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전날 저녁, 나는 페이스북에서 문재인이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대선 토론 영상을 보았다. 대선 토론에 성소수자가 의제로 등장한 게 신기했을 뿐, 너무나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 사람―중년의 시스젠더 헤테로 한국 남성―이 ‘그런 생각’을 밝히는 장면은 내게 인지 충격을 주기엔 아무래도 시시했다. 그의 발언에 분노하는 친구들의 sns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적당히 공감하긴 했지만, 그들처럼 본격적으로 분노한다는 건 왠지 힘 낭비처럼 느껴졌다. 문재인에게 성인지 감수성과 관련해서 무엇도 기대한 적이 없으며, 어쩌면 그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문재인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엔 얼마나 많으랴……. 그리고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혐오하는 사람 특유의 흐리멍덩한 무지에 대해서, 그 흐리멍덩함이 얼마나 모두의 것인지에 대해서, 대체 어디부터 관심을 요구할 수 있으랴.

그날 오전에는 a집단에서 보고서 발표회가 있었다. 내 차례는 아니었고, 어떤 (모르는) 언니가 b시대 소설의 c이데올로기를 주제로 글을 써 왔다. 사실상 그 주제는 문재인의 문제 발언과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니는 문재인의 동성애 혐오와 자신의 발표 주제를 연관시키며 보고서를 끝맺었다. 뭐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타당한 것도 같고 억지인 것도 같은 그 논리는 자꾸 곱씹게 되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d역 근처에서 애인처럼 보이는 여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 언니를 봤다. 그걸 보면서 나는 발칙하게도(?) 세상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깨달아 버렸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쉬우니 실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는 거군. 내가 분노했다면 그건 아마 부조리보다는 무력함을 향한 거였을 테다. 무-동력無-動力. 영원히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영원히 정지하는 세상.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게 애초부터 그렇게, 시동이란 것이 걸리지 않게 설계된 고장난 시스템 같은 것.

그리고 그날 밤에, 나는 2년도 더 된 고등학교에서의 학교폭력 사건을 고발했다. 왜 해가 지난 사건을 그날 그 야심한 시각에 고발했는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했고 나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내 성격적 특성을 참고하여 홧김 아니면 우연이겠거니 하고 단순히 결론지었다. 그냥 떠올랐고 곱씹다 보니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정념을 날것 그대로 분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현대인의 연장된 신체-스마트폰이 마침 손안에 있었고 글을 썼다. 글이 유명해졌고 친절한 몇몇 사람들이 1년 넘게 사건 해결을 위해 같이 고생해 주었으며 교장을 비롯한 교사 여럿이 해고되면서 사건은 끝이 났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오늘 소설을 읽다 불현듯 그 사건이 떠올라서 비공개 처리해 둔 그 게시글을 다시 읽었다. 그 글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 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논리로 전개되어 있었다. 글의 첫 문장은 학교에서 행해졌던 교내연애 색출과 문재인의 동성애 혐오 발언을 연결하면서 사고의 시작점을 명확하게 지시한다. 명확하긴 한데 지시만 하고 끝이다. 지금이야 ‘교내연애가 금지된 학교에서 미성년자들의 연애가 일종의 퀴어한 만남일 수 있으며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없듯 교내연애 또한 허가와 금지의 대상일 수 없다’는 식으로 이어붙일 수 있게 됐지만, 그 당시에는 꿈에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연결한다고 해도, 굳이 그렇게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뭔가. 문재인한테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면서, 그 사건도 잊고 있었다면서. 그저 그날 그 언니의 발표까지를 포함한 일련의 모든 사건이, 어쩌면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모두가 내 사고의 발화점이 되어준 게 아닌지를 짐작할 뿐이다.


최진영의 「돌담」​*​은 장미에 관한 이야기와 유독물질이 들어간 장난감을 만드는 나의 직장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가 어릴 적 살던 고향의 풍경 위에서 병치시키고 있다. 나는 이 애매하게 관련된 두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장미에 대한 열등감에 가까운 동경과, “그들의 살”(227쪽)이 되고 싶었던 게 “절대로 아니”(227쪽)라고 되뇌는 마음은 과연 얼마나 밀접한가. 쪽문에 장미를 버려둬도 “괜찮겠지”(226쪽)라며 도피하는 나의 비겁한 모습은, 내가 ‘회사가 유독물질이 들어간 장난감을 만들도록 놔둬도 “괜찮겠지”’라며 도피하지 않는 계기로 사용되기 위해 계산적으로 덧붙여진 것일 뿐인가. 그 전에 나로 하여금 장미를 피하게 했던 “수치심”(226쪽)과, 회사에서 받은 “모욕감”(220쪽)은 너무 결이 다른 것 아닌가. 나의 고발이 비겁과 모욕을 딛고 발화된 것이라 할 때, 그건 대체 무슨 비겁이며 무슨 모욕을 일컫는가. 그게 현재에 대한 성찰을 낳은 과거의 비겁과 합당한 정도의 연관성이 있다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한마디로, 장미에 대한 기억의 반추가 현재의 고발에 결정적 변수가 되었음을 암시하기엔 연관성의 밀도가 너무 낮다고 느꼈다. 특히 과거 이야기는 너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미래의 죽음 또한 꼭 필요한 설정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미래의 동생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을 돌이켜 보게 하기 위함이라면 너무 잔인하고, 미래의 죽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어차피 그렇게 될 일들’에 대한 태만함을 보이고 싶었던 거라 해도 죽음이 너무 쉽게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두 가지 이야기가 다소 성기게 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분명히 둘을 대응시키듯 서술한다. “괜찮겠지, 괜찮겠지”하는 “기만하는 수법”(226쪽)을 공통분모로 두 사건을 연결한다든가, “그들의 살이 되고 싶었나?”(227쪽)라는 물음에 “나는 장미의 동생이 되고 싶었다”(227쪽)고 자문자답한다든가. 또 “설마 몰라서 가만있겠어?”(220쪽)라는 영업부장의 꾸지람에 연이어, “설마 그러겠어?”(221쪽)라며 장미를 방치해 두었던 과거에 대한 회상이 등장한다든가.

어린시절 : 장미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쪽문에 장미를 버려두고 온 기억 ; 장미래의 죽음

직장 : “나도 처음부터 뼈는 아니었다”(226쪽) ; 회사의 부조리를 내면화한 나의 모습 ; 고발

이렇게 작위적으로나마 정리해서 써 보아도 뭔가 와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것은 내가 ‘구성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거나 ‘두 이야기가 억지스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단언해버리지 못한다는 거였다. 스스로의 작품 분석 능력에 대한 불신도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차치하고) 실제 변화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곤 한다는 믿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이라도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어떤 인물을 떠올릴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욕심 혹은 속죄에의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는 게 자꾸 떠올랐다.

2층짜리 양옥집에 살던 장미와의 우정, 나의 판잣집에 대한 부끄러움, 장미와의 관계로부터 나를 도망치게 한 수치심-자기에의 수치심. 그것을 아무리 열심히 곱씹어 봐도, 작가가 “괜찮겠지” 혹은 “설마”와 같은 몇 개의 구절들로 이어붙인 것처럼은 “그들의 살”에서 기꺼이 떨어져 나온 나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늠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장미에 대한 애정과 장미가 끝내 내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 ‘나’를 할 말 하게 만들었다는 데 이미 나는 깊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잘 모르겠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한 이야기들을 어떤 관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엉망진창으로나마 당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갔던 것 혹은 과거의 기억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이 뭐라도 나아지게 할 거라는 희망이 될 수 있을지. 그런 위안이란 무력한 게 아닐지. 어쩌다 고발자가 된,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아도 불타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닌 듯한 한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227쪽)다며 돌길을 걷는 마음에 대해서나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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