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발터 부르케르트 지음, 남경태 옮김 / 사계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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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기본 요소들과 그 구조를 상정하여 그들 철학의 재료로 삼지만, 그 원소, 혹은 요소들은 어디에서 온 것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소여 상태는 그리스 철학의 대 전제가 되며, 고유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서양 철학사 입문의 필수 코스 격인 코플스톤 신부나 사하키안 저서들 역시 그리스 철학 이전의 철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은 서양 철학사에서 ‘이미 주어져 있어서 더 이상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상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태동하던 당시의 주변 정세 속에서 그리스 철학과 문화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수메르에서 시작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국들이 그리스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동방의 대국이 벌인 정복 전쟁 속에서 그리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아는 것이 그리스 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 첫 걸음인 셈이다. 또한 전쟁에서 패한 나라에서 유입되어 들어온 사람들이 그리스의 과학과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말해 준다.

알파벳 문자의 유래, 호메로스의 작품에 들어 있는 동양 정서, 오르페우스교의 전파 등 각 장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그리스 문화가 서양 문화의 원천이긴 하되 막다른 골목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정석 수학의 집합 부분 같이 철학사의 선두에 서서 기어이 철학사 책을 서가 깊숙한 곳으로 밀어내게 만드는 힘을 지녔던 그리스 철학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책을 안 사고 못 배기게 만드는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지 않다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인문 서적 한 권을 읽었다는 뿌듯함까지 느낄 수 있다.


발터 부르케르트, 남경태 역, 사계절, 값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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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 Lumley - She Talks In Maths: Interpretation Of Radiohead [재발매]
엘리자 럼리 (Eliza Lumley) 노래 / Beatball(비트볼뮤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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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고를 때 원작이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것은 감독이 어떤 변형을 가하든 새로이 창작된 영화보다 튼실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미 원작을 본 경우라면, 그것이 어떤 낯선 형식으로 변화되었나, 혹은 얼마나 원전을 잘 살렸나 살펴보는 것이 영화 내용 자체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다.

비틀즈의 음악들을 다양한 장르로 해석하는 시도들은 변형이 가져온 재미와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거나, 역시 원곡을 따라 올 수 없다는 비틀즈에 대한 변함없는 찬탄을 내뱉게 만들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해석으로 원곡과는 다른 맥락에서 귀를 휘어잡을 때에도 역시 비틀즈의 원곡이 얼마나 완벽한 음악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대표적 넘버들이 재즈로 해석되어 발매되었다 했을 때, 이 앨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라디오헤드의 곡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커버된 곡들이 High and Dry, No Surprises, Karma Police 등 라디오헤드 베스트 음반 격의 구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원곡을 망쳐 놓았다는 원망이든, 이런 식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놀라움이든 세평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앨범의 운명이다. 데뷔 앨범의 실패가 대개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해서 오는 것과 반대로 이 앨범의 실패는 엄청난 비난 속에서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패리스 힐튼이 존 바에즈를 부르겠다고 나선 모양새라면 그냥 그러나 보다 하고 말 일이겠지만.

라디오헤드 커버 음반의 주인공은 1999년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 OST에서 Honey Honey를 불렀던 영국의 뮤지컬 가수 엘리자 럼리Eliza Lumley다. 엘리자 럼리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실연은 하지 않았지만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 <맨 오브 라 만차(Man of La Mancha)>의 OST에 참여하며 뮤지컬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재즈와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녀는 <She Talks in Maths>라는 앨범을 통해 이 둘에서 공유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재즈와 록의 간극을 메워보는 실험에 착수한다. <Bends> 음반에 수록된 Black Star는 트럼펫으로 처리한 도입부에 이은 퀸텟 편성의 재즈 트랙으로 재해석되었다. 이 곡은 작년 미국 드라마 <본즈(Bones)>의 OST에 삽입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OK Computer>의 수록곡이자 Creep과 함께 라디오헤드의 대표적인 넘버인 No Surprises는 나른하고 주술적인 느낌의 원곡에서 나른함은 살리되 절제된 피아노 반주와 청량한 목소리로 원곡 못지않은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외 다른 곡들에서도 역시 그녀가 행한 음악적 실험들은 상상을 뒤집는 악기 편성과 편곡으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음악적 변화의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She Talks in Maths> 음반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되려 라디오헤드 음악의 해석 가능성과 변주의 폭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감탄하게 되니 이 여가수에게는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원곡의 종교와도 같은 지위에 길들여진 팬들의 눈높이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어 성공적인 앨범을 만들어낸 신인 음악인의 용기와 음악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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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브루스 토마스 지음, 류현 옮김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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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레이크 뷰 공동묘지,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작은 묘지의 묘석에는 한 동양 남자의 흑백 사진이 끼워져 있다. 공동묘지 입구에 버스 한 대가 들어선다. 열 명 남짓한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무덤가로 향한다. 그들은 묘지 둘레에 잔디 보호를 위해 쳐 놓은 경계선을 넘더니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을 밟는지도 모르는 채 사진 찍기에만 여념이 없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들은 다시 버스에 올라 다음 여행지로 떠난다.

사진 속 남자는 한때 실전 격투의 제왕이라고 불렸다. 절권도의 창시자,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불과 다섯 편의 영화를 남기고 서른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전설의 액션배우, 다혈질의 성격과 과시욕 때문에 항상 싸움을 몰고 다니면서도 자신을 깎아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무술 철학자.

장사꾼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다스림을 받는 이 나라에서 그는 무술도, 철학도, 연기도 아닌 보험을 팔고 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내지르던 괴성과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동작은 이제 고객을 불러 모으기 위한 재롱으로 전락했다.

극도로 나약하고 불완전했던 몸으로 인간의 극점에 다다랐던 한 인간이 더 이상 돈과 웃음의 소재로 전락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기막힌 보험 하나를 들었다. 이 보험 상품의 이름은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 설계사인 브루스 토마스는 엘비스 코스텔로의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다는 만만치 않은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개의 인물사와 같이 이 보험 역시 연대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형식은 이소룡의 무술 철학을 담아내는 데 썩 안성맞춤이다. 뛰어난 무술인이 되기 위해 이소룡은 기술을 배우고 반복 수련하고 마지막엔 기술을 넘어선다. 이소룡은 처음 미국에 도착해 레스토랑 웨이터로 일하던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바탕인 영춘권 수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고정된 싸움 방식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무술을 익힌다. 그것은 흠 많은 자기 내면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절권도 수련생이기도 한 이 설계사는 자신이 연주자가가 되기 노력했던 과정을 이소룡의 가르침에 투영해 봄으로써 이소룡의 가르침이 단순히 무술이라는 영역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 보험 상품은 이소룡을 우스운 광고 모델에서 해방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광고에 속아 결제 일자에 애태울 애꿎은 이들의 통장 잔고를 확실하게 지켜준다.

이 보험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이 상품이 만들어질 당시 함께 지켜봤던 주변 분들의 증언이다. 또한 비슷한 이름으로 출시되었던 이전 상품들이 편협한 시각으로 이소룡을 만화 속 영웅으로 묘사하거나 여자관계 복잡한 약물 중독자로 매도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수많은 자료 조사와 인터뷰로 인간 이소룡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어떤 고객은 액션 영화를 싫어해서 이소룡을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미 이소룡과 관련된 보험쯤 몇 개는 들어 놔서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하다. 폭력이 싫어서, 무술을 배울 용의가 없어서, 성룡과 이연걸이라는 신상품에 만족하고 있어서 이 상품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싫다는 사람에게 굳이 권할 마음은 없지만 안쓰러운 마음마저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은 포스트 이소룡을 말하며 거기에 만족하며 산다지만, 포스트 이소룡은 어디까지나 이소룡에서 파생되어 나온 상품이다. 또한 이소룡은 폭력 전도사가 아니라, 반폭력 전도사다.  비폭력과 반폭력은 다른 것이다. 비폭력을 지고한 가치로 착각하는 사람에게 영화 <노맨스랜드>는 말한다. 전쟁의 현장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전쟁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폭력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넘어서는 힘과 지혜가 필요하다. 순진한 무장해제 따위는 절대로 아니다.

이소룡에 관한 상품들이 넘쳐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어떤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느냐다. 인간 이소룡인가, 영화배우 이소룡인가, 행복한 판매고를 예상하고 출시한 인구 속 회자되는 이소룡인가. 이 상품은 몸소 무술가가 돼보라 권하지 않는다. 철학자도 영화배우도 될 필요가 없다. 다만 인간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소룡마저 희극인으로 전락하는 이 시대에 누구의 인간성인들 보장될 수 있을까. 수해나 화마, 책 도둑에 유의한다면 한 번의 등록으로 평생 보장이 가능한 이 보험, 원로원식 화법을 빌리자면, 꼭 들라고 하는 건 아니다.


브루스 토마스, 류현 역, 김영사, 값 2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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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하니? - 지구촌 친구들의 인권 이야기
세이브더칠드런 지음, 설배환 옮김 / 검둥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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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최대 관광도시 씨엠립, 중국계 베트남인 보트피플의 정박지를 보기 위해 톤레샵 호수 유람선에 오른 적이 있다. 배가 수상 가옥들 근처를 지나자 고무 통을 노 저어 배 난간에 붙어 서는 아이들이 일제히 원 달러를 외친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돈을 줘 봤자 그게 그 아이들 몫은 아니라고, 작은 보탬, 사는 동안 간직될 고마움,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일 달러 줘 봤자 변하지 않을 일상들을 일 달러 안 주는 것으로서 각성시키자는 것인가? 다시 모터가 돌자 더 갈급히 손을 내미는 아이들, 자기를 봐 달라 손을 흔드는 소녀, 손을 모으는 아이 엄마. 몇 백 달러 쯤 들어 있는 지갑을 단속하며 그들의 모습에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나는 행복한가?

『너는 행복하니?』는 1919년 영국에서 설립된 Save the children Fund가 생존 위기에 처한 세계 각국 아이들의 실상을 알리고 그들의 생존권과 더불어 어른들에 의해 무심히 지나치기 마련인 어린이들의 권익을 신장하고자 발간한 책이다.

코소보에 사는 사란다는 열두 살이 되던 해 세르비아 군인의 폭격으로 집을 잃었다. 피난을 갔다 돌아온 후 사란다의 가족은 폐허 위에다 종이 상자를 이어 붙인 임시 거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수개월을 살아야만 했다.

부르키나파소에 사는 아마두는 오늘도 금광 갱도에 들어가 사금이 들어 있을 만한 돌을 캐내고 있다. 콩고의 열한 살 소년 주이르는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소년병에 지원했다. 열한 살 소년 크리스티앙이 사는 콜롬비아 메델린에서는 대낮에도 노상에서 갱단들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그들이 어리다고 해서 갱도가 무너질 시간이 지연되거나 총알이 알아서 빗겨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동구의 어린이는 자라서 동구인들의 생존 문틈에 총알을 박아 대는 어른이 될 것이며, 콜롬비아 뒷골목 어린이는 자라서 조카뻘 되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총질을 해대는 마약쟁이가 될 것이다. 에이즈로 일찌감치 부모를 잃은 우간다의 어린이는 자라서 덜 자란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는 에이즈 환자가 될 것이다.

Save the children Fund를 위시한 세계 각국의 많은 구호단체들이 그 지역에 가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든 영원히 자라지 않을 어린이를 대상으로 구호 활동을 펼치지 않는 한 먹고 살기 힘든 어린이들은 결국 먹고 살기 힘든 부모가 되고 말 것이다. 『너는 행복하니?』라는 물음은 그들보다 먹고 살기 나은 우리더러 너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주거, 교육, 위생을 비롯한 어린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제반 조건에 관한 이야기라면, 사실 너는 지금 행복하냐는 것은 이 나라 독자들에게는 불필요한 질문이다. 이만하면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더 이상 사회에서 아무 것도 할 의지가 없는 배부른 정권에서 KTV의 입을 빌려서나 할 소리지 않나.

『너는 행복하니?』는 표면적으로 어린이의 삶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린이의 삶의 조건을 만드는 어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장을 덮으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땅 파면서 돈 나오길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 나라에서도 왜 잘 사는 사람의 사는 모습만큼은 좀 산다는 나라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걸까?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기획, 설배환 역, 검둥소, 값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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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과학 - 20세기 과학기술의 사회사
김명진 지음 / 사계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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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바람대로 독학으로 과학을 익힌 누리는 머리를 식힐 겸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을 잃고 과학의 성에 이른다. 누리가 성을 빠져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 성안의 과학 고수들과 대결을 벌여 모두 이겨야만 한다. 속도의 고수 스피더스, 작용·반작용의 고수 모멘토, 빛의 고수 옵티마. 각 단계별 고수들이 문제를 내고 누리가 문제를 푼다. 고수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내는 문제는 중고등학교 수준의 공식들이다. 따라서 중고등학교를 이미 졸업한 사람에게는 벅찬 문제들이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문제가 나오는 족족 풀어 젖히는 누리가 ‘스테이지 클리어’ 뒤에 설명을 해줘야만, 아 그런가 보다 싶다.

제목에서 표방하듯 『안티 사이언스 랜드』는 진지하지 않게 과학을 접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게임처럼 단계별 수행을 해 가며 진행되는 방식은 친근하기도 하고 부담도 없다. 문제는 각 장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과학 문제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독자층과 해당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전개 방식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독자층이 다르다는 것이다. 핵심 내용이 10대 중후반 이라면, 핵심을 도입하기 위한 이야기 설정은 10대 초반이다.

다루는 내용이 과학이되 진지하지 않은 과학 이야기라고 하니 생활 속의 과학,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엄청난 과학적 비밀이 들어 있었던 일상 습관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법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과학이라는 주제만 놓고 봤을 때는 10대에서 멀어질수록 읽기가 거북해질 터, 일반 성인 독자들까지 고려했다면 이 책은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전개 과정은 10대가 아니고선 참아줄 수 없을 정도다. 애초부터 독자층을 그렇게 상정했으니 아쉬울 것 없다고 한다면, 아무렴 그러시던지.

『안티 사이언스 랜드』가 개론서에 가깝다면『야누스의 과학』은 과학과 과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이는가를 다루는 과학사 책이다. 한 과학자가 새로운 합성 가스를 만들어내고 프레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티 사이언스 랜드』라면 어떤 화학 공식에 의해 이 가스가 만들어졌고, 이 공식을 적용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또 다른 가스는 없는지 설명할 것이다. 반면 『야누스의 과학』은 이 가스가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상용화되었을 때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과학에 대해 묻는 것은 공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가 아니라, 이 공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이 공식을 왜 필요로 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서 프레온 가스가 만들어지는 화학식은 중요하지 않다. 이 가스가 미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적 영향들을 대하는 사회 각계의 입장 차이, 첨예한 대립, 의견 조율과 타협 등 과학 자체보다 더 어려운 과학 저변의 문제가 이 책의 중심이다.

백군이 위성을 쏘아 올리자 이에 질세라 청군이 달에 깃발을 꼽는다. 금방이라도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의 소개팅이 성사될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더니 운동회 끝났으니 체조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오기 무섭게 달리기하다 삔 다리에 달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어서 배아줄기세포가 완성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단한 발견이 되기 위해선 사회적 환경과 부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달 표면의 생김새나 프레온 가스가 만들어지는 공식의 순수한 가치와 별개로 그것이 내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지금의 과학이다.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이러한 일반 인식이 어떻게 굳어지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 안에는 흥미로운 질문들이 많다. 게다가 질문들 대개가 딜레마다. DDT를 사용하면 환경이 오염되어 인간에 직접적 해를 가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 늘어난다. DDT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프리카 땅에서는 당장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것이다. 여기서 과학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인간의 활동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킨다고 말하는 것도 과학자고 지구온난화는 인간과 관계없이 진행된다고 말하는 것도 과학자인데 그럼 19살 이후로 과학하고 담쌓고 살아온 사람들은 대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오늘은 버스 타고 내일은 자가용 탈까, 종이는 분리수거하고 페트병은 그냥 버릴까?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과학이 과학으로 인정받거나 가설로 그치거나 하는 과학적 검증의 과정, 의료의 목적으로 복제된 동물을 생명체로 볼 것이냐 의료 도구로 볼 것이냐 하는 윤리적 선택의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갈등과 혼란으로 이야기로서의 과학은 풍성해진다. 그런 면에서 『안티 사이언스 랜드』와 『야누스의 과학』은 과학책을 읽는 두 가지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완성, 『안티 사이언스 랜드』, 함께읽는책, 값 13,800 원.

김명진, 『야누스의 과학』, 사계절,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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