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덕담이나 희망이 아니라, 매순간 태어나고 변하고 죽을거라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9)

- 재현의 사유는 재인과 상식을 동원해서 독화살의 출처와 독화살을 쏜 배후자를 알아내려고 한다. ... 우리의 몸은 위험신호를 보내는데도, 우리의 오만한 의식은 분석하고 종합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재현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현재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근심한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의 혁명성을 의심한다. 행위함이 새로운 삶의 창안이다.

재현은 “ 삶의 운동에 대항하여, 삶의 운동을 발명하는 즐겁고 다양한 방법에 대항하여 파과적으로 반응” 한다는 점에 파시즘과 닮아 있다. (11) 일말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파시즘처럼 재현 역시 동일성의 체계로부터 달아나는 모든 힘들에 대해 극도로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한다. (12)

-동아시아에서는 그림을 보는 것을 “외유”라고 표현한다. 사유하기란 일종의 와유다 누워서 산책하기! 걷기를 통해 세계에 기을 내고, 세계와 만나고, 세계의 비전들을 펼치듯이 사유를 통해 우리는 개념을 창안하고 새로운 마주침을 구성하고 다른 삶의 비전들을 만들어낸다. 걷기도 사유도, 모두 시간을 열어젖히는 행위다. 매번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버리고, 줍고 휘청거리고 중심을 잡는 행위(13)

- 마그리트는 말한다. “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패닉의 순간이지,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무엇이 아니다” (23) 마그리트는 집요하게 ‘재현’의 문제를 파고든다.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재현을 비판하고 ‘반재현적' 형상을 고민했지만, 마그리트처럼 간명하고 유머러스하게 재현의 여러양상을 문제화하한 작가는 드물다(25)

- 우리는 어떤 개념을 일반화하고, 이를 원형응로 삼아 세계를 이해하고 가치를 판단한다. ....이처럼 개념은 사물에 붙이는 단순한 꼬리표가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특정한 방식이자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철학을 “개념의 창안”으로 정의한다. 철학이란 도그만화된 기존의 개념을 의심하고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세계를 전과 다르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26) 개념의 창안이란 “ 사물들과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 ”이다.  개념을 창안한다는 것은 문제를 구성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자유인은 문제 자체를 스스로 구성한다.

- 재현이든 표상이든 대의제든 ‘리프리젠테이션’은 꿈틀거리는 활물의 세계, 눈앞에 호나하게 현존하는 세계를 부정한다. 버젓이 목전에 현혆나는 사건을 보면서도 뒤에 도사린 원본을 찾거나... 재현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하거나, 작가의 무의식을 표상하거나, 억압된 것, 혹은 상실된 것을 대리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재현의 논리 속에서는 무언가를 매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된세계에 닿을 수 없는 것이다. (35)

-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물들을 그림으로 그려지면 실물과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감탄한다고. 파스칼.

플라톤은 저게 대체 어떤 이데이를 표현하는 거지? 뭘 닮은 거야? 닮음이 전제하고 있는 원본, 혹은 진리의 실체를 묻는 순간, 그림은 더 이상 유희가 될 수 없다.(37)

- 벤야민은 미메시스능력을 주위 환경을 모방함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동물처럼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으로 인식했다. (40)

- 재현적 모방이 닮음을 위한 닮음, 무언가에 대한 닮음이라면 비-재현적 모방은 새로워지기 위한 닮음이요, 배움으로서의 닮음이고, 그럼 점에서 닮지 않은 닮은 이라고 할 수 있다.(41)




삶이란 양적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강도의 문제라는 것.(43)

- 예술품의 의미를 예술품 ‘밖’에 놓은 무엇과의 일치로부터 찾으려 할 때 우리는 결국 어떤 척도나 원본을 끌어들이게 된다. 재현은 이렇나 척도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며,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원본의 권력과 진리를 재생산한다. ‘재현’개념의 내포하는 것은 원본의 무거움이다. .. 사유란 세계에 대한 인식이고, 예술이란 미의 재현이며, 삶이란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생각. 사유와 예술과 삶은 그 자체 생성으로서 아니라 무언가를 재생산하는 노동으로 전락한다. 이같은 재현의사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우리 삶 전반에 퍼져있다. 우리의 사유와 예술과 삶을 해방시키는 과정은 결국 이 재현과의 한판 싸움이 될것이다. (50)

- 세계는 그러한 외징들 혹은 상형문자들로 뒤덮인 거대한 책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그것과 유사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호들의 법칙을 찾는다는 것은 유사한 사물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53)

-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이제 기호는 유사성이라는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대상의 관념을 투명하게 표상할 수 있다. 투면한다는 것은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내용과 기능 및 규정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 표상-기호들은 그 자체가 기호로 표상된다. (55)

- 푸코에 따르면, 시녀들에는 재현의 근원이 되는 주체가 부재하는데, 이는 주체로부터 해방된 재현, 순수한 재현을 보여주는 고전주의시대의 특징이다.  재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주체가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다.(57)

- 유사성을 통한 사유는 이제 환상이 되고, 광기가 되었다. 유사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아니라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광인의 표지가, 진리의 형태가 아니라 오류의 증거가 되었다. 돈키호테와 광인의 공통점은 “도처에서 유사와 유사의 기호만을 발견” 한다는 사실이다. 돈키호테처럼 미치지 않으려면 책과 현실의 ‘차이’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분해 내고, 그 차이를 통해 이 세계를 질서화할 것인가? 차이를 질서 안에 위치지음으로써 세계를 투명하게 재현하는 것! 이것이 고전주의 시데 에피스테메다.(62)

-사실 관상학은 우리의 심신이 일원적이라는 사고, 그리고 우주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다르지 않다는 사고에 기반해 있다.(65)

-차이는 동일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하에서의 ‘결함’으로 취급된다.(67)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차’라는 매개를 통해 유안에서 사물들의 차이를 더욱 정합적으로 체계화한다.(68)

-헤겔은 차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모순되는 대립물과 대립의 발전, 그리고 대립물의 통일로 이어지는 변증법의 트라이앵글(69)

-재현의 논리는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다만 인정할 뿐이다.  원본과의 닮음 속에서만 원본이라는 동일자로 회귀하는 한에서만, 재현의 재는 차이들을 잡아먹는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70)

- 우리가 주체를 사고하는 방식은 나라고 하는 뭔가가 있고 그것은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는 것. 동일성의 테두리에 갇힌 차이가 대상에 내재된 속성으로 실체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 역시 뚜렷한 윤곽과 본질을 갖는 존재로 실체화된다. (72)

- 부단하게 변화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존재의 본질일진대, 그중 어떤 것을 ‘주체’로 붙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생각하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허구다. 주체앞에 세워진 ‘물자체’ 역시 허구다. 물도 나도 객관도 주관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재현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불변하는 무언가를 상정할 때만 그것을 ‘다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재현은 생각하는 나의 동일성과 대상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74)

하지만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현상)으로부터 ‘대상 자체’를 분리해 낼 수 있을까? (75)

- ‘윤곽’은 실재의 감옥이다. 동일성으로부터 차이를 구출하는 것, 윤곽을 지우고 색채를 흘러넘치게 하는 것, 이것이 재현의 논리로부터 달아나는 방법이다,(76)

-상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보편화함으로써 상대의 언어를 주변화해버리고, ‘양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리를 더 우월한 위치에 둠으로써 상대의 논리를 비하하는 방식.(78)

-재인과 상식은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도그마다.(79)

- 선문답은 질문과 답이 아니라 질문을 부수는 행위들로 이루어 진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진리라는 실체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던져지기 때문인다. 절대적 진리가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 자들만이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81)

- 상대주의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으로 사고의 유연함을 가장하지만 실은 대단히 비겁하고 허무주의적 논리다.

이와달리 장자의 구절은 진리란 자신이 서 있는 지평 위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 그 지평의 배치가 바뀌면 진리 또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현신을 떠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없으며, 진리란 뜨겁게 들끊는 현장 속에서 도출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진리이다.  요컨대 ‘올바름만이 올바른다’는 플라톤의 논리는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키고, 지금 여기의 세계를 거대한 모방과 환영으로 채워버린다.(86)

- 재현적 사유는 진리에 대한 선의지에서 시작한다. 즉 우리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것. 이처럼 사유를 진리에 대한 선의지로 규정하는 철학은 자신이 이미지를 종종 국가에서 빌려온다.(88)

- 세잔의 사투가 보여 주듯이 새로운 사유와 예술은 굳은 살과 같은 기억과의 한바탕 전투다. 어떤 전제 위헤;서 시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제 없이 지작할 것인가의 문제. 양식과 상싯ㄱ, 선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 실제에서 우리는 선의라는 폭군을 만나게 된고, 타인들과 공통적인 사고를 하도록 가용당하며, 교훈적 모델의 지배에 접하게 되고,,.... 사유의 너무나 분명한 도덕성을 만난게 된다(들뢰즈이 푸코)(90)

- 재현은 개념안의 동일성, 술어안의 대립, 판단 안의 유비, 지각 안의 유사성이라는 4중의 굴레에 갇혀있다.(90)

- 재현적 사유는 삶을 믿지 않느다. 삼이 내포한 공백을, 그 불안정성과 비대칭성을 부정한다. ...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삶. 흐름들로, 차이들로, 영원한 변화와 사건들로 채워진 예측불허의 삶. 우리가 재현을 넘어 사유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삶에 반하기 때문이다. (92)

- 요컨대 ‘자기’란 “ 면역계의 발생 환경에 존재하고 있는 물질의 총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라는 것 자체가 시시각각 변모하게 된다. 어제까지 자기였던 것이 비-자기가 될 수도 있고, 거꾸로 비자기였던 것이 자기가 될 수 도 있다. 따라서 동일한 ‘자기’란 존재하지 않으며, “반응하는 자기, 인식하는 자기, 인식되는 자기, 관용하게 된 자기, 이런 식으로 자기란 자기의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깥이다.(95)

- 내가 내 바깥이듯, 사유는 사유안의 비-사유다. 즉 견해와 상식 재인에 맞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 바로 사유다. (96)

- 나라는 존재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모두 나의 바깥이다. 나의 건강은 나의 병이며, 나의 삶은 나의 죽음이며, 나는 나의 타자다! (97)

- 불교에서는 제법무아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나라고 할 만한 자성이 없다는 것. 이를 다른 말로 공하다고도 한다. 이는 존재가 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는 변화와 관계의 역동적 재치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는 없다는 거다. (98)

- 재현의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결별해야 한다. 긔고 이를 위해 선 사고 혁명적 전환이 요구된다.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실존전체를 건 모험이!(99)

- 파도는 부단하게 이어지는, 그러나 단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시간의 형이상이자 변화로서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미지다. 자아없이 세계를 보는 자들, 미리 규정된 법칙이나 경화된 기억없이 흐름을 지각하는 자들에게 세계는 변화무쌍한 파도와 같은 모습으로 현현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지속을 선분으로 분절하고 변화를 본질이 아닌 현상의 문제로 치환하며, 운동을 단순한 공간상의 위치변화로 간주한다. (101)

-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거나 줄고, 공간이동은 수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존재의 질을 변화시킨다.

- 예컨대 늙음이란 무엇인가?  나라는 고정된 주체로부터 늙음의 특징을 추출해 내는 방식으로 나의 늙음을 사고한다.(101)

- 늙음을 하나의 새로운 생성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특정한 상태로 재현하는 자에게 ‘늙어감’이란 현실은 ‘젊음’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비추어 부정된다. 젊은이에게 늙은이에게나 시간은 매순간 새롭게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기에 젊음도 늙음도 ‘재현’될 수 없고, 다만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늙는 것이 아니라 늙음이 나를 만들어 간다. 늙음은 새로운 시간을 열어 주는 또 다른 잠재성인 것이다. (102)

- 무엇인가 있다.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찾아나게서 되고 소의 발자취를 보게되고, 그걸 따라가 마침내 소를 얻게 된고, 소와 함께 유유자적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전부 인식주체의 망상에 불과하다. 십우도의 핵심은 그 다음부터, 소(인식대상)가 없어지고, 사람(인식주체)도 업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둥근 원만 남는다. 빈 원은 텅빔을 의미하는 허무의 원이 아니라 사람도 소도 고정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깨달음의원이다. 이 깨달음을 얻은 후 우리는 어떤 초월성도 실체도 없이 ‘사물 그 자체’를 마주할 수 있다.(105)

- 언어표상 역시 진리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존재의 혁명적 전환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고한다면 재현의 세계를 벗어나는 출구로 기능할 수 있다. ... 언어라는 표상 속에 사유를 가두는 태도를 경계하기 위함이다.(106)

- 궁극의 경지는 언구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벽암록)

- 선문답의 언어는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고 안정된 존재의 지반에 지진을 일으킨다.(107)

- 추위나 더위를 피하려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저편을 상상하는 대신 추위와 더위가 있는 바로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라! 여기 아닌 어딘가 특별한 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야말로 지독한 망상이다. (109)

 - 까마귀의 ‘검음’은 이 무수한 뉘앙스들로부터 뽑아낸 추상일 뿐이지 어떤 ‘본질’이 아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차이로 인해 살아간다.  (110)

- 차이가 이것과 저것의 비교를 통해 추출되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다. 개념적 차이는 이것과 저것의 실체를 전제한 후에 이것은 저것이 아님으로써 이것이고, 저것은 이것이 아님으로써 저것이라는 부정적 논리를 통해 도출된다..

-차이는 ‘이것’으로부터 발생하면서 ‘이것’의 동일성을 지워 나가는 이질성이다. 즉 차이란 “차이화하면 나아가는 차이”다.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차이화의 과정이다.(111)

-스스로의 소멸이라는 죽음이 자신의 존재의 현출이라는 삶인것,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순간적 단절로 빛나는 섬광, 아무리 눈을 응시해도 구름이 전환하는 순간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의 단절이 없다면 존재는 전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상의 철학)

-우리가 보는 것은 구름의 변화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새롭게 출현하는 무엇이다. “한순간조차 머물지 않는 자기차이성”이다.

-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는 비존째 때문이라고, 다시말해서 존재는 이전 순간과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음으로써만, 스스로 차이화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살아있는 신체는 불안정을 유지함으로써 즉 외부환경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문제를 설정함으로써 ‘살아있음“을 유지한다. (112)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

-차이가 ‘차이화하는 차이’라고 하는 건 부단한 차이화과정을 뜻하는 것이지, 여기서 저기로의 위치변화를 의미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113)

-우리가 차이를 사유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존재의 근원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양이 아니라 질의 변화다. 존재방식을 뒤바꾼 질적 변화다. (114)

- 현재라는 ‘순간-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가르기. 하지만 대체 순간이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무한히 짧은 순간을 생각한다고 해도 순간이 말해지는 그 순간 이미 순간은 과거가 되고, 동시에 그 순간 속에 이미 미래가 들어와 있는 것.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는 순차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한순간 속에 공존한다.

- 존재란 차이화의 산물이 동시에 시간의 산물이다.

- 모네의 루아 대성당시리즈가 보여주는 것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시간이다. (118)

-‘성당’이라는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성당을 존재하게 하는 차이로서의 시간.

-동일한 것은 두 번다시 되돌아 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되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극단적 형상들뿐이다.” (120)

- 시간은 재현의 체계화된 세계를 뒤흔드는 현기증이며, 원본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엄청난 소용돌이이다. (121)

-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 비슷하다는 것은 언제나 참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ㄷ, 비슷한게 존재 할 수 없다면 참된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참되고 참되다... (122)

- 플라톤은 이데아를 닮지 않는 가짜 즉 비슷하지도 않는 것을(시뮬라이크) 추출해 내는 것이였다. (123)

- 푸코에 따르면,  재현적 사유를 특징짓는 유사의 원리와 달리 원본 없는 시뮬라이크는 상사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124)

- 이미지가 현실을 닮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좇는 역설적 상황이 도래하였다.

- 현대사회는 거대한 시뮬라이크의 왕국이 되었다. 시뮬라이크르의 순순한 현전은 불일치를 척도로 삼는다. 그것들은 단 한번 차이로서 명멸한다.

-시뮬라크르가 긍정되는 것은 그것이 유사성을 방치한 채 “단지 차이를 통해 살아가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26)

-루쉰은 말한다. 절망은 허망하다고, 희망이 그러하듯이. 루쉰은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고 정말에 휘청거리지도 않는다. 희망이나 절망이란 것이 미래에 대한 망상의 산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말고 대체 확실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루쉰은 오로지 ‘지금 이 길’에 대해서만 말한다(128)

- 전사회적으로 영토가 구획되고, 거기에 부가되는 노동만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결과 자신과 그의 자손을 기진맥진하게 밀어붙임 노동에 대한 사랑, 노동에 대힌 맹렬한 열정이 짓누르게 되었다.

- 야생적 자연의 카오스 속에서 어떤 척도도 없이 다양한 삶의 리듬을 생산하는 쾌락과 자유의 공간, 이것이 정원의 이미지다. (130)

-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역량을 폄하하고, 또 다른 삶과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수동적 허무주의.

- 변화와 사멸이 반복되는 차안을 견딜 수 없는 인간들만이 영원과 불멸이 지배하는 피안을 추구한다.(131)

-니체는 완전한 허무주의를 내세운다. 이것은 생성의 무죄에 대한 긍정, 끊임없이 무너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있는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생멸하고 비산하는 차이들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그 순간, 그 현장에 온몸을 내던진다. (132)

-  우리의 사고의 고고학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산물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만일 그러한 배치가 나타날 때처럼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가 가능성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데 불과한 어ㄸ 사나건이 .... 그 배치를 무너뜨리게 도니다면, 그때 우리는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이 인간이 이내 지원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푸코 말과 사물 439~440)

- 재현의 논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을 넘어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베르그손 말대로 철학이란,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것, 달리 말하면 사유의 습관적인 작업방향을 전복하는 것이다.(135)

-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각하고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감각하기,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의 극한까지가서   또 다른 사유를 낳기. 그러나 새로운 세계와 만났을 떄도 익숙한 것만을 발견하고 거기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사유는 사유 속으로 초월을 외삽한다.(135)

- 무언가가 깨지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예술을 없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슬픔을 동반하는 고통이 아니라 인가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고통이다. 익숙한 것을 재생산 하는 예술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것을 생산함으로써 인간의 감각기관 전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예술. 그런 예술만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베이컨은 믿는다. --- 이런 예술은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있는 일종의 폭력을 생산한다. (140)

- 베이컨이 말하는 예술의 ‘폭력성’ 역시 마찬가지다.  익숙한 것에 가해지는 충격이며, 원초적 삶이 내포하고 있는 표현불가능한 강렬함을 의미한다.

- 사유와 예쑬이 발생하는 것은 지성이 곤혹스러워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극한에 이르는 사유나 행위는 항성 거기서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의 열림을 경험한다. 베이컨은 신체를 극한까지 몰고 가서 거기서 유기체를 넘어선 신체를 발견했으며, 아르토는 언어를 극한까지 몰고 가서는 무질서해진 언어, 언어를 초월한 언어. 물리적 진동을 되찾은 새로운 차원의 언어를 발견했다. (143)

- 비재현적은 작품은 관개의 지성이 아니라 감각에 호소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를 ‘발견’하기보다는 ‘발명’하기를 요구한다. (146)

-  익숙한 감각이 위협당한다고 느낀 대중들은 날을 곤두세우며 방어벽을 쌓는다.(149)

- 베르그손은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을 구분한다. 가능적인 것은 실현되기전의 상태로서, 그것은 실현된 것을 통해 역으로 유추된다. 실현된것은 언제나 가능성과의 유사성을 통해 파악되며, 다른 가능성들의 제한을 내포한다. (예 의사가 된 아이의 가능성등)

- 사실 따지고 보면 실현된 것으로부터 가능성을 추출해 낼 뿐이다.

- 이와 달리, 잠재성과 짝이 되는 개념은 실현성이 아니라 현실성이다. 가능적인 것은 실현된기  전에는 실재하지 않는 반면, 잠재적인 것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실재한다. 실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이다.

- 싹이라는 현실성은 땅 속의 씨앗이라는 잠재성과 어떤 유사관계도, 어떤 우월성도 없다. 싹으로 현실화 된 것과 현실화 되지 못한 것 사이에는 위계가 아니라 ‘차이’가 있다. (153)

- 잠재성은 땅 속의 씨앗처럼 보이지 않을 뿐 지금 여기 공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153)

- 지금 이 책을 읽는 사건과 이책을 읽지 않는 사건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화 되지 않은 사건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재적 차원으로 존재한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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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선생님의 재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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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덕담이나 희망이 아니라, 매순간 태어나고 변하고 죽을거라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9)

- 재현의 사유는 재인과 상식을 동원해서 독화살의 출처와 독화살을 쏜 배후자를 알아내려고 한다. ... 우리의 몸은 위험신호를 보내는데도, 우리의 오만한 의식은 분석하고 종합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재현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현재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근심한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의 혁명성을 의심한다. 행위함이 새로운 삶의 창안이다.

재현은 “ 삶의 운동에 대항하여, 삶의 운동을 발명하는 즐겁고 다양한 방법에 대항하여 파과적으로 반응” 한다는 점에 파시즘과 닮아 있다. (11) 일말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파시즘처럼 재현 역시 동일성의 체계로부터 달아나는 모든 힘들에 대해 극도로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한다. (12)

-동아시아에서는 그림을 보는 것을 “외유”라고 표현한다. 사유하기란 일종의 와유다 누워서 산책하기! 걷기를 통해 세계에 기을 내고, 세계와 만나고, 세계의 비전들을 펼치듯이 사유를 통해 우리는 개념을 창안하고 새로운 마주침을 구성하고 다른 삶의 비전들을 만들어낸다. 걷기도 사유도, 모두 시간을 열어젖히는 행위다. 매번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버리고, 줍고 휘청거리고 중심을 잡는 행위(13)

- 마그리트는 말한다. “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패닉의 순간이지,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무엇이 아니다” (23) 마그리트는 집요하게 ‘재현’의 문제를 파고든다.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재현을 비판하고 ‘반재현적' 형상을 고민했지만, 마그리트처럼 간명하고 유머러스하게 재현의 여러양상을 문제화하한 작가는 드물다(25)

- 우리는 어떤 개념을 일반화하고, 이를 원형응로 삼아 세계를 이해하고 가치를 판단한다. ....이처럼 개념은 사물에 붙이는 단순한 꼬리표가 아니라 세계를 절단하는 특정한 방식이자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철학을 “개념의 창안”으로 정의한다. 철학이란 도그만화된 기존의 개념을 의심하고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세계를 전과 다르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26) 개념의 창안이란 “ 사물들과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 ”이다.  개념을 창안한다는 것은 문제를 구성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자유인은 문제 자체를 스스로 구성한다.

- 재현이든 표상이든 대의제든 ‘리프리젠테이션’은 꿈틀거리는 활물의 세계, 눈앞에 호나하게 현존하는 세계를 부정한다. 버젓이 목전에 현혆나는 사건을 보면서도 뒤에 도사린 원본을 찾거나... 재현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하거나, 작가의 무의식을 표상하거나, 억압된 것, 혹은 상실된 것을 대리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재현의 논리 속에서는 무언가를 매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된세계에 닿을 수 없는 것이다. (35)

-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물들을 그림으로 그려지면 실물과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감탄한다고. 파스칼.

플라톤은 저게 대체 어떤 이데이를 표현하는 거지? 뭘 닮은 거야? 닮음이 전제하고 있는 원본, 혹은 진리의 실체를 묻는 순간, 그림은 더 이상 유희가 될 수 없다.(37)

- 벤야민은 미메시스능력을 주위 환경을 모방함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동물처럼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으로 인식했다. (40)

- 재현적 모방이 닮음을 위한 닮음, 무언가에 대한 닮음이라면 비-재현적 모방은 새로워지기 위한 닮음이요, 배움으로서의 닮음이고, 그럼 점에서 닮지 않은 닮은 이라고 할 수 있다.(41)




삶이란 양적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강도의 문제라는 것.(43)

- 예술품의 의미를 예술품 ‘밖’에 놓은 무엇과의 일치로부터 찾으려 할 때 우리는 결국 어떤 척도나 원본을 끌어들이게 된다. 재현은 이렇나 척도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며,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원본의 권력과 진리를 재생산한다. ‘재현’개념의 내포하는 것은 원본의 무거움이다. .. 사유란 세계에 대한 인식이고, 예술이란 미의 재현이며, 삶이란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생각. 사유와 예술과 삶은 그 자체 생성으로서 아니라 무언가를 재생산하는 노동으로 전락한다. 이같은 재현의사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우리 삶 전반에 퍼져있다. 우리의 사유와 예술과 삶을 해방시키는 과정은 결국 이 재현과의 한판 싸움이 될것이다. (50)

- 세계는 그러한 외징들 혹은 상형문자들로 뒤덮인 거대한 책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그것과 유사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기호들의 법칙을 찾는다는 것은 유사한 사물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53)

-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이제 기호는 유사성이라는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대상의 관념을 투명하게 표상할 수 있다. 투면한다는 것은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내용과 기능 및 규정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이 표상-기호들은 그 자체가 기호로 표상된다. (55)

- 푸코에 따르면, 시녀들에는 재현의 근원이 되는 주체가 부재하는데, 이는 주체로부터 해방된 재현, 순수한 재현을 보여주는 고전주의시대의 특징이다.  재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주체가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다.(57)

- 유사성을 통한 사유는 이제 환상이 되고, 광기가 되었다. 유사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아니라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광인의 표지가, 진리의 형태가 아니라 오류의 증거가 되었다. 돈키호테와 광인의 공통점은 “도처에서 유사와 유사의 기호만을 발견” 한다는 사실이다. 돈키호테처럼 미치지 않으려면 책과 현실의 ‘차이’를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분해 내고, 그 차이를 통해 이 세계를 질서화할 것인가? 차이를 질서 안에 위치지음으로써 세계를 투명하게 재현하는 것! 이것이 고전주의 시데 에피스테메다.(62)

-사실 관상학은 우리의 심신이 일원적이라는 사고, 그리고 우주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다르지 않다는 사고에 기반해 있다.(65)

-차이는 동일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하에서의 ‘결함’으로 취급된다.(67)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차’라는 매개를 통해 유안에서 사물들의 차이를 더욱 정합적으로 체계화한다.(68)

-헤겔은 차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모순되는 대립물과 대립의 발전, 그리고 대립물의 통일로 이어지는 변증법의 트라이앵글(69)

-재현의 논리는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다만 인정할 뿐이다.  원본과의 닮음 속에서만 원본이라는 동일자로 회귀하는 한에서만, 재현의 재는 차이들을 잡아먹는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70)

- 우리가 주체를 사고하는 방식은 나라고 하는 뭔가가 있고 그것은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는 것. 동일성의 테두리에 갇힌 차이가 대상에 내재된 속성으로 실체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 역시 뚜렷한 윤곽과 본질을 갖는 존재로 실체화된다. (72)

- 부단하게 변화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존재의 본질일진대, 그중 어떤 것을 ‘주체’로 붙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생각하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허구다. 주체앞에 세워진 ‘물자체’ 역시 허구다. 물도 나도 객관도 주관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재현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불변하는 무언가를 상정할 때만 그것을 ‘다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재현은 생각하는 나의 동일성과 대상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74)

하지만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현상)으로부터 ‘대상 자체’를 분리해 낼 수 있을까? (75)

- ‘윤곽’은 실재의 감옥이다. 동일성으로부터 차이를 구출하는 것, 윤곽을 지우고 색채를 흘러넘치게 하는 것, 이것이 재현의 논리로부터 달아나는 방법이다,(76)

-상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보편화함으로써 상대의 언어를 주변화해버리고, ‘양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리를 더 우월한 위치에 둠으로써 상대의 논리를 비하하는 방식.(78)

-재인과 상식은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도그마다.(79)

- 선문답은 질문과 답이 아니라 질문을 부수는 행위들로 이루어 진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그것은 진리라는 실체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던져지기 때문인다. 절대적 진리가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 자들만이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81)

- 상대주의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으로 사고의 유연함을 가장하지만 실은 대단히 비겁하고 허무주의적 논리다.

이와달리 장자의 구절은 진리란 자신이 서 있는 지평 위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 그 지평의 배치가 바뀌면 진리 또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현신을 떠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없으며, 진리란 뜨겁게 들끊는 현장 속에서 도출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진리이다.  요컨대 ‘올바름만이 올바른다’는 플라톤의 논리는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키고, 지금 여기의 세계를 거대한 모방과 환영으로 채워버린다.(86)

- 재현적 사유는 진리에 대한 선의지에서 시작한다. 즉 우리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것. 이처럼 사유를 진리에 대한 선의지로 규정하는 철학은 자신이 이미지를 종종 국가에서 빌려온다.(88)

- 세잔의 사투가 보여 주듯이 새로운 사유와 예술은 굳은 살과 같은 기억과의 한바탕 전투다. 어떤 전제 위헤;서 시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제 없이 지작할 것인가의 문제. 양식과 상싯ㄱ, 선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 실제에서 우리는 선의라는 폭군을 만나게 된고, 타인들과 공통적인 사고를 하도록 가용당하며, 교훈적 모델의 지배에 접하게 되고,,.... 사유의 너무나 분명한 도덕성을 만난게 된다(들뢰즈이 푸코)(90)

- 재현은 개념안의 동일성, 술어안의 대립, 판단 안의 유비, 지각 안의 유사성이라는 4중의 굴레에 갇혀있다.(90)

- 재현적 사유는 삶을 믿지 않느다. 삼이 내포한 공백을, 그 불안정성과 비대칭성을 부정한다. ...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삶. 흐름들로, 차이들로, 영원한 변화와 사건들로 채워진 예측불허의 삶. 우리가 재현을 넘어 사유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삶에 반하기 때문이다. (92)

- 요컨대 ‘자기’란 “ 면역계의 발생 환경에 존재하고 있는 물질의 총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라는 것 자체가 시시각각 변모하게 된다. 어제까지 자기였던 것이 비-자기가 될 수도 있고, 거꾸로 비자기였던 것이 자기가 될 수 도 있다. 따라서 동일한 ‘자기’란 존재하지 않으며, “반응하는 자기, 인식하는 자기, 인식되는 자기, 관용하게 된 자기, 이런 식으로 자기란 자기의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깥이다.(95)

- 내가 내 바깥이듯, 사유는 사유안의 비-사유다. 즉 견해와 상식 재인에 맞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 바로 사유다. (96)

- 나라는 존재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모두 나의 바깥이다. 나의 건강은 나의 병이며, 나의 삶은 나의 죽음이며, 나는 나의 타자다! (97)

- 불교에서는 제법무아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나라고 할 만한 자성이 없다는 것. 이를 다른 말로 공하다고도 한다. 이는 존재가 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는 변화와 관계의 역동적 재치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는 없다는 거다. (98)

- 재현의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결별해야 한다. 긔고 이를 위해 선 사고 혁명적 전환이 요구된다.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실존전체를 건 모험이!(99)

- 파도는 부단하게 이어지는, 그러나 단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시간의 형이상이자 변화로서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미지다. 자아없이 세계를 보는 자들, 미리 규정된 법칙이나 경화된 기억없이 흐름을 지각하는 자들에게 세계는 변화무쌍한 파도와 같은 모습으로 현현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지속을 선분으로 분절하고 변화를 본질이 아닌 현상의 문제로 치환하며, 운동을 단순한 공간상의 위치변화로 간주한다. (101)

-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거나 줄고, 공간이동은 수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존재의 질을 변화시킨다.

- 예컨대 늙음이란 무엇인가?  나라는 고정된 주체로부터 늙음의 특징을 추출해 내는 방식으로 나의 늙음을 사고한다.(101)

- 늙음을 하나의 새로운 생성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특정한 상태로 재현하는 자에게 ‘늙어감’이란 현실은 ‘젊음’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비추어 부정된다. 젊은이에게 늙은이에게나 시간은 매순간 새롭게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기에 젊음도 늙음도 ‘재현’될 수 없고, 다만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늙는 것이 아니라 늙음이 나를 만들어 간다. 늙음은 새로운 시간을 열어 주는 또 다른 잠재성인 것이다. (102)

- 무엇인가 있다.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찾아나게서 되고 소의 발자취를 보게되고, 그걸 따라가 마침내 소를 얻게 된고, 소와 함께 유유자적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전부 인식주체의 망상에 불과하다. 십우도의 핵심은 그 다음부터, 소(인식대상)가 없어지고, 사람(인식주체)도 업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둥근 원만 남는다. 빈 원은 텅빔을 의미하는 허무의 원이 아니라 사람도 소도 고정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깨달음의원이다. 이 깨달음을 얻은 후 우리는 어떤 초월성도 실체도 없이 ‘사물 그 자체’를 마주할 수 있다.(105)

- 언어표상 역시 진리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존재의 혁명적 전환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고한다면 재현의 세계를 벗어나는 출구로 기능할 수 있다. ... 언어라는 표상 속에 사유를 가두는 태도를 경계하기 위함이다.(106)

- 궁극의 경지는 언구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벽암록)

- 선문답의 언어는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고 안정된 존재의 지반에 지진을 일으킨다.(107)

- 추위나 더위를 피하려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저편을 상상하는 대신 추위와 더위가 있는 바로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라! 여기 아닌 어딘가 특별한 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야말로 지독한 망상이다. (109)

 - 까마귀의 ‘검음’은 이 무수한 뉘앙스들로부터 뽑아낸 추상일 뿐이지 어떤 ‘본질’이 아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차이로 인해 살아간다.  (110)

- 차이가 이것과 저것의 비교를 통해 추출되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다. 개념적 차이는 이것과 저것의 실체를 전제한 후에 이것은 저것이 아님으로써 이것이고, 저것은 이것이 아님으로써 저것이라는 부정적 논리를 통해 도출된다..

-차이는 ‘이것’으로부터 발생하면서 ‘이것’의 동일성을 지워 나가는 이질성이다. 즉 차이란 “차이화하면 나아가는 차이”다.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차이화의 과정이다.(111)

-스스로의 소멸이라는 죽음이 자신의 존재의 현출이라는 삶인것,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순간적 단절로 빛나는 섬광, 아무리 눈을 응시해도 구름이 전환하는 순간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의 단절이 없다면 존재는 전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상의 철학)

-우리가 보는 것은 구름의 변화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 새롭게 출현하는 무엇이다. “한순간조차 머물지 않는 자기차이성”이다.

-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는 비존째 때문이라고, 다시말해서 존재는 이전 순간과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음으로써만, 스스로 차이화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살아있는 신체는 불안정을 유지함으로써 즉 외부환경에 따라 매 순간 다르게 문제를 설정함으로써 ‘살아있음“을 유지한다. (112)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

-차이가 ‘차이화하는 차이’라고 하는 건 부단한 차이화과정을 뜻하는 것이지, 여기서 저기로의 위치변화를 의미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113)

-우리가 차이를 사유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존재의 근원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양이 아니라 질의 변화다. 존재방식을 뒤바꾼 질적 변화다. (114)

- 현재라는 ‘순간-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가르기. 하지만 대체 순간이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무한히 짧은 순간을 생각한다고 해도 순간이 말해지는 그 순간 이미 순간은 과거가 되고, 동시에 그 순간 속에 이미 미래가 들어와 있는 것.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는 순차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한순간 속에 공존한다.

- 존재란 차이화의 산물이 동시에 시간의 산물이다.

- 모네의 루아 대성당시리즈가 보여주는 것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시간이다. (118)

-‘성당’이라는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성당을 존재하게 하는 차이로서의 시간.

-동일한 것은 두 번다시 되돌아 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되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극단적 형상들뿐이다.” (120)

- 시간은 재현의 체계화된 세계를 뒤흔드는 현기증이며, 원본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엄청난 소용돌이이다. (121)

-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 비슷하다는 것은 언제나 참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ㄷ, 비슷한게 존재 할 수 없다면 참된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참되고 참되다... (122)

- 플라톤은 이데아를 닮지 않는 가짜 즉 비슷하지도 않는 것을(시뮬라이크) 추출해 내는 것이였다. (123)

- 푸코에 따르면,  재현적 사유를 특징짓는 유사의 원리와 달리 원본 없는 시뮬라이크는 상사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상사는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124)

- 이미지가 현실을 닮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지를 좇는 역설적 상황이 도래하였다.

- 현대사회는 거대한 시뮬라이크의 왕국이 되었다. 시뮬라이크르의 순순한 현전은 불일치를 척도로 삼는다. 그것들은 단 한번 차이로서 명멸한다.

-시뮬라크르가 긍정되는 것은 그것이 유사성을 방치한 채 “단지 차이를 통해 살아가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26)

-루쉰은 말한다. 절망은 허망하다고, 희망이 그러하듯이. 루쉰은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고 정말에 휘청거리지도 않는다. 희망이나 절망이란 것이 미래에 대한 망상의 산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말고 대체 확실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루쉰은 오로지 ‘지금 이 길’에 대해서만 말한다(128)

- 전사회적으로 영토가 구획되고, 거기에 부가되는 노동만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결과 자신과 그의 자손을 기진맥진하게 밀어붙임 노동에 대한 사랑, 노동에 대힌 맹렬한 열정이 짓누르게 되었다.

- 야생적 자연의 카오스 속에서 어떤 척도도 없이 다양한 삶의 리듬을 생산하는 쾌락과 자유의 공간, 이것이 정원의 이미지다. (130)

-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역량을 폄하하고, 또 다른 삶과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수동적 허무주의.

- 변화와 사멸이 반복되는 차안을 견딜 수 없는 인간들만이 영원과 불멸이 지배하는 피안을 추구한다.(131)

-니체는 완전한 허무주의를 내세운다. 이것은 생성의 무죄에 대한 긍정, 끊임없이 무너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있는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생멸하고 비산하는 차이들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그 순간, 그 현장에 온몸을 내던진다. (132)

-  우리의 사고의 고고학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산물이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만일 그러한 배치가 나타날 때처럼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가 가능성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데 불과한 어ㄸ 사나건이 .... 그 배치를 무너뜨리게 도니다면, 그때 우리는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이 인간이 이내 지원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푸코 말과 사물 439~440)

- 재현의 논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을 넘어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베르그손 말대로 철학이란,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서 사유하는 것, 달리 말하면 사유의 습관적인 작업방향을 전복하는 것이다.(135)

-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각하고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감각하기, 자신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의 극한까지가서   또 다른 사유를 낳기. 그러나 새로운 세계와 만났을 떄도 익숙한 것만을 발견하고 거기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사유는 사유 속으로 초월을 외삽한다.(135)

- 무언가가 깨지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예술을 없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슬픔을 동반하는 고통이 아니라 인가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고통이다. 익숙한 것을 재생산 하는 예술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것을 생산함으로써 인간의 감각기관 전체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예술. 그런 예술만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베이컨은 믿는다. --- 이런 예술은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있는 일종의 폭력을 생산한다. (140)

- 베이컨이 말하는 예술의 ‘폭력성’ 역시 마찬가지다.  익숙한 것에 가해지는 충격이며, 원초적 삶이 내포하고 있는 표현불가능한 강렬함을 의미한다.

- 사유와 예쑬이 발생하는 것은 지성이 곤혹스러워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극한에 이르는 사유나 행위는 항성 거기서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의 열림을 경험한다. 베이컨은 신체를 극한까지 몰고 가서 거기서 유기체를 넘어선 신체를 발견했으며, 아르토는 언어를 극한까지 몰고 가서는 무질서해진 언어, 언어를 초월한 언어. 물리적 진동을 되찾은 새로운 차원의 언어를 발견했다. (143)

- 비재현적은 작품은 관개의 지성이 아니라 감각에 호소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를 ‘발견’하기보다는 ‘발명’하기를 요구한다. (146)

-  익숙한 감각이 위협당한다고 느낀 대중들은 날을 곤두세우며 방어벽을 쌓는다.(149)

- 베르그손은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을 구분한다. 가능적인 것은 실현되기전의 상태로서, 그것은 실현된 것을 통해 역으로 유추된다. 실현된것은 언제나 가능성과의 유사성을 통해 파악되며, 다른 가능성들의 제한을 내포한다. (예 의사가 된 아이의 가능성등)

- 사실 따지고 보면 실현된 것으로부터 가능성을 추출해 낼 뿐이다.

- 이와 달리, 잠재성과 짝이 되는 개념은 실현성이 아니라 현실성이다. 가능적인 것은 실현된기  전에는 실재하지 않는 반면, 잠재적인 것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실재한다. 실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이다.

- 싹이라는 현실성은 땅 속의 씨앗이라는 잠재성과 어떤 유사관계도, 어떤 우월성도 없다. 싹으로 현실화 된 것과 현실화 되지 못한 것 사이에는 위계가 아니라 ‘차이’가 있다. (153)

- 잠재성은 땅 속의 씨앗처럼 보이지 않을 뿐 지금 여기 공존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153)

- 지금 이 책을 읽는 사건과 이책을 읽지 않는 사건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화 되지 않은 사건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재적 차원으로 존재한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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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되도록이면 빚을 좀 털어야겠다. 계산해 보니 이자만 몇십이다. 모으는 것은 둘째치고, 계속 빚지면서 살수 없다. 그러니까. 좀 털어내자. 그럴려면 사지말자. 아.. 내 머리속에 그 많은 신발들이 굴러다니는데...알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자꾸만 스스로 선물을 준다.. 내가 스스로에게 선물을 준다. 그것은 엄연하 선물이다. 어떤 댓가가 아니니까. ㅎㅎㅎ 내 스트레스의 보상이라고하면서, 하지만 오히려 더 스트레스 받을 뿐, 하나를 소유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니까. 어쨌든 이번연도내에 다는 아니더라도 반정도는 해치워야겠다..  

그리고 살빼기. 옷이 맞는게 없으니 자꾸 또 옷을 사고 싶다. 펑퍼짐한 걸로. 살빼면 입을거 많은데.. 스트레스는 운동으로 해소한다. 술도 줄이고,  

그리고 하일라이트! 

독서계획.. 리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집에 있는 안읽은 책들을 읽는다. 사고싶은 책이 있어도 당분간은 사지 않는다. 일단 온라인으로 강의 한달에 하나씩 들으면서 혼자 소화하기 어려운책을 독파한다.  

- 강신주, 고병권, 이정우 강의듣기.  

- 1월에 읽은 책.. 다섯째아이, 굿바이사교육, 시간의 놀라운 발견, 길을 읽어야 진짜 여행이다. 재현이라 무엇인가. 철학 삶을 말하다. 위험한 경제학, 크로스, 평화가 깃든 밥상.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지금 읽고 있는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차이를 횡단하는 모험. 네 고통는 나뭇잎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차이와반복  

- 앞으로 읽을 책... 니체와 들뢰즈 중심으로 .. 차이와 반복/짜라투스트라/싹트는 생명  

- 민기... 영어공부 습관 등. 집안일도 열심히~

**** 이렇게 쓰고 나니 힘이 솟는다!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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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이제 보지 않는다.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나를 부품으로서 더욱 견고한 부품,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자신을 계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만들어진 욕망에 대한 저항과 거부감때문에 자기계발서를 노상 들여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계발을 위한 열정과 나의 게으름 사이에서 무엇이 더 훌륭할까 생각해보면 행동하는 그들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근 1년간 일이 너무 하기싫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이 싫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일에 대한 성취감도, 지위에 대한 욕심도, 돈에 대한 욕심도 이제는 없는데, 내가 왜 계속 직장에 다녀야 만 되는가... 그런 생각때문에 그만그만 하게 유지만 해왔다. 그러다 보니 내 업무적으로도 버벅되는 순간이 급기 오기 시작했다. 일하나는 자신 있다고 믿어왔는데, 역시 신경을 안쓰는 만큼 일을 빵꾸가 나기 마련이다. 내가 능동적인 입장이 아닌 유지의 차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어불성설이긴하다. 내가 근무하는 이조직이 아무리 느슨 조직이지만, 이렇게 일을 놓고 사니,,, 이것도 아니다.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는 노동의 존엄성을 조작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본가들의 조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노동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조작하여 내가 하는 이 일들이 나에게 어떤 존엄성을 부여준다는 것은 착각인지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할 뿐이지 무슨 존엄인가? 그럼 너무 삶이 비참해 지지 않는가?  내가 일하는 이유를 오로지 소비하기 위해서 일을 한다면 소비의 욕망을 줄이고 다른 삶을 꿈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일이 커져버린다...! 결국 다른 삶을 꿈을 꾸면서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수는 없다. 그러면 현재의 일상을 낯설게 감각하기..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 과연 가능할까?  

임경선씨의 책에서는 그 모티브를 다시 얻었다.  "노동의 유희"  일을 하면서 즐거움에 빠지는 것. 이것이말로 지극히 일상적인 것일지 모른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즐거워 하는 것, 현재를 현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동의 유희성, 일의 즐거움을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고 내 머릿속에 다시 집을 짓는 것. 그렇다면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지겹지만은 않을 것이다.  2010년에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다. 여러모로 늘어져 있던 나에게 자극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임경선의 2030대 직장여성으로 살아가기를 읽으면서 다시 나 자신을 조이는 시간을 가졌다.  임경선씨의 치열한 20대의 모습, 지금 선택한 길에 대한 만족감과 직장생활에 있어서 여러 에피소드에 대한 현명한 처신들을 보면서,  지금의 나태한 내모습에 대한 반성도 많이 하고, 다른 환경으로 진입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직장상사와 동료들에 대한 관계도 배울 수 있었다.  잘해나가야 할텐데... 잘 해날갈 수 있을것이다. 일단 일을 재밌게 하고 싶다.  

철학 삶을 말하다(강신주).. 오늘 아침에 만난 구절에서는 노동이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김훈이 말하는 이 밥벌이의 지겨움이 나온다.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노동이 놀이가 되면 더이상 그것은 고통이 아닐 것이다. 결국 내가 마음먹기 나름인 것인가.. 노동을 유희로 만드는 것이 나의 몫인가...?  일이 재밌고, 그 일로 인해서 먹고 산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노동이 수단이 될 수 밖에는 없지만 그 수단과 목적을 좀 더 가깝게 하는 노력은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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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한 로렌스의 책을 처음 읽고 있다. 생전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명 사르디니아의 여행기라고 한다.  가만있자.. 사르디니아가 어디인가? 스페인 어느쯤인 것 같다. 읽으면서도 어디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중해의 그 하얀집과 파란바다를 상상했던 나에게 초반부터 로렌스는 적나라하고 실감있게  기차와 배의 멀미부터 선사해주시더니 이제 배에서 내려 항구에 도달했을 때는 현대화되지 않은 거리의 쓰레기와 오물의 풍경을 친절히 묘사해주신다... 역쉬 친절한 여행기는 아니였다. 하지만 애로물이라는 오명의 명작 북회귀선의 작가라는 나의 선입견을 금방 넘어버린다.   유머러스한 비유와 날카로운 관찰력, 인간들에 대한 직관과 통찰 등 그의 시크한 매력 빠져 열심히 읽어나갔다.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이 어떻게 작가들은 이리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프루스트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것은 기억일까 창조일까.. 창조된 기억일까? 분명 그는 여장을 풀고 시간을 내어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썼을 텐데 어찌 이렇게 세밀한 묘사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면서 그 많은 생각을 했다가 풀어놓는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한장면 한장면 머리속에 사진을 찍어놓고 이렇게 앉아서 하나하나 그 사진들을 보면 아 그때 내가 느꼈던 것들을 묘사하고 비유하고 창조하는 것 같다. 마치 대사하듯이..

 여행 중 나는 풍경을 보면서 곧잘 내가 무엇을 좀 느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불안해한다. 나를 압도만큼의 풍경을 본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감각이 무딘것인가? 어쨌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못느끼고 있다는 강박감 때문에 풍경들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와 재미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이러저러한 인간이겠지? 내 그간의 편견들을 작동시켜서 상상하는게 생각의 고작일 것이다.  로렌스는 타인들을 들여다 볼때도 예리한 관찰력으로 꿰뚫어 본다. 타인들의 허세와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알맞은 변명을 붙인다. 종종 웃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이다.  

 똑같은 9일의 시간을 보냈어도 나는 기억과 조우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 밖에 감각하지 못하겠지만 로렌스 등 작가들은 능동적으로 시간을 감각하고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9일간의 여행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  이것이 소위 밀도를 가지는 시간, 두께가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에게 하루란 긴 하루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만큼 빠르다는 것은 여행을 갔을 때 1박2일을 지나고 월요일 출근길에 주말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었을 뿐인데 곰방 후딱 지나간 것 같이 느껴진다.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영화를 보았을 때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금방 시간이 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 차이는 의식적인 시간을 보내는지 수동적인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은 나도 끊임없이 하지만 로렌스 같이 상황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상황과 거의 무관한 잡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뚝뚝 그 잡념속에 현실이 끼어드는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에게 하루란 긴 하루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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