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러고는 내 손을 잡은 채 말하기 시작했네.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오래전부터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냥 아는 것과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건 다르다고 했어. 그래, 어떤 중요한 사실을 새로 깨닫게 되면 한동안 그 사실이 모든 생각과 꿈을 차지하게 되지.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건 언어가 아니라 그림처럼 영상화된 하나의 장면이라네. 그러다가 어느날 확신을 갖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좌우로 한 칸씩밖에 못 움직이는 장기처럼 말이야. 그런 게임은 계속하나 포기하나 마찬가지인 거야. 인생이라는 적은 '장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늘 한 수씩만 물려주지. 그래서 희망도 없으면서 유일한 한 수를 기대하며 사는 거야. 그렇지만 안나는 그 마지막 한 수마저도 지겨워져 버린 거지. 지겨워진 거라고!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