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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근래 들어 가장 오래 걸려 읽은 책은 분명합니다. 책의 두께도 장난아니거니와(무려 554쪽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같은 듯 다른 내용이 연속되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전쟁에 참여했던) 여자들이 말하는 전쟁을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책의 내용은 대부분 저자와 여군(이었던)과의 인터뷰입니다.
책에서 언급하는 전쟁은 2차 세계대전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했던 200여 명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친구와의 수다나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에도 부족했던 그 청춘의 시기에 전장에서 전투를 치른 이들의 목소리. 더구나 여인의 목소리. 쉽게 만날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들의 육성을 듣다보면 가슴 먹먹한 순간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두려움없이 적과 맞서고 동료를 챙기고 부모와 가족을 그리워하고 사랑도 합니다. 당연히 가장 많이 만나는 장면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서술하면서 인터뷰어도 울고 독자는 눈물을 머금게 됩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거의 대부분의 여성(소녀가 맞는 표현입니다.)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오히려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입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발적 애국심인지 이념의 영향인지 군중심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많은 여인들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일상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대를 거부하는 정치위원회에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거나 제 발로 찾아가서 입대를 간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입대에는 뭔가 신비로운 느낌도 강하게 듭니다.
인간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 남성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책.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로부터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의 전쟁을 당국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책에서도 저자는 책 발간에 대한 압력과 협박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인터뷰 내용을 거르고 걸러서 탄생한 책. 노벨문학상 수상(2015년)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1940년대는 이념의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무차별적인 전쟁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것이 파시즘이든 나치즘이든 군국주의든 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기만의 언어 아래 인간 개체는 어디에도 설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또다른 축이었던 연합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패자는 정치, 경제적으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승자는 잔치를 베풀고 저마다의 무용담을 나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여자는 당연히 설 자리가 없었을 테구요. 승리자의 역사, 남성의 역사에서 사라진, 아니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여인들의 목소리를 지상으로 끌어내 활자화했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 것입니다. 알면서도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았던, 숨 죽였던 여인들의 목소리가 이제 활자 속에서 큰 울림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폭력의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일단 육체적 역량에서 남성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떠올려보면 여성의 자리는 없는 것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2차 대전에서 그녀들은 적군을 죽이고 동료가 죽는 장면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입대를 했기 때문에 전쟁 도중 여인의 징후를 만나기도 하고 키도 훌쩍 자랍니다. 거칠고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상황의 연속이기에 여성의 징후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죽은 동료를 제대로 매장도 하지 못하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행군도 해야 합니다. 배급받은 전투복과 전투화는 너무 크고 머리도 짧게 잘라야 합니다. 전쟁이라는 아수라장 속에서 더이상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여성이지만 정신적, 현실적으로는 남성으로서 그 억압과 폭력의 현실을 견디고 이겨낸 여성들. 하지만 전쟁 후에는 전쟁에 참여했다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어떤 남자가 나같은 여자를 신부로 맞아 들일 것이며 내 이웃들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탄식하는 그녀들의 목소리... 마음을 울립니다. 그녀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여전히 약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포성이 울리는 곳만이 전쟁터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근들은 여전히,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상당히 더뎠습니다. 꼼꼼히 읽어서이기보다는 같은 듯 다른 내용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전쟁과 일화, 분명히 다른 내용이지만 그 본질적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분명 다양한 상황, 다양한 시선으로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기에 분명히 다른 내용이지만 반복되는 인터뷰 속에서의 기시감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니 집중도도 떨어집니다. 정말 오랫동안 책을 읽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꽤 읽은 것 같은데 제자리...ㅠ.ㅠ. 상당한 인내와 집중력을 가지고 읽어야 할 책입니다.
수많은 전쟁참전 여인들의 육성... 그렇기에 가슴에 다가온 문장들이 참 많습니다. 그 문장들로 마무리합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14쪽)
회상이란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19쪽)
죽음은 비밀은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다. 전쟁은 지나치게 내밀한 체험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만큼이나 그 끝을 알 수가 없다...(22쪽)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劇化)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31쪽)
나는 내가 겪은 일만 기억나. 내가 겪은 전쟁만.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결국 사람은 혼자야.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홀로 죽음을 대면해야 하거든(65쪽)
나는 감정의 역사를 쓴다... 영혼의 역사를 쓴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를 쓴다.(90쪽)
행복... 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145쪽)
역사는 만들어졌지만, 낮뿐이 삶이었으며 기억도 짧았다.(192쪽)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인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198쪽)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198쪽)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 어떻게 생각해?(224쪽)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225쪽)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 고하려고...(252쪽)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268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374쪽)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악은 끝이 없어 보인다. 나는 이제 더이상 악을 역사의 문제로서만 대할 수가 없다. 누가 나에게 대답해 줄 것인가... 무한정 되풀이되는 삶의 반복성에 대해 생각해본다.(479쪽)
또다시 두 개의 다른 세상, 두개의 다른 삶이다. 기껏 증오하는 법을 익혔는데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래 전에 잊힌 감정들을, 잊힌 말들을 다시 떠올리야 했다. (511쪽)
지금 녹음되고 있는 거지? 역사를 위해, 그렇지?(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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