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비타 악티바 : 개념사 6
공진성 지음 / 책세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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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미국은 피노체트 군부를 앞세워 선거로 선출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후 17년간 칠레에서의 학살과 실종, 부패 말고는 더는 없을 공포정치를 지원한다. 1990년 9월 11일에는 조지부시가 의회에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했음을 선포한다. 그들의 적은 서구의 지원 아래 이란과 전쟁을 치렀고, 미국의 지원으로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한 이라크의 후세인이었다.

2001년 9월 11일 현대 자본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폭력이 각인된다. 1973년부터 36번의 9월 11일이 지나갔건만 사람들은 36년 만에 처음으로 폭력을 목격했다. 폭력이 대체 무엇이기에, 폭력을 규정하는 이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어떤 때는 폭력이 되고 어떤 때는 정당한 힘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폭력』의 저자는 폭력이란 “파괴를 수반한 강렬한 힘”이라 말한다. 그 힘이 폭력적으로 인식되느냐의 여부는 힘 자체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이란 무엇이냐는 힘의 출처가 정당한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되었든, 누가 학살했느냐에 따라 폭력이 되기도 하고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기도 한다. 이는 홉스에게 국가를 고안하게 했던 자연상태와 흡사하다. 저자는 자연상태란 공통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 말한다. 지구상에 국가는 있어도 지구국가는 없다. 미국이 지구국가를 자처하고 나섰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악의 축’들이 건재하는 한 지구적 자연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 국가 내에서의 자연 상태는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정부가 광우병 발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했고 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교육법, 언론법, 토지 개발, 국가가 내세우는 정책마다 국민은 국가와 의견을 달리했다. 국가가 정당한 권력을 작동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자 국민은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권 퇴진”, 달시 말해 국가의 권력을 회수하겠다는 구호를 외쳤다. 국가의 힘의 원천이 국민이기에 국민의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권력을 회수하겠다고 나선다면 국가는 순순히 자신의 힘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힘은 배분되지도 회수되지도 않았다. 정당성을 의심받은 권력은 자신을 의심한 세력을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지켰다. 정당성에 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다. 그로서 시위대는 폭도가 되었고 촛불 시위는 폭력 시위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폭력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가 불거졌다. 전경버스와 컨테이너박스로 올린 명박산성이 시위대의 길을 막아 서자 정부가 쌓은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려는 사람과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항 폭력과 비폭력에 관한 논쟁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나의 폭력에는 침묵하면서 대항하려는 폭력에는 폭력적이라 주장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상황에도 비폭력은 고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서두에서 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비폭력을 규정하는 과정 자체가 폭력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재의 상황이 과연 자연상태를 완전히 벗어나 하나의 정당한 권력만이 존재하는 사회인가? 총을 든 상대 앞에서 꽃을 들기를 거부한 군대 사회에서, 정당성 없이 정당성에 관한 조변석개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두 명 죽인 것으로는 폭력의 강도를 느낄 수 없는 높은 폭력 감수성의 사회에서 우리는 폭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의 폭력성을 키움으로써 잠재적 폭력에 맞설 것인가, 비폭력으로 무장해제하고 어떠한 폭력도 거부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폭력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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