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최근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 식물을 들이고 있다. 소위 '식덕(식물덕후)'들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도심의 아스팔트 밖으로 밀려나 그저 가로수 정도로만 접할 수 있었던 식물을 곁에 두고 관찰하면서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식물도 매순간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명의 경이와 살아있는 것의 사랑스러움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 책은 식물, 더 나아가 식물을 관찰하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방법, 식물을 통해 사유를 유영하는 방법까지를 헤세의 아름다운 문장 속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헤르만 헤세에게 식물, 특히 나무는 살아있는 것의 경이를 넘어 살아가는 자신의 시절과 시절들을 추억하게 하는 무한한 기억의 바다이자 사유의 놀이터다. 헤세는 "우세한 나무 종류가 없는 도시나 풍경은 내게는 완전한 이미지가 되지 못하고 언제나 특성 없는 것으로 감정에 남는다"(37쪽)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에게 실제로 시절과 장소, 기분은 나무를 통해 기억되고 기억 속에서 무한해진다. 젊은 어느 날의 여름, 밤을 새워가며 창가에 걸터앉아 사색하던 날의 추억은 우거진 밤나무로 그에게 남고(「밤나무」) 알프스 고지의 사람들은 그에게 그 지역의 온과 꽃과 풀, 양치류와 이끼류에 대한 비유처럼 "산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은둔자와 전사"(「은둔자와 전사」)로 기억에 남는다. 그의 유년시절은 커다란 복숭아나무 한 그루 곳곳에 아련하게 자리잡아 있으며(「복숭아나무」) 한때의 방랑은 어지러운 보리수꽃 향기 속에서 그 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낸다(「보리수꽃」)

헤세에게 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유의 무대이기도 하다. 헤세는 나무를 관찰하며 나무를 관찰하는 법 자체에 대해, 그리고 그를 통해 내면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깊은 사유를 드러낸다.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 다른 무엇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헤세의 이러한 독특한 사유는 나무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헤세는 두 그루의 대조되는 모습을 가진 나무를 관찰하며 '대립'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자체에 대해 사유하기도 하는데, '집중, 지속성, 정신, 의지'와 '근심 없음, 자연스러움, 다산성, 충동'과 같은 수많은 개념들이 마치 저글링을 하듯 헤세의 생각 속에서 나무를 배경으로 유연하게 펼쳐진다.

이 책의 표지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여름을 연상케 하는 싱그러운 복숭아 나무 표지에 은은한 금박이 덧입혀져 있는 것이 정말 잘 어울렸다. 내용 구성도 좋았다. 나무에 관한 헤세의 산문과, 그 산문과 오묘하게 연관 있는 헤세의 시를 연이어 배치하는 식. 이런 생각에서 이런 시가 탄생했구나 하고 생각해봄직하다. 그가 얼마나 나무를 사랑하는지, 또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무를 관찰하며 살아갔는지, 또 나무를 어떻게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 속에서 뿌리내리게 했는지 알 수 있는 아름답고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평단] 미트코에 대하여, 결국은 나에 대하여

 

미트코와 나는 NDK 지하 화장실에서 만난, 일종의 거래 관계다. 나는 미트코에게 돈을 지불하고 미트코는 나에게 성적인 대가를 지불한다. 이러한 관계는 관계의 연극성에 집착하는 나의 생각과도 잘 어우러진다. 진실된 관계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나는 미트코와의 관계 또한 연극적인 것에 불과하다 보기 위해 노력하지만, 미트코라는 존재는 그에게 묘한 아름다움과 함께 진실성으로 다가온다.

 

투명함(혹은 투명하게 보이는 겉모습)과 신비로움을 이렇게 잘 뒤섞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내게 미트코는 지나치게 노출된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어막 뒤에 숨겨진 것처럼 보였다.”(30)

 

아마 위의 구절이 미트코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 구절이 아닐까 싶다. 미트코는 천진하고 나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방인(불가리아인)이며 언제 침실에서 나의 귀중품들을 훔쳐 달아날지 모르는 자이다. 이런 이중성은 미트코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잘 형성해 보여준다.

 

이런 이중성의 한 축-미트코의 이방인적인 성격-에 기대어 나는 관계를 피상적인 것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구성하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네가 너무 좋아. 내가 말했다. 서툴지만 허심탄회하게.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나한테 좋지 않아.” (65)

 

나는 어쩌면 이것이 나의 가장 진실된 속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미트코의 이중성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 결국 나의 이중성인 것은 아닐까? 사랑을 믿고 싶은 마음과 믿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 미트코에 대한 나의 진술은 어쩌면 전부 나에 대한 정보를 비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트코의 순수함과 동시에 존재하는 위험한 매력, 그리고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나의 사랑과 매혹이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



[편집 비평]


너에게 속한 것. 표지의 강렬한 보색 대비와 유화로 그린 듯한 남자의 흐린 옆모습이 눈에 띈다. 지금은 사적 대화 무단 인용 건으로 절판된 '여름, 스피드'를 떠올리게 하기도.


영어 제목과 한국어 제목이 병기되어 있는데 세련된 느낌이 난다. 우리는 사랑일까 거래일까ㅡ뒷표지의 이 부분은 미트코와 나의 관계의 아주 피상적인 부분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데 자극적이어서 홍보엔 도움이 될 수도. 추천사의 '퀴어문학이 아니라 이미 문학이다'라는 말은 좀 지겨웟슴. 하지만 왜 발간되자마자 클래식이 된 레전드 책인지 읽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나의 과거, 정체화 과정과 미트코를 향한 (자기부정되는?) 사랑이 너무나도 애틋하다.


"네가 너무 좋아. 내가 말했다. 서툴지만 허심탄회하게.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나한테 좋지 않아."<아련했던 장면...


그리고 나라면 뒷표지에 인용으로


"투명함(혹은 투명하게 보이는 겉모습)과 신비로움을 이렇게 잘 뒤섞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내게 미트코는 지나치게 노출된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어막 뒤에 숨겨진 것처럼 보였다."(30쪽) 이 문장을 썼을듯ㅎㅎ 미트코라는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그 인물을 궁금해하게 하는 문장.


#너에게속한것 #가스그린웰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터 버블의 시대, 혐오로부터 우리를 구할 우연의 민주주의

(괄호에 표시된 쪽수는 전부 혐오 없는 삶으로부터 인용된 것입니다)

 

지금을 혐오의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난민을 향한 혐오,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 여성과 다른 인종을 향한 혐오는 우리 사회의 유대와 결속을 약하게 할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폭력과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어쩌면 혐오는 한낱 개인의 정서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의 결과가 불러오는 폭력과 전쟁의 피해는 어마어마하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혐오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혐오 없는 삶의 저자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접촉 가설을 혐오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직접 만나보면 혐오의 대상-이었던-사람을 더 이상 혐오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간단한 혐오의 해결 방안인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기자로서 자신이 목격한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이주민과 개인적으로 친해짐으로써 이주민에 대한 혐오를 극복한 사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극복한 사례, 나치와 친구가 되었던 사례 등등


그러나 앞서 혐오를 극복한 사례를 제시했다고 요약했으나 그 사례들이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례일 수는 있어도 혐오를 극복한 사례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세르비아 이주민들을 혐오하던 하랄트 헤르메스는 특정한 세르비아인들과 친해질 수 있게 되었지만 롬족이 여전히 위험하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79). 그리고 존 귄터 딘은 나치인 슐리케와 친해지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나치즘적 성향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슐리케는 딘에게 그저 좋은 나치”(161)일 뿐이다. 이런 지점들에 주목해 보건대 베르브너가 제시한 사례들은 혐오를 극복한 사례가 아니라 혐오를 저편에 묻어두고 사적인 관계가 진행될 수 있었던 사례에 속한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연하고 사적인만남으로부터 비롯된 친교를 혐오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혐오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특정 집단을 혐오하게 되지 않는다. 국가, 자본주의, 군사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등 수많은 사회적 이데올로기들에 의해서 혐오는 발생한다. 그렇기에 혐오의 해결책 또한 (그것이 제도화된 것일지언정) ‘만남이라는 사적인 층위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층위의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혐오를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경우 우리는 해결(화해)의 주체가 될 양극단의 평등한사람들의 존재를 전제로 삼게 되는데 혐오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소수자들을 향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혐오를 동등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것으로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점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의 힘을 강조했던 우연과 민주주의라는 챕터는 몹시 재미있었다. “추첨을 통한 선출은 민주주의의 본성과 잘 맞으며, 투표를 통한 선출은 과두정의 본성과 잘 맞는다”(192쪽에서 재인용), 민주주의와 우연성을 연결짓는 몽테스키외의 말도 인상깊었다. 생각해 보면 훌륭하고 잘 교욱받은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는 어디까지나 따옴표를 치는 한에서만 가능하며 따옴표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바야흐로 필터 버블의 시대다. 양극화된 미디어의 관점과 알고리즘의 발달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평소 관점에서의 정보만을 습득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SNS 친구를 맺고, 그들이 올린 게시글()을 보게 된다. 우리의 타임라인에 타자는 없다. 또한 알고리즘은 평소의 우리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기존의 우리가 좋아할 만한 정보를 우리의 타임라인에 보여준다. 나와 다른 것,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필터에 걸러져 나의 타임라인 밖으로, 나의 세상 밖으로 쫓겨난 지 오래다.


게다가 코로나 19의 세계적 전파는 사람들 간의 우연한 접촉을 어렵게 만들었다. 우연성이 초래하는 낯선 것과의 만남은 점점 그 빈도를 줄여가고 있다. 반면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오프라인 세계에서 온라인 세계로 전환되면서 필터 버블은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렇듯 한없이 좁아지기만 하는 시야와 그 시야 너머로 보이는 좁은 사회에서 베르브너가 제안하는 우연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더 넓고 북적북적한 광장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베르브너가 경험하고 제언했듯이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이주민 자체에 대한 생각, 나치즘 자체에 대한 생각, 동성애자 혐오 자체에 대해 서로 치열하게 논쟁하고 생각을 바꿔 나가는 아주 사적인 관계에서의 정치적 쟁투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쟁투야말로 아무리 작은 것일지언정 혐오를 묻어두는 것이 아닌 혐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관계맺기의 방식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적과 친밀할 권리만큼이나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필요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옹 2021-06-21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정답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작가라는 한 ‘사람’이 연구한 수많은 소중한 가치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타인의 의견에 이렇게 조목 조목 다 따져서 틀렸다 틀렸다 틀렸다 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글로 써서 책으로 내는게 정당합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은 미술이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스러운 개념이며, 예술가는 배움 없이도 천재성을 타고난 자이고, 미술이 자율적으로 그 역사를 축적하고 성장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미술은 근대적 주체와 소유 문화가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 근대적 제도이다. 우리가 지금 미술이라고 부르는 숱한 과거의 유산들은 당대에는 미술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적을 시작으로 저자는 우리가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통념들을 하나하나 깨부순다. 예컨대 그는 정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 또 여성 예술가가 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사례를 들며 '천재'라는 개념이 결국 백인 남성 지식인들의 것으로 전유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또한 박물관과 미술관은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미술을 나머지 세계와 분리시키며 미술을 자율적인 발전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미술에 대한 통념을 반박하며 책은 궁극적으로 미술이 미술가 개인의 고립된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늘 의존해 있는 것임을 밝혀 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 현실문화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라이 클레어는 퀴어, 장애, 페미니즘, 환경, 계급이 맞닿는 경계선에서의 사유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성차별주의나 인종차별주의 하나만을 대상으로 삼는 단일 쟁점 정치로는 우리가 직면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바로 다중 쟁점 정치다. 그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간단명료한 대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대신에 복잡한 맥락을 고려한 복잡한 질문들로 세간의 간단명료한 대답을 다시 쪼갠다. 벌목 노동자와 환경의 관계, 장애인과 섹슈얼리티, 그리고 소수자의 언어와 자긍심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스스로의 경험과 다양한 예화들을 가로지르며 복잡한 질문들로 뚫고 나가는 그의 화법은 억압과 저항이 뒤얽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목표해야 할 것이 결국 모두의 해방임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