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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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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는 모닥불이 지펴졌고 초상화가는 그가 지난 몇 달 동안 작업을 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자료들을 불 속에 던지고 있다. 사진, 비디오테이프, 물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이 불꽃의 크기를 키우는 사이 이제 남은 것은 한 흑인 소년의 나체가 그려진 캔버스뿐이다. ‘나’는 캔버스다. 캔버스인 ‘나’는 인간의 아픔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았다면 이제 곧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두려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이제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감탄하길 바랐다. 하지만 끝내 사람들 시선을 받지 못하고 나는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누가, 왜 나의 운명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초상화가 펠릭스 빈센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거부이자 미술 수집가인 스페흐트에게 자신의 죽은 아들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빈센트는 죽은 사람을 그려본 경험이 없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만을 그려왔고, 그것은 초상화가로서 그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는 <피에타>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창조적 그림 세계를 펼치고 싶다는 욕망을 기억하고 그 제안에 응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 거액의 수수료다. 이 돈만 있으면 초상화 일을 끝낼 수도 있고 지금의 작업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도 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리기 위해 죽은 이의 생전 눈빛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다 자신의 기억 속 한 소년의 눈빛과 마주하게 된다. 그 소년의 눈빛을 닮은 나는 싱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내가 싱어가 되는 것은 언제까지고 세상에 비밀로 부쳐져야 한다.

이 소설의 시점은 캔버스다. 캔버스는 화실 한 편에 고정되어 서 있다. 따라서 캔버스가 전달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화실 안이나 화실에서 듣거나 볼 수 있는 거리의 일들로 한정된다. 화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독자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사건을 읽는다. 캔버스가 화가의 의도를 가감할 수 없다는 한에서 ‘나’는 객관적인 전달자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는 딱 그 크기만큼의 사건만이 그려질 수 있다. 캔버스는 이야기를 전달함과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다 알 수 없도록 제약한다.

객관적이면서도 인간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캔버스의 자의적인 사건 전달로 이야기는 대체 어디로 진행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의뢰인과 그의 아들, 초상화가, 그의 아내와 아들, 기억 속 소년을 한 화폭 위에 올려놓는다. 여러 겹 덧칠해진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시간을 두고 녹아들며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가듯, 이 소설 역시 각각의 인물들과 얽힌 오해들이 한 장의 초상화 위에 서서히 합쳐지며 놀라운 그림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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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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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미국은 피노체트 군부를 앞세워 선거로 선출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후 17년간 칠레에서의 학살과 실종, 부패 말고는 더는 없을 공포정치를 지원한다. 1990년 9월 11일에는 조지부시가 의회에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했음을 선포한다. 그들의 적은 서구의 지원 아래 이란과 전쟁을 치렀고, 미국의 지원으로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한 이라크의 후세인이었다.

2001년 9월 11일 현대 자본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폭력이 각인된다. 1973년부터 36번의 9월 11일이 지나갔건만 사람들은 36년 만에 처음으로 폭력을 목격했다. 폭력이 대체 무엇이기에, 폭력을 규정하는 이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어떤 때는 폭력이 되고 어떤 때는 정당한 힘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폭력』의 저자는 폭력이란 “파괴를 수반한 강렬한 힘”이라 말한다. 그 힘이 폭력적으로 인식되느냐의 여부는 힘 자체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이란 무엇이냐는 힘의 출처가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되었든, 누가 학살했느냐에 따라 폭력이 되기도 하고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기도 한다. 이는 홉스에게 국가를 고안하게 했던 자연상태와 흡사하다. 저자는 자연상태란 공통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 말한다. 지구상에 국가는 있어도 지구국가는 없다. 미국이 지구국가를 자처하고 나섰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악의 축’들이 건재하는 한 지구적 자연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국가 내에서의 자연 상태는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정부가 광우병 발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했고 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교육법, 언론법, 토지 개발, 국가가 내세우는 정책마다 국민은 국가와 의견을 달리했다. 국가가 정당한 권력을 작동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자 국민은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권 퇴진”, 달시 말해 국가의 권력을 회수하겠다는 구호를 외쳤다. 국가의 힘의 원천이 국민이기에 국민의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권력을 회수하겠다고 나선다면 국가는 순순히 자신의 힘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힘은 배분되지도 회수되지도 않았다. 정당성을 의심받은 권력은 자신을 의심한 세력을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지켰다. 정당성에 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다. 그로서 시위대는 폭도가 되었고 촛불 시위는 폭력 시위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폭력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가 불거졌다. 전경버스와 컨테이너박스로 올린 명박산성이 시위대의 길을 막아 서자 정부가 쌓은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려는 사람과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항 폭력과 비폭력에 관한 논쟁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나의 폭력에는 침묵하면서 대항하려는 폭력에는 폭력적이라 주장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상황에도 비폭력은 고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서두에서 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비폭력을 규정하는 과정 자체가 폭력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재의 상황이 과연 자연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하나의 정당한 권력만이 존재하는 사회인가? 총을 든 상대 앞에서 꽃을 들기를 거부한 군대 사회에서, 정당성 없이 정당성에 관한 조변석개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두 명 죽인 것으로는 폭력의 강도를 느낄 수 없는 높은 폭력 감수성의 사회에서 우리는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의 폭력성을 키움으로써 잠재적 폭력에 맞설 것인가, 비폭력으로 무장해제하고 어떠한 폭력도 거부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폭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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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 영어, 미국화, 세계화 사이의 숨은 그림 찾기 라면 교양 4
문강형준 지음 / 뜨인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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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전공한 70대 노교수가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7세의 미국 아이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우리는 상식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내국인만을 대상으로 상품을 파는 기업의 입사 조건이 영어 점수라면, 입사 후 외국인을 만난 적도 없고 영어를 쓸 일도 없는 영업사원이 승진을 위해 퇴근 후 영어회화 학원에 다녀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과연 경쟁력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영어 열풍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을까?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의 저자는 언어의 죽음이라는 개념에서 이 열풍의 진앙을 파악해 들어간다. 언어는 최후 사용자의 죽음이나 급격한 환경 변화 등 자연적으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식민지 한국이나 남미, 아프리카의 예에서 보듯 지배국의 강제력에 의해 사라지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선 경제구조의 변화가 언어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예컨대 국가가 수렵, 채집 부족의 터전을 체벌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유입시킨다면 이 부족은 생존을 위해 농부가 되어야 하고 이로써 그들은 농사짓는 이들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가깝게는 인터넷 용어나 항공 용어가 그렇다.

영어가 세계어로 군림하게 된 것은 영미 제국의 팽창 정책에 이은 미국식 경제 구조의 강제적 이입 때문이다. 힘이란 것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미국 내에 일고 있는 미국의 쇠퇴 예상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세계어란 것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언어가 가진 권력 관계가 국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한 달에 80만 원을 호가하는 국제중 대비 학원에 다닐 수 있는 초등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한 한기 480여 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중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으로 구분되는 사회에서 영어 실력으로 경쟁력을 가늠하겠다면 경쟁이란 건 해보나 마나 아닌가. 이럴 때 영어는 학식도 학문도 아닌 권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소통의 편의,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표현은 미국식 경제 구조를 모방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계에는 미국식 영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 싱가포르, 자메이카, 인도 등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나라는 영미 말고도 많다. 그러나 한국인이 생각하는 영어는 미국식 생활방식을 빼고선 말할 수 없기에 밥 말리 식으로 더듬거리는 영어를 영어로 생각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소통과 경쟁력이 영어 교육의 목표라면 백인 미국의 영어를 추종하는 게 아니라 한국식 영어를 정착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어로도 회의 진행이나 토론에 능숙한 사람을 만나 보기 어려운 현실에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논의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슬픈 외국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어로 노래를 못 하던 사람이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잘 부르게 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못 부르는 노래라도 영어로 불러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가 수단이 아니라 물신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영어를 한다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일일까? 저자는 영어에 제자리를 찾아 주자고 말한다. 그 첫 단계는 사회적 문제제기다. 강화도조약을 Kang-hwa island treaty라고 가르치려 한다면 교육 당국에 교육 효과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이미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린 영어를 학문과 문화 소통을 위한 언어로 되돌려 놓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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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빠의 몰락
로버트 H. 프랭크 지음, 황해선 옮김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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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속옷 브랜드에서 보석이 박힌 1,200만 달러짜리 속옷을 출시했다. 말할 것도 없이 안 팔렸다. 하지만 제조사는 큰 이익을 남겼다. 이 속옷 덕에 사람들은 100달러짜리 속옷을 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이야기다. 한국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이 일화는 소득 최상위 계층의 지출이 중산층의 소비패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출 연쇄 반응으로 중산층이 소유하는 주택, 승용차, 의류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런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노동 시간을 늘렸고 도심에서 멀어졌다.

통근 시간 30분의 24평 아파트와 통근 시간 한 시간의 40평 아파트 중에서 사람들은 대개 통근 시간을 늘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가계 저축은 감소했고 부채는 늘었다. 스스로 노동 시간과 통근 시간을 연장했고 이에 따라 여가 시간이 줄었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 중산층의 이야기다. 미국의 이러한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저자는 소득세 중심의 현행 조세 제도를 소비세 중심으로 개편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감세 정책은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중산층에게 부자의 소비패턴을 강요함으로써 세수가 줄었고 공공 서비스가 약화되었다. 약화된 공공서비스는 곧바로 질적 개선을 위한 민영화 정책으로 전환됐고, 사회복지는 축소되었다. 부시 정부가 행한 공급 중시의 감세 정책은 결국 최상위 1%에게 중간 소비계층의 40배에 해당하는 세금 혜택을 누리게 했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사정이다. 부시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그대로 들여와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감세 정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저자의 이름부터가 로버트 아닌가. 아, 라벗이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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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큰 사상가
박영호 지음 / 두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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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말씀이 있었으니, 사람은 생산 도구가 아닌 마음 씀과 마음 나눔으로 이루어진 영적 공동체이다. 동물로 태어났으나 동물로 자라나지 않고 영성을 키워나갈 길을 열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19세기 산 20세기 철학자 다석 류영모다.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말로 철학한 다석의 이름이 낯설다면 씨알 사상의 함석헌 선생에게 씨알을 심어준 이가 바로 다석 류영모임을 생각하면 것이다.

20여 년간 류영모를 사사한 다석 사상의 대가 박영호가 쓴 『다석 류영모』는 다석의 삶과 사상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에게서 몸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 하지 않았던 다석인 까닭에 그를 알 수 있는 단서는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일화와 그가 남겨 놓은 다석 일지가 전부다. 게다가 다석이 남겨 놓은 글들은 그만의 철학 용어로 작성되었기에 그에게 직접 배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해독할 수도 없다. 저자 박영호는 다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집과 다석 사상에 비춰 고전을 해석한 책들을 발간한 바 있다.

그것들이 본격적인 철학서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이전 저작물들을 접하기 전에 다석의 삶과 사상의 전반에 관해 미리 학습해 볼 수 있는 입문서다. 저자는 다석의 사상이 현실의 우리에게 절실한 말씀이자 나아가 자본 경제와 생태 파괴를 바탕으로 한 인류 문명의 대안이라 말한다. 그는 다석을 앎으로써 우리 인격이 크게 탈바꿈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다만 우리 삶에 돈의 절실함과 소비 위주의 삶의 방식이 너무도 크게 자리 잡은 까닭에 모든 것을 버리라는 다석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이가 얼마나 될까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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