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카피라이터가 되었어도 한 시대를 풍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까지 쓴 작품들의 제목은 짧고 경쾌하며 시대를 명쾌하게 해부하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기발한 언어감각까지. 이 작품 역시 그리스 아토스와 터키를 일주한 여행인데, 두 여행을 한자 네 개로 아우렀다. 우천염천.
혹여 독자들이 읽지 못할까봐 한글로 달아주고, 게다가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와 같이 나름대로 대구를 맞춘 제목을 달리까지 했지만, 우천염천의 함축성이 더 마음에 든다. 아토스에서는 비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고생을 했고, 터키에서는 지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애를 먹었다. 아마 자기 여행기에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언어감이 있는 작가는 별로 없을 듯 하다. '~ 여행기'류의 무난한 제목이나 추상적이거나 젠체하는 제목으로 포장하는 일은 있겠지만...
수도자들만 사는 아토스는 왠지 하루키와 닮았다. 그의 수필이나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는 참 금욕적으로 투쟁하며 사는 듯 하다. 그런 모습이 100% 종교적 확신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아토스 수도자들과 겹쳐진다. 그들은 우리가 도시적, 문명적이라는 것과 스스로 결별하고 비가 구질구질하고 바위 투성이의 섬에서 격리되어 살아간다.
수도원 별로 아토스 미슐렝 가이드를 만들어 별점을 준다던가, 일정이 꼬이거나 길을 잘못들거나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던가 하는 고생은 지극히 느긋하게 묘사된다. 하긴, 이런 일에 일일이 열을 받으면 굳이 여행을 할 필요가 없겠지. 또 그가 묘사하는 그리스의 바다와 산의 묘사는 얇은 비닐 랩이 살갗을 덮듯 밀착된 느낌을 준다.
거기에 비해, 터키 편은 심심했다. 아마,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 보통 독자가 책을 읽었더라면 별셋이상은 주기 힘들 듯.