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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평점 :
구입은 작년 하반기에 했지만 내내 묵혀뒀다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왜 이제서야 읽었을까 후회가 들 만큼 깊은 울림과 감동을 안겨준 자서전이었습니다.
1977년 뉴욕 출생.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생물학 전공, 동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 취득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와 철학 과정 이수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 졸업 후에는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과정 이수.
박사 후 연구원으로 종사.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 수상.
2015년 3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
간단한 저자의 약력입니다. 웬만한 엄친아는 저리 가라 할 만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장밋빛 인생만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앞에 내려진 폐암... 그는 어떻게 이 병마와 보냈을까요?
약력에서도 보이듯 폴 칼라니티는 의사이지만 문학에 상당한 관심과 조예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2014년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합니다. 이 글에서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정확히 언제 죽을지는 모르는 불치병 환자의 딜레마를 절실히 표현했다고 합니다. 자서전 곳곳에서도 그의 문학적 관심과 재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 이유도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의 교차점에 의학이 있다고 생각하여 의과 대학원에 다시 진학했다고 합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의 인간적, 학문적 고뇌도 읽히는 부분입니다.
책은 건강한 시절의 그를 다룬 1부와 암과 직면한 그의 생활을 다룬 2부로 구성됐습니다.
암, 그것도 말기암에 걸렸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대부분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질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고요. 본문 192쪽에 슬픔의 5단계가 제시됩니다.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아마 이 단계가 암 환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폴 칼라니티는 이 단계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진술합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류의 반응에서 '왜 하필 나야?'와 같은 분노. 그리고 신을 비롯한 절대자와의 협상 그리고 그 협상의 실패에 따른 우울,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수용 혹은 체념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겪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폴 칼라니티는 이런 과정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암 진단 후 포기했던 레지던트 과정을 치료를 받으면서 끝내는 마치고 만다는 것이죠. 의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대개 대충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말기 암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는 그 힘든 나날을 저자는 굳건한 의지로 완수하고 마는 것이죠. 전율이 일 정도의 사명감 혹은 생명의지입니다. 이 부분에서 전 슬픔보다는 한 인간의 숭고한 삶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두려울 정도로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욱 슬픈 자서전이었습니다. 결코 빠르게 읽을 수 없습니다.(물론 책 속의 내용, 특히 1부는 어느 정도 속도가 붙기는 합니다.) 특히 그의 투병기를 따라가다 보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도 끝내 피우는 꽃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렇게도 아름답고 처절하면서 숭고한 인간의 삶을 참 오랜 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죽음에, 시간에 맞서는 것은 당랑거철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 앞의 주어진 삶을, 시간을 소중히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 숭고한 삶을 폴 칼라니티가 보여줍니다. 실천합니다.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기 속에서, 절망 속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위기가 닥치거나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안절부절 못하고 무척이나 예민해집니다. 결국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시 돋힌 말을 건네 상처를 입히고 말지요. 대범하지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삶의 한계입니다. 반면에 폴 칼라니티는 더욱 진중해 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 역시 자신이 죽음 앞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앞에 주어진,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누렸습니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193쪽) 그는 이 책을 썼습니다. 물론 미완성의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 대한 태도, 죽음에 임하는 진실성을 충분히 확인하고 가슴아파하고 존경의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책임에 분명합니다.
책 속에는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참 많았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반성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했다. 죄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72쪽)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120쪽)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143쪽)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198쪽)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231쪽)
'용감한 보는 자 폴은 이 책을 쓰면서 말하는 자가 되었고,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하라고 가르쳐주었다.'(253쪽)
'폴은 평생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결국 그는 그 일을 해냈다.
나는 그의 아내이지 목격자였다'(264쪽)
죽음이란 단어만큼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단어가 있을까요? 누구나 피하고 싶고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단어. 그 단어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대개는 앞서 언급한 슬픔의 5단계를 밟아가겠지요? 얼마 전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폴 칼라니티의 삶은 더욱 아프고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한 눈으로 죽음에 대면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의 삶을 다한 그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상마저도 버거운 삶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힘겨울 때, 혹은 잠시 여유로울 때 죽음 앞에 마주한 삶을 떠올린다면 내 앞의 오늘에 정말 숙연해지지 않을까요? 죽음보다는 삶의 숭고함을 알려준 책, 죽음 앞에 당당한 삶의 자세을 일깨운 책,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입니다.
‘몇 년 전, 나는 다윈과 니체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을 규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것이다.‘(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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