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천재들을 다시 읽고 있다. 다 읽었는데도 리뷰를 바로 쓰지 않으니 생각이 안나서 다시 읽고 있다. 책 서두에 정혜윤피디는 김한민에게 편지를 쓴다. 림보까페에 김한민. 저자간담회를 갔다온 나로서는 아 이 두분이,, 강신주, 정혜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 자기목소리를 가진 사람들. 김한민 역시 림보까페도 좋았지만, 삶의 태도에 영감을 받았던 작가다. 정수라는 것을 뽑아내고, 밀고 나가는 것. 정혜윤은 사생활에 있어 천재적인 이들에게서 절도를 보았다. 어찌보면 의지와 비슷한 말까지만, 절도라는 것은 욕망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천재는 박수용 다큐멘터리 감독이였다. 소몰이꾼으로 자라난 그는 자연 안에서 세계를 배웠던 사람이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기다리면서 한평의 비트에서 몇개월간의 그 숲의 짐승이 되어 기다림을 배웠다고 한다. 마침내 호랑이를 대면한 장면 이라던가.. 그의 이야기는 어찌 인간의 겸허함을 보여준다. 변영주 감독은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진 세월을 넘어온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그리고 자기를 비운 몇년의 시간동안 질문하고 배웠던 그 시절에 대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 보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나의 관념적 일상은 편하고 쉽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 뿐이지.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집에가서 청소도 좀 하고 빨래도 하고 정리 좀 해야겠다. 보기싫은 것들도 똑바로 봐야한다. 진실을 내 안에 있다. 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투사해야한다. 열심히 봐야 한다. 그래야 큰다. 어린애같이 요동치지 말자.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다. 처음과 끝을 알고 있으니,, 하루하루는 만들어 내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우리 머릿속에 주입된 것은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리가 바로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라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너나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성립하는 사회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요. 중요한ㄴ 것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가라는 기예art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해줍니다. 자신의 존재를 예술작품(기예의 대상)으로 삼는 것,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일입니다. ' 프랑스어네는 '처세술, 셍활의 기술을 의미하는 art de vivre라는 표현이 있는데, 슈뢰더와 푸코에게 이 표현읜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 기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 히로세 준 <봉기와 사랑에 빠지다>-1p

 

책 서두에 인용문이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담담히 삶의 여정을 써내려 간다. 어떻게 어린시절은 무데기들을 그리 소상히 기억하고 있을까. 박수용, 김산하, 변영주, 윤태호.. 그들의 열정. 삶의 뜨거워지는 순간을 가진 그들의 삶이 참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가 엉기는 것을 상상한다.

엉긴피는 나를 잠식하여 발끝부터 썩어갈 수 도 있다.

 

과거는 비릿한 배경이 되어

분절하는 현재에 끼어들지만

 

지금 이순간을 살아내고,

미래는 없는 것 처럼

미래에 대한 상상이 크게 지배한 것이 나의 과거였다면,

 

지금은 지금.

현재에 가장 큰 사건, 어쩌면 미래에 일어날 큰 사건을

접수한 미래의 탐정과 같이

 

오늘의 의식을 쪼개고 맛본다.

뜨거운 태양과 바람의 촉감만이 육체의 일부인 생각을 몰아내듯이

온 신경이 몸에 쏠려있을때..

육신의 건강함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병자로서, 살아갈 처한 내 운명을

걸어갈것인가.. 놓아줄 것인가..

 

이것은 강요된 선택인가..

몇겹의 자신을 벗기려들때마다 그다지 나는 소중한 것인가?

 

무수한 영혼이 통과하는 반투명의 물질이 아닌가?

걷는 내 몸까지 의식하는 동떨어진 이탈.

 

뒤틀린 척추와 누런 자위들

세상의 진부한 말들을 소각장으로

발끝의 저림은 발톱하나를 뽑아내기를

 

실제와 실재가 혼용하는 처마 밑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챕터만 읽은 상태이지만, 조금 정리해보고자 한다.

 

----신경성 폭력

매우 얇은 책이지만, 저자가 바라본 시대의 질병이 독특했다.

저자는 지난 세기는 면역적 시대였으며 이제는 신경증적, 경색성 질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면역이라는 것은 타자의 이질성에 대한 공격과 방어,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것이라면, 경색적 질병은 긍정성의 부정이다. 이 부분에서 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구별이 되지 않는 동질적인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하여 신경증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질성의 과다라는 것은 개인의 개성과 취향이 자유로이 각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포획되어 각자의 고유함보다 같은 것 아래 놓여있을 뿐인것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수 있다. 낯선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저항혁은 오직 비유적 의미로 쓰인다.'

타자를 나와 다른 것이라는 이질성에으로 몰아내려는 것과 타자와 나를 구별할 수 없이 같은 방식의 삶이라는 것은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을 침범과 마찬가지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온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등 "

현대의 삶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울증, 번아웃 등 현대병이 가지고 있는 여러 신경학적 질환등은

자신의 내부를 갉아먹는데,, 이것의 원인은 타자와의 관계가 너무나 촘촘해 거기서 벗어나거나 혹은 너무 깊은 잠식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때 나타나는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신경성폭력은 시스템의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소진증후군도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저항력같은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력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타자에 대한 이질성은 자아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 수 있지만, 타자와 자아의 경계가 모호함으로서 일으키는 피로감은 오히려 폭력적이지 않은가. 자의식의 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같은 시스템에서 반복되는 일상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뻔한데... 그것이 자의식 만이 아니다라는 어렴풋한 생각이 든다

 

---규율사회 피안에서

다음 챕터에서는 우리사회에 규율에서 성과중심의 사회로의 이행에 관한 분석이다. 저저는 날카롭게 규율, 즉 금기와 억압, 부정성의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면서 과거 복종적 주체에서 우리는 성과적 주체로 이행되었음을 지적한다. 성과적 주체란 자기자신을 하나의 기업으로서 관리하고 경영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모든 사회는 일의 효율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규율과 당위로 생산성을 끌어올렸던 과거에 비해 긍정의 도식으로 자발적인 성과주체가 되어 생산성의 극대화를 도모하고 있다. 과연 창의성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하여 많은 기업이 도입하고 있는 펀경영 역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성과주체를 만들기 위함아닌가. 그러한 사회 모든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도태되고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믿는 무력한 개인은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어떤것도 가능하다고 전제되는 사회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은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의 우울증 역시 시스템의 폭력아래 양산된 현대병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개인의 의지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규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착취가 되는 것이다. 성과에 매달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기자신을 착취하기에 이것을 저자는 강제된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라고 말한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현대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러한 우울증 환자들이 자신과의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 진실의 알약이라고 처방해주었으면 하지만, 프레임을 벗어나보라고 하고 싶지만, 쉽지않은 일이다. 답이 없다..

접힌 부분 펼치기 ▼

 

21세기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된 사회다.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부정성의 금지, 법령, 억압의 사회에서 긍정성, 성과위주의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을 강조하는 사회로 이행된 것이다.

"금지의 부정성, 복종적주체는 범죄자를 양산하지만, 성과적주체(자기자신을 경영하는 기어)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한다"  저자는 과거 금지와 억압의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로 나누어 범주를 벗어난 자들은 범죄자가 되었지만, 이제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들이 개인이 자기자신의 주권자가 되고 싶어하나 자기자신이 되지 못하는 자괴감으로 우울증 환자가 만들어진다는 알랭에랭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여기에 덧붙어 저자는 우울증은 자기자신의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시스템의 폭력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파편화된 개인, 인간유대의 결핍 역시 문제의 하나라고 보고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진증후군 역시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기 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해야할 것이다.'

알랭이 이야기한 주권적 인간은 실은 어떤 주권도 갖지못한 노동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며 자기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고 말한다. 실로 자발적인 착취이기 때문에 그는 피해자이기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발발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이러한 자기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

여기에 접힐 내용을 입력해주세요.

 

펼친 부분 접기 ▲

깊은 심심함 -----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세계가 닫힌다고 한다. 그가 보는 세계를 완전히 똑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친구다. 거칠어 보이지만 호탕하고 잘 웃었던 친구인데... 나의 기억속에서 그를 불러본다. 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하게도 모르고, 어떤 정황만을 알 뿐이다. 언젠가부터 너의 투정아닌 투정이 답답해서 들어주는 역할마저 내맘속에서 밀어냈을즈음... 너는 그렇게 외롭게 떠났구나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아직 함께할 시간들이 많은데,, 너의 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너는 정작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제 추모공원에 안치한 너의 유골함은 이 추운 겨울.. 남아있고,, 너의 영혼은 벌써 이승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보고싶다.. 나는 우리가 그래도 가까운 사이였다. 생각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너의 그 선택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모두 그렇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한끗 차이일뿐... 허무함과 두려움이 가슴속에 휘몰아쳤다가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앞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날 때 그녀는 그의 등을 찾는다.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스킨쉽으로 사라지기나 할 것처럼,, 그녀는 설렘과 죄책감 사이에서 밀려오는 감정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너무나 행복한 우리였지만, 나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는 없는 것'이 지금의 사랑이라고 마고는 생각하는 것 같다. 너무나 예민한 그녀...살아가면서 그냥 울고 싶어싶어지는 그 막연한 슬픔. 마고는 자신의 그 내면의 공허를 알아봐주는 그 남자가  진짜 그녀의 남자 그녀의 사랑이 아닐까 믿게 된다. 결국 남편을 버리고,  그 사랑을 찾아 떠나고, 남편은 그런 그녀를 붙잡지 않고,, just go...  영화는 마고는 그를 찾아 함께 살게되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결국엔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아무렇게나 용변을 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 사랑의 설렘의 끝에는 결국 혼자 남는다는 것...새것도 헌것이 되어버린다는 그 현실에 대하여...결국엔 혼자 흔들리고 살아내고, 그 고독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 고독의 존재를 눈치채거나, 혹은 눈치채지 못하고 익숙하게 살아가는 두 존재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그녀는 이 일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걸어갈까.. 아니면 사랑이 식었다고  그 집에서 나오게 될까... 이제 남편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 놀이기구를 타면서 상념에 빠진다.. 이제 혼자 걷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천진하고 피곤한 매력때문에 새 사랑은 또 예기치 않게 다가오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