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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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의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 봅니다. 아는 소설가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지만 문장, 그 중에서도 문체에 가장 신경을 쓰고 또 가장 탁월함을 보이는 작가가 김훈 선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단문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훈 선생의 글을 읽을 때에는 아무래도 문체에 신경을 쓰며 읽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만난 '공터에서'도 이런 선생의 문체적 특성이 잘 드러난 소설입니다.

 

소설은 아버지 마동수와 그의 아들인 마장세, 마차세의 삶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기록이란 말을 쓰는 것은 무엇보다 작가는 우리 앞에 그들의 삶을 툭~ 던져 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단문, 극도의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도의 객관적인 서술이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일제 시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부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어떤 작가의 판단도 개입되지(개입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먹고 살기 위하여 일상을 부딪치는 그들의 스산한 삶을 풍경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마동수는 거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무색무취의 인간,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는 인간,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인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에서 중국 상해를 거쳐 다시 대한민국으로 그의 삶은 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이 있지요. 그 가족을 위해 1년에 몇 번 땔깜을 가지고, 양식을 가지고, 고등어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올 때 아무런 기척이 없이 오듯 갈 때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납니다. 그의 삶의 흔적이라곤 장세와 차세, 이 둘뿐입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모으고 쌓아서, 막막한 날들을 건너'(192쪽)가야 하지만 그에는 그 작은 것을 모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떠날 때는 한없이 작은 몸으로, '꼬부린 자세로 죽어'(41쪽)습니다. '칠성판에 눕힐 때 등뼈에서 우드득 소리가'(41쪽) 날 정도로...

 

마장세는 그런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가 있는 이 나라가 싫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파병이 끝나고 귀향하지 않고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납니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로 결코 오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얽혀서 발목이 잡히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인지, 그냥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그는 결국 '거기'라고 불리던 나라의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발목이 잡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돌아옵니다. 마장세에게 한국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 굴레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어찌보면 가장 평범하고도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 마차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사랑을 하고 어느 정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실직의 아픔을 겪긴 하지만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둡니다. 무엇보다 마차세를 아버지와 형을 구분짓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동수가 어머니 이도순을 만나 아이를 낳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하기 보다는 시대의 억압과 흐름에 억눌린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마장세는 아내의 존재와 비슷한 린다가 있었지만 그들의 사이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마차세 곁에는 아내 박상희와 눈이 오는 날 태어난 딸, 누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었기에 실직의 아픔을 견디고 가족의 뒷일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 시작할 때 빈 종이처럼, 좀 더 견뎌'(192쪽)라는 박상희의 말,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199쪽)라는 박상희의 생각이 마차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성의 긴밀도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마씨 성을 가진 부자의 삶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는 질곡의 역사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역사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늘에서 벗어난 삶도 살지 못합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갈등도, 긴장감도 없는 소설입니다. 때문에 소설적 재미는 다소 약한 편입니다. 다만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그들의 삶을 우리는 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마씨 부자의 주변에 오장춘이나 시누크, 김오팔 등의 주변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그닥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서로 인연이 얽히고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뚜렷한 갈등구조도 보이지 않고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언제나 당면한 삶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소설은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시대와의 부조화보다는 신산한 삶의 흔적을 카메라와 같은 시선을로 따라가고 비춰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느껴집니다.

 

'문득 태어난 자리에 묶여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볍고 하찮게 느껴졌다. 그 가벼움이 어째서 그토록 무거웠는지'(284쪽) 느끼는 것은 비단 마차세만이 아닐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무겁고 질곡과도 같았던 일상은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탈바꿈합니다. 단지 그 순간순간의 무게가 우리의 삶을 짓누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지난 시간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동수와 마장세처럼 바람처럼 흘러가고 삶의 거점 마련을 도외시하고 도피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삶은 여전히 버티기 어려운 굴레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삶은 장남에게 이어지고 장남의 삶은 끈태 파국으로 흐릅니다. 삶이 끝났을 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마동수는 마장세이고 이도순은 마차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라는 이도순의 외침은 자신의 남편과 장남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이든, 남아서 주어지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삶이든 무섭게도 닮은 외모처럼 삶의 풍경 역시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끝나더라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혈연의 이어짐, 삶의 끈질김을 이 소설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습니다. (맞는 표현일 지 모르지만) 서늘한 문체를 읽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설이었습니다. 절제된 단문은 대가가 아니면 쉽게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숙할수록 문장은 길어지고 꾸밈이 많아집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그 광활한 바다를 직선 하나로 갈무리할 수 있는 대가의 손길이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너다.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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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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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쇼코의 미소'에서도 표지 인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읽은 '82년생 김지영'도 표지 그림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표지 인물보다 검고 큰 그림자가 더 깊게 다가옵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여인. 무얼 생각하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옆의 검은 그림자는 인물의 혹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청와대 방문 당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해서 더 화제가 된 책 '82년생 김지영'.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뒷표지에 있는 문구이면서 이 책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남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한 중년 남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나라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로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꽤 오랜 기간 이어질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 여인이 약 35년간 겪어온 차별과 억압의 기록이 마치 르포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내용도 길지 않고 가독성도 좋아서 다 읽는데 채 3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책을 빨리 읽는 편이기도 하지만 책의 흐름이 예상가능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여성이 아닌 남성이기 때문에 심각성을 인식하자 못하고 읽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도 다양하고 세부적인 부분까치 차별이 미치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 책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익숙하다.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다.'(179쪽)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운 문장이지만 소설의 핵심을 정리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82년생 김지영 씨가 겪는 그 수많은 경험과 차별이 익숙합니다. 주위에서 충분히 봤고 들어봤던 내용들입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내용들도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김지영이란 인물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가 익숙함(일상성) 속에서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인물의 형상화를 목표로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결코 잘 써진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수성이라는 문장은 소설의 약점을 교묘하게 감추는 수사가 아닌가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더구나 소설+르포의 형식적 특성을 취하고 있기에 수많은 각주와 통계 자료를 적시하는 듯한 문장의 딱딱함도 소설로서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장치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여성 차별,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외면하거나 축소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 소설이 소설적 형상화의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일 뿐...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처럼 눈을 감아 버리고 입을 닫아 버린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있고 그 일은 피로와 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186쪽)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경시와 차별,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도 무시되어 버릴 것이라는, 심리적 장벽 혹은 무용론이 여성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분명 차별을 받고 있고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는 참고 넘겨버리는, 어쩔 수 없이 회피되고 회피해야만 하는 현실의 반복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많은 장면에서 김지영 씨는 눈을 감아버리고 입을 닫아 버리고 있습니다. 남성으로서 당연히(!) 누리고 향위하는 현실에서의 지위와 영향은 결국 여성의 눈물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또다른 엄마가 되어서까지 여성의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차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유리천장은 조금도 균열이 가지 않고 견고한 벽을 쌓아올렸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내각의 관료를 30%이상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유리천장에 가하는 묵직한 펀치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한 남성 중심의 사고가 혁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다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남성으로서의 권리 아니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남성이기에 당연시여겼던 것들이 그 맞은편 여성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고와 행위였습니다. 그러고 이것들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쉽게 고칠 수 없는 고질병같은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불안한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됐습니다. 여성의 주체적 사고와 행동, 남성의 내려놓기 혹은 역지사지의 자세가 결합될 때,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은 점진적으로 해소될 것입니다.

 

아프게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보다 남성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의 시작은 공감과 이해에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으로서 인간의 역할과 지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논의의 본격적인 시작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김지영처럼 눈을 감아 버리고 입을 닫아 버린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있고 그 일은 피로와 무력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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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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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선정한 2016년의 소설(공동 1위), 과연 어떤 점이 소설가들로 하여금 올해의 소설로 뽑히게 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쇼코의 미소'를 만납니다.

책에는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씬짜오, 씬짜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충분히 암시하는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이방인들간의 소통과 단절을 다루고 있는 '한지와 영주', 이념과 투쟁이 사라진 90년대 초반의 노래패와 그 속의 사람들을 다룬 '먼 곳에서 온 노래', 어쩔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미카엘라',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안으로만 삭히며 소리없는 통곡이 존재하는 '비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쇼코의 미소'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적하고 조용한 K군에 할아버지, 어머니와 사는 나(소유), 일본문화가 전격 개방되는 그해에 일본의 자매학교에서 교류 프로그램으로 온 쇼코. 이 두 사람의 이별과 만남을 통한 성장의 이야기입니다. 쇼코는 짧은 기간이지만 나와 할아버지의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이별... 이후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 쇼코를 만나고 또 한참의 시간의 흐른 뒤에 쇼코가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납니다. 그 와중에 쇼코의 할아버지와 나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자리합니다. 잔잔한 물결과 같은 소설입니다. 뚜렷한 갈등이나 사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물과 인물의 만남과 헤어짐, 할아버지와의 정신적 단절과 이해, 정신적 성장에 따른 엄중한 현실의 이해가 드러납니다. 또한 이 소설은 국적이 다른, 하지만 가정 환경은 비슷한 두 소녀의 정신적 성장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물론 쇼코는 할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이, 나는 할아버지의 무관심이 자리하지만 그 사랑과 무관심을 딛고 한 개인으로 성장해가는 소녀들. 그 곳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단절과 지속, 사랑의 다른 모습이 존재합니다. 벗어나고만 싶었던 가족과 할아버지는 역설적으로 두 소녀의 버팀목이 됩니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순간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야 함을 작가는 말합니다.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냥 두 소녀의 인간 관계망을 보여주기만 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쇼코와 '나'는 또다른 나가 아닐까 하는 자각을 이끌어 냅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단어는 상처를 가진 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국가와 국가 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한 개인(가족)에게 남겨진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씬짜오), 국가(사회)라는 거대 조직이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으며(순애 언니)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과 오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결국 개인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으로 이어지고 말지요. 명분이 없던 싸움에 끼어들어 수많은 사상자를 양산한 베트남 전쟁은 소설 속에서 언급한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78쪽)다는 그 철없고 순수한 믿음을 여지없는 깨버리는, 감추고만 싶은 대한민국의 민낯입니다. 그리고 그 침략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질 나는 학살'(81쪽)에 가담한 대한민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침략을 하지 않는 나라가 아니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1964년과 1974년에 벌어진 인혁당 사건. 무고한 시민을 발가벗긴 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자행하고 10년 뒤 그 인물들 8명을 사형선고 내려진 지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한, 국제법학자협회에 의해 ‘사법사상 암흑의 날’을 선포하게 한 전대미문의 사건. 그 잔상이 '순애 언니'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죄 없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숨어 살며, 자신을 감추고 감추어야만 했던 소시민의 모습이 바로 순애 언니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어'라고 마지막 순간에야 내게 말을 건네는 언니, 폭압적 군사정권이 육신을 감금하고 죽일 수는 있었지만 정신마저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결하고 올곧은 정신은 80년대와 2010년대를 관통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프고 아픈, 결코 숨겨서는 안 되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작가는 결코 큰소리로 외치지 않습니다. 정권에 의해, 억압적 현실에 의해 부서져가는 개인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소설 속 개인의 모습은 정확히 '나'의 모습으로 중첩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듯 소설 속 인물이 어느 사이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은영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러울 수 있지만, 부당한 현실 속에서 아무 행동하지 못한 나를 자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나일 뿐'입니다. '보무철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164쪽)은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살기도 하고, 노래는 끝났지만 이미 떠나간 이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살기도 하고,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었던 시간'(176쪽)을 살아가기도 하는 나는 여전히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현실 속의 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는 언제나 혼자가 아닙니다. '위태롭게나마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부모와 상처받았기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던 응웬 아줌마 부부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간'(91쪽)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삶을,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의 흐름은 도도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개인의 삶은 지극히 작고 작을 뿐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은 현실에 의해 쉽게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디작은 개인이 모여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87년의 민주화, 2017년의 촛불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대의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 '쇼코의 미소'에서 저는 현실 속 개인에 대한 작가의 연민과 공감을 느낍니다. 절망적인 삶 속에서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에 인간에 대한 애정입니다. 때로는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 감정의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집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최은영 작가의 시선을, 그 마음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위태롭게나마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부모와 상처받았기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던 응웬 아줌마 부부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간‘(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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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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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어찌된 일인지 기욤 뮈소 책을 한 권도 포스팅하지 않았네요.

읽은 책은 분명 여러 권 되는데...

'구해줘', '종이여자', '사랑하기 때문에' 정도는 읽은 것 같은데 한 권도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블로그에 처음 올리는 기욤 뮈소의 작품,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하루 만에 완독했습니다. 가독성만큼은 뭐...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기욤 뮈소의 글쓰기 장점이자 단점이 온전히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 거기에 결합되는 환상적 요소. 이번에는 시간여행이란 흔하디흔한 장치를 이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내용은 뻔한데 이를 얼마만큼 얼기설기 잘 엮어내느냐가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기욤 뮈소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기욤 뮈소의 작품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서 작년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네요. 당연히 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에서 시간여행이 가능한 것은 신비한 황금색의 알약과 수면입니다. 수면에 대해서는 106~108쪽에 걸쳐 설명을 하고 있는데 나름 소설 전개의 개연성을 부여하려 한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얕은 수면은 '서파수면' 단계에 해당하고 깊은 수면은 '역설수면' 단계에 해당하고, 역설 수면은 대략 90분마다 한 번씩 찾아오며, 15분 정도 지속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가장 격렬한 꿈을 꾸게 된다고 하네요. 엘리엇의 알약을 먹고 과거로 이동하는 시간과 과거에 머무는 시간이 역설수면의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럴 수도 있겠네'하는 사람은 없겠지만요 ㅎㅎ

 

소설의 주인공인 엘리엇은 성공한 외과의사이지만 폐암 말기의 환자이기도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연인 일리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만난 신비의 노인으로부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열 개의 알약을 얻게 되면서 그의 삶은 파란에 휩싸입니다. 60살의 엘리엇과 30살의 엘리엇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과 일리나를 살리고자 하는 일념의 젊은 엘리엇과 나이 든 엘리엇의 갈등. 우여곡절 끝에 일리나를 다시 살리지만 그 여파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욤 뮈소의 작품이 그렇듯이 막판에 급격하게 휘몰아치는 사건과 상념들... 얼마만큼 받아들이는가는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뭐... 그냥 그렇게... 특별한 감흥 없이 읽었습니다. 다만 엘리엇이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심리는 꽤 깊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에게는 넉넉한 사랑을 주려 노력하는 아빠, 화목한 가정을 이루려 노력하는 아빠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어릴 때의 아픈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삶도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욤 뮈소의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아서 속단하기는 그렇지만... 기욤 뮈소의 책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일정한 패턴의 반복처럼 보이는데... 저만의 느낌이겠지요... 아무튼 저는 기욤 뮈소의 작품을 찾아서 읽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깊이 다가온 작가는 아니란 말이겠지요. 그래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크나큰 후회 하나 가진 사람에게는 꽤 매력있게 다가갈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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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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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은 작년 하반기에 했지만 내내 묵혀뒀다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왜 이제서야 읽었을까 후회가 들 만큼 깊은 울림과 감동을 안겨준 자서전이었습니다.


1977년 뉴욕 출생.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생물학 전공, 동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 취득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와 철학 과정 이수

예일 의과 대학원에 진학, 졸업 후에는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과정 이수.

박사 후 연구원으로 종사. 미국 신경외과 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연구상 수상.

2015년 3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


간단한 저자의 약력입니다. 웬만한 엄친아는 저리 가라 할 만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장밋빛 인생만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앞에 내려진 폐암... 그는 어떻게 이 병마와 보냈을까요?


약력에서도 보이듯 폴 칼라니티는 의사이지만 문학에 상당한 관심과 조예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2014년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합니다. 이 글에서 그는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정확히 언제 죽을지는 모르는 불치병 환자의 딜레마를 절실히 표현했다고 합니다. 자서전 곳곳에서도 그의 문학적 관심과 재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 이유도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의 교차점에 의학이 있다고 생각하여 의과 대학원에 다시 진학했다고 합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의 인간적, 학문적 고뇌도 읽히는 부분입니다.


책은 건강한 시절의 그를 다룬 1부와 암과 직면한 그의 생활을 다룬 2부로 구성됐습니다.


암, 그것도 말기암에 걸렸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대부분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질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고요. 본문 192쪽에 슬픔의 5단계가 제시됩니다.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아마 이 단계가 암 환자들이 겪는 일반적인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폴 칼라니티는 이 단계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진술합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류의 반응에서 '왜 하필 나야?'와 같은 분노. 그리고 신을 비롯한 절대자와의 협상 그리고 그 협상의 실패에 따른 우울,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수용 혹은 체념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겪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폴 칼라니티는 이런 과정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암 진단 후 포기했던 레지던트 과정을 치료를 받으면서 끝내는 마치고 만다는 것이죠. 의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대개 대충은 알 것입니다. 그런데 말기 암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는 그 힘든 나날을 저자는 굳건한 의지로 완수하고 마는 것이죠. 전율이 일 정도의 사명감 혹은 생명의지입니다. 이 부분에서 전 슬픔보다는 한 인간의 숭고한 삶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두려울 정도로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더욱 슬픈 자서전이었습니다. 결코 빠르게 읽을 수 없습니다.(물론 책 속의 내용, 특히 1부는 어느 정도 속도가 붙기는 합니다.) 특히 그의 투병기를 따라가다 보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도 끝내 피우는 꽃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렇게도 아름답고 처절하면서 숭고한 인간의 삶을 참 오랜 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죽음에, 시간에 맞서는 것은 당랑거철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 앞의 주어진 삶을, 시간을 소중히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 숭고한 삶을 폴 칼라니티가 보여줍니다. 실천합니다.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기 속에서, 절망 속에서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위기가 닥치거나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안절부절 못하고 무척이나 예민해집니다. 결국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시 돋힌 말을 건네 상처를 입히고 말지요. 대범하지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삶의 한계입니다. 반면에 폴 칼라니티는 더욱 진중해 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 역시 자신이 죽음 앞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앞에 주어진,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누렸습니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193쪽) 그는 이 책을 썼습니다. 물론 미완성의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 대한 태도, 죽음에 임하는 진실성을 충분히 확인하고 가슴아파하고 존경의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책임에 분명합니다.


책 속에는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참 많았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반성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했다. 죄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72쪽)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120쪽)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143쪽)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198쪽)

 

'죽음은 예상보다 느리게 올지도 모르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분명 빠르게 닥쳐올 것이다.'(231쪽)

'용감한 보는 자 폴은 이 책을 쓰면서 말하는 자가 되었고,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하라고 가르쳐주었다.'(253쪽)

'폴은 평생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결국 그는 그 일을 해냈다.

나는 그의 아내이지 목격자였다'(264쪽)


죽음이란 단어만큼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단어가 있을까요? 누구나 피하고 싶고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단어. 그 단어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대개는 앞서 언급한 슬픔의 5단계를 밟아가겠지요? 얼마 전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폴 칼라니티의 삶은 더욱 아프고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한 눈으로 죽음에 대면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의 삶을 다한 그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상마저도 버거운 삶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힘겨울 때, 혹은 잠시 여유로울 때 죽음 앞에 마주한 삶을 떠올린다면 내 앞의 오늘에 정말 숙연해지지 않을까요? 죽음보다는 삶의 숭고함을 알려준 책, 죽음 앞에 당당한 삶의 자세을 일깨운 책,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입니다.

‘몇 년 전, 나는 다윈과 니체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을 규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것이다.‘(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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