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9월 내맘대로 좋은책
"위기의 주부들"
아웃키리노 나츠오 지음, 홍영의 옮김 / 다리미디어
지난 여름엔 문자 그대로 미친듯이 추리소설이 쏟아졌다. 제아무리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라지만, 제발 이제 그만 좀 나와! 라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그러나 정말 많은 신간 추리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6년 전에 출간된 <아웃>이다.
이 책은 1998년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으로 2004년 미국 에드가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과 인물, 짜임새를 잃지 않고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내러티브를 지닌, 흡입력 100%의 추리소설. 한 권, 한 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를 읽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도시락 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네 여자가 있다. 구조조정으로 오래 다닌 직장에서 해고된 후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사코, 없는 형편에도 빚을 내어 과소비를 하는 탐욕스러운 성정의 쿠니코, 자리보전한 시어머니와 딸, 손녀까지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과부 요시에, 도박과 술집 여자에 미쳐 불성실해진 남편 때문에 고민이 많은 야요이. 네 여자 모두 각자 힘겨운 삶을 견디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더이상 남편을 참아내지 못하게 된 야요이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는 늘 침착해 보이는 마사코에게 도움을 청하고, 마사코는 그녀를 돕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살인을 완벽하게 은폐하고 한 남자의 시체를 처리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 요시에와 쿠니코마저 이 일에 말려들고,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던 네 여자는 잔혹하고 위험한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살인 전과가 있는 도박과 매춘업자가 살인자로 몰리는 가운데, 시체를 토막내어 유기하고 뒷처리하는 과정이 손에 잡힐듯 리얼하게 그려진다.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므로 비위가 약한 사람은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얼핏 쉽게 덮고 넘어갈듯 보이던 사건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복잡하게 뒤엉키고,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또한 커다란 내적 변화를 맞는다.
얼핏 평온해보이는 일상 바로 곁에 폭력과 죽음의 세계가 놓여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지만 필요에 따라 한없이 잔인하고 이기적일 수 있다. 때때로 차마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닥쳐온다. 가족의 무관심과 몰이해에 계속해서 상처입고 무릎이 꺾인다. 복잡한 세상에서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건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고 말해야 하는 게 문학-예술이 아닐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끔찍한 시간을 견뎌낸 후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면 새로운 문을 찾아서 열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 거짓 이야기를 꾸며내든, 망각을 선택하든...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결국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명제이다.
"나는 스밀라에게 반하지 않았다"
소년이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얼음과 눈, 숫자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스밀라 외에는.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웃에 사는 한 소년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스밀라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책을 읽는 건 스밀라,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행위이다. 아니다. 곁에 서서 그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이다. 600여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전체가 통채로 '스밀라'다.
스밀라는 정말 특별한 여자다. 그린란드인과 덴마크인의 혼혈인 그녀는 이전 어느 소설의 캐릭터보다도 독특하고 냉정하며 (자신에게조차) 탱크 같은 행동력을 지녔다. 동시에 놀랄만큼 다정하고 다분히 감상적이며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익숙하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않는 그런 사람이다.
중간에 읽기를 여러 번 멈추고 책 귀퉁이를 여러 번 접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인간과 사물, 세계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사유와 성찰과. 스밀라의 뒤에 바짝 붙어선 채, 차갑고 먼 북구의 바다를 헤매는 자신을 발견한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생존해나갈 방법 찾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 스밀라에게 생존의 이유는 바로 '이해'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해의 소설'이다.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 스밀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희망' 때문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 표현되는 무엇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인간에 대한 고요하고 깊은 이해와 성찰이 담긴, 진심으로 일독을 권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책'. 소설가 김연수의 진심이 담긴 추천글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글의 마지막 문단을 내 식으로 바꾼다면, 마지막 장면 속으로 잠시 들어가 그녀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고 '삶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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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여. 장르여."
아, 책이 너무 좋을 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좋은지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지 막막하다. <영웅문>을 모르는 친구에게 스토리를 이야기해주다가 말을 더듬는 것도, 를 읽어보라고 하긴 해야겠는데 얼굴만 벌개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게다.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이 SF 독서의 마지막이었는데, 이 책이 또다시 장르에의 애정에 기름통을 부었다. 케이트 윌헬름이 어슐리 K. 르 귄과 더불어 SF의 여성시대인 70년대를 풍미했다는 사실도, 테드 창이 그녀를 사사했다는 점도, 심지어 이 책에 주어진 온갖 수상 딱지와 찬사도, 이 책 그 자체보다 훌륭하지는 않다.
원폭, 불임으로 예견되는 인류의 종말, 클론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소재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작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사람'에 고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3편의 중편이 합쳐진 소설의 연결고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그녀는 속삭인다. 과학도, 사회도,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시적인 묘사가 가득한 짤막한 에필로그를 읽는다면, 이 책이 왜 SF 소설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외국어.실용담당 김세진
(sarah2002@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