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페이퍼들을 읽어보았다. 2007년이 처음이였고, 내 기억에 꽤 길었다고 생각했던 리뷰들은 진짜 짧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조금 세련되졌다는 것. 아직도 글의 뒷심은 항상 부족하다. 예전의 페이퍼도 잘 나가다가 마무리가 어째 좀 .....하자.. 이런 식으로 자기자신의 결심이라던가,,이렇게 끝을 맺는다. 다소 촌스럽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사람은 힘들때 글을 많이 쓰게 된다. 지금도 힘드니까 이렇게라도 순간, 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이들때는 심리학에서 답을 찾으려고도 하고 철학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하기도 한다.

나는 묻는다. 내가 제대로 묻고 있는지.. 그 질문 자체의 숙고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질문부터 다시해야 답도 다시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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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벙커1 강신주의 늙음에 대한 간단 후기를 써본다.

전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이후의 늙는다는 것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전 자본주의시대에 늙음의 경험이 쌓여 현자로 아랫사람에게 존경이 대상이 되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없음으로 용도폐기가 되버리기 일쑤다. 이제 경험에 따른 정보는 너무나 널려있으며, 누구도 어르신들에게 묻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 해서 최신식의 기계를 만나고 적응해야 하는 것이 벅차며, 최신상품에 소외되고 만다. 그 늙음의 폭이란 것은 점점 더 짧아져서 이제 십대, 이십대를 지난 삼십대도 최신 전자제품 사용을 배워야하며, 배우자 마자 또 새로운 상품이 계속 대체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프로그램과 기계를 매번 새롭게 배워야 하고 부끄러워야하는 상황이 오고 마는 것이다.  

강신주박사님은 다소 맥빠지는 결론이였지만, 효는 아니지만, 언젠가 우리도 늙고 용도폐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부터 어르신들을 지키면 나중에 그 자리가 남아있지 않겠는가...하였다. 내가 우리엄마를 아빠를 소홀히 한만큼 우리 자식도 나한테 그렇게 할텐데.. 한편 두렵지만 기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주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어찌보면 냉소인데,  사실...부모님을 버리고 몇년간 잘 살아오긴 했다.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을 벗고 내 멋대로 살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그들을 챙기겠다는 말은 아니고, 이제 조금씩 챙겨야겠다는 얘기다. 쓸만큼 쓰고,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는 나누어주어야 할때. 그다지 많이 가져서 그런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냥 내 수준에서 잘 놀았다 싶다. 내 것을 좀 줄이고자 한다. 늙을 수록 더 현명하고 지혜로와 져야 한다. 내 남은 인생을 한병철도 얘기했듯이 늙지는 않고 불시에 죽어버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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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경련이 어제부터 일어난다. 왼쪽 눈꺼풀 위에 파르르,, 파르르 떨린다. 누구는 마그네슘부족이라고 하고 누구는 피로누적이라고 한다. 내 삶의 피로가 눈꺼풀 위에 앉았나.. 심한 다크써클도 그렇고 어릴때부터 종종 알던 다래끼.. 눈이 수난시대는 계속 이였다. 내 신체의 가장 약한 부분이 눈이라서 그런가.. 큰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소한 이런 것들이 신경이 쓰이는 약하디 약한 신체. 그 약한 신체와 어울리는 정신.

 

건강함이라... 어제의 숙취로 손발이 떨린다. 혈당이 급격히 올라간듯... 이렇게 관리가 안되서 큰일이다. 술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불시에 죽기를 원하는가. 불시가 아닌 적시에 죽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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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리파이너리에서 커피마시면서 이책을 읽고 있다.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아도르노의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몇장의 셀카를 찍어본다. 어색하게 늙은 내 모습이 보기가 좋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포기하자. 그렇다고 싫어할 것도 없고 당당할 것도 없고 머리속에서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명령에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보가 명령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눈에 빛은 사라졌는가. 내가 가진 육신의 뇌는 어떠한다.

삶을 집도하는 집도의로서, 거친프레임에서 때로는 가벼운 유리같은 프레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삶에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답일지 모른다.

어떤 프레임을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관계 역시 유동적인 것이다.

관계라는 것 역시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다른 것을 느끼는 법.

점점 더 많은 차이들을 읽어내게 되고, 그 차이들이 모여 정보가 되기도 하지만,

정보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밖에 모른다.

따라서 입체를 만드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조금 지어진 일부일지 모른다.

 

김유동의 해제에서 발췌해본다.

아도르노(1903~69)

 작곡가의 삶을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간 아도르노는 티 하나 없는 거울처럼 외부 세계를 온전히 자아 속에 기록하고는 ' 더 많은 주체'를 가지고 가장 깊이까지 반성하고 해석하여 이론을 만들고 사악한 전체인 사회에 맛 결을 거슬러 솔질을 하듯 저항을 한 시민의 적이면서 최후의 시민이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삶과 사상은 '20세기 문화가 자기 표현에 이른 것'이라고보아도 될 것 같다.

 

... 미나마 모랄리아의 방법은 개념적 학문이나 형상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글쓰기가 어떠한 것인지 보여준다.

 

자신과 외부 세계외의 견실한 관계 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후기산없사회에 오면서 무력화되고 불구화되고 있는 것이다.

 

체계의 그물망이 더욱더 촘촘해져가는 상황에서 어떤 진정한 출구도 없이 그 세상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또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과 그 삶의 토대인 세상을 긍정할 수 밖에없는 현대의 개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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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천재들을 다시 읽고 있다. 다 읽었는데도 리뷰를 바로 쓰지 않으니 생각이 안나서 다시 읽고 있다. 책 서두에 정혜윤피디는 김한민에게 편지를 쓴다. 림보까페에 김한민. 저자간담회를 갔다온 나로서는 아 이 두분이,, 강신주, 정혜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 자기목소리를 가진 사람들. 김한민 역시 림보까페도 좋았지만, 삶의 태도에 영감을 받았던 작가다. 정수라는 것을 뽑아내고, 밀고 나가는 것. 정혜윤은 사생활에 있어 천재적인 이들에게서 절도를 보았다. 어찌보면 의지와 비슷한 말까지만, 절도라는 것은 욕망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천재는 박수용 다큐멘터리 감독이였다. 소몰이꾼으로 자라난 그는 자연 안에서 세계를 배웠던 사람이다. 시베리아 호랑이를 기다리면서 한평의 비트에서 몇개월간의 그 숲의 짐승이 되어 기다림을 배웠다고 한다. 마침내 호랑이를 대면한 장면 이라던가.. 그의 이야기는 어찌 인간의 겸허함을 보여준다. 변영주 감독은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진 세월을 넘어온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그리고 자기를 비운 몇년의 시간동안 질문하고 배웠던 그 시절에 대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 보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나의 관념적 일상은 편하고 쉽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답답한 마음을 토로할 뿐이지.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집에가서 청소도 좀 하고 빨래도 하고 정리 좀 해야겠다. 보기싫은 것들도 똑바로 봐야한다. 진실을 내 안에 있다. 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투사해야한다. 열심히 봐야 한다. 그래야 큰다. 어린애같이 요동치지 말자.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있지는 않다. 처음과 끝을 알고 있으니,, 하루하루는 만들어 내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우리 머릿속에 주입된 것은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리가 바로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라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너나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성립하는 사회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요. 중요한ㄴ 것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가라는 기예art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해줍니다. 자신의 존재를 예술작품(기예의 대상)으로 삼는 것,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일입니다. ' 프랑스어네는 '처세술, 셍활의 기술을 의미하는 art de vivre라는 표현이 있는데, 슈뢰더와 푸코에게 이 표현읜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 기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 히로세 준 <봉기와 사랑에 빠지다>-1p

 

책 서두에 인용문이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담담히 삶의 여정을 써내려 간다. 어떻게 어린시절은 무데기들을 그리 소상히 기억하고 있을까. 박수용, 김산하, 변영주, 윤태호.. 그들의 열정. 삶의 뜨거워지는 순간을 가진 그들의 삶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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