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신체와 언어사이의 간극

아니 에르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단순 명료한 문체로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왠지 평범한 문장들이 서늘하다. 뜨거운 욕망을 서늘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글은‘욕망의 정확함’과‘무서운 솔직함’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문체는 은유나 비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수사, 연민 같은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그녀의 페르소나였던 글은 그녀 자신과 섞여버렸다. 그녀의 소설 속 내용이 충격적이라기 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말투가 특별하게 여겨진다.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너무나 덤덤하게 얘기한 나머지 먼 과거에 있던 일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의 그녀에게는 그 일은 바로 오늘 일어난,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정』보다 나는 『탐닉』이 더 좋았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

 그녀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진 말은 “그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이다. 아니 에르노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모든 경험속에서 '의미'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주시한다. 자신이 S를 얼마나 욕망하는지, 사랑의 진실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녀는 의미를 찾지 않고, 그를 욕망하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두려워하는 그녀의 '시간'을 그린다. 시간 속에남겨진 것은 '글쓰기에 용해된 욕망'이다. 단순히 고통을 씀으로써 고통을 완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을, 고통을, 쾌락을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언어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분열이 존재한다. 인간은 언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적확하게 표현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어쩐지 우리는 글과 동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계속 쓰게 만든다.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가 글을 씀으로해서 '거리'를 생산한 것이다. 그 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거리이다.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며, 내 육체와 감각과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사건』

 우리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타자의 생각, 관념 그대로 자신의 경험이 복기 될 뿐이다. 어제의 나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읽어주는 대로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언어로 복기하면서 자신에게 붙어있는 세상의 고정관념들을 파괴하고 자신의 문체로 말하기를 시도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아니에르노라는 새로운 보편’을 만든다.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 『부끄러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이 타자는 실제적인 눈앞의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방향성이다. 모두가 원하는 그것, 이데올로기, 자본, 성공 등 우리의 욕망은 타자들의 욕망과 같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욕망들을 기술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빠져나가 자신의 욕망을 발명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굶주린 여인

 『탐닉』은 13세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세계적 주목을 받는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로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였다면, 그리고 끔찍하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듯 했다. " -탐닉 11P-

 우리는 책을 읽으며 그녀의 광기를 체험한다. 고통과 쾌락의 혼종인 주이상스를 탐닉하는 그녀는 많은 시간을 그를 기다리거나, 그와의 격정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그를 상실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들로 채운다. 그녀는 욕망의 시작되면 곧 빠져들 고통에 대해서도 마치 즐기는 듯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글 어디에서도 수치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연하를 만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연하를 짝사랑하고 있다면 묘한 수치감이 들 것 같다. 그녀는 그녀가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점이 어쩌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사실을 적는다. 그녀는 수치심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욕망의 가치, 즉 자기에서 어떤 지고의 쾌락을 가져다 주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그것을 누렸다. 스스로 매몰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 패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사랑하기를 멈추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탐닉』에서는 프루스트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싶다. 프루스트의 '갇힌 여인'이 아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굶주린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허기는 그녀의 삶의 원인이다.

 글쓰기 욕망

 "나는 모든 생을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 그 자체였다”

그녀가 S를 추앙한 이유는 그가 어리고 잘생겼으며, 러시아인이라는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녀의 남자에 대한 욕망은‘결여’때문이다. 욕망의 원인은 결여이고, 우리는 자신의 결여를 보충해줄 것만 같은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면서 욕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과 우리의 결여가 일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깡과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것은 근원적 상실과 관련이 있다. 인간존재는 태어나면서 대타자(부모)와 관계 속에서 발생된 주이상스(쾌락)가 언어를 배우면서 상실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각자의 욕망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욕망의 구조 속에서 평생을 반복하면서 산다. 작가의‘남자에 대한 욕망’은 다시 말해 근원적 상실을 보상하려는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새로운 욕망은 글쓰기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글쓰는 행위는‘자신의 발명’이다.

작가의 책을 보면 쉽게 읽혀 쉽게 쓴 것 같지만 이 소설에 대해 말하기를,

“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인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이 소설에 몰입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수많은 퇴고 속에서‘잉여가 없는 문장’을 추구했던 작가의‘정확함’에 대한 강박적 노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면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글쓰기의 욕망이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남자를 욕망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글쓰기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쓰기의 효과로 주체의 현실을 창조했다.

한 남자를 사랑 혹은 욕망한다는 것. 거기엔 저울이 필요없다. 이론도 필요없다. 오직 열정과 고통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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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일도 하지 않지만 언제나 기소된다 ㅡ레비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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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이즈 섹스? - 성과 충동의 존재론, 그리고 무의식 여이연이론 36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김남이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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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란 무엇인가?

 

알렌카 주판치치는 지젝과 함께 슬라보니아 정신분석이론자이다

그녀는 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정신분석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로 고려하고자 한다.


라캉은 나는 지금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섹스와 같은 만족을 얻는다고 말한다. 성충동을 승화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 섹스와 같은 만족을 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기와 섹스의 만족이 어떻게 같은 것이며, 성적만족에서 도대체 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성개념이 도발한 추문 혹은 오해에 대해 그 개념이 너무 지성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하기의 만족 (혹은 모든 종류의 지적행위에서의 만족)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행위들의 굴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섹슈얼리티를 놀랍게도 지적인 행위로 승격시키는 것에 대한 것이다”(10)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인간의 성충동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을 승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이 성충동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면 유아기의 성충동이라는 것은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 언어프로그램이 심어지기 이전의 쾌락(주이상스)가 다형적인 충동으로 남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에서 이란 무엇인가. 알렌카 주판치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정신분석에서 성은 무엇보다도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 현실의 끈질긴 모순을 정식화한다.

둘째, 이 모순은 부차적 차원에 제한되거나 환원될 수 없고, 이 존재자들의 바로 그 구조화 속에 바로 그 존재 속에 모순으로서 연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성은 존재론적 문제인 것이다.

이어가는 논의에서 성과 존재론에 관해 다시 물을 것을 그녀는 제안한다. 이 책이 제안하고 있는 바는 성적인 것이 정신분석에서는 어떤 위치이자 관점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씨름하게 만드는 모순의 독특한 형식이라는 점 때문에 위치가 중요한 것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떠한 모순일까

오늘날 치료사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여전하다. 말하지만 섹슈얼리티를 일반적인 인상 특히 유아 섹슈얼리티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성교’, ‘성적실천들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도 섹슈얼리티가 바로 다양한 성적 실천들, 암시들, 의미들의 배후의 심오하고 아주 까다로운 문제들이였다는 점은 아이러니 하다.

프로이트 역시 성적 행위는 섹슈얼리티 자체의 내재적 곤경과 어려움으로 재 이중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 자체가 중요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프로이트 역시 섹스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것이라고 답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는 당신이 말하는 그 섹스라는 존재가 도대체 뭐란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19)

알렌카 주판치치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성적인 것(탈구된 부분충동들이란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불리는 동물의 궁극적 지평이자, 일종의 환원불가능한 인간성의 정박이라고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성적인 인 것은 비인간의 작동자, 탈인간화의 작동자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성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의 본능적 차원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의 출현과 동연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체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주체는 상징계 내에서 주인기표의 삽입에 있에 발생한다고 보았을 때,  주인기표(언어적세계)와 함께 성이 주체를 출현하는데 그 역할을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인기표는 성충동을 억압하면서 주체의 출현을 도모하게 된다. 주인기표란 우리를 언어적 세계로 포획하기 위해 우리에게 강제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버지의 이름즉 부성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심리치료에서는 섹슈얼리티는 특정 경험과 기술로 축소시키거나, 부수현상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성에 관한 문제이거나, 성을 과장된 것으로 일축해 버리는 관점으로 본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완전한 성적 만족의 불가능성을 무의식적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구성적이고 통합적인 부분으로 간주한다. 성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생산하기 보다 성을 실재의 차원으로 복귀시키는 것. , 성을 인간적으로 생산된 모든 의미의 궁극적 지평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본래적인 무의미로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의 차원에서 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의 과제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유아 섹슈얼리티란 유아는 성적존재이며, 그것은 존재하지만 생물한 적이자 상징적인 프레임의 결여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성교와 같은 성적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유아기의 성적충동은 복합적인 성적충동(보기, 만지가, 빨기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성적충동은 성기라는 기관적 통일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닌 탈자연화된 충동들의 역설적이며 인공적인 자연화인 셈이다.

말하자면 빨기, 구강충동이 어떻게 섹슈얼리티와 만나는가? 이것에 왜 성적인가에 대해 논의가 누락되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플랑슈는 이것은 연습했던/ 실천했던어떤 만족이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 완전히 생략하는 설명이며, 쾌락을 성적으로 만드는 것은 쾌락 혹은 만족 그 자체가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타자속에서 있지만 오직 잃어버린 것으로서만 아이들에게 최초로 들어오는 어떤 것, 즉 마이너스와의 조우인 것이다. 유아의 충동들과 관련된 향유를 만드는 것은 바로 그 향유의 무의식(그것의 존재론적 부정성)과의 관계인 것이지, 좁은 의미에서 성교와 관련된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무의식은 억압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을 때, 사실상 억압은 오직 억압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고 볼수 있다. 억압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적인 것이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 “섹슈얼리티는 그 자신의 존재론적 불확실성 속에 있는, 무의식의 바로 그 거기-있음과 관계하는 것이다.” (30) 그리고 이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무의식은 섹슈얼리티에 있는 존재론적 부정성이라는 존재의 바로 그 형식, 섹슈얼리티와 지식의 독특한 방식/분열의 연결 때문에 이 형식은 현실적으로 인식론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존재론적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사라진 어떤 것. 금지된 것은 성적인 것에 대한 대문자 기표가 아니라 그런 대문자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지식과 성은 연결되어 있다.

고로, 섹슈얼리티는 방탕함 때문에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문자 기표, 대타자의 대타자가 없다는 지식 때문에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겨우 1장의 내용을 정리했는데도 부족하다. 처음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성', '쾌락' 이런 기표들은 기의와 너무나 달라붙어 있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은 성관계, 쾌락은 오르가즘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깡은 오히려 성관계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는 이러한 기표들은 자유로워 졌기는 하나, 아직도 알듯 모를듯 명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루하루 쌓이는 것 같다가 도대체 내가 뭘 알고 있는것이지?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그러나 여기 나의 주이상스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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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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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왔지만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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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교수의 세계철학사와 함께 읽는다
예전에는 지루했는데
지금보니 이정우교수님의 책은 뛰어난 맥락설명과 철학사를 관통하는 개념의 시원을 놓치지않고 설명한 뛰어난 저서 이다 이번에는 완독을 목표로 열심히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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