 정사-역사, 몽타주, 데쿠빠쥬 등의 용어들이 이미 독자들의 사전지식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사유 속의 영화’와 같은 영화이론서들을 처음 맞딱뜨리는 일반 독자에게는 용어의 정확한 이해때문에라도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기호학 용어와 정신분석학 용어, 정치학 용어 들의 등장은 독서를 더디게 만든다. 이에 더해서 이처럼 초기 영화 연구 논문들은 당시의 영화들을 텍스트로 하고 있어서 현대영화를 많이 접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전혀 사례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점도 한 몫 거든다.
그러나 이 독서를 필두로 영화사에 의미있는 초기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가지고 그 매력을 당시를 치열하게 논쟁했던 학자들의 논의와 함께 한다면 불가능 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영화를 읽는 과정은 당시의 영화를 다르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어느 영화를 보아도 지금의 사회상과 연결된 영화의 플롯들과 각 장면의 의미, 편집의 의도 등을 사유하게 하여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을 키워준다.
에이젠슈테인의 글은 영화이론에 문외한인 이에게도 영화의 제작과정이 이루어내는 사실이 아닌 시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쇼트와 또 다른 시공간의 쇼트 혹은 부분을 재현한 쇼트 등의 몽타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에 관한 것이므로 책의 첫장을 여는 에이젠슈테인의 글에서 이러한 쇼트가 만들어낸 영화의 환상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자신의 눈높이보다 약간 위쪽을 응시하는 쇼트 바로 다음에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쇼트가 편집되었다면 관객은 그 누군가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있다고 인지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되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쇼트와 편집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진적 현실복제에서 나아가 실제보다 많은 생략 혹은 재구성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른하임의 글에서는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에르빈 파노프스키와 벤야민에 이르기까지 저급문화로 치부되었던 영화를 예술로 볼 것인가에 대해 영화와 현실의 재현적 차이에서 오는 예술성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심리학이라는 말로와 퐁티의 논문도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영화제작을 이루는 연기와 촬영에서 생겨난 영화 언어와 문법의 발생(클로즈업을 비롯한)을 살펴보면서 각 저자와 함께 영화가 예술로서의 독특한 양식창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그러한 문법은 분명 심리학적으로 관객에게 어떤 효과로 다가갈 것인지 영화의 시각적 효과(특히 무성영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앙드레 바쟁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미지의 객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연 그대로를 복제하는, 인간의 개입이 없는 쇼트에서 자연재현이라는 기준을 들이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롱쇼트의 롱테이크인 장면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연출 혹은 후반작업이 없으리라는 신뢰를 할 수 없을테지만 이는 보도영상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연출된 장면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생각할 때 영화의 사실성을 그 본질로 생각해야 할지, 그 본질을 인간의 창조적 개입이 있는 재구성의 예술로 여겨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그 어느 쪽도 옳거나 그를 수 없다. 누군가의 이론들은 비판을 받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것도 사장되는 영화이론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사진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늘 의심하고 영화 또한 현실 그 자체를 옮기는 쇼트의 존재도 의심한다. 이런 지금에 영화의 사실성과 환상성을 운운하며 어떤 것이 옳은 재현인가를 논의하거나 어떤 것이 사실인지 구분해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논의는 자칫 의미없어 보일 수 있으나 아직까지 다큐멘터리와 재현, 영화적 재현에 있어서 새로운 영화언어와 작가들만의 문법 창출, 다양한 양식에 대한 논의의 여지는 남는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오래 전 학자들의 영화이야기는 헛되지 않다. 모든 철학과 영화이론에 있어서는 누군가의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언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언어학과 기호학의 잣대를 영화에도 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은 영화학도들에게는 교과서와도 같을텐데 66년의 이 논문에 이르면 앞의 여러 논문의 이론들을 아우르는 비평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영화편집에서 쇼트와 쇼트의 연결인 페이드와 디졸브의 시각적 효과에서도 생각할 수 있듯, 영화(영상작업)에서의 쇼트의 크기와 앵글과 조명 등의 모든 요소는 이미지의 언어가 된다. 쇼트는 메츠의 말대로 단어 하나가 아닌 ‘발화’이며 아직까지는 시각적 언어에 치중한 해석이지만 이를 읽는 우리는 사운드(대사, 음향, 음악 혹은 무성 등)의 영화언어적 모습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양산물로 영화산업이 전락해가고 제작에서 배급까지 독점적인 영화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더 활발해진다. 영화의 주체인 관객이 영화의 정사-역사에 몰입함으로써 관객 자신을 부재시켜버리는 봉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영화가 영화임을, 그리고 관객 자신의 위치를 자각시키는 영화제작사례를 읽는다. 이는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의 형식의 문제 또한 지적하는 지점이 된다. 영화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언뜻 네러티브만을 연상하기 쉽지만 플롯이 나닌 영화생산 자체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한 인물에 대한 호명으로 인한 무의식적 학습 등 영화 내외 적 모든 요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의미한다.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논문에서 제시하는 여러 영화의 범주들로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서 강조하는 영화비평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영화의 주체이어야 하며 이러한 기존의 담론을 현대의 영화들로 이해할 필요성 또한 느낄 것이다. 현대영화의 비평을 곁들인 저자의 논의가 있었더라면 일반독자들에게 훨씬 이해가 쉬워졌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재구성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되니 오역의 가능성이 생긴다. 아마도 저자는 학자들의 글 자체가 문장 자체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기획의도에서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정신분석학과 시각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되기도 한다. 장-루이 보드리의 논의에서 나아가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한나래) 등의 시각예술에 대한 책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카메라의 눈의 권력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영화 안의 봉합의 의도(의도가 없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를 읽어내는 키워드가 된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가 저항의 역할을 해야하는가.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가능성이 있으려면 현실재현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를 비롯한 여러 학자가 말한다. 그저 보여줘버리는 것, 그 리얼리즘을 가장한 (우리가 아는 스펙터클은 이렇게 왜곡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키튼의 슬랩스틱과 마술과 같은 스펙터클에서 과장된 표현주의의 상징적 스펙터클로 그리고 비천함(자크 리베트)과 파괴의 완전히 드러난 스펙터클은 이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다) 카메라의 권력적 시선에서 곁눈질로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어내는 영화를 옹호하는 시선들까지 아직까지 이러한 논의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아래 지속되어 오고 있다. 물론 영화들의 다양한 생산과 시도만큼이나 독점적 배급을 벗어난 다양한 소비까지를 아직 기대할 수는 없지만 생산의 시도는 고무적이다.
영화평론가만이 영화비평과 제작의 인터랙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시대에 문화소비의 대상이 대중인만큼 모든 관객이 비평의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뿐 아니라 모든 재현된 이미지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모든 관객에게 중요하다. 의미의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생산과 이미지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본 혹은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읽어내는 작업들이야 말로 저항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인터랙션을 이끌어낼 것이다.

도움이 될 만한 더하는 독서 :
영화서술학(앙드레 고드로, 프랑수아 조스트)
영화분석의 패러다임(자끄 오몽, 미셸 마리)
현대영화이론의 이해(로버트 랩슬리, 마이클 웨스틀레이크)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김성태)
시각과 현대성(주은우)
공포의 권력(줄리아 크리스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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