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세계사 시인선 15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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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의 시 세계는 썩어가며 악취가 진동한다. 그것은 썩어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이미 썩은 세상에 대한 묘사처럼 보인다. 가난과 그 부패한 삶의 냄새는 이연주에게 삶 그 자체이다("지독한 삶의 냄새") 이미 망할대로 망한 세상에서의 삶에 무서울 것이란 없다.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이 차라리 구원처럼 느껴진다는 그 삶은 죽음보다 무겁다. 죽음은 삶과 달리 "부패의 냄새가 없"고 삶과 죽음 사이는 "쉽고 간단"하다. 굶어죽기 직전의 한 남자가 "한 끼니의 식사를 제공해 준다면 그 대가로 저 강물에 빠져 죽"겠다고 제안하는 아이러니.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속에서 교환되는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죽음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삶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을 "돼지코의 진주"라고 명명하는 이 시인은 "파동의 꼭짓점에서" 도달할 고요, 흘러들어간 모든 폐기물들과 썩은내들을 품어줄 바다에서의 죽음을 소망하면서도 끈질기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연주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매일의 죽음을 견디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서서히 죽어가는 방식으로서만 삶을 연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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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전날 저녁, 나는 페이스북에서 문재인이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대선 토론 영상을 보았다. 대선 토론에 성소수자가 의제로 등장한 게 신기했을 뿐, 너무나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 사람―중년의 시스젠더 헤테로 한국 남성―이 ‘그런 생각’을 밝히는 장면은 내게 인지 충격을 주기엔 아무래도 시시했다. 그의 발언에 분노하는 친구들의 sns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적당히 공감하긴 했지만, 그들처럼 본격적으로 분노한다는 건 왠지 힘 낭비처럼 느껴졌다. 문재인에게 성인지 감수성과 관련해서 무엇도 기대한 적이 없으며, 어쩌면 그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문재인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엔 얼마나 많으랴……. 그리고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혐오하는 사람 특유의 흐리멍덩한 무지에 대해서, 그 흐리멍덩함이 얼마나 모두의 것인지에 대해서, 대체 어디부터 관심을 요구할 수 있으랴.

그날 오전에는 a집단에서 보고서 발표회가 있었다. 내 차례는 아니었고, 어떤 (모르는) 언니가 b시대 소설의 c이데올로기를 주제로 글을 써 왔다. 사실상 그 주제는 문재인의 문제 발언과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니는 문재인의 동성애 혐오와 자신의 발표 주제를 연관시키며 보고서를 끝맺었다. 뭐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타당한 것도 같고 억지인 것도 같은 그 논리는 자꾸 곱씹게 되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d역 근처에서 애인처럼 보이는 여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 언니를 봤다. 그걸 보면서 나는 발칙하게도(?) 세상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깨달아 버렸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쉬우니 실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는 거군. 내가 분노했다면 그건 아마 부조리보다는 무력함을 향한 거였을 테다. 무-동력無-動力. 영원히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영원히 정지하는 세상.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게 애초부터 그렇게, 시동이란 것이 걸리지 않게 설계된 고장난 시스템 같은 것.

그리고 그날 밤에, 나는 2년도 더 된 고등학교에서의 학교폭력 사건을 고발했다. 왜 해가 지난 사건을 그날 그 야심한 시각에 고발했는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했고 나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내 성격적 특성을 참고하여 홧김 아니면 우연이겠거니 하고 단순히 결론지었다. 그냥 떠올랐고 곱씹다 보니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정념을 날것 그대로 분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현대인의 연장된 신체-스마트폰이 마침 손안에 있었고 글을 썼다. 글이 유명해졌고 친절한 몇몇 사람들이 1년 넘게 사건 해결을 위해 같이 고생해 주었으며 교장을 비롯한 교사 여럿이 해고되면서 사건은 끝이 났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오늘 소설을 읽다 불현듯 그 사건이 떠올라서 비공개 처리해 둔 그 게시글을 다시 읽었다. 그 글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 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논리로 전개되어 있었다. 글의 첫 문장은 학교에서 행해졌던 교내연애 색출과 문재인의 동성애 혐오 발언을 연결하면서 사고의 시작점을 명확하게 지시한다. 명확하긴 한데 지시만 하고 끝이다. 지금이야 ‘교내연애가 금지된 학교에서 미성년자들의 연애가 일종의 퀴어한 만남일 수 있으며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없듯 교내연애 또한 허가와 금지의 대상일 수 없다’는 식으로 이어붙일 수 있게 됐지만, 그 당시에는 꿈에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연결한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뭔가. 문재인한테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면서, 그 사건도 잊고 있었다면서. 그저 그날 그 언니의 발표까지를 포함한 일련의 모든 사건이, 어쩌면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모두가 내 사고의 발화점이 되어준 게 아닌지를 짐작할 뿐이다.


최진영의 「돌담」​*​은 장미에 관한 이야기와 유독물질이 들어간 장난감을 만드는 나의 직장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가 어릴 적 살던 고향의 풍경 위에서 병치시키고 있다. 나는 이 애매하게 관련된 두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장미에 대한 열등감에 가까운 동경과, “그들의 살”(227쪽)이 되고 싶었던 게 “절대로 아니”(227쪽)라고 되뇌는 마음은 과연 얼마나 밀접한가. 쪽문에 장미를 버려둬도 “괜찮겠지”(226쪽)라며 도피하는 나의 비겁한 모습은, 내가 ‘회사가 유독물질이 들어간 장난감을 만들도록 놔둬도 “괜찮겠지”’라며 도피하지 않는 계기로 사용되기 위해 계산적으로 덧붙여진 것일 뿐인가. 그 전에 나로 하여금 장미를 피하게 했던 “수치심”(226쪽)과, 회사에서 받은 “모욕감”(220쪽)은 너무 결이 다른 것 아닌가. 나의 고발이 비겁과 모욕을 딛고 발화된 것이라 할 때, 그건 대체 무슨 비겁이며 무슨 모욕을 일컫는가. 그게 현재에 대한 성찰을 낳은 과거의 비겁과 합당한 정도의 연관성이 있다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한마디로, 장미에 대한 기억의 반추가 현재의 고발에 결정적 변수가 되었음을 암시하기엔 연관성의 밀도가 너무 낮다고 느꼈다. 특히 과거 이야기는 너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미래의 죽음 또한 꼭 필요한 설정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미래의 동생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을 돌이켜 보게 하기 위함이라면 너무 잔인하고, 미래의 죽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어차피 그렇게 될 일들’에 대한 태만함을 보이고 싶었던 거라 해도 죽음이 너무 쉽게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다소 성기게 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분명히 둘을 대응시키듯 서술한다. “괜찮겠지, 괜찮겠지”하는 “기만하는 수법”(226쪽)을 공통분모로 두 사건을 연결한다든가, “그들의 살이 되고 싶었나?”(227쪽)라는 물음에 “나는 장미의 동생이 되고 싶었다”(227쪽)고 자문자답한다든가. 또 “설마 몰라서 가만있겠어?”(220쪽)라는 영업부장의 꾸지람에 연이어, “설마 그러겠어?”(221쪽)라며 장미를 방치해 두었던 과거에 대한 회상이 등장한다든가.

어린시절 : 장미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쪽문에 장미를 버려두고 온 기억 ; 장미래의 죽음

직장 : “나도 처음부터 뼈는 아니었다”(226쪽) ; 회사의 부조리를 내면화한 나의 모습 ; 고발

이렇게 작위적으로나마 정리해서 써 보아도 뭔가 와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것은 내가 ‘구성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거나 ‘두 이야기가 억지스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단언해버리지 못한다는 거였다. 스스로의 작품 분석 능력에 대한 불신도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차치하고) 실제 변화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곤 한다는 믿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이라도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어떤 인물을 떠올릴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욕심 혹은 속죄에의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는 게 자꾸 떠올랐다.

2층짜리 양옥집에 살던 장미와의 우정, 나의 판잣집에 대한 부끄러움, 장미와의 관계로부터 나를 도망치게 한 수치심-자기에의 수치심. 그것을 아무리 열심히 곱씹어 봐도, 작가가 “괜찮겠지” 혹은 “설마”와 같은 몇 개의 구절들로 이어붙인 것처럼은 “그들의 살”에서 기꺼이 떨어져 나온 나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늠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장미에 대한 애정과 장미가 끝내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 ‘나’를 할 말 하게 만들었다는 데 이미 나는 깊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잘 모르겠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한 이야기들을 어떤 관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엉망진창으로나마 당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갔던 것 혹은 과거의 기억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이 뭐라도 나아지게 할 거라는 희망이 될 수 있을지. 그런 위안이란 무력한 게 아닐지. 어쩌다 고발자가 된,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아도 불타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닌 듯한 한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227쪽)다며 돌길을 걷는 마음에 대해서나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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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유서 움직씨 퀴어 문학선 2
구묘진 지음, 방철환 옮김 / 움직씨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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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퀴어 소설가 구묘진의 유작. 파리 유학생 조에는 연인 솜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후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 스무 편의 연애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철저히 차단당한 채로도 스스로 완성되는 그 사랑의 집요함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식으로 완성된 폐쇄적 사랑은 죽음을 결말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어 비장한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완성시킨 조에의 예술가적 정신은 충분히 그 의의가 있다. 조에는 솜이, 솜의 가족이, 사회가, 피하고 놓아버린 솜과 자신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탐색한다. 연인으로부터 유폐된 채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했던 자기분열과 아이러니 속에서도 편지는 끝내 앞으로 나아가며 마침내 유서가 된다(유서로 완성되는 데 성공한다). 조에가 죽음을 불사하고 그토록 사랑에 매달렸던 까닭은 그에게 사랑이 자신을 압도하는 "운명"(143쪽)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기서 조에가 말하는 운명론은 단순한 낭만이나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 타인들이, 사회가 너무도 쉽게 놓아버린 관계와 존재의 잠재력에 대한 존중이자 신봉이다. 변희수 하사를 비롯한 퀴어 시민들의 죽음이 이곳저곳에서 비보로 들려오는 지금, 성소수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아니라 조에가 삶을 불태우며 기록한 바와 같이 존재를 결정짓는 운명적 잠재력으로서의 사랑을 존중하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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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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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 페미니즘, 퀴어, 지대, 장애에 대한 지금-여기의 문제의식이 총망라되어 있는 젊은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모은 책이다. 전하영은 연수와 나 두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중심적 예술성을 구성해온 아우라의 인식론적 파괴를 보여준다(「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멜라는 장애인이자 퀴어 여성인 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조형해냄으로써 관계의 잔잔한 어긋남과 그 잔향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생동감있게 전달한다(「나뭇잎이 마르고」). 김지연은 레즈비언 커플이 한국의 보수적인 가정에 수용되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냄으로써 퀴어 서사에 드리워져 있었던 우울과 무게를 유쾌하게 덜어내고 있다(「사랑하는 일」) 김혜진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지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나가 손미와 만옥이라는 두 여성 간의 묘한 연대와 갈등 속에서 풀어나간다(「목화맨션」). 박서련은 게임을 못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아들 대신 게임을 연습하여 플레이하지만 결국 여성혐오의 벽에 부딪히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보여줌으로써 누군가를 이긴다는 룰 자체에 내재한 폭력성과 젠더적 차별을 낱낱이 폭로한다(「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서이제는 독립영화계의 어려운 현실과 함께 영화를 사랑한다는 행위가 남기는 발자취의 생생한 물질성을 실제 존재하는 영화관, 영화제 등의 풍경을 비추며 보여준다(「0%를 향하여」). 한정현은 제국의 과학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하며 자신의 이름을 명명하고 계보를 이어나갔는지를 몹시 지적인 방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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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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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수자의 개인적 역사 쓰기를 통한 사회 시스템의 포착과 자기 발명의 윤리에 대해서 더없이 탁월한 예시를 제시한다. 디디에 에리봉은 게이로서, 또 민중 계급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분석한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 과거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지녔던 계급성과 자신이 계급을 '탈출'할 수 있었던 역사를 서술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명해낸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계급적·성적 수치심이 사회적 지배 체계의 유지에 끊임없는 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폭로한다. 디디에 에리봉과 그 가족의 삶은 우리가 속한 세계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미래를 강력하게 정의하고 이끌어나가는지 절망적일 정도로 선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절대적인 전복, 절대적인 해방이란 존재하지 않는(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세상에 개인에게 부여하는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변화시키는 자기 표명의 기술을 천명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257쪽) 계급적 정체성과 성적 정체성의 충돌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명해내야 했던 에리봉은 우리에게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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