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리파이너리에서 커피마시면서 이책을 읽고 있다.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아도르노의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몇장의 셀카를 찍어본다. 어색하게 늙은 내 모습이 보기가 좋지 않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포기하자. 그렇다고 싫어할 것도 없고 당당할 것도 없고 머리속에서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명령에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보가 명령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눈에 빛은 사라졌는가. 내가 가진 육신의 뇌는 어떠한다.
삶을 집도하는 집도의로서, 거친프레임에서 때로는 가벼운 유리같은 프레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삶에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답일지 모른다.
어떤 프레임을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관계 역시 유동적인 것이다.
관계라는 것 역시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다른 것을 느끼는 법.
점점 더 많은 차이들을 읽어내게 되고, 그 차이들이 모여 정보가 되기도 하지만,
정보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밖에 모른다.
따라서 입체를 만드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조금 지어진 일부일지 모른다.
김유동의 해제에서 발췌해본다.
아도르노(1903~69)
작곡가의 삶을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간 아도르노는 티 하나 없는 거울처럼 외부 세계를 온전히 자아 속에 기록하고는 ' 더 많은 주체'를 가지고 가장 깊이까지 반성하고 해석하여 이론을 만들고 사악한 전체인 사회에 맛 결을 거슬러 솔질을 하듯 저항을 한 시민의 적이면서 최후의 시민이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삶과 사상은 '20세기 문화가 자기 표현에 이른 것'이라고보아도 될 것 같다.
... 미나마 모랄리아의 방법은 개념적 학문이나 형상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는 글쓰기가 어떠한 것인지 보여준다.
자신과 외부 세계외의 견실한 관계 설정 속에서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치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 주체'였던 예전의 개인이 후기산없사회에 오면서 무력화되고 불구화되고 있는 것이다.
체계의 그물망이 더욱더 촘촘해져가는 상황에서 어떤 진정한 출구도 없이 그 세상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또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과 그 삶의 토대인 세상을 긍정할 수 밖에없는 현대의 개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