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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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연금술사'이후로 처음이네요. 파울로 코엘료의 명성이나 작품 수에 비한다면 이렇게 안 읽을 수가 없는 것인데...ㅠ.ㅠ.

'연금술사'는 뭐... 전세계인의 필독서이자 세계인의 심리적 각성을 일깨운 책이니까 굳이 첨언이 필요없지만... 이번에 만난 '스파이'는 제 기대치에는 많이 모자라네요...

소설은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감옥에 수감중인 마타 하리의 최후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담담하고도 당당한 죽음... 그리고 소설은 그녀를 변호했던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마타 하리는 이 편지가 자신이 죽고 난 후 홀로 남겨질 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녀의 인생과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결혼을 위해 이국적인 인도네시아 자바 섬으로 떠난 마타 하리. 그러나 낯선 문화, 남편의 방탕한 생활, 아들의 죽음 등 평탄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그녀는 파리로 향합니다. 그리고 천둥벌거숭이와 다름없는 처지에서 그녀는 이국적이고 신비한 동양적 춤으로 파리문화계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뒤이에 따라오는 명성과 부...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녀와 가까이 하고자 노력합니다.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파리에서의  화려한 성공... 하지만 화려한 불꽃은 사그라지고 파리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던 그녀는 독일로 향합니다.

 

마타 하리(여명의 눈동자 혹은 새벽의 눈의 의미를 가진 인도네시아어입니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영화로도 뮤지컬로도 그리고 책으로도 그녀의 생애가 많이 조명됐기 때문입니다. 스파이 혹은 이중 스파이의 대명사, 치명적인 팜므 파탈 등 그녀를 가리키는 말도 많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

(Margaretha Geertruida Zelle). 네덜란드 출신입니다.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로, 다시 파리로 그리고 독일로... 파란만장한 인생입니다.

그녀는 암호명 'H21'이라고 불리는 독일 스파이로 프랑스 정관계의 고급정보를 독일 측에 팔아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결국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스파이였는지 시대의 희생양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1999년 비밀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문서에는 마타 하리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마타하리는 여전히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을 뿐이죠.

파울로 코엘료가 마타 하리에 주목한 것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자유롭고 독립적이고자 노력한 여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이고,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훗날 내 이름이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29쪽) 이 문장에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소설을 읽는 내내 (최소한 저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용기있는 여성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도... 제 독해력의 부족이 큰 이유이겠지만 작가가 마타 하리를 선택한 이유가 제게는 와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본 마타 하리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알고 이를 지극히 잘 활용한 여성일 뿐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당시 사회에(특히 남성들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성의 최대 무기는 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특유의 관능미와 신비함(여기에는 그녀의 거짓말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됩니다.)으로 파리문화계를 주름잡던 그녀가 니진스키를 비롯한 신진들에게 밀려나고 그 화려함을 다시 찾기 위해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녀와 관계를 맺던 수많은 남성들은 결코 그녀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녀의 마지막에 가서 어떤 남성도 그녀를 편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말이죠. 결국 육체와 육체가 얽힌 관계였을 뿐이겠죠. 이런 점을 볼 때 작가가 생각한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란 판단에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책은 마타 하리와 그녀의 변호사 클뤼네의 편지 형식으로 진행됩니다.(1, 2부-마타 하리, 3부-클뤼네) 편지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것이 상황이든 생각이든. 즉 사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서술되는 편지 형태의 글은 독자와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타 하리의 글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개인적 변명으로만 생각됩니다. 내가 무죄이다를 말하면서 그 타당한 근거가 희박합니다. 물론 전쟁의 광기 속에서 희생된 가녀린 여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인생을 살다 좌절된 한 개인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라면 그닥 할 말이 없지만...

어쩌면 편지 형식이 아닌 장면 중심의, 대화 중심의 내용 전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상상의 여지가 크지 않았을까 읽기의 흥미가 배가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극히 사념적인 전개 위주의 글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명성에도 다소 미치지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럼에도 눈길을 머물게 한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읽기를 멈추고 머릿속 잔상도 잠시 흩어 뿌리는 그런 문장들...

 

사랑은 범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우리를 갑자기 앗아갑니다.(82쪽)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는 길을 잃는 법도 없습니다.(86쪽)

인생은 왜 나로 하여금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일을 겪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들을 견딜 수 있는지 보기 위하여.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하여. 내가 무언가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지만 그러기 위해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125쪽)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무리 공포스럽다 해도 이 숲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고 나는 저편에 다다르려 한다는 것이지요. 승리가 왔을 때 나는 관대할 것이고 나에 대해 온갖 거짓말을 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126쪽)

 

나는 행복을 찾았던 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라 브레 비La vraie vie’, 진정한 삶을 원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상심의 순간들이 함께 있고, 충성과 배신, 두려움과 평화의 순간들이 공존하는 진정한 삶. (157쪽)

'... 당신은 사랑을 철저히 불신하고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무게게도 복종하지 않고 그 신비를 해독하려는 사람을 배신할 뿐입니다.'(208쪽)


파울로 코엘료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읽었을, 그리고 상대적으로 만족도도 높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작품이나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저에게는 많이 아쉬운 작품, '스파이'였습니다.

 



나는 내가 언제나 전사였으며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나의 전투를 치러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전투들은 삶의 일부였습니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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