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닥터.

우리가 가진 감정들은 마음의 신호

예를 들어  자실은 과거의 낡은 자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희망하는것.

 

세상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나는 초심자는 아니지만 공감가는 그의 말들을 옮겨적어본다.

 

- 정신치료의 1차 목표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 궁극적 목표는 창살이나 감옥따윈 애당초 없었다는 걸 깨닫는 것.

- 지나친 도덕은 마음의 균형을 깬다. 악몽을 자주 꾼다는 사실은 그만큼 당신이 착하다는 반증이다. 아주 작은 나쁜 감정조차도 꿈으로 속죄해야 한다는 것이니.

(예전에 비해 나의 악몽은 많이 사라졌다. 이제 꿈이 비유와 상징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의 걱정과 있었던 일이 그대로 꿈에 재현된다. 그것은 나의 내면의 억압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던지. 더 깊은 무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대로 우린 적어도 우리 내면이 말하는 대로 움직일 수는 있다. 자존감의 시작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움트는지도 모른다.

마움이란 운영체제를 최적화시키는 소스 코드가 있다. 우린 그 코드를 지혜라고 부른다.

자아..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것. 순간의 나를 느끼며 균형있게 확장하는 것.

자존감은 있는 그래로의 내몸과 마음을 충분히 느끼는 것. 애당초 높이고 낮추는 것이 아니다.

성취를 통해 자존감을 느끼는 건 마음의 입장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 기대했던 자존감 대신 돌아오는 건 공허감과 무가치함뿐이므로

(자존감이라는 것은 자아존중감이라고 한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타인과의 상대적이 자기평가기준이라고 볼수 있을까. 자존감을 있은 그대로의 자신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존감이 높다 낮다란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자존감이 항상 낮은 것은 아닐까... 어떻게 자존감이란 것을 높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을 은연중에 하면서 살아왔던 거 같다. 애당초 높이고 낮추는 바 없이 내면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자신을 믿고.. 그렇게 생각하면 될까. )

정신치료는 시간 싸움이다. 마음 속 깊은 곳의 변화는 느림과 함께 성취된다.

왜 사소한데서 스트레스를 받을까요? 세상의 사소함과 심리적 현실에서의 사소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느낌 감정이란 열쇠로 무의식을 통찰할 기회

많이 퍼주는 사람 중 일부는 역설적으로 사랑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다. 양육자로부터 방임되어 자란 그들은 부모를 탓하기보다 자신을 탓하는 서글픈 부채의식에 쌓여있다. 그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시작한 봉사활동은 속죄의식으로 변질되어 상대를 속죄양의 제물로 착취하는 아리러니에 빠진다.

많이 퍼주는 사람에 속한다. 받은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받고 싶은 만큼 더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뼛속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고 감히 떠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내가 얼마나 사랑에 의존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누구를 감히 탓하기 보다는 희생과 손해를 통하여 댓가없이 나를 나눠주는 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자학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

실망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실망이라는 것은 기대로부터 비롯되고 기대라는 것은 현실의 왜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외부의 어떤 대상을 범주화하려는 순간부터 그 대상의 본질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왜곡된 허상이 내 마음속을 대신한다.

범주화하려는 습관때문에 이렇게 삶이 피곤하다.

죄책감... 정당한 분노조차 억압시키는 통에 팔자에 없는 공황장애 유발.

일탈은 사회적 영향력을 재확인함으로써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종의 자가 치유행위다. 비난을 받을지언정 힘을 확인하는 것이 적어도 나르시시스트들에 있어선 자기 존재감을 지키는 데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이 없는 것 때문에 죄책감이 생긴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나에게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내가 그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님 이제 겉과 속이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림움을 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 그리워한다는 건 이미 내안에서 영원이 싹튼다는 것. 그리움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영원이라는 것일까.

공허감. 지나치게 의존했던 대상을 상실한 뒤 느껴지는 마음의 착각.

때론 버려지는게 두려워 버려진 채로 남는다

서운함은 초라한 자책이 빚은 신기루

사실은 화가나는 것인데 서운함이라고 표현한다. 자칫 그 화 때문에 더욱 초라해질까봐 그저 서운함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용서는 악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의리에 대한 집착은 배신에 대한 지나친 혐오때문이다. 우린 배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배신을 통해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배신은 우릴 쓰라리고 아프게 하지만 의존심을 치료하는 순기능이 있다.

배신당할까봐 항상 불안에 떤다. 배신당한적도 없으면서. 배신당할 각오를 하자.

자살충동에는 낡아빠진 과거의 나를 소멸시키라는 암시가 숨어있다.

미리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재의 사랑을 앞에 두고 과거의 사랑이 자꾸 떠오른다고 해서 지금의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남자에게 과거의 그녀가 있음을 알았을 떄 대부분은 아직도 그리워할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정작 그 불안의 본질은 의구심보다 가장 특별한 존재 되고자 했던 열망이 꺾인 후 생긴 분노다. 그 열망은 되도록 빨리 체념하는게 좋다. 갖고 있으면 남는 건 외로움뿐이니.

과거의 사랑이 떠오르는 것은 현재의 사랑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랑보다 과거의 사랑이 깊었기 때문이고 그 상실과 공허를 현재의 사랑이 채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때는 그때이고 현재는 현재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란함이 단순히 쾌락을 향한 도착이 아니라 속죄를 통한 애도일 수 있음을.

이별은 누구의 탓도 아니나 서운함은 타당한 분노조차 자책으로 만든다.

거짓말은 복종의 또 다른 표현

복종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부딪치기 싫어서이고 부딪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위한 거짓말도 있는 것. 복종일 때도 있지만 복종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아이가 장차 띠게 될 색깔은 양육자가 낀 색안경의 색과 같다. 아이는 보는 대로 자란다.

보는대로 자라지만  부모외의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달라질 수 있다.  

어른 - 심장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행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심장이 하는 말과 생각이 하는 말을 잘 구분할 수 있을까.

세상에 절대 호인과 악인은 없다. 찰나의 호연과 악연만 있을뿐.

시기심을 부정하면 수치심이 그 자릴 대신할 뿐. 부러운걸 부럽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하다.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은 기대를 낮추는 것. 기대를 낮추는 것은 상대방 역시 나처럼 서투르고 나양한 사람이란 점을 받아들인 것.

기대를 낮추는 것이 마음을 접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 역시 나처럼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필요한 말이다.

아첨은 불신의 산물이다. 지나치게 예의바르다는것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피학적인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의 잔인한 행동에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상대의 힘을 나눠가지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즐긴다.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들 주변에는 언제나 나쁜 사람이 있다. 얼핏 나쁜 사람이 그들을 이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이 내면의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남들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 중 일부는 부적절함과 서로 다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억울한 감정에 휩싸인다면 그건 당신이 의존적이라는 뜻이다.

우유부단하지 않으려면 먼저 남 덕 볼 생각을 없애야 한다. 우유부단함은 자기의 뜻과 남의 뜻 사이에서 선택을 못 할때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한 남의 뜻이란, 우리의 생각이 전가된 허상의 것이기에 우유부단함을 결국 나와 또 다른 나와의 끝없는 싸움이다.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이 인간 같지 않은 무리를 대하는 최선의 태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허전하다면 그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본질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

수치심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믿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외도를 안 이후 많은 커플들은 우리 관계를 다시 예전처럼 회복할 수 있을지 자신 없어 하면 불안해한다. 그럴때마다 난 꼭 다시 예전처럼 살아야겠는냐고 반문하는 편이다.

과거의 그녀들은 질투한다. =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 그의 엄마보다 더

우린 사랑일까 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이어질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다면 그건 상대를 나의 일부로 여긴다는 증거

나만 사랑해 달라는 말만큼 이기적인 말도 없다. 사랑은 상대가 아니라 그의 바깥을 품는 태도이다.

의처증과 의부증이 갖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건 행복의 대부분을 상대방에게 그만 의존하고 이제는 나 스스로를 가꿀때라는 신호라는 것.

남자는 여자의 관심, 친절, 애정을 모조리 욕정의 폴더에 저장하고 여자는 거절당함, 혼자 있음, 뜸한 연락을 죄다 버려짐 폴더에 간직한다.

당신의 남자 옆에 온갖 유혹을 다 하는 여자가 눈에 밟히더라도 절대 동요하지마라.

남자의 노력에 사랑을 허락하는 여자는 있어도 여자의 노력에 마지못해 사랑을 만드는 남자는 없기 때문이다.

때론 집착의 본질이 그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통제력으로 밝혀질 때가 많다.

상대방이 내 맘대로 따로오는지 안오는지에 대한 덧없는 의구심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만 낳는다.

만나자마자 활활 타올랐다= 서로 많이 외로웠다.

미움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을 향한 애정에서 자란 태생적 속성 때문이다.

상대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순간이 더 가까워질수 있는 기회다.

공감이란 소통의 길이 있으니까.

이건 무슨말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깨닫게 하는 건 그 사람도 나도 아니다. 상실과 시간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우린 점차 사랑을 알게된다. 상실은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것이야말로 사랑이었다는 벅찬 느낌을 채워준다.

부재를 통하여 사랑을 확인한다는 뜻이다.

불신은 사랑의 상처를 막아주지만 불안은 막을 수 없다.

만신창이가 되는 게 연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 이유

연인.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 상대방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

위기를 겪어봐야 안다. 내가 진정 사랑했던 게 상대라는 우주였는지 아니면 그저 관계라는 알량한 향수였는지. 의심은 버거운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일종의 빌미. 그것의 부산물이 고통인 점을 미루어 보면 걱정의 존재 목적은 자기 징벌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당신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커플이 최고

자주 싸운다는 건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뜻.

피학적인 희생은 배려가 아니라 의존이다.

희생이라는 것이 배려가 아닌 의존, 자학이라는 것.

혼자 살아도 아쉬울 것 없다고 느낄 때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

흔들린다.

남성, 이미 마움이 떠났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

여성, 다른 남자에게 빠질 것 같으니, 좀 붙잡아 달라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메시지

생각이 아닌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란 흰 토끼를 쫓을 때 지구란 별에서 그나마 행복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

걱정.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미래의 시점에 대입시키는 시제호응 오류, 세상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마음의 경고 신호. 걱정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긴장 그 자체.

제 흥에 끌리는 대로 살 용기를 갖춘 사람을 일반인들은 천재라고 부른다.

조바심보다 더 악랄한 덫은 없다.

선택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기쁨과 만족이 되어야 한다.

세상과 자연 그리고 무의식의 공통점은 잔인함과 친절함이 공존한다는 것. 생존과 삶이 공존하며 헷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

에필로그

삶이란 여정에서 우릴 힘들게 하는 두 가지, 시간과 관계는 아무리 혼자 발버둥 쳐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은  이 둘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 어쩜 이 사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수월할 지 몰라.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포유동물들은 그저 나약한 존재. 나 자신과 서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더 평화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길이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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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2명 신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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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1 강신주 강의를 가면편 1강을 듣고 간단히 리뷰를 적어본다. 평소 내가 궁금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강신주선생님은 인간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가면을 쓴 사람

둘째, 가면없이 맨얼굴로 사는 사람

셋째, 가면을 썻다 벗었다 하는 사람.

 

가장 좋은 것은 가면을 썻다 벗었다하는 것이다. 그것도 유효적절하게 상황에 맞게 가면을 써야 될때와 쓰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생존, 생계와 관련되서는 가면을 써야 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전 아주 못되처먹은 직장상사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진 수모를 겪으면서 참고 또 참았다. 그때 나는 내가 두려워서 참는것지 드러워서 참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녀가 두렵기도 하고 드럽기도 했던것이 맞을 것이다. 두고두고 그녀에게 한마디 던지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고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녀는 나의 상사고, 그녀가 입을 잘못 놀리는 날에 나에게 안좋은 여파가 두고두고 나돌것이였으며, 그녀때문에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휴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이였기에 나는 그냥 참았던거 같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나의 참을성에 대해 모두 놀라워했다. 하지만 내가 참고 참은 것이 후회가 되는 것을 보면 어차피 싸워서 이길 수는 없는 상대이긴 하나 한 번쯤을 안 참았으면 어떨까 싶다. 다 참을만해서 참긴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참을 것 같지 않다. 강신주는 맨얼굴은 나중에 한방에 그 직장을 그만두거나 할 수 있을때 벗어도 된다고 말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어떤 면으로는 가면이다. 내 맨얼굴을 보여주는 것. 생각해보면 거의 난 맨얼굴로 산다고 생각이 든다. 가면을 더러 쓰기는 하지만 그 두께는 얇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맨얼굴을 보여줬을때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걱정으로 사람들은 가면을 벗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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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

 

삶을 생산에 부수된 하루살이 현상으로 격하시킨 삶과 생산과의 관계는 완전히 부조리한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을 위한 목적이라는 이 어리석은 상황에 대한 예감마저 삶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된 것은 아니다 축소되고 퇴화되 본질은 스스로를 피상적인것을 변질시키느 마법화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아직 생산의 질서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지는 않은 생산에 거역하는 힘에 의해서만 인간은 좀더 인간적인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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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읽지 않은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두고 장바구니의 책들을 본다. 언젠가 읽어야지 하는  책들. 올해들어서 무거운 책을 몇개월씩 끌고 가고 가벼운 책은 주말을 이용해서 다 읽어버린다. 원저를 읽기를 시도 하고 있으나, 아직 벤야민이 시초고, 벤야민 다시 읽기를 하반기에 해야한다..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겠다. 작년과 올해 초는 지젝을 많이 읽었다. 어디다가 밑줄을 쳐야 할지  잘 모르겠는 책이 좋다. 몇번이고 다시 읽어서 눈에 들어오는 책. 지력을 다해서 읽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 나의 핑계이다. 술마시고 괴로워하는 시간은 있으면서 책 읽을 시간을 없다니.. 반성하자. 읽으면서 쓰고 싶은데

황병승 가야 되는데.. 가면 집에서 욕먹고, 그냥 사무실에 7시 까지 책보고 가야겠다. 운동을 한시간할까...

운동한시간 하고 집에가는게 정신건강에 좋겠다.

운동하면서 강신주강의도 마저 듣고..

오늘 하루도 이렇게 가는구나. 카톡질과 인터넷에 잦은 접속, 알라딘에 페이퍼 최소한의 할일만 하고,,

 

결국 어제 술한잔하고 열두시나 되서 집에 들어갔다. 가서 .. 피곤하다. 발바닥도 저리고.. 몸이 개운하지가 않은게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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