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가치를 전복성이라 한다면, 이 책을 쓴 나피시 교수가 처한 처지는 정말 절묘하기 그지없다. 회교원리주의자에 의해, 여성들에게 다시 차도르가 씌워지고, '사과를 유혹적으로 베어물었다'는 이유로 여대생들을 억압하는 테헤란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 그리고 나피시 교수가 모여앉아 금지된 소설들을 읽는다.

소설을 비롯한 모든 예술 작품들은 작품을 완성한 순간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버린다. 작품은 결코 작가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는다. 평론가들과 같은 전문적인 분석가들에 의한 공인된 해석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교과서에 실리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이며, 그들만의 세계이다.

한권의 책이 독자의 손에 잡혀 읽히는 순간 그 책은 읽는 사람의 경험 체계 속에서 재의미화된다. 이 책은 단순히 독후감이 아니다. 억압적이고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작품은 제각기 또다른 의미를 독자에게 제공하고, 삶의 조건들을 반성하고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이 책의 제목에 테헤란과 롤리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이 워싱턴이나 뉴욕 혹은 런던과 파리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면 그저 평범한 감흥 정도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제목부터 얼마나 전복적인가. 테헤란과 롤리타. 후세인과 미국만큼이나 안맞는 궁합이다. 차도르를 벗고 그들만의 안식처에서 여자들을 롤리타를 읽으면서, 험버트가 소녀 롤리타를 자신의 환상에 끼워맞추려고 했던 것은,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여성들을 그들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것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모두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부서진 과거를 애처롭게 끼워맞추려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여성들은 롤리타와 험버트의 관계를 통해 그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남성적 권력의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롤리타>,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까지 모조리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절망적이라면 끝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소설을 읽었던 이유는 뭘까 생각하면서. 예술은 무엇가 대항할 대상이 있을 때 더욱더 강하게 타오르는 것 같다. 창작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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