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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중시하는 사회는 우리가 모든 리스크를 예방하거나 적어도 예측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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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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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5월 말 즈음부터 한 소설의 제목과 일부 내용이 인터넷 상에서 매일같이 눈에 띄었더랬다. 이런 추세는 메르스가 창궐하면서 그 빈도수가 높아졌다. 심지어는 내가 구독하는 신문에서 한 문화평론가가 이 책을 소재로 칼럼을 쓰기도 했다. ‘제목이 자극적이네. 흥미 끌기 딱 좋구만.’ 난 이 책이 이슈가 되는 이유를 자극적인 제목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동시에 난 이 열렬한 반응과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오히려 이 소설에 거부감이 들었다. 비문학이 아닌 이상, 난 좀 더 은은하고 담담해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무릎을 탁!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이 늘 최고의 제목이라고 생각해 왔다. 줄거리를 노골적으로 밝히는 소설 제목에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다. 게다가 매일 같이 인용되는 내용들을 보니 분명 재밌고 공감이 가긴 한데 너무 직설적이고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1. 오후 1시쯤 택배가 왔다. 박스를 열어 책의 물성을 느껴봤다. ... 책 표지도 예쁘고 표지 질감도 좋은데? 이렇게 생각하고 책의 첫 장을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난 그냥 한 챕터 정도 대충 읽고 책상 위에 올려둘 생각이었다. 그날의 난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2. 택배 상자를 풀던 자리에서 그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책을 읽어가던 나는, 내가 목표한 한 챕터를 다 읽고는 책을 내려놓기는 커녕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선호하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는 휴지까지 구비해 놓으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읽어 내려갔다. 분명 이 소설은 신파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쩌다 신파조로 흐를라치면 애써 목을 가다듬으며, “아 됐고,”라고 말하는 듯한 소설을 보면서 이렇게나 펑펑 울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3. 내가 가장 동요했던 부분은 주인공의 비극적으로 가난한 환경이라는 설정이나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 내가 직접 겪어온/겪고 있는 날 것의 삶에 대한 묘사였다. 막상 내가 울었던 부분은 연인이나 가족과의 이별과 같은 대놓고슬픈 부분이 아니다. 계나의 직장생활 이야기, 필기시험 통과 경험이 없어 스터디마저 지원하기 힘든 지명의 취업준비생 시절 이야기와 같은 부분들. 부조리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텨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훌륭한 것이라고 주입받으며 살아온 나를 토닥여주는 기분에 울컥하는 감정이 솟았다.


 4. 이 소설이 그렇게나 화제가 된 것도 마치 거울같이 우리를 비춰주는 현실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적당한 판타지가 곁들여져 있다. 작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굉장히 현실적이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적이라 찝찝하진 않은, 적당히 위안 받을 수 있는 조미료로 기능하는 약간의 판타지. 몇 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충분히 나아졌음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하고 기다려줄 연인의 존재가 너무 판타지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사랑에 대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좋았던 건, 이런 판타지가 주인공의 삶에 결정적 결말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도구로써 활용됐다는 점이다.

 

  나는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 점, 안 좋은 점들을 생각했어. 좋은 점은 사랑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두 가지. 어떤 애들한테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지. 하지만 난 사랑의 감정에 흠뻑 젖는 스타일은 아니었어. 시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사랑의 도주 같은 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리고 경제적 안정이 제일 중요했다면 아마 리키랑 결혼했을 거야.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안 좋은 점은, 일단 걔랑 있으면 내가 너무 슬퍼질 거 같더라.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가 없다는 거. 전업주부가 아니라 내가 직장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긴 어려울 거 같더라고. 전에 한 번은 지명이한테 너는 왜 매일 퇴근이 늦냐, 평생 그렇게 야근을 해야 하는 거냐?”라고 따지니까 걔가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내가 반박했지.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기자나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진짜 직업들이 있고, 그 아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직업들이 있다는 거지. 내가 직장에 다니더라도 그게 토플 문제지나 조선 업체 정보지를 만드는 일이라면 지명이는 아마 그걸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살림하는 여자인 거지. 그런 건 싫어.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2015), 민음사, 158-159 pp.

 

 ‘여성이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구분이 있고 살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는 건 결국 이런 사고 때문이 아닐까. 여자는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직업이 더 적합하다는 인과 관계가 생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보다 살림을 더 해야 한다, 어떻게 남편/아버지가 겪는 바깥일의 고됨을 알겠느냐 같은 생각이 나오는 것이겠지. 지금은 지명이 자신을 사랑할지라도 지명과 결혼한다면 자신에 대한 존중보다는 보살핌에 가까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계나가 이별을 결심하는 이 부분이 좋았다. 관계를 지속시키고 서로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관계는 누가 누구를 보살핀다고 여겨지는 관계(사실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생각'한다면)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5. 노출된 정보만으로 봤을 때 ‘1등 시민으로 살아왔으리라 여겨지는 작가가(실제 인터뷰에서도 작가는 저는 계나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 많은 기회를 받았고, 부채의식을 강하게 느낍니다.” 라고 말했다.) 한국과 호주의 다양한 2등 시민들, 혹은 3등 시민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꾸준히 전개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타자는 자신의 이익과 반하더라도 주류의 시선을 내면화해야 사회에 적응하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주류의 시선을 익혀나간다. 하지만 주류는 타자의 시선을 애써 이해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타자의 관점 따위를 접하기조차 힘든 구조일뿐더러 알아봤자 정체성에 혼란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높은 감수성이 인상 깊었다.


 6. 하지만 책 말미의 허희 평론가의 말처럼 계나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못할 것 같다. “나도 지잡대 나왔어. 같은 처지야.”라고 말하는 재인에게 굳이 난 홍대 나왔는데?”(44p.)라며 나와 너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이나, 친구인 은혜, 미연, 경윤과 언니, 동생, 동생의 남자친구를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모습에서 결국 지명의 부모, 지명이 하던 행동이나 사고와 계나의 모습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낀다(언뜻 아주 약하게 나빼썅전법이 느껴지기도……. 심지어 위에 인용된 부분에서도 그런 계나의 모습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오마이갓.).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통찰이 아쉬웠다. 서로의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고 존중하는 주인공이었다면 너무 계몽적인(그래서 읽기에 불쾌한) 이야기가 되려나?


 7. 이러나저러나 이 소설의 강점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낸 20, 30대의 삶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글 중에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라는 칼럼이 있다. 쉬운 글은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져 아무 노동(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기에 쉬울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이렇게나 재밌고 쉽게 읽은 것도 결국은 나의 삶,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직접 읽기 전 인용된 부분을 보면서 가볍다고 느꼈던 것도 결국은 그래서였겠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내가 별 다섯을 준 것은 그 쉬운 재미가 정말 끝내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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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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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단히 낙관적인 기분과 자포자기의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일부는 감방에서 머무르길 원했다. 

말의 꼴주머니를 짜고, 월터 스콧 경의 이야기를 읽고, 마당에서 머리칼을 깎이는 동안 감기에 걸리고, 깔개에 관한 구식 농담을 들으면서. 

그는 감방에 머무르길 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운명에 굴복하는 최상의 길은 그런 운명을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용감한 친구들 1, 304-305pp.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모자라고, 시간에 허덕이는 자신의 바쁜 모습을 SNS에 노출시키며 자신이 이렇게 '바쁜 사람임'을 광고한다. 조금이라도 한가해 보이면 '잉여' 취급을 받는 이 시대에, 바쁜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높은 가치를 증명한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약속을 잡고 갖가지 활동들로 자신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메꾸어 나가는 것인지 모른다. 체념한 조지의 모습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내가 바뀌자!"


  조지의 이런 모습은 책 전체에 걸쳐 드러나는데, 노골적인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당한 일은 인종차별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아서 경,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겠군요. 전 인종에 대한 편견과 이 사건이 관련돼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감한 친구들 2, 22p


"전 깜짝 놀랐어요." 조지가 마침내 입을 연다. "그가 왜 저를 괴롭히려고 했던 걸까요?"

(중략) "아서 경, 경께서 이 사건에 인종적 편견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신다는 점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샤프와 전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누굴 싫어하려면 먼저 알아야죠. 그다음에 싫어할 이유를 찾는거고요. 

싫어할 이유가 충분치 않다면 상대방이 지닌 약간 이상한 점, 예를 들어 피부색 등을 구실로 싫어할 수 있겠죠. 하지만 분명 샤프는 절 모릅니다. 

제가 그에게 뭔가 잘못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봤어요. 제 의뢰인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고……." 

용감한 친구들 2, 192-193pp.


1권의 전부분이 아서와 조지의 차이점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아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를 고무시키는 양친 아래서 자라났으며(엄마는 이야기꾼, 아빠는 화가로 모두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예술가였다), 조지는 상상력을 금기시하는 환경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로 태어나고 자라왔다(용감한 친구들 1, 12-17pp.). '상상력'에 대해 갖는 태도 하나만으로 이 두 인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과 삶의 태도를 갖게 됐다. 조지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문제의 원인과 결과로 인식하고, 아서는 그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문제의 원인으로 추론한다.


  사실상 차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차별이 더 교묘하고 해소하기 힘든 법이다. 차별로 인한 피해자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트라우마를 지니게 되는 것도 이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정희진처럼 읽기, 95p.

성희롱을 당할 때 피해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대개 '이거 지금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일 때가 많다. '그냥 장난이겠지?'하고 넘겨버리기도 일쑤다. 하지만 이렇게 넘겨버린 성희롱 경험은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 머릿 속을 떠돈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가 하는 말은 주로 '예민한' 행동으로 치부되기에 피해자는 자신의 불쾌함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줄 사람들을 찾는다. 이미 사건이 종결된 뒤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거 내가 기분 나쁠 만한 일 맞아?"라고 묻는 우리는 이미 가해자 중심주의 사회에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해결하기엔 이미 늦어버린(늦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두고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해하려 하기 시작한다.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면서. 자신이 경험한 불쾌함이 암묵적인 차별 행위에서 기인한 것인지 추론하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내가 남자/백인이었어도 이렇게 말했을까?'라는 상상력. 상상력이 없었던 조지가 자신이 겪은 상황을 인종차별이라 정의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조지가 선택한 길은 '그런 운명을 원함으로써 운명에 굴복하는 길'이었다. 차별을 원했다는 말은 아니다. 조지는 자신에게 닥친 불합리한 상황을 가시적인 인과관계에서 해석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받아들이려했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자신이 문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 통제력을 갖게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은 그래서 계속, 꾸준히, 자신이 맞닥뜨린 불쾌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조지는 전형적인 피해자였다.




  반면 아서는 상상력이 과한 인물이었다. 조지와의 첫만남에서 그를 파악하는 모습이라거나 진범을 찾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마치 '셜록 홈즈'처럼 눈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상상하고 추론하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론한 것이 곧 진실이라고 믿었다. 아서의 이런 자신만만함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100%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은 결코 틀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과 혹여 틀리더라도 사회적으로 '처벌'하지 않는 환경이 결합됐을 때에나 이런 자신감이 가능하다. 백인 남성에 엄청난 유명세와 부를 가진 작가였던 아서는 거침없는 자신의 행동에 처벌은 커녕 오히려 팬들로부터 사실상의 '강화'를 받았다. 조지가 누명을 벗도록 도운 것도 아서였지만, 그 역시 편견에 휩싸여 행동하긴 마찬가지였다. '파르시들은 타인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다거나 동양인의 천성, 긍정적 특성을 들어 조지의 무죄를 주장한 아서가 앤슨과의 설전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한 것은 그 역시 앤슨과 다를 바 없는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논리 자체의 허점을 짚어내지 않고 그 논리를 반박하는 식으로 따라가게 되면 결국 처음 주장한 사람에 더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앤슨이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 순간, 앤슨은 아마 승리를 예감했을 것이다. 그 둘의 차이는 '동양인'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데 있을 뿐, 인종차별의 가해자였음은 동일하다. 


그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금욕적인 원칙에 따라서라기보다는 부모가 그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배심원단이나 위원회는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금주는 적당히 절제하는 삶의 방식으로도, 혹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옭죄는 태도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용감한 친구들 2, 187p.


실제 이유가 어떤 지 보다는 자신이 판단한 사실이 중요하다는 이들의 논리는, 결국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아서는 이런 조지를 '적당히 절제하는 삶을 사는 동양인'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앤슨은 '극단적으로 자신을 옥죄는 사이코 패스' 쯤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방향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아서의 유명세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전략은 조지를 '유죄인 동시에 무죄'인 상태로 밀어넣었다. 빠른 시일 내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위원회가 움직이도록 만든 효과적인 전략이기는 했으나 스태퍼드셔 지서와 다를 바 없는 스스로의 논리적 허점에 빠져 아서는 조지의 완벽한 무죄를 밝혀내지 못했다(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역시 이런 사실을 조지가 스스로 깨닫는, 2권의 198-201쪽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여성들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극단적인 행동으로 비칠런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들이 가해자의 지위를 갖고 침묵하던 남성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고 있다. 그간 여성들은 '내가 잘하고 바뀌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 이중 노동을 하거나, 아예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신이 준-가해자의 위치에 서곤 했다. 이번 사건이 여성들을 이중 노동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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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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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애를 할 때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고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최악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나를 숭배하듯 대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썩 좋은 연애인 것은 아니다. ‘를 숭배하는 그에게 맞추기 위해 는 항상 내 본모습을 숨긴 채 연기해야만 하고 그가 혹시 내게 실망하지나 않을까 맘 속 깊은 곳에서 걱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한 모습과 다른 모습이 드러날라 치면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아니 나를 얼마나 알았다고?)라 하며 책망하다 떠나가기도 한다. 결국 라는 존재가 그의 상상 속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마도) 헤어진 후의 일이다.

 

2.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권위자까지 끌어오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신학자인 에릭 버터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벨 훅스가 그랬다).

진정한 사랑은 독특한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이 통찰력을 통해 상대를 총체적으로 꿰뚫어보게 된다. 그것은 상대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을 채, 상대의 현재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동시에 잠재적인 모습까지 인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현재 모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상대가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펼쳐서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기꺼이 돕겠다는 확고한 의지이기도 하다.” 벨 훅스, All about Love, 233-234 pp.

 

3. 그렇기 때문일까. 사회가 비주류를 주류에 끼어들지 못하게 배제하는 원리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간접적인 폭력과 억압, 2) 이상화시키기.

1)의 사례야 너무 흔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겠고. 2)의 대표적인 사례는 과거 초현실주의자들이 여성을 뮤즈로서 사용했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세계에서 여성은 철저히 뮤즈로 대상화 될 뿐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열 받은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여성은 뮤즈가 아니라 창조자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4. 이렇게 길게 서론을 길게 깔아놓은 이유는…… 작가 구병모가 서민, 노동자, 소외된 계층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 점에서 이 두 가지 차별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종종 접하는, 책을 비롯한 많은 예술 장르에서 노동자를 과하게 칭송하거나 엄청나게 성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를 봐 왔다. 그때마다 오그라드는 내 손…… 

우리는 우리를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원할 뿐이다!’

 

5. 자신의 이익 앞에 자존심을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며 지긋지긋한 삶 앞에 인간적 도리나 애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남아있지 않은, 그러나 적당히 도덕적이고 적당히 인간적인 이들의 모습은 담담한 서술 속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가진다. 오히려 이 점이 누군가에게는 읽는 데 불편함을 줄 수도 있겠다

아니, 내 인생도 더럽게 짜증나는데 이런 걸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나?’

구병모야말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통찰력을 갖게 된 것일지 모른다.

 

6. 다만 여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만큼은 작가의 서술이 종종 편견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런 편견을 가진 사회를 비판하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 의문이 들기는 한다. 예컨대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가장 합리적인 퇴출 대상인 성질 더러운 선배가 알고 보니 부서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묘사라거나, <이물(異物)>에서 나타나는 비서라는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 시키는 묘사 등등. 정말 문제가 되는 근본적인 구조를 비추기보다 어떤 표면적 모습에 돋보기를 갖다 대는 이러한 묘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엉뚱한 곳에 분노가 흐르게끔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묘사는 항상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 ‘포의 법칙(Poe's Law)'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7. 뭐 이런 불편함을 다소 참아낸다면 이 책은 긴 문장도 이렇게나 매력적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매력적인 단편집이다. 한참 중요한 순간에 딱 끝나버리는 전개가 미완성의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되레 쿨하게느껴지는 소설. 일부 묘사의 불편함 때문에 별 하나를 깎지만 별 네 개만큼은 좋은 소설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이 궁금하고, , 기대된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관통>의 메인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루초 폰타나의 작품을 표지 아이디어로 삼을거였다면, 소설 속에 등장한 작품처럼 빨간 바탕의 작품을 가져오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눈에도 확 띄고 굉장히 매력적이었을텐데...... 


바로 이런 작품들



그나저나 루초 폰타나의 <부키> 연작은 굉장히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4차원으로의 편입초월적인 선험적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를 의미하는 그의 작품이 <관통> 앞부분에 인용된 보들레르의 시와 <관통>이라는 작품 그 자체와도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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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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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이것은 절대자유주의의 메시지였다.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pp.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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