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프레시인  기획 시사다. 중국 지식인이라. 

21세기, 중국 지식인의 위상과 곤경 

 최근 중국에서는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관련 서적의 판매 부수가 갑자기 증가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빠져들면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정책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다. 공교롭게도 이 서적들에 관심을 보인 자들은 당대 중국의 지식인들도 아니고 관방의 공공서비스 기관도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의 노동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중국의 보통 시민들이었다.

관방과 민간의 양대 문화 권력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관방과 인민의 양대 구도로 이분되었던 중국의 문화 권력은 그 구도가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다. 관방은 중화주의와 애국주의를 앞세우며 당대 중국의 문화 권력을 주도하고 있다. 관방은 일찌감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하위 이데올로기를 발굴해왔다. 90년대에는 '현대신유학'에 주목하여 관방과 대학 간의 철학적 접목을 모색하였다. 현대신유학 연구에 대한 독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 신드롬으로 이어졌고, 20세기에 철저히 외면당했던 공자는 21세기에 화려한 부활을 맞이했다.

관방이 주도하는 문화적 주도행위에 인민의 생활공간인 '민간'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선 대대적인 공자문화 복원사업이 일어났다. 방송 매체에선 공자의 사상에 대한 연속 강의가 유행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유불도(儒佛道)에 대한 강의가 줄을 이어 방영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불교의 탈세간적 교리가 방송의 황금시간대에 선포되는 요지경 중국이다. 유교의 가르침에 대해선 대륙의 학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이완의 저명한 대학교수까지 모셔다 강연을 듣고 있다.

관방의 주도에 대한 민간의 신속 반응은 결코 문화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민감한 정치 이슈가 터져 나올 때마다 민간은 자발적으로 애국주의의 선봉에 서곤 했다. 최근 발생한 티베트 사태에 대해 프랑스가 중국 정부를 비판하고 나서자, 민간은 프랑스 다국적 기업인 까르푸에 대한 대대적인 불매운동을 벌였다. 또한 일본과의 마찰이 발생하는 시점에선 민간은 어김없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나 일본 음식점 거부와 같은 구체적인 행동을 벌였다. 이러한 애국주의는 온라인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그 불똥은 우리나라와의 관계 설정에도 옮겨 붙었다. 올림픽 성화봉송 사태나 강릉단오제에 대한 중국 누리꾼의 공격은 매우 거세고 맹목적이었다.

민간의 문화 행위는 관방에 대한 반응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자체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확대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민간의 문화 생산은 대부분 대중문화의 다양성에 기반을 두었다. 중국에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급성장한 대중문화는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는 거대한 문화 권력으로 탈바꿈했다. 대중문화는 그 생리상 정부의 통제틀 내에서만 움직이지 않고 자체 내의 자율성과 생산성을 확대해갔다. 인터넷 블로그 문화는 표현의 자유가 통제된 중국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표출할 수 있는 소중한 분출구 역할을 했다. 베이징 외곽을 중심으로 형성된 창의적인 미술 전시공간은 중국 문화계의 새로운 생산기지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인구에 회자하는 산자이(山寨)문화는 민간의 소외 계층이 만들어 낸 풍자와 조소의 문화 공간이다.

중국 지식인, 논쟁을 통한 자리 찾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밤이 깊어야 비로소 비상하듯이, 중국 지식인의 담론은 개혁개방으로 인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틀 지워지기 시작한 90년대 초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사회는 더욱 역동적으로 기존의 계획경제 틀로부터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그 무렵, 중국 지식인들은 '인문정신'을 주제로 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논쟁은 인문정신 위기론자의 주장에 대해 인문정신 조소론자가 대응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왕샤오밍(王曉明)으로 대표되는 인문정신 위기론자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상업화되고 저속화된 중국 문화계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조롱과 욕망의 늪에 빠진 인문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문정신 조소론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논리를 폈다. 그들은 중국 사회가 이미 다원 가치의 시대로 진입했는데도, 여전히 인문정신의 우월성과 5.4식의 계몽주의 환상에 빠져 있는 인문정신 옹호론자들의 논리는 위선과 독선에 불과하다고 맹렬히 공격했다.

9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인문정신' 논쟁은 90년대 후반 동아시아가 금융위기봉착하면서 주춤하게 된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세계화(Globalization)' 담론이 급부상하였고, 이 화두를 중심으로 소위 '신자유주의' 학파와 '신좌파' 학파가 정면에 등장하였다. <두수(讀書)>라는 학술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양대 학파의 논쟁은 수많은 부수적 국소 담론과 결합하면서, 중국 사회에 지식인 담론의 전성기를 되찾아 주었다. <두수>는 발행부수가 10만부를 육박할 정도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기고자의 짧은 분량의 글쓰기와 독창적인 관점을 적극 지원하면서 그 세를 확장했다.

관방과 민간 사이, 소통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중국 사회에서 중국 지식인의 담론이 관방과 민간에 긴밀하고도 신속하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제한된 표현의 자유 속에서 행해지는 이들의 담론은 관방과 민간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민간에서 조성된 대중문화의 무한진화와 다양성 속에서 그들의 무거운 주제는 한없이 따분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관방이 주도하는 중국특색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여러 논리들은 여전히 주변적인 학설로 치부되고 있다. 중국에서 논의되는 '신좌파'의 사상은 중국 내에서보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고평가된 면이 있다.

관방과 민간의 밀월 시대에 중국 지식인의 행보는 매우 독자적이고 활기차다. 그들은 비록 관방과 민간 사이에서 훌륭한 소통을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들의 담론이 직간접적으로 관방과 민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의 담론은 다수의 주목을 받을 만큼 매우 역동적이고, 지식인들 간에는 상호 소통적이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논쟁을 유발시킬 만큼 생산적이다. 이는 우리나라 학술계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사상계'가 중국의 <두수>로 그 바통을 넘겨준 형국인 셈이다. 논문식 글쓰기에 매몰된 나머지 학파 간의 논쟁과 대화가 실종되고, 연구 프로젝트에 목매어 담론의 현주소를 잃어버린 우리나라 학계의 현실을 볼 때, 중국 지식인의 역동적인 행보는 부러움과 반성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강진석 오산대 교수. 중국문화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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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오는 김에 더 퍼온다. 이 연재를 신경쓰고 보지 않았다. 후회가 막급 

 

中國探究]<46> 중국 지식생산구조의 변화와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

스타 지식인 위추위()의 '거짓 기부'  사건  

  

 

 

 

'국학대사'라 불리는 지셴린(季羨林)의 서거로 잠시 소강상태를 맞기는 했지만, 올해 상반기 중국 문화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일은 아마도 위추위(余秋雨)의 '거짓 기부' 소동일 것이다. 위추위는 '가을비'라는 이름의 아우라가 말해주듯이, 중국 문화를 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해 대중적 수필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 왔다. 그는 최근 중국에서 대중 스타 지식인의 출현이라는 사회·문화 현상을 이끈 주요한 사례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는 '위대사(余大師)'라는 별칭까지 얻었을 정도다. 중국 문화에 관한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 소개된 바 있어 우리에게도 낯선 작가는 아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작년 쓰촨성(四川省) 원촨현(汶川縣)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하자, 학교 건물부실 공사 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 때 그가 학교를 다시 짓는 데 약 20만 위안(元)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기부 액수는 중국 작가들 중에서 으뜸을 차지할 만큼 큰 규모였고, 중국 사회는 그의 이런 선행에 다시 한 번 '감동'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올해 5월, <베이징문학(北京文學)>의 편집장 샤오샤린(蕭夏林)이 블로그에 "그의 기부는 거짓"이라는 요지의 글을 올리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1주일 쯤 지난 뒤 위추위의 비서가 나서 '주주독서인(九久讀書人)'이라는 문화 기업을 통해 직접 기부했노라고 해명했다. '주주독서인'의 이사장 황위하이(黃育海)도 학교 세 곳에 도서관을 짓는 비용으로 기부했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그런 해명에도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6월 15일에는 역시 위추위 못지않은 대중 지식인인 이중톈(易中天)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기부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하라며" 몰아붙였다. 황위하이는 일언지하에 그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불과 사흘 뒤 기부 사건의 한 당사자였던 두장옌시(都江堰市) 교육국이 기부금으로 도서관을 지은 것은 아니며 "책을 기부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샤오샤린이 다시 이에 대해 "거짓 증언"이라며 맹공을 퍼붓자 지난 6월 22일 위추위가 공개적으로 해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해명은 자신은 "세계 토론대회 심사위원이라 논쟁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느니 "고수는 함부로 손을 쓰지 않는 법"이라며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이번 소동은 중국 사회의 지식 생산과 유통의 구조, 그리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라는 다양한 쟁점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사회주의 이후, 중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했다. 물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만이 '인민'으로 호명되면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지식 생산에 기여해 왔던 지식인은 사회적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지금은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대학교수나 의사 등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 상위 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집단으로 분류되어 왔다. 사회주의 실험기 동안 중요한 지식은 주로 당과 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기획되었고, 역시 당과 정부가 장악한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었다. 제도권 내부의 지식과 다른 관점이나 경향은 존재할 수 없었고, 설령 제도권 밖의 지식인들이라 해도 당과 정부의 지침을 철저히 따라야만 했다.

개혁 개방이 급속한 경제 성장을 불러오면서, 이런 상황에도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지식이 유통되는 통로인 학교나 연구소 같은 기구나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과 같은 미디어에 대한 관리, 감독에 여지가 생기게 되었고 그 틈을 타고 지식의 생산이 새롭게 구조화하기 시작했다. 세기의 전환과 더불어 지식 생산의 새로운 구조를 보여주기 시작한 데는 전통적인 제도와 기구로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대학이나, <독서(讀書)> 등과 같은 잡지의 역할이 컸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흥 미디어가 새로운 지식 생산의 주요한 진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단편적인 정보와 오락적 기능만을 담당하던 텔레비전이 이를 선도했다. 중국 국영 중앙방송10(CCTV10)이 2001년 "중국의 훌륭한 전통문화를 보급하자"는 취지로 기획한 '백가강단(百家講壇)'이라는 프로그램은 이중톈이나 위단(于丹) 등과 같은 수많은 스타 지식인을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 위추위도 여러 차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텔레비전은 중국 지식인들이 고루한 학문의 틀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유통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지식의 대중화'와 '대중의 지식화'라는 목표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텔레비전 못지않게 인터넷 역시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공방은 공식적인 당사자들의 해명을 제외하고는 주로 인터넷 블로그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터넷 블로그는 중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아젠다를 창출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공격을 가하는 쪽은 주로 인터넷 블로그를 이용하는데 반해, 방어를 하는 쪽은 공식 인터뷰강연의 기회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오프라인에서 여론의 반전을 꾀하는 수비자들이 온라인의 개방성과 신속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형국인 듯, 인터넷 여론은 위추위에게서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중국 내 지식 생산의 구조가 큰 변화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도 급격하게 상승했고, 단지 '지식의 생산'만으로도 큰 경제적 수입을 가져올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위추위는 중국의 전업 작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인세 수입을 자랑한다. 그의 인세가 연 평균 140만 위안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지식인 역시 '바오파후(爆發戶: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그들의 부(富)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위추위는 지식인의 계층 이동이라는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부의 사회적 환원'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의혹을 제기한 측이 진실인지, 아니면 위추위의 기부가 진실인지는 여전히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당사자들이 구성하는 '기부'의 라인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데 비추어 위추위의 해명은 여전히 중국의 '인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유례없는 대재앙으로 기록됐던 쓰촨 대지진의 현장에서 중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은 그의 선행이 도덕적 조건을 갖췄느냐의 여부에 따라 스타 지식인은 다시 추락을 거듭할 수도 있다. 분명한 점은 중국 사회의 '개방'은 현재진행형이고 그에 따라 사회적 개방성 또한 시간이 갈수록 투명도를 더해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대사'라는 칭호를 계속 보유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추어 계층 이동의 꿈을 꾸고 있지만, 거기에서 대중성이 충분조건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지식인, 사회적 책임, 기부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번 소동을 곱씹어 보면, 우리 사회의 경험이 역시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오히려 강력한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할 때 참된 '계층 이동'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셴린의 죽음을 전 국민이 애도하며 그를 '국학대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점이 지금 그의 상황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중국대중문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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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글 하나 퍼왔다.  

프레시안의 연재 기사  

 中國探究]<69>중국을 이해하는 21세기 최고의 키워드

 꿰이저(潛規則), 중국사회의 '숨겨진 규칙' 

 

 

 

 

 

올해 2월, 우쓰(吳思)가 쓴『첸궤이저(潛規則):중국 역사의 진실게임(수정판)』이 푸단(復旦)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이미 2001년 출판되어 중국 지식계를 뜨겁게 했었다. 특히 그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이듬해인 2002년 8월 중앙정부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어 출간을 금지당하기도 했었다.

우쓰는 중국에서 '첸꿰이저'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다. 그가 주장한 이 개념이 보편적으로 중국에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여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중국을 이해하는 주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쓰는 1957년 베이징출신으로 현재는 전직 관료출신 가운데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출판하고 있는 잡지,『옌후앙춘추(炎黃春秋)』의 편집장으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우쓰는 중국 사회의 만연한 '부패'의 원인문제에 대해 역사 속에서 그 규칙을 찾아낸 인물이다.

'첸꿰이저(hidden rules)'란 사회 각계각층에서 보이지 않고 명문화된 규정이 없지만 사람들로부터는 오히려 광범하게 인정받으면서 실제적인 역할을 하고 반드시 '준수' 해야 할 '숨겨진 규칙'을 의미한다. 우쓰는 유구한 중국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숨겨진 규칙(첸꿰이저:潛規則)'의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았다. 기존의 중국사회에서 이미 존재했던 각 분야에서의 '숨겨진 규칙'을 새삼 발견하였기에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이 개념은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21세기 최고의 키워드'가 되었고, 우쓰에게 '첸궤이저 개념의 아버지'라는 칭호까지 부여하며 열광하게 되었다. 한국어 번역본(도희진역, 잠재규칙:5천년 중국, 숨겨진 부패의 역사, 황매, 2005)』)도 출판되었다. 필자는 한국어 번역자가 사용한 '잠재규칙'보다는 보통명사로서 '숨겨진 규칙'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숨겨진 규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중국 사회 각 분야에서의 이른바 '숨겨진 규칙'이란 무엇인가?

우쓰는 "우리의 공식적인 '규칙' 뒤편에는 숨겨진 또 다른 규칙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들이 지켜야할 행동준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준칙과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몇몇 역사 인물과 역사적 사건의 관찰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들 집단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 실제로 그들이 겉으로 늘 이야기하고 존중하는 그런 원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인의도덕, 충군애민, 청렴결백 등 멋진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들 집단의 행위를 진정으로 지배하는 행동규칙은 매우 현실적인 이해관계다. 인간의 행위는 이해관계의 계산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그 결과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숨겨진 규칙'이다."

결국 우리 인간은 이해관계 때문에 옳고 정당함보다는 옳지 않아도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고, 그 결과 사회적인 '악행'도 하나의 규칙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숨겨진 규칙'이 중국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결국 불법적이고 범죄적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깨닳지 못하고 있다. 마치 "빨간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중국의 속담을 체현하는 것과 같다.

중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숨겨진 규칙' 현상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첫째, 연예계의 '숨겨진 규칙'이다. 중국에서 '숨겨진 규칙'의 대표적인 분야로 연예계를 꼽을 수 있다. 이유는 '수요와 공급'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른바 연예계의 '첸궤이저'는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는 "연예계의 '숨겨진 규칙' 여성"이라는 타이틀로 끊임없이 보도되고, 여러 배우들의 실명과 사진이 인터넷에 등장하고 있다. 이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2007년 7월 4일, 장위(張鈺)라는 여배우가 중공기율검사위원회에 13명의 영화감독과 '성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고소한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금년 5월 8일자 <신조우칸(新周刊)>의 이궈칭(李國慶)이라는 저자가 "연예계의 '첸궤이저'의 폭로"라는 글에서 이에 관한 배우의 실명과 구체적인 유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연예계에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연기 이외의 것을 요구하고, 따라서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식품업계의 '숨겨진 규칙'이다. <난팡왕(南方網)>의 보도에 따르면 금년 2월 18일 광저우에서 식중독 사건으로 70여명이 중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원인을 보면 '주수육(注水肉:육류에 물을 주사하는 행위)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정협위원이자 중국육류식품연구센터의 주임 펑핑(馮平)은 "'육류에 물을 주사하는 행위'는 이미 보편적인 '숨겨진 규칙'이다"라고 폭로하였다. 주수육은 물에 공업색소와 방부제 등을 첨가해서 주사기로 주사해서 만든다. 이렇게 제조된 제품은 쉽게 부패되고, 세균으로 인해 사람들이 쉽게 병이 생길 수 있고, 육류의 영양분을 파괴함으로써 동물성 전염병을 전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이미 보편적이고 이들 업종에서 '숨겨진 규칙'의 하나이다.

이들의 행위는 당연히 '이익'을 위해서이다. 쇠고기 분야는 더욱 심각하여 '물을 주사하지 않은 쇠고기는 거의 없을' 정도다. 이렇듯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해 '숨겨진 규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중국축목축의학회이사 겸 운남농업대학 동물과기원원장 꺼장롱(葛長榮)의 발언)

금년 1월 12일, <충칭완빠오(重慶晩報)>에 따르면 이를테면 100킬로그램 중량의 돼지의 경우 물을 수십 킬로그램까지 주사하고, 500킬로그램의 소에는 105킬로그램까지 주사하여 무게를 늘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사된 육류는 주사하지 않은 고기보다 약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육류에 물을 주사하는 일은 이 업종의 오랜 기간의 '숨겨진 규칙'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동물방역법>에는 '주사육'과 관련된 규정이 없고 검역원도 '주사육'을 검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돼지나 소가 도살장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주사를 하고, 유통시장으로 흘러가면 공상부문에서 감독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의 미비와 '이익'을 탐하는 이들 간의 끊임없는 숨박꼭질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셋째,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다. 금년 8월 15일 <신징빠오(新京報)>의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의 중앙음악학원 70세인 박사지도교수가 대학원생과 육체관계를 맺고 10만위안을 뇌물을 받았다"고 보도하였다. 이 사건도 대표적인 교육계의 '숨겨진 규칙'이다. 흑룡강성 어느 대학 성인학원에서 300명의 학생들이 합격을 위해 학생마다 50위안씩 모금하여 교수에게 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중국교육 역사상 최대의 충격사건으로 교육계의 '숨겨진 규칙'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넷째, 식당업계도 '숨겨진 규칙'이 범람하는 업종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거나 가짜 영수증을 주는 등등의 행위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너무 보편적인 일이라 현재 충칭에서는 '숨겨진 규칙'을 없애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충칭소비자위원회>는 판매업, 음식점, 여관, 여행오락, 장식업, 물류업, 미용이용, 학원중개업과 농산품 판매 등에서 '숨겨진 규칙' 교정을 위해 언론매체와 함께 공개적으로 관련 사례를 수집하는 노력을 하고 있을 정도다.

다섯째, 스포츠계에도 '숨겨진 규칙'이 존재하고 있다. 최근 12월 3일자 한국의 <헤럴드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양쯔완바오(揚子晩報)는 '축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농구계도 심각하게 오염이 됐다'면서 '조만간 축구계에 이어 농구계도 승부조작, 도박 등으로 크게 몸살을 앓을 것'이라는 경고하고 있다. 스포츠계에서 대표적인 '숨겨진 규칙' 사건은 꿍지엔핑(龔建平)사건이다. 2004년 7월 축구심판이었던 꿍지엔핑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승부 조작을 뇌물을 받았다가 수뢰죄로 10년형을 받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끝으로 중국 관료사회의 '숨겨진 규칙'으로 매관매직의 경우를 살펴보자. 예를 들면 2004년 8월 건국 이래 최대의 매관매직 사건인 '마더(馬德)사건'은 전형적인 '숨겨진 규칙'이다. 흑룡강성 쑤이화(綏化)시의 시위원회 서기였던 마더가 저지른 매관매직 사건은 전임 국토자원부 부장 텐펑산(田鳳山), 흑룡강성정협주석 한궤이즈(韓桂之) 등 고관과 쑤이화시의 관료 등 모두 265명이 연루된 사건이었다. 그들은 현장 직책은 30만위안, 현서기 자리는 50만위안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 이는 마치 중국 속담에 '3년 동안 지부(知府)를 하면 10만냥의 설화은(雪花銀)'을 만질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중국인들은 수근 거렸다. 이것이 바로 관료사회의 '숨겨진 규칙'이다. 이는 정부기관 끼리 부정부패의 내용을 상호 묵인해주는 관례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장기간 이런 상태가 유지되면 규범의식이 부족해지고, 제도의식도 희박하게 되어 준법과 위법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숨겨진 규칙'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숨겨진 규칙'은 공개적이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의 내용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어 명문으로 규정된 제도보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숨겨진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손해라는 의식과 현실적인 '살상력'도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숨겨진 규칙'을 만들고 어떠한 근거에서 이러한 규칙을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해 우쓰는 "확실한 답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것은 모두 '이익'과 '금전'이라는 두 단어와 함께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숨겨진 규칙'이 만들어지는 것은 누가 이익을 얻을 것인지와 이익을 얻는 집단이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결국 '숨겨진 규칙'은 국가의 정당한 법률과 법규에 도전하고, 사회의 공정한 정의를 파괴하고, 공공의 가치기준에 심대한 혼돈을 가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안전, 알권리, 선택권에 침해를 가하고 공정거래권 등 합법적인 권익과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규칙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한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계층적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 규칙은 공개되지 않고 광범한 영역에 숨겨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이 일반화된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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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중국 탐구이다.  

 중국 교과서에까지 실린 金庸 소설의 매력 

 

 

 

 

 

해금 후 30년의 숙성을 끝내다

최근 베이징과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 고등학생들은 새로 교과서에 수록된 무협소설을 배우고 있다. 흔히 무협소설이라 하면 통속소설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쉬운데, 어떻게 그 까다로운 검정 절차를 거쳐 중국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을까? 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소설가 '진용'(金庸)의 소설이다. 우리에겐 이미 '김용'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 중국 소설가 진용(金庸) ⓒ연합뉴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대륙에서 무협소설은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자본주의 소설이라는 오명에다 통속소설은 천박하다는 오해로 인해 무협 소설은 대륙에서 황색소설(에로티시즘)과 유사한 수준으로 치부되곤 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조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 대륙에서 진용의 작품은 '금서'로 분류되었다. 대만에서도 국민당 정부는 진용의 작품을 한 동안 금서로 분류하였다.

1980년대 초 대만과 중국 대륙에서 진용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해금되면서, 양안은 '김학'(金學)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땅속에서 발굴한 황금덩어리처럼 사람들은 갑자기 접하게 된 보고를 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학'은 파죽지세로 동아시아 문화계를 휩쓸어버렸다. 그 전에 그의 작품은 이미 홍콩과 동남아 사회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등극되어 있었다.

<설산비호>가 <아Q정전>을 대신하다

2004년 11월 베이징에서는 인민교육출판사에서 최초로 진용의 대표작인 <천룡팔부>의 일부를 교과서에 수록했다. 3차에 걸친 엄격한 검정을 거쳐 검정위원들은 진용의 작품 두 편을 선정했다. 그 후 2007년에 <설산비호> 중 제5회의 내용 일부가 재차 베이징시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홍콩에서는 진용의 이름을 동아시아에 떨친 작품인 <사조영웅전> 중 제 30회의 일부가 교과서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설산비호>가 수록되는 대신 <아Q정전>의 일부가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매혈기>는 <진환생진성>을 대체했다. 루쉰 소설의 일부가 교과서에서 삭제되자 루쉰과 진용의 지지자들은 두 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루쉰파는 진용 소설이 통속 소설에 불과하다고 폄하했고, 진용파는 루쉰파를 혁명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두 파로 갈린 지지자들의 흥분 상태와는 달리, 검정위원들과 문단에서는 진용 작품의 교과서 수록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들은 3,40년대의 중국 소설이 현대 중국문화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엔 한계에 이르렀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부족한 부분은 진용의 작품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진용 작품이 지닌 현대적 문체의 매력, 수준 높은 문학성, 모방할 수 없는 심리묘사와 경관묘사 등은 진용의 작품이 지닌 문학적 뛰어남이다. 이와 더불어 진용의 작품은 중국문화의 위대한 가치를 고양시켰다고 보았다. 중국의 협의(俠義) 정신, 민족 단결적 요소, 개성 해방의 추구, 도덕적 희생정신 등은 문학성과 더불어 교육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결론이었다.

통속의 형식으로 철리를 빚어내다

진용은 젊었을 때부터 반골 기질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아버지마저 공산당에 의해 반동지주로 몰려 총살당하는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한편 국민당에 의해 장악된 학교 분위기에 맞서 홀로 저항을 거듭하다 퇴학을 처분받았다. 반골로만 보면 그는 투창과 비수로 무장한 루쉰과 그 기질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은 훗날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열어 밝혔다.

그의 작품은 80년대부터 타이완의 <아호> 철학 잡지에서 주목을 받았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했던 현대신유학의 대표 잡지에서 그의 작품을 철학적 관점에서 수차례 심도있게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천룡팔부>는 민족의 화해와 중원문화의 자긍심을 넘어 불교의 철리를 무협의 형식을 빌어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평가했고, <소오강호>는 독고구검의 검법을 빌어 도교 미학의 상징성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고, <사조영웅문>은 유가의 우직한 선비상을 곽정이란 캐릭터를 통해 훌륭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그의 문체는 피동문을 난발했던 3,40년대 중국 문학가들과는 달리 매우 현대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자 했던 소설 무대의 공간은 중화문화의 고전적 요소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 그가 그린 세계는 민족 간의 대립을 넘어선 화해의 지평이었고 , 파벌 간의 투쟁을 무력화하는 절대무공의 경지였다.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은 항상 거대한 계파 간의 투쟁에 상처입은 개체 민초의 소중한 불씨를 되살리는 데에서부터 눈부시게 데뷔한다. <천룡팔부>의 교봉, <신조협려>의 양곽, <사조영웅문>의 곽정, <의천도룡기>의 장무기가 모두 그렇게 무대 속에 등장하였다.


▲ 2003년 중국<CCTV>에 방송된 '천룡팔부'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홍콩, 대만, 대륙을 막론하고 <사조영웅전>이나 <의천도룡기>, <신조협려> 등은 중화권 국가에서 너무 자주 상영되어, TV 드라마로 몇 차례 리메이크되었는지 조사하기조차 힘들다. 그리고 중화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문학의 화두로 수시로 인용되고 있다. 진용에 따르면 북한에서도 그에게 펜레터를 보내는 열광 신도가 있다고 한다.

고전은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되새겨진다. 동아시아에서 진용만큼 광범위하고 각계각층의 독자를 소유한 문호가 또 있을까? 드넓은 역사의 무대 속에서 애타는 남녀 간의 애정 묘사를 이끌어 내고, 10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해 무대를 촘촘히 채우고, 이를 다시 중국 특유의 미학 경지로 끌어올리고, 보편적인 철학적 상징으로 승화시킨 문학세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작품을 일개 통속소설로 치부하는 자들은 과연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보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강진석 오산대 교수 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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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중인 중국문화에 대한 글이다.  

  추락하는 '꽌시'에는 날개가 있다

 

한중 수교 초기, 우리는 중국인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꽌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어느덧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중국은 건국 60주년을 맞이했다. 그 와중에 중국은 WTO에 가입하여 세계 표준에 눈을 떴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대국의 행보를 더욱 빨리 하고 있다. 중국 곳곳에서 '꽌시'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재중 한국 기업인들 역시 중국에선 더 이상 '꽌시'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꽌시'의 의미와 현주소를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기 어려운 '꽌시'라는 초상화

중국 문화를 배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꽌시'(關係)라는 말을 접한다. 중국인은 고대로부터 이른바 '꽌시'(關係)에 의존해서 사회를 형성했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꽌시'에 관한 전문 자료를 찾아보려 하면 그리 쉽게 구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인 스스로도 이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할 뿐더러 이를 공자의 사상처럼 대놓고 말하기에는 다소 껄끄럽기 때문이다. '꽌시'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 세속성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이 세속 윤리는 중국 사회를 가장 근저에서부터 설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까지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학문으로의 착수는 중국인들보다 서양 학자들에 의해 먼저 이루어졌다. 서양 학자들의 눈에 가장 자주 포착된 소프트웨어는 '미엔쯔'(面子), 즉 중국식 '체면' 문화였다. 그들은 이 '체면'의 상호 작용이 가져온 인간관계의 구조와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인의 세속윤리와 행위관습을 해부하고자 하였다.
 

 

 

 

 


중국 내의 '꽌시' 연구는 대만 학자와 서양 학자의 연구 성과를 등에 업고 시작되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꽌시'는 매우 사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또한 그 속에서 보편 법칙을 끌어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쪽으로 결론을 몰아갔다. 그것은 어떤 특정 인물이 또 다른 특정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세속적인 정감 또는 관습으로 이해되었다. 소수자들의 특수 정황 중에 발생한 사적인 정감 체계 속에서 보편 법칙을 추출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사색조 같은 '꽌시'의 정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양 학자들은 꾸준히 '꽌시'에 내재한 보편 규칙을 해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점차 그 초점을 '꽌시'가 지닌 '인연'(人緣), '인륜'(人倫), '르언칭'(人情), '미엔쯔'(面子) 등의 네 요소로 압축해갔다. 그것은 각각 '꽌시'가 지닌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자원교환, 심리조절 등으로 상징되고, 나아가 연고주의, 윤리규범, 교환행위, 의식구조 등의 영역과 관련한다. 이 네 요소는 마치 한 마리 새가 네 가지 색깔로 변할 수 있는 사색조처럼 각자 다른 특징을 지니며 유기체처럼 결합되어 있다.

그 중 '인연'(人緣)은 흔히 말해지는 혈연, 지연, 학연, 직장연 등의 귀속의식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언급되는 연고주의와 유사한 관념으로서, 한번 맺어지면 결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꽌시'의 하드웨어를 구성한다. 한국에선 학연이 종종 지연이나 직장연을 압도하지만 중국에선 학연보다 지연이나 직장연이 더 우세할 때가 많다. 특히 우리에게 존재하는 동 대학 학부 출신이란 동문의식이 사회전반에 걸쳐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분위기가 그리 보편적이지 않다. 반면 중국은 의사(擬似) 혈연 집단, 즉 '의형제' 집단의 분포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보편적이고 빈번하다.

'인륜'(人倫)은 공자와 맹자가 말한 윤리 관계에 기초한다. 근대시기 중국철학자 량수밍(梁漱溟)은 중국인의 '꽌시'가 바로 이 '윤리적 꽌시'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기반 위에서 자신과 가까운 자를 먼저 돌아보고, 여력이 있을 때 타인을 돌본다는 친소(親疏)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였다. 따라서 이 '인륜'은 꽌시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한다.

'르언칭'(人情)은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부채(負債)적 자원(Resource)의 교환법칙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지닌 자원을 상대방에게 빌려주거나 또는 상대로부터 제공받을 때 발생하는 자원의 교환법칙과 부채(負債)의식이다. 이는 동양 사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청탁과 보답의 교환행위로도 이해된다.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채무의식은 동시에 채권자의 입장에선 그에 준하는 강력한 기대심리를 양산하면서, '르언칭'으로 인해 형성된 양자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든다.

'미엔쯔'(面子)는 인간관계 중에 발생하는 상호 확인심리이다. 중국인 사이에서 체면은 자기 자신을 세워주는 동시에 상대를 세워주는 배려로 작용한다. '미엔쯔' 속에는 자존심, 수치심, 도덕심, 허영심 등의 요소가 한데 뒤엉켜있다. 이로 인해 많은 서양 학자들은 이 '미엔쯔'야말로 중국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심리요소로 간주했다. 미엔쯔를 대표하는 자존심이란 정감은 때론 모호한 수치심과 연관되고 때론 도덕적 손상과도 연관되며 때론 막연한 허영심과 연관되기도 한다. 얼굴이 땅에 떨어진다는 의미의 '미엔쯔 손상'은 때론 중국인들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문제로 인식된다.

'꽌시'의 축소와 부패와의 전쟁

이처럼 논문과 책 속에서 우리는 중국인의 '꽌시'를 1:1 또는 소수자들 간의 관계로 간주하고 그 속에 내재된 사적인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지만, 정작 여론 광장 속의 '꽌시'는 중국 사회의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하며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언론은 주로 중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 전반의 법제화에 주목하였다. WTO에 가입한 후 중국의 경제 구조가 더 이상 몇몇 고위 간부를 통한 '꽌시'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사회 전체 시스템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은 곧 '꽌시'의 대폭적인 축소를 의미하고, 특히 한중 경제교류에 있어서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중국 언론은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성숙된 시민의식을 언급하면서 '꽌시'가 지닌 부정적 요소를 일소하고 사회 전반의 공공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부응하는 조치는 몇 해 전부터 시행되어져왔다. 중국 정부는 2007년 9월 국가예방부패국을 만들었고 그 해 12월 부패공직자 고발싸이트를 만들어서,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의 문제를 일소하고자 노력했다. 부패의 고발과 공공성의 확대는 정비례하며, 시민의식의 성숙과 고발싸이트의 운영으로 사회 투명성이 이전보다 많이 개선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상의 언급과는 달리, 중국 내에서의 '꽌시'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것처럼 보인다. 최근 충칭(重慶)시 공안당국은 사법국장, 공무원, 경찰이 연루된 조직폭력배 2000여명을 적발했다. 21세기 들어 조직폭력배 조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중국의 의사 혈연집단인 '의형제 꽌시'의 부정적 변용의 산물이다. 그리고 뇌물수수로 인한 부패의 관행은 예상과 달리 그리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부패의 영역은 오히려 더 확대되어 최근에는 의약계나 대학가에서도 청탁성 뇌물이나 대가성 수뢰가 공공연하게 발생하고 있다. 올 10월에 발생한 우한대 부총장의 수뢰사건이 그 한 예이다.

추락하는 '꽌시'에는 날개가 있다

이처럼 사색조의 '꽌시'는 사회시스템의 변화와 연동되어 변신을 꾀하면서 여전히 활약 중이다. 이 위력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첫째는 관료주의이다. 수천 년간 중국인의 발목을 잡은 관료주의는 사회주의 도입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단지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고질적인 관료주의의 득세는 필연적으로 청탁문화와 특혜문화를 양산할 것이고, 이 와중에 '꽌시'는 관료주의 문화와 연동되어 그 효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둘째는 개선되지 않는 중국 사회의 부패 관행이다. 중국 사회의 부패는 앞서 언급한 관료주의와 더불어 투명하지 않은 국가 행정 관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거대한 부패군을 양산하였다. 우리나라의 부패 문제도 매우 심각하지만 중국 사회의 부패는 개인 간의 은밀한 부패 수준을 넘어 군락의 개념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친소(親疏)의 관계는 윤리 관계가 아닌 담합의 원리로 변모하기 쉽다.

셋째는 정보의 독점과 소통의 부재에 기인한 일방적인 사회 풍기이다. 언론과 정보가 독점되고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꽌시'는 공개적 소통과 교류를 꾀하기보다는 여전히 사적인 교류나 은밀한 관계의 구축을 도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시민단체 등과 같은 NGO 단체가 걸음마 단계인 중국에선 은밀함이 공개성을 앞서고 특수성이 합리성을 앞설 명분은 쉽게 주어진다.

이처럼 현 중국에선 '꽌시'의 영향력이 단기간에 축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추락하는 '꽌시'의 위상을 멈추게 할 만한 요소가 사회 곳곳에 퍼져있고, 심지어는 날개를 달아줄 새로운 요소도 등장할 수 있다. 관료주의와 부패문제 그리고 소통부재는 '꽌시'의 부정적 변신에 일조할 동력으로 특히 주목받는다. 중국 사회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지혜를 모으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강진석 오산대 교수 중국문화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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