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Fithele > 책장을 덮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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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1 - 네 개의 우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작년에 [다빈치 코드]를 필두로 역사추리/스릴러 붐이 일어서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장르의 책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그 바람에 [옥스퍼드의 4증인]이라는 이름으로 이전에 나왔다가 막상 구하려고 보니 절판됐던 이 물건도 예전 제목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이 제목을 달고 재간되었는데... 그 많은 소설에 대한 한탄아닌 한탄으로 빠지기 전에 얼른 결론만 말하면, 많은 역사 소설이 초유의 베스트셀러였던 [장미의 이름]의 이름을 선전 문구에 달고 나왔어도 그 이름값을 하는 책은 드물었다. 알라딘 마을 분들의 추천을 받고 재간을 사서 읽기 시작한 이 [핑거포스트 1663]도 그 베스트셀러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구입을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다른 리뷰어들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름값은 물론이고, [장미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선사해 주어서 비교당하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장미...]가 그 엄청난 박학과 중세 유럽의 문화 전반을 이용한 세밀하고 멋진 묘사로 가득한 대신 얘기 타래를 풀어 나가는 형식 자체는 너무나 솔직한 본격 미스터리인 데 반해, 이 책은 비록 사건의 내용은 거창하지 않고 묘사는 간명하며 역사 왜곡의 기미까지 보이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4 사람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증언, 이라는 그 독특한 형식 때문에 "푸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별이 10개가 허용된다면 10개를 주고 싶어지는 책으로 그 퀄리티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거나 다름없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이런 독특한 구성으로 인해 독자가 얻는 재미는 고전 미스터리에서 얻는 "누가 로저 래빗을 죽였나?" 보다는, "누구의 말이, 무엇이 거짓말인가?" 라는 문제를 풀어 나가는 재미. 첫 진술, 즉 마르코 다 콜라의 진술이 그렇게 눈길을 끌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당한 사건은 실제 단순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고, 본토인의 반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영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기행은 한국에서 번역판을 읽는 문외한에게는 생소해 보인다. 작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이태리인의 눈으로 본 영국의 꼴사나움(?)을 묘사하여 이야기를 양념하고 있고, 번역본에도 실존인물 리스트를 잠깐 소개하여 이해를 돕는 배려를 했다.
어쨌든, 진정한 재미는 잭 프레스콧의 진술로부터 시작된다. 콜라의 진술을 머릿속에 넣은 독자는, 당분간 프레스콧의 진술에만 의존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교묘한 글쓰기 탓에 프레스콧이란 사람은 자신이 적고 있는 자화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과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환각 내지 음모론으로 가득찬 안개 덮인 가시밭길을 뚫고 손톱만한 '진실'이라도 건지기 위해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물론 그 진실이란 "누가 그로브 박사를 죽였나?" 라는 의문, 앞서 나온 증인이 한 진술의 진위 여부, 그리고 후기에도 나와 있듯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대로 "4대 우상"에 사로잡힌 인간의 오해, 편견, 권위에 기대는 경향, 맹목 등으로 인해 손가락 사이로 흘러 없어졌는지도 모르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술의 진위를 가리며 퍼즐 조각을 찾아 헤매는 독자에게 있어 첫 증인 콜라를 제외한 나머지 세 증인이 털어 놓는 스토리가 마치 수면 아래의 빙산이 그 위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것처럼 황당한 스케일로 부풀어 올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가장 재미있었고 책장이 휙휙 넘어가던 파트는 대부분이 음모론이나 다름없어서 꼭 실존 인물이 나오는 무협지나 야사 같던 월리스 박사의 증언이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다른 우상이 아니라 자칭 이정표(Fingerpost)인데, 베이컨의 논지를 따라 진상을 밝혀도 얻을 게 없을 사람이 진상을 밝힌다고 자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당한 경험 탓에 상당히 수상쩍게 읽힐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함을 자아낸다.
게다가 그 진상이란 것도 역시 앞서 말한 인간의 편견과 경험이라는 절대 벗을 수 없는 옷에 싸여 있으니 더욱 황망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 소설 전체가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거대한 농담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제목에도 언급했듯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권당 몇백 페이지가 넘는 긴 책을 고통스럽게 읽은 기억도 싸악 잊고 머리 속에 들어 앉은 퍼즐 조각에 빠진 데가 없는지 다시한번 읽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 2권에 한 권당 만원이 넘는 가격이 압박이라면 압박인데, 새로 나온 보급판 2권 세트는 조금 싸졌기 때문에 구입은 그 쪽을 추천하고 싶다. 번역이 상당히 잘 되었기도 하지만 이 정도로 글을 간명하면서도 교묘하게 쓸 수 있는 작가라면 다른 저서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사 시리즈가 유명하다고 하던데 ...
한 가지 옥의 티가 있다면 역자 후기를 1권에 합본해 놨는데, 멋모르고 넘어갔다가 2권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조금 김이 샜다. 역자 분이 시대 배경 내지는 이 책의 주제인 "우상"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 주셨기 때문에, 완전히 다 읽고 난 다음 후기가 읽혀서 독자가 그동안 해 온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실제로 본인도 2권의 책장을 덮고 나서 1권의 후기를 다시 들쳐 보았다.
ps. 5백만 권의 장서가 있다는 보들리안 도서관이 영국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콜린 덱스터에 이어 여기서도 실감했다. 당신들은 축복 받으신 거예요......
책 없이 못사는 사람, 친구가 놀러와도 책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사람을 '책벌레'라고 합니다. 사각사각, 책을 갉아먹는 상상을 해봅니다. 물론 실제로는 아주 맛이 없겠지만, 책은 정말 훌륭한 영혼의 양식이지요. 당신이 책벌레라면 열광할, 책에 미친 사람의 이야기들, 그리고 언제나 일방적으로 읽히기만 하던 책들이 입을 열어 털어놓는 수다를 한번 들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